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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엔젤
마가렛 로렌스 지음, 강수은 옮김 / 도서출판 삼화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요즘 언론에서는 곧 있을 대통령 선거 보도로 떠들썩하다.
후보들의 일정에서부터 그들의 말, 표정 등 세밀한 것에 이르기까지 각 언론사의 취재진들은 이런 것도 기삿거리가 되나, 싶은 것들도 앞다퉈 보도하곤 한다. 덕분에 정작 알고 싶은 기사는 항상 뒷전으로 밀린다. 투표의 주인공이 될 국민들은 다들 시큰둥한 눈치인데 기자와 정치꾼들, 그 옆에서 기생하는 온갖 시정잡배들만 한껏 들뜬 분위기다. 12월 대통령 선거일까지는 오직 그들만의 축제요, 그들만의 전쟁이 이어질 것이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아름다운 이야기,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만한 작은 이야기들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며 <스톤엔젤>을 읽었다. 캐나다가 사랑하는 여성 작가 마가렛 로렌스의 대표작이라고 한다. 나는 사실 어려서 읽은 <빨간 머리 앤>을 빼면 캐나다 출신 작가의 작품은 읽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책은 술술 읽혔다. 무엇보다 자극적이거나 가볍지 않아서 좋았다. 지독히 자극적인 소재와 스토리 전개, 감상적인 문체가 주류를 이루는 요즘의 소설은 디지털 시대를 살아온 젊은 세대에게는 평범하거나 익숙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날로그 시대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기성세대에게는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하다.
소설이 그 시대의 반영물이라고 할지라도 '영혼의 정화'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면 그것은 천편일률적으로 찍어 낸 공산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의 주인공인 헤이거는 아흔 살이 넘은 노인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편적으로 기대하는 푸근하고 넉넉한 인상의 할머니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모습이다. 지극히 편협하고, 독선적이며, 고집이 센 노인이다. 아들 마빈과 며느리 도리스의 보살핌을 받으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그녀는 과거를 향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다.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이제 나는 걷잡을 수 없이 추억에 빠진다. 자주 이러지는 않는다. 아니, 어쨌든 그렇게 자주 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들은 노인이 과거에서 산다고 말하지만, 허튼소리지. 요즘 나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하루하루를 진귀하게 여기고 있다. 마치 처음으로 민들레를 볼 때 잡초 같은 면을 잊어버리고 그저 꽃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탄하듯, 오늘 하루를 꽃병에 꽂고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P.10)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도 그랬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모진 고생을 하며 2남 1녀의 자식을 키우셨던 할머니는 결코 당신이 힘들어 하던 과거를 말하지 않았다. 차멀미가 심하여 버스를 타지 못하던 할머니는 여든이 가까운 연세에도 신대방동에서 용산을 오직 자신의 두 발로 걸어다녔다.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당신의 아들을 보며 자신의 탓인 양 가슴을 치셨다. 할머니는 잘못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레 마늘을 까셨다. 그렇게 푼푼이 모은 돈으로 장성한 손주들에게 용돈을 쥐어주셨고 매년 거르지 않고 다니셨던 어느 사찰의 부처님께 손주들의 미래를 축원하셨다. 딱 삼 일만 앓고 죽게 해달라는 당신의 염원과 함께. 그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할머니는 단 하루도 앓지 않고 돌아가셨다.
헤이거의 유년시절은 불행했다. 자신을 낳다가 죽은 어머니, 자수성가한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두 오빠, 자신에게 쏟는 아버지의 기대. 어머니의 묘지 앞에 세워진 '천사상(stone angel)'을 보며 자란 헤이거는 아버지가 세워 놓은 그 천사상처럼 자신도 아버지의 체면과 위신을 세우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꼭두각시로 사는 삶에서 벗어나고자 그녀가 선택했던 결혼. 남편 브램은 거칠고 무례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한 번 결혼하였다가 사별한 남자였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택한 결혼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헤이거의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유언장은 벽돌집의 내용물을 어떻게 처분하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어쩌면 아버지는 이 이상 나와 화해하려고 노력할 수 없으셨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돈과 부동산에 대한 구체적 지시사항은 있었다. 그 중 일부는 아버지가 우아한 영원의 궁궐에서 지상을 내려다보셨다가 자기 무덤이 노란 구륜앵초에 뒤덮인 걸 보고 모욕감에 젖지 않아도 되도록 가족 묘지를 돌보는 영구 관리비가 되었다. 남은 돈은 모두 시에 환원되었다." (P.82)
헤이거는 두 아들을 두었다. 마빈과 존. 둘째 아들 존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랐던 친구 로즈의 딸과 결혼하려 했다. 이들의 결혼을 반대했던 헤이거와 그 두 사람의 죽음. 헤이거는 몸도 마음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나이에 이르러 그들을 그리워 한다. 자신의 마음과 다르게 늘 엇나가기만 했던 그녀의 인생. 환갑이 넘은 아들 내외가 자신을 돌보는 것이 힘들어 요양원에 들어가게 된 헤이거는 그제서야 그 모든 것이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진정한 삶의 모습이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우리가 바라는 삶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신이 바라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임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편린처럼 흩어진 삶의 조각들이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고 우리가 죽는 순간에 보게되는 완성된 삶의 모습에서 바라볼 때 어느 순간에 가졌던 자신의 마음이나 행동이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삶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당위성과 진정성을 획득할 수 있으며 그것에 깊이 감사하게 된다.
"나는 누워서 내가 지난 90년 동안 했던 진정으로 자유로운 행동을 떠올려보려고 애쓴다. 그렇게 여겨질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근의 두 가지 일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하나는 농담이었다. 하지만 이는 다른 여느 승리와 마찬가지로 치열한 전투 끝에 쟁취한 전리품이 하찮아 웃을 일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거짓말이었다. 그렇지만 거짓말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이 말은 적어도, 드디어 일종의 사랑이라 할만한 마음으로 한 말이었으니까." (P.377)
나는 지금도 꿈결처럼 나의 할머니를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기도한다.
삶이 이어지는 어느 한 순간에 주관적인 선악의 판단으로 내 자신이 요동치지 않게 하소서. 오직 내 마지막 순간에 기꺼운 마음으로 감사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