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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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가장 솔직하지 못했던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말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나를 기만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우고, 그런 행위에 대해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순간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지난 일에 대해 우리가 하는 후회는 결국 우리 자신을 기만했던 모든 행위와 생각과 어리석음에 대한 자책과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모든 외부 환경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진실로 솔직해지는 순간이 올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누구의 비난도, 다가올 미래도, 어쩌면 죽음까지도 잊을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외부 조건에도 휘둘리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혁명과 같은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회적 관습이나 통념에 비추어 그들을 단죄하고 비난한다.  우리에게는 과연 그런 사람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진심으로 축하할 용기는 과연 있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인 한스 에리히 노삭은 우리를 향해 진지하게 묻고 있는 듯하다.  이제는 우리가 대답해야 할 차례이다.

 

베르톨트 묀켄은 작가이다.  어느 날 그는 상공인협회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다.  사실은 '헬데겐 사'가 주최한 시상식이었지만 헬데겐 사의 대표인 막스는 익명을 원했고, 수상식장에는 그의 부인 마리안네를 대신 보낸다.  베르톨트는 그곳에서 만난 마리안네에게 첫눈에 반한다.  "당신과 함께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베르톨트.  마리안네와 베르톨트는 그 순간이 자신들에게 가장 솔직한 순간임을 직감한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모든 외부 환경이나 사회적 비난, 그들이 걱정해야 할 미래마저도 초월하는 순간이다.  그날 마리안네는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베르톨트와 함께 집을 나간다.

 

그러나 행복은 실로 순간적인 일이다.  사회적 관습과 통념에 비추어 좋은 사람으로, 남들에게 비난 받지 않을 정도로 착하게 산다는 것(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고 있지만)은 그 순간을 만나지 못한 불행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어떤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행복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어긋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처음의 그 순간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그 역시 행복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행복이 비록 오랫동안 계속될 수 없음을.  그것이 예전부터 생각해오던 것과 같지 않음을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행복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행복은 오직 현재일 뿐이다.  거기엔 과거도 미래도 없다.그때 우린 참다운 행복을 알았고, 그래서 그후 우린 불행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P.128)

 

      

한 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베르톨트의 머릿속에는 오직 미래만 존재한다.  과거와 단절한 채, 자신의 엄마와 동생조차 만나지 않는다.  미래에 저당잡힌 베르톨트는 현재의 시간을 시시껄렁한 잡담으로 소비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오직 그에게는 잘 팔리는 희곡을 완성하여 좋은 집으로 이사도 하고, 폭스바겐도 한 대 사고, 마리안네와 마음껏 여행할 날만 기다린다.  늦어도 11월에는.

 

"너무나도 괴로운 시간이었다.  세상의 모든 탄식마저 입을 다무는, 아무리 빠져나오려 애를 써도 빠져나올 수 없는 무기력한 시간이었다.  울고 싶어도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두워지기 시작해야 비로소 숨이 좀 트였다."    (P.180)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마리안네에게 시아버지의 방문은 한줄기의 빛이요, 탈출구였다.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시아버지는 성공을 향해 오직 앞만 보며 살았다.  그런 까닭에 자신의 부인은 집을 나가 죽고, 아들 막스는 어머니도 없이 자랐다.  이제 자신이 세운 회사는 그에게 긍지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저주의 대상이었다.  사회적 통념과 관습에 의해 전 인생을 바친 그는 이제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이 되었다.  원인은 서로 달랐지만 베르톨트와 마리엔느, 그리고 시아버지는 사회적 통념에 의해 자신들의 삶이 무참히 짓밟혔음을 깨닫고 이에 저항하려 한다.  작가의 입장에서 그들은 타자(他者)인 동시에 서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한몸인 것이다.  시아버지에게 베르톨트와 마리안네는 자신을 대신하여 사회적 관습과 통념에 저항하는 대리인이다.

 

"나 역시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지.  내 나이에도 말이다.  부끄러운 일이지.  사람들은 흔히 말하지.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고...  누구도 깊게 생각해보려 하지 않아.  그냥 대충 그런 식으로 넘기려는 거지.  하지만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야.  운수가 사나울 땐 흔히들 소리치지.  이따위 인생이 다 뭐야!  정말 지긋지긋해!  하지만 어쨌든 인생은, 삶은 그렇게 계속되는 거다..."    (P.227)  

 

시아버지의 권유에 의해 마리안네는 결국 베르톨트를 남겨 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남편 막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녀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해 11월, 베르톨트의 희곡이 마리안네가 사는 도시에서도 공연된다는 기사를 읽게 된다.  마리안네는 공연 입장권을 구입하였지만 정작 자신은 가지 않는다.  그리고 11월의 어느 날, 우박이 심하게 내리던 날 밤 베르톨트는 마리안네의 집을 찾아온다.  베르톨트임을 직감한 마리안네는 베르톨트와 함께 다시 집을 나간다.  그러나 베르톨트가 약속한 폭스바겐을 타고 떠나던 두 사람은 철로 교각에 부딪쳐 영원한 여행을 떠난다.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카레니나>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말했던 것처럼 "전후 독일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이며, 가장 탁월한 작가"인 한스 에리히 노삭은 연애 소설이라는 구조물 속에 또 다른 스토리를 깔고 있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삶의 수동성과 맹목적성에 저항하는 젊은 두 남녀와 이를 지켜보며 지지하는 한 명의 노인, 그리고 인습과 통념에 순응하며 사는 대다수의 주변인들.  성공, 의무, 도덕 등 우리에게 주어진 외부 환경에 의해 우리는 단 한 번도 저항하지 못한 채 우리의 삶을 마감한다.  이런 삶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찾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시아버지의 관점에서 그렇게 살았던 자신의 삶은 얼마나 허망했을까?  자신이 할 수 없었던 일, 자신은 감히 용기조차 낼 수 없었던 일을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두 젊은이는 얼마나 부럽고 대견했을까?  관습과 통념에 따라 읽으면 이 책은 한낱 흔한 러브 스토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작가는 그 인습의 벽을 깨고자 시도했던 두 젊은이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묻고 싶었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에게 얼마나 솔직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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