울고 싶은 남자들 - 이 시대 대한민국 남자들의 자화상
서재순 외 지음 / 아침나라(둥지)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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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가 내린다.
유난히 비가 많았던 올해는 여름 내내 비를 맞았건만 가을비의 느낌은 새롭다.
조금은 쓸쓸하고 때로는 감상에 젖게 한다.  한동안 눈이 부시도록 맑은 날이 지속되었는데 오늘 내리는 비는 그동안 들떠있던 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하루가 다르게 계절은 점점 가을빛으로 물들어 간다.

회사에서 짬짬이 책을 읽었다.
책장을 넘기는 표정이 자못 비장했던지 직장 후배가 묻는다.
"뭔 책을 그렇게 열심히 읽으세요?  재밌는 책이면 제게도 좀 권해주세요."
하기에 읽던 책을 덮어 표지를 보여주었다.  표지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큼지막한 제목. <울고 싶은 남자들>.  제목을 읽은 후배의 표정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요즘 고민 있으세요?  책 제목이 심상치 않은데요."
"고민?  고민 많지.  세계 평화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지구 온난화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그리고..."
"왜 그러세요.  그런 거 말구요."

KBS에서 방송작가로 근무하는 세 명의 여성 작가가 쓴 이 책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중년의 우울한 자화상을 여과없이 담백하게 보여주자는 의도로 출발했다고 한다.  이 기획의 출발은 "동아일보"에 연재된 시리즈 '울고 싶은 남자들-가정의 외딴 섬,가장'에서 비롯되었고, 예상과는 달리 젊은 세대가 더 많이 공감했단다.  방송국에 접수된 사연과 취재를 통하여 모은 다양한 일화들이 짤막짤막하게 소개되고 있는 이 책은 자신을 돌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던 중장년의 가장들이 겪는 아픔과 소외를 다루고 있다.

후배는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책의 한 부분을 펼쳐 정신없이 읽고 있었다.
"남 얘기 같지 않네요."
"그러니까 가족들한테 잘 해.  더 늦기 전에.  자신을 돈 버는 기계처럼 다루면 안 돼.  가끔씩 주변도 둘러보면서 세월을 느껴야 해."
"저야 잘하고 싶죠.  그런데 어디 여유가 있어야죠.  시간도 그렇고."
"젊어서는 가족들이 내게 바라는 것은 오직 돈이라고 생각하고 죽을 둥 살 둥 모른 채 돈,돈,돈 하며 살지.  다들 그렇게 사니까.  그런데 조금 더 나이가 들면 가족들과 나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벌어졌다는 걸 알게 돼.  그때는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지게 되고."

남자들이 겪는 소외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거꾸로 생각하면 이 시대의 가장은 가족 구성원에게 오직 돈만 충족시켰기 때문에 경제적 능력을 상실했을 때 그 효용은 이미 다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항변하고 싶은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을 그 지경까지 몰고간 것이 전적으로 본인들의 탓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가치관과 그 가치관에 편승한 가족들 모두의 공동책임은 아니었을까?  경제적 효용이 다한 중장년의 남성들이 겪는 인간소외나 고독은 사회보장제도가 부족한 우리 나라의 현실에서는 피할 수 없는 질병일지도 모른다.

"아내한테 이 책을 선물로 사다줘 볼까요?"
후배의 순진한 웃음에 나도 그만 웃고 말았다.
"돈,돈 하는 아내의 잔소리에 귀를 막고 자네는 오직 사랑, 사랑만 외치고 살아.  그러면 이 책 속의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늙지는 않을 거야.  그게 제일 어렵지만 말이야."

가을비는 하염없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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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오후 2시 - 낯선 곳에서 시작한 두 번째 삶 이야기
김미경 지음 / 마음산책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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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친구들을 만나 인생상담 겸 연애상담을 할 때가 가끔 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카사노바와 같은 청춘을 보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할 수도 있겠다.  게디기 한발 더 나간다면 장동건 뺨치는 빼어난 외모에 모든 여자들을 뿅가게 하는 뛰어난 언변을 갖춘, 거기에 돈도 넘치도록 풍족하여 말 한마디 걸지 않았는데도도 여자들이 줄줄 따라 붙는, 시쳇말로 엄친아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은 정 반대였다.

변변한 연애 한번 못해본 내가 연애상담이라니...
그러나 어느 곳에서든 예외는 있는 법.  장기도 직접 두는 사람보다는 옆에서 훈수를 두는 사람이 정세를 더 잘보지 않던가.  지금도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어디서 뵌 분 같다라는 말을 심심찮게 듣는다.  그만큼 나는 남의 시선에 띄지 않는 평범한 외모를 지녔음이리라.  그래서인지 내 주위에는 의외로 여자들이 많았다.  아무도 눈독을 들이지 않는 외모이니 여자들 입장에서 나와 만난다고 추문이 날 것도 아니요, 성격도 소심한지라 죽네 사네 하면서 달려들 것도 아니니 이성 문제로 고민하는 뭇여성들에게 있어 나보다 더 적합한 상담자를 찾기는 어려웠으리라.

예나 지금이나 유머가 풍부한 남성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다.
무엇보다 만남은 즐거워야 한다.  그러므로 서로의 진면목을 숨긴 채 만날 수밖에 없는 연애 초반의 탐색전에서는 그 어색한 시간을 채워줄 유머가 필수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연애기간이 길어질수록 유머가 때로는 남녀 사이에 벽을 만든다는 걸 남자들은 알지 못한다.  만나면 늘 깔깔대고 웃는 연인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으로 비칠지언정 당사자들에게는 독과 같다.  유머는 더할 수 없이 가까운 관계를 지속하게 하면서도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든다.  남녀 사이의 진전은 8할의 유머에 더하여 2할의 진지함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결국은 파국으로 끝나는 것이 남녀 사이다.

행복과 슬픔이 교차하지 않는 삶은 지루하고 밋밋하듯이 한번도 싸운 적이 없다는 부부를 만나면 나는 그들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곤 한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애정이 없거나 공통의 관심사를 갖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서로의 속내를 시시콜콜 밝히는 관계에서 어찌 갈등이 없을 수 있겠는가.  성인군자끼리의 결합도 아닌데 말이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이 책은 <인터넷 한겨레> 뉴스부장을 지낸 뒤 <허스토리> 편집장을 지냈던 작가가 2005년 뉴욕으로 옮겨 한국 문화원에서 근무하며 자신의 딸과 알콩달콩 살아가는 이야기를 가볍고 경쾌한 필체로 그린 산문집이다.  2007년 친구들과 함께 만든 웹 매거진 <선주스쿨>에 '브루클린 이야기'로 연재하던 것을 책으로 엮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이야기는 이혼녀로 사는 자신과 딸의 이야기이다.  미국 문화에 동화된 딸과 자신의 이력과는 상관없이 제2의 인생을 사는 저자의 이야기는 슬픔이나 고뇌의 그림자라곤 눈을 씻고 찾아 봐도 단 한줄도 보이지 않는다.

19금을 넘나들듯한 아슬아슬한 표현과 과하다 싶을 정도의 유쾌, 통쾌한 이야기들은 동양적 사고에 반평생이 절어 흐물흐물 생기를 잃은 나의 뇌세포에 짜르르한 전기를 보내는 듯하다.  그래도 뭔가 허전한 것은 진지함이 묻어나는 감동의 글이 없다는 것이다.  기자로서, 더구나 '석사 아내와 고졸 남편'으로 유명했던 저자가 자신을 지켜주던 그런 꼬리표를 모두 떼고 지금처럼 한없이 가볍게 살아가기까지는 결코 쉽지 않은 세월이 흘렀으리라.

책의 내용이 궁금한 분들을 위해 한 귀절을 옮긴다.  저자와  그녀의 딸 마린의 대화다.
"엄마, 엄마는 언제 섹스했어?"
"음...... 대학교 1학년 때 첫 애인이랑."
"어휴, 그러면 스무 살 될 때까지 섹스 한 번도 안 했단 말이야?"
"그때는 다들 그랬어.  엄마는 그래도 빨리 한 셈일걸?"  
"그래? 왜 다들 그렇게 살았대?"
"글쎄, 섹스 너무 빨리 하면 그거 생각하느라 공부도 못하고 그럴까봐 그랬겠지."
"나는 스무 살 때까지 참을 수 없어."
"하고 싶어서 못 살겠다 싶으면 해야지 뭐......"
  <"키스하고 섹스하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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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lat 2011-09-24 14:01   좋아요 0 | URL
유머가 벽을 만들 수도 있다니....
ㅎㅎ그런데 그럴 듯도 합니다.
오랜 연애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깊이 공감은 못하겠지만요. ㅎㅎ

평생 안 싸우다가 요즘 몰아서 싸우고 있는 울부부는 그나마 다행인 걸까요?
힘들어요~~ㅠㅠ

꼼쥐 2011-09-25 20:13   좋아요 0 | URL
저는 직장 내에서도 거리를 두고 싶은 사람에게는 주야장천 농담만 한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가까운 듯 보이지만 사실은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벽이 생기죠. 가끔 싸우고 또 화해하며 사는 것이 행복이지 싶네요.
 
해바라기
시몬 비젠탈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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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누군가를 용서하고 누군가로부터 용서받는다는 것은 쉬운 듯하면서도 어렵기 짝이 없는 일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이 문제에 집착했었고 진정한 용서가 가능할까? 하는 의문에 휩싸였었다.  성경을 종교가 아닌 독서 혹은 상식의 차원으로 읽었던 내게 그들이 말하는 참회나 회개는 더더욱 이해하기 힘든 문제였다.  나의 상식으로는 어떠한 죄를 짓더라도 진심으로 뉘우치면 용서가 된다는 것이 궤변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신으로부터의 용서를 기대할 수 있는 죄의 범위는 분명 존재한다고 믿었다.  가령 거짓말과 같은 작은 죄는 용서가 되지만 살인과 같은 돌이킬 수 없는 범죄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주에 속한다고 믿었다.

성경에 대한 이런 주관적 해석은 칸트가 말했던 정언명령에 더하여 감성적 일깨움으로 굳어지게 마련인데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순결 혹은 성적인 면에서도 자신이 책임질 수 없거나 사랑하지 않는 이성과의 육체적 결합은 신의 용서를 기대할 수 없는 범죄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 탓에 아내와 만나 결혼을 약속하기 전까지 나는 일체의 스킨쉽도 하지 않았다.  아내의 말을 빌자면 그때의 나는 숨이 콱콱 막힐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나의 태도는 어쩌면 열등의식을 숨기기 위한 방어기제, 또는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선민의식과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서 "용서"는 일종의 나약한 인간의 방어기제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진정한 용서는 대다수 일반인에게 불가능한 일임에도 자신만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세상의 모든 이에게 보여주려는 유치한 발상에서 기인한 행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시쳇말로 쿨해 보이기 위한 치기어린 행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믿었다.  겉으로는 용서하는 체하면서도 마음 속에 존재하는 감정의 찌꺼기는 어찌할 수 없이 자신의 인내에 의존해야 한다고 믿었다.  즉 상대방에 대한 증오나 분노는 분명 이성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위선적 용서보다는 오히려, 지금은 나의 감정을 존중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분노의 감정이 희석되기를 바라는 편이 옳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결론짓고 한동안 덮어 두었던 "용서"의 문제는 이 책으로 인해 불거졌다.
저자인 시몬 비젠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포로 수용소에 갇혀 강제노역을 하였다.  하루하루의 삶이 늘 죽음과 함께 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저자는 나치의 학살자들에 의해 무려 89명의 일가친척을 잃고 아내와 단 둘이서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수용소의 강제노역 도중에 만난 한 SS대원의 참회와 그에 대한 자신의 행동이 과연 정당했는지 묻고 있다. 

저자는 어느 날 임시병동으로 쓰이던 기술전문학교 건물의 쓰레기 하치 작업에 동원되었다.  그 학교는 자신의 모교였고, 작업 도중 한 간호사에 의해 임종을 앞둔 젊은 SS대원의 병상으로 인도된다.  온몸에 붕대를 두른 채 누워있는 병사는 자신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을 고백한다.  그리고 불이 붙은 채 건물 밖으로 떨어지던 유대인 부부와 아이의 얼굴을 잊지 못하겠다며 용서를 빈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병사의 참회를 듣게된 저자,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에 놓여있던 저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 자리를 떠난다.  다음 날 병사는 죽었고 간호사는 그 병사가 자신에게 남긴 유품을 전하지만 거절한다.  전쟁이 끝나고 저자는 그 병사의 어머니를 만난다.  남편도 잃고 아들마저 잃은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착한 아이였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저자는 그 아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채 그곳을 떠난다.
저자는 글의 말미에 독자에게 묻는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이 책의 2부에는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28명의 주장이 실려 있다.
비젠탈의 행동은 옳았다고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다는 사람들.  홍세화, 달라이 라마 등 각계의 유명인사들의 견해는 서로 달랐다.  성직자의 견해와 일반인의 견해는 분명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용서의 행위를 시간적 연속성(또는 관계의 지속성)을 전제로 한 행동이라고 간주할 때 이 책에서 제기한 용서의 문제는 조금 다르다.  그 병사는 임종을 앞두고 있었고,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그 병사는 무엇보다 영혼의 안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관계의 지속성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라는 말이다.  또한 저자의 입장에서 임종을 앞둔 한 인간의 모습은 일말의 동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보면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고 싶었던 지극히 이기적인 병사의 참회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용서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병사의 행위는 자신에게 행해진 것이 아니기에) 저자의 갈등은 인간이기에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의 문제일 뿐이라고 본다.  그 상황을 재연할 수 없는 독자의 입장에서 비젠탈의 질문은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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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9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3 15: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던 수필 - 새로 가려 뽑은 현대 한국의 명산문
방민호 엮음 / 향연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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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침부터 바람이 불었다.
뜨겁게 내리 쬐는 햇살, 그러나 가을 바람은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을 감질나게 하던 한여름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초가을의 향수가 마음 가득 안겨오는 주말의 아침.  여름이 다 가기도 전에 나는 벌써 한 해가 다 간 듯한 쓸쓸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버석거리며 밟힐 듯한 낙엽과 과거로 향하는  가을 한낮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여 꽤나 낯이 익은 문인들의 수필을 읽었다.    문학 평론가로 활동하는 방민호 교수가 가려 뽑은 것인데,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우리 문인들의 산문 중 지금 읽어도 그 생생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선별하였다고 한다.  가을은 할 말이 많은 계절이다.  가끔 떠오르는 옛친구의 얼굴에서, 지금은 잊혀진 아련한 첫사랑의 미소에서, 끊이지 않는 이야기가 샘솟을 듯한 계절.  그 계절의 초입에서 나는 숱한 이야기의 향연에 초대를 받았다.

 "이 산문 선집을 펴내며 글을 고른 기준을 들라면 바로 이 영원한 현재성을 꼽고자 한다.  오늘의 우리가 읽을 때 그 글이 우리 선배들의 글이라는 점 말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막막한 심정을 위로해 주고 스스로 자기의 삶을 구성해 가는 여유와 지혜를 주는 글이야말로 훌륭한 글이 아니겠는지?  나는 이러한 글을 찾아내기 위해 고심하였다."  (P.286)

1920년대부터 해방직후의 근대문학 공간에 발표된 명산문 91편(51명)을 가려 뽑은 「모던수필」은 발표 당시의 판본을 토대로 당대의 명문장가를 비롯 카프계열, 친일계열, 소수파 여성계열 등을 망라했다. 총 4장으로 구성됐는데 첫장에서는 계절과 자연물, 음식 등을 둘째장에서는 문사들이 느끼는 생활자로서의 번민을, 셋째장에서는 문화의 변화를 바라보는 문학인의 시각을, 넷째장에서는 요절한 문인을 추모한 조사와 예술관을 소재로 담았다. 작가연보와 주석이 실려 있다.

나는 이따금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아무리 재미있고 유익한 글도 일단 국어 교과서에 실리면 가장 재미없는 글로 전락하는 신세를 면치 못할거야.  왜 그런고 하니 그 글은 시험에 출제되는 지문으로서의 자격 말고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지.  심지어 너희들이 즐겨 보는 만화도 교과서에 실리면 재미없다고 느낄걸."하고 말이다.

이 책에 실린 문인들의 글을 읽으면 생각나는 대로,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라는 수필의 취지에 걸맞게 정형화된 글쓰기 방식으로는 쉽게 담을 수 없는 크고 작은 생각들을 자유롭고 솔직한 태도로 표명하고 있지만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완벽한 글을 탄생시키는 놀라운 재주에 그저 감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암울한 시대에 씌어진 글들이니 그 분위기 또한 그렇겠거니 짐작한다면 큰 오산이다.  일상에서 벌어졌던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하는 등 글은 비교적 경쾌하고 밝다.  특히 노자영의 <오천 원의 꿈>과 엄흥섭의 <탈모주의자>는 시종 웃음을 머금게 했다.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대목은 예컨대 이런 것이다.
"만일 기아가 닥쳐든다 하더라도 쥐의 기사(饑死)는 멀리 인간 기사 후에 속한다.  그런 까닭으로인지 식(食)에 복(福)하고 한쪽에서 굶어도 먹을 것이 풍요한 사람은 대개는 쥐 상(狀)으로 보인다."  (김광섭의 <꽃을 먹는 쥐>중에서)  나는 이 대목에서 현실 정치인 중 한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작금의 세태와 그렇게도 잘 들어맞는지.

그런가 하면 문학과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대목도 있다.
"어쨌든 오늘의 세대에서 살아가기가 어려운 이상으로 창작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역시 작가에게 있어서 최대의 교훈자요 최후까지의 동반자는 현실이 있을 뿐이다.  이 현실을 응시하고 이것과 결리고 여기서 배우고 그 밑에서 얻어내는 바가 없이는 진정한 창작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한설야의 <고난의 교훈>중에서)

"이광수의 산문은 종교적 깊이가 있고 김기림 은 예지적이며 정지용은 단소(短小)한 가운데 독한 기운이 있고 이태준은 부드럽고 엷은 거죽 속에 강잉(强仍)한 신조가 담겨 있다. 채만식은 포즈로 가장한 속에 진실 을 숨겨두고 딴청을 부리는 묘미가 있다"고 저자는 평한다.  그러나 나의 소회로는 그 시대에 씌어진 글들을 읽을 때마다 범접할 수 없는 엄숙함을 느끼곤 한다는 것이다.  풀 먹인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듯, 글의 풍모는 고고한 난초를 보는 듯하다.  어쩌면 그것은 지금의 작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깊은 사색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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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의정 옮김 / 맑은소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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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일을 새로 시작할 때 인터넷에서 로그인을 하지 않으면 창이 열리지 않는 것처럼 처음부터 잘못 들어선 길이라면 그 일이 더이상 진행되지 못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아이디,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하는 말과 함께 숫제 화면도 열리지 않는다면 비극적 운명 앞에서 좌절하거나 지난 일을 후회하는 일은 더이상 없을 테니 말이다.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츠바이크의 중편소설 <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이다.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내면을 깊이 탐색했던 그의 소설은 언제나 탁월한 심리묘사가 일품이다.   한때 3대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으로 명성을 떨쳤던 츠바이크는 체게바라 역시 그의 작품을 자신의 도서목록에 포함시킬 정도로 광범위한 독자층을 형성하였지만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그가 망명했던 브라질의 리우에서 그의 아내 로테와 함께 동반자살한다.  작가의 비극적 운명을 예견이라도 하듯 이 소설은 한 남자를 열렬히 사랑했던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을 다루고 있다.

"저를 전혀 알지 못하는 당신에게,
이따금 눈앞이 캄캄해지곤 합니다. 어쩌면 이 편지를 끝내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게 남은 힘을 다해서 일생에 단 한번 당신에게 보내는 이 편지를 써내려 가고자 합니다.  저를 전혀 알지 못하시는 당신에게"
라는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어린 시절, 옆집에 살았던 한 작가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여인과 여인의 편지를 유서로 읽는 중년의 작가.  그들의 엇갈린 운명은 편지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삶과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사랑으로 승화된다. 

자식의 주검 옆에서 쓴 여인의 편지는 편지의 수신인, 즉 여인이 그토록 사랑했던 작가 R이 발신인이 없는 편지를 읽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일종의 액자소설이라 말할 수 있는 이 소설은 편지를 읽는 순간과 다 읽은 후의 묘사 부분을 제외하면 모두 한 여인의 편지가 그 주를 이룬다.
 
일찌기 명성을 얻었던 작가 R은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그를 따르는 많은 여인과 교제하며 여행을 즐긴다.  그런 그를 지켜보며 첫눈에 반한 여인은 엄마의 재혼으로 2년여의 시간 동안 잠시 떨어져 있던 시기에도 그를 잊지 못한다.  결국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남자의 곁으로 돌아온다.  직장을 다니며 남자의 곁을 맴돌던 여인은 한 순간의 유희를 좇는 남자의 성격을 잘 알면서도 그의 청을 수락한다.  여전히 남자는 그녀가 어린 시절 옆집에 살던 소녀였음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성적 욕구만을 채운다.  그 후 남자는 여행을 떠나고 여인은 잊혀진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은 남자의 눈을 피해 아이를 낳게 되고, 언제든 자신의 품에 안을 수 있는 그 아이를 통하여 상실의 고통을 잊는다.  여인에게 있어 아이는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분신이요, 삶의 목적이었다.  여인은 그런 아이를 먹이고 가르치기 위해 사창가의 여인처럼 몸을 팔아 그 비용을 감당한다.  여인의 주변에는 많은 남자들이 기웃거렸고 청혼도 하였지만 여인은 모두 거절한다.

"그러나 당신께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무엇에든 구속되기를 원치 않았으며, 언제고 당신이 부르시면 기꺼이 달려갈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로 남아 있고자 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로부터 한 여자로서 눈을 뜨게 된 이후까지 저의 전 생애는 오로지 기다리는 것, 당신이 불러주시기를 기다리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였습니다." 

여인은 우연한 기회에 그 남자를 만나 그의 집에서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여인은 다음날 아침 자신의 모자에 놓인 지폐 몇 장을 보고 좌절한다.  아이를 키우며 오직 한 남자의 사랑을 갈구했던 여인.  비록 그 남자의 의식 속에 없는 애닯은 사랑이었지만 그의 생일이면 매년 꽃을 보냄으로써 언젠가 있을 사랑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아이가 죽고만 지금, 그녀 역시 자신의 분신이자 핵심이었던 운명적인 애정을 어디에서도 다시 찾을 수 없기에 그녀는 모든 희망을 잃는다.  그러나 자신이 스러짐으로써 가치를 잃게 될 그녀의 사랑이 그 남자를 통하여 끝없이 이어지길 바라며 편지를 쓴다.  어쩌면 작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무명인의 소중한 사랑, 누군가 기록하지 않으면 쉽게 잊혀질 수많은 사랑의 본질적 가치를 아쉬워 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미사 또한 믿지 않습니다. 저는 오로지 당신만을 믿고, 당신만을 사랑하며, 당신 속에서만 살아가려 합니다. 아, 1년에 단 하루만이라도 그 때처럼 조용히 당신 곁에 머물 수 있도록, 사랑하는 이여, 부디 그렇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당신께 드리는 제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입니다...... 다시 한번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만을 영원히 사랑합니다...... 내 사랑, 부디 안녕히......" (P.132)

자신에게는 없는 밝고 명쾌함 그리고 자유로움,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으로 시작된 첫사랑의 기억을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놓지 못했던 한 여인의 편지를 읽는 남자.  그가 느끼는 것은, 희미하게 떠오르는 이웃집 소녀에 대한 기억과, 어느 낯모르는 처녀에 대한 기억과, 술집에서 만났던 어느 여인에 대한 기억들이 한데 뒤엉킨 것이었다. 그것들은 불명료했고,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마치 흘러가는 강물의 밑바닥에서 형체 없이 반짝이며 떨고 있는 돌멩이와도 같이.

"그는 한 여인의 죽음과, 자신을 향한 그녀의 불멸의 사랑을 느꼈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한 여인의 모습을 애틋한 마음으로 그리기 시작했다."(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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