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첫 문학과지성 시인선 345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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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할 수 없는 감정은 팽팽한 압력이 된다. 감당할 수 없는 큰 슬픔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수분의 압력이 되는 것처럼 커다란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는 열기의 압력이 된다. 그러므로 감당할 수 없이 큰 기쁨이나 슬픔, 분노나 그리움 등은 오롯이 감정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차라리 질병에 가깝다. 밖으로 분출되거나 스스로 용해되지 않은 감정은 자신의 몸 곳곳으로 고스란히 스며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감정에 가장 솔직한 이는 시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인은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몸에 오롯이 받아 한 줄 시를 통해 분출한다. 한 시인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한 줄 '시(詩)'로 읊지 못한다면 이 서러운 세상을 어찌 건널 수 있으랴. 나는 이따금 시에서 분출하는 시인의 슬픔을, 분노를, 차마 담지 못한 그리움을, 웃음기마저 지워버린 기쁨을 시인을 대신하여 갈무리한다. 이렇게 나누는 감정의 품앗이가 없었다면 뉜들 세상살이가 그저 쉽기만 할까.


감기


당신이 들여다보는 흑백 사진 속에 내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세상에서 마주 보았다


당신의 사진 속은 늘 추웠다

기침나무들이 강을 따라 콜록거리며 서 있었다


눈을 뜨면 언제나 설산 오르는 길이었다


간신히 모퉁이를 돌아서도 희디흰 눈발

날카로운 절벽 아래로 툭 떨어지는 가없는 벼랑이었다


얼어붙은 하늘처럼 크게 뜬 당신의 눈을 내다보는 저녁


동네에 열병을 옮기는 귀신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지고

굴뚝마다 연기들이 우왕좌왕 몸을 떨었다


당신은 내 몸에 없는 거야 내가 다 내쫓았거든


내 가슴에 눈사태가 나서 한 시간 이상 떨었다


기침나무들이 몸을 부르르 떨며 눈 뭉치를 떨구자

벌어진 계곡에서 날 선 얼음들이 튕겨져 나왔다


맨얼굴로 바람을 맞으며, 입술을 떨며

나는 얼어붙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당신이 들여다보는 여기에서 나가고 싶었다


김혜순 시인의 시집 <당신의 첫>을 읽었다. 시집을 읽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어서 폐부를 찌르는 시인의 감정이 때로는 나의 심장을 겨누기도 하고, 노을을 바라보던 시인의 시선은 줄곧 빈 허공을 맴돌기도 하였다. 김 시인에게 '시란 불행을 더 불행답게, 슬픔을 더 슬픔답게, 파괴를 더 파괴답게 하는 존재'라고는 하지만 이따금 등장하는 젊은 여자와 늙은(혹은 나이 든) 여자가 사는 이곳은, 발가벗고, 때리고, 엉키고, 뒹굴던 메아리나라. '내가 풍경을 바라보는 줄 알았는데/풍경이 날 째려보고 있었다는 걸 안 순간 질겁했습니다'라고 했던 당신의 고백.


시를 읽는다는 건 허공에 걸린 자신의 조각상을 향해 칼을 겨누는 일이다. 차갑게 식은 그 몸뚱어리에서 뜨거운 피가 솟구칠 리는 없지만 한나절 그렇게 난자하다 보면 어느새 내 눈물이 붉은 피로 변해 흐르고, 내 이웃이 흘린 눈물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삶의 시간들이 뜨거운 숨결의 연속이어야 한다는 것을 시구 한 자 한 자를 되짚으며 깨닫게 된다.


태풍 송다가 비껴가는 일요일 오후. 옷이 비에 젖어 후줄근할지라도 마음만은 언제나 뽀송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손에 잡았던 김혜순 시인의 시집. 장마철인데 나는 마치 황폐한 사막에 다다른 듯 모래바람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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