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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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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것들이 많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많이 얘기하는 것은 어쩜 음악일 것 같다.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들으면서 뛰었던 심박수를 낮추며 평온을 찾아가는 것 중에 음악만한 것이 어디 있을까 싶다. 그런 음악과 적절한 짝꿍을 이루는 것은 또 그림이 한 부분을 차지할 것 같다. 적절한 음악의 배경지식과 그림의 이해가 있다면 훌륭한 하모니를 이룰 수 있겠지만 좀처럼 페이지를 쉽게 넘길 수 없는 이해력을 가졌다면 이 책이 주는 부담감은 클 수밖에 없다. 삼백페이지가 넘는 책을 일주일을 넘게 가지고 들쳐봤다 덮었다가를 몇 번이나 했다. 간혹 많이 보았던 작가나 그림이 나오는 부분은 심도 있게 읽고 살펴보았는데 그걸 보더라도 적당한 수준으로 알고 읽는 것은 책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부분의 한계가 얼마나 큰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페이지마다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그림과 화풍의 비교를 할 수 있는 것이 미학에 대한 미천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을 위한 가장 큰 미덕이 아니었을까 싶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고전예술 편』에 이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으로 나온 책은 3편을 예고하고 있다. 전편에 고전예술에 대한 부분을 다뤘다면 두 번째 책에서는 모더니즘과 함께 아방가르드에 대한 이해와 설명이 담겨있다.

이미 미학 오디세이라는 책 시리즈를 통해 서양미술과 미학의 부분에 대한 얘기를 풀어 놓은 적이 있는 진중권의 미학 얘기에는 그의 깊은 철학에 부러움만 가득할 뿐이다. 전작 시리즈는 2편까지 밖에 못 읽었는데 이번 서양미술사 시리즈는 몇 편까지 나올지 모르겠지만 맞춰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가도 점점 미궁으로 빠지는 살인사건의 소설처럼 점점 어려워지는 용어들과 해설들에 깊은 한숨이 쉬어진다.

 

이 책의 모티브와 뼈대가 되는 아방가르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운동이었다, 라는 시작 하에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을 풀어 놓는다. 음악이나 문학도 그렇지만 그림 또한 순수함으로 시작으로 예술 활동을 펼치지만 차츰 고전적인 미와 예술의 이상은 무너져 내리고 그것을 모더니즘이라 일컬으며 그 모더니즘은 동의어처럼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다.

 

사실 책 얘기에 시대적 예술가들의 예술의 지향성이나 방향에 대한 얘기에 크게 공감을 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지만 아방가르드와 키치의 비교 분석은 가장 큰 공감을 한 부분이었다. 예술은 순수성을 가지고 시작하고 그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많은 변화들을 꾀했지만 결국 그 예술 또한 키치, 즉 대중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키치는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예술과 문학이다. 이윤 추구를 위해 모든 문화적 경험을 키치로 만들어 소비하는 산업사회에서 아방가르드는 문화의 진정성을 (높은 수준의 예술과 문학)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P350)

하지만 아방가르드와 키치, 이 두 개의 동시적인 문화 현상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키치가 추구하는 참된 빛이 아방가르드와 함께 할 수 없는 정신적 가치에서 큰 오류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아방가르드는 전통의 거부에 있지만 키치야 말로 새로움의 제스처를 갖고 있다. 같다고 생각되는 부분이지만 사실 이 둘의 의미는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아방가르드의 길에는 예술가들의 미래가 보인다고 했다.

“예술가는 대중의 앞서 미지의 땅에 들어간다. 거기에는 물론 희생이 따르나,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개척해놓은 그 길을 따라 사회는 안전하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348)

 

사실 그림을 이해한다는 것, 아방가르드 시대의 그림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쩜 모두 어떤 암호를 풀어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혼란하고 모호한 의미란 결국 ‘암호’일 뿐이다. 암호에는 보통 해법이 있지만, 현대회화에는 객관적 해법이 없다. 결국 현대회화가 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과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것이리라.” P21

 

이 책을 다시 완독하고 나면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과 얘기할일이 좀 많아졌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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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 민음 경장편 1
김이설 지음 / 민음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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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가끔씩 보는 드라마속의 한국의 모습은 부유하고 화려하다. 하지만 소설 삶속으로 들어가면 그들의 삶은 드라마속의 화려한 삶의 거울의 뒷면처럼 음습하고 어둡기만 하다. 마치 열두시가 되면 마법이 사라지는 신데렐라처럼 현실로 돌아와 나를 보는 것 같다. 소수의 일부만이 존재하는 직장속의 본부장님보다 일반 사원의 삶이 훨씬 많은 현실이 아닌가. 그래서였는지 김이설의 <나쁜피>를 읽는 내내 드라마를 보면서 잊고 싶은 삶의 우울한 단면을 잘라내며 모른척하고 싶었던 지금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드라마속의 판타지만이 내 삶에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김이설의 소설 속 하층 계급의 주인공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소시민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지금이 가장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즘 소설의 트렌드인지 모르겠지만 소설속의 주인공들은 성인이지만 성숙하지 못한 성인이 등장하거나 성인이 아니지만 이미 몸도 마음도 성인의 세월을 넘긴 미성년들이 나온다. <나쁜피> 또한 주인공 화숙은 노처녀이지만 상처로 인한 성숙도지 못한 청춘을 아직 보내지 못한 성인이다. 화숙은 정신이 온전치 않은 엄마 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어미는 밤이건 낮이건 딸 앞에서도 겁탈을 당하며 살았다.

뺨 한대만 맞아도 일어나지 못하는 손을 가지고 있는 외삼촌과 알코올 중독 할머니, 자신의 첫사랑마저 가져가버린 외삼촌의 딸 수연은 화숙에게 가족이 아니라 그녀의 더러운 피를 나눈 어쩔 수 없는 가족일 뿐이다. 그 가족은 드라마와 현실의 경계선처럼 천변 어귀 저쪽과 이쪽으로 나눠진 이쪽의 고물상이 즐비한 퇴락한 도시의 후미진 곳에 살고 있다. 작가가 만들어 놓은 화숙이라는 인물 때문에 마음이 쓸쓸해졌다. 하루 종일 일하면서 평생 처음으로 자신의 것을 마련해 본 오락실은 이제 남의 손으로 넘어가게 생겼고, 결국 상가 주민들의 원망을 받으며 화숙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었던 오락실을 잃고 말았다.

 

요즘은 늦은 나이의 결혼이 이상할 것도 없지만 화숙에게 결혼은 그녀의 삶에 더욱 평범하지 않을 일정 같은 것이 되었다. 정신지체의 엄마 밑에서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게 자란 화숙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슬픈 가족사를 담임에게 말하며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화숙은 그런 담임에게 성추행을 당하며 유년시절을 보냈고 자신의 서러운 삶을 사촌 수연에게 분풀이를 하며 세월을 지워냈다. 남들처럼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살고 싶은 아주 평범한 서른 살 여자의 꿈을 수연이 이루며 사는 것을 그저 지켜 볼 수밖에 없다. 그저 남들처럼 그렇게, 자신의 옆에 있는 수연처럼 살고 싶지만 화숙에게는 그런 삶이 오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시간이지만, 시간은 그 주인에 따라 각각의 몫으로 소멸되었을 것이다. 같은 10년을 보내는 동안 누군가는 학부형이 되고, 빚쟁이가 되기도 하며, 생을 끝내기도 한다. 어떤 이는 과거에 매몰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앞만 보며 뛰어갔을 것이다.” (P122)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을 똑같이 소비하지 못한 화숙의 분풀이는 늘 수연에게로 돌아갔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화숙이 자신보다 십여 년이나 많은 아저씨와의 불륜이 애처롭기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엄마의 모습을 보며 절대로 남자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 같았는데 수연을 좋아하는 재현에게 향하는 연정의 마음을 접지 못하는 것을 보며 더욱 마음이 쓰렸다. 그녀는 사람을 만나면 좋아지고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생기는 사랑의 마음을 품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재현은 화숙이 아닌 수연에게 마음이 있고 끝까지 수연을 놓지 않았다. 사랑 따위도 화숙에게는 공평하지 않다.

 

화숙의 가정은 폭력적으로 그려졌다. 엄마의 성폭력, 외삼촌이 죽어가는 엄마에게 다했던 폭력, 걸핏하면 때려대는 외숙모에게 다했던 가정폭력, 딸이라고 예외가 없었던 폭력 속에 화숙은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가 되었다가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고물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외삼촌에게 밀고하거나 엄마가 당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수연에게는 화숙은 가해자가 되어 그녀의 지친 사람의 이면을 뒤집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주인공 화숙을 이해하면서도 그녀의 짧을 얘기를 들어주는 일을 그만하고 싶기도 했다. 화숙의 동선을 따라가며 그녀의 지친 삶을 지켜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도 짧은 경장편의 소설을 끝까지 읽게 하는 것은 화숙과 수연의 딸 혜주, 그리고 아이를 잃고 아이에 대한 집착 때문에 오로지 아이를 키우고 싶어 혜주의 엄마가 되기 위해 살고 있는 것 같은 진숙과의 결합 때문이다.

영화 <가족의 탄생>처럼 전혀 피 한 방울 나누지 않는 사람들이 한 집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시간에 등을 기대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말하는 가족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던 영화처럼 <나쁜피>속의 세 사삼의 가족탄생은 지루했던 삶을 끝내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말하는 동화의 끝부분 같기도 했다. 수연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절대로 있을 것 같지 않는 아버지의 분노로 떠났던 외삼촌은 의문의 죽음 맞이하며 지붕위에 올라가 호령했던 외삼촌의 고물상은 화숙의 몫이 되었다. 오락실을 잃고 다시 그녀의 소유가 되는 두 번째 그녀의 소유물이 되었다. 말을 잃었던 수연의 딸 혜주는 말을 찾아가고 아이를 잃었던 진숙은 어미를 잃은 혜주를 자신의 딸로 찾아갔다. 그들은 잃었던 것들을 하나씩 찾았다. 그리고 찾았던 것들을 자신의 자아에 넣으면서 새로운 가족이 된 것이다. 그들의 몸속에 어떤 피가 흐르건 그들은 그냥, 가족이 된 것 같았다.

 

“천변이 부옇고 흐려지고 있었다. 황사가 걷히면 더욱 따뜻해질 것이었다. 봄이 끝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p179)

 

천변에 봄이 오면서 그들도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고 새로운 삶의 시작에 서게 된 것이다. 그녀의 엄마가 죽었던 분류장 앞에서 다시 시작이라는 말을 꺼내며 살아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녀가 했던 그 말처럼 이제 평등한 것들을 찾아 나갈 것이다.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것을 더 많이 찾아 나설 것이다. 그래서 책을 덮으며 나는 화숙이 좀 더 편하게 하루를 맞이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리고 어디쯤 머물고 있을 수연을 화숙이 조금 더 애틋한 마음으로 그리워했으면 좋겠다. 어쩌면 그녀 때문에 세상을 등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수연을 많이 그리워하며 그녀의 삶을 같이 이어나갔으면 한다. 그래야 그녀의 피해의식이 그녀의 사람을 잠식시키지 않을 것 같다. 나는 화숙이 조금은 수연에게 미안해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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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대중문화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김기찬 사진집  

골목안 풍경 전집 / 김기찬 (지은이) | 눈빛 | 2011-08-27 

오지 않을것 같은 가을이 왔다.   여름, 올해는 정말 많은 비가 내렸다. 모든것들이 떠내려 갈것 같았던 그 여름은 가을까지도 떠내려 보내는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은 정직하고 착실하다. 계절을 시간 앞에 가져가 놓았다.  그 계절앞에 마음이 먹먹하게 만드는 작품을 하나 발견했다.  골목은 늘 두려움과 떨림을 간직하고 있다. 어두운 골목길을 잘 걷지 못해서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야만 했던 어린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매번 그가 지나가길 기다리며 서성였던 그 골목길도 떠오른다.  

2005년 향년 68세로 별세한 사진가 김기찬 선생이 남긴 6권의 ‘골목안 풍경’ 이라는 말만 들어도 작가가 스쳤을 많은 인연의 골목길이라는 그 풍경이 나의 오랜 기억과 함께 오버랩이 된다. 떨리는 가슴이다. 

 

 

     

 무명 화가들의 반란, 민화  

 외국 여행을 가도 그곳의 유명한 명소들을 찾가가는것보다 사람들이 북적이며 살고 있는 시장을 한번 갔다 오면 훨씬더 그 나라의 정서를 느낄수 있었다. 그래서 여행을 가면 꼭 주변의 시장은 한번씩 갔다오곤 한다. 그만큼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의 삶이 주는 모습이 진짜 모습같아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림도 그럴때가 있다. 이름없이 그려지고 사라지는 민화들속에 우리의 모습이 더 정겹게 남아 있는것 같다. 그런 기분때문일까, 책을 열기도 전에 참 소란스러울것 같다. 전통없이 자유롭게 그려졌을 그들의 그 자유가 펄떡인다.  

 

 

 

 영화가 노동을 만났을때  

요즘 드라마에는 부자집 본부장님이나 사장님이 주인공이 아닌 드라마가 거의없다. 우리나라에 재벌이 뭐 얼마나 있다고 나오는 주인공마다 다 그렇단 말인가. 그들은 참 일도 안하시고 무슨 아픔이 그렇게 많단말인가. 그래서였을까 그런 생각때문에 이 책은 가슴아프게 다가 올것 같다. 김기덕 감독님이 그랬던가. 너무나 가학적인 영화라는 말에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가학적이고 무서운 곳이라고.  

영화 리스트올려진것 보았는데 나는 영화와 노동이라는 단어를 떠오르면 당연히 라스폰트리에의 <어둠속의 댄서>가 떠오르는데 그 영화가 빠져있어서 섭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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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와 경계를 넘다 - 수의사 문성도, 5대륙 12만 킬로미터를 달리다
문성도 글.사진 / 일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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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와 의사, 그리고 여행과 길이라는 단어들의 조합을 떠 올리면 체게바라가 떠오르는 것은 너무나 상투적인 생각일까? 오토바이를 타고 대륙을 누비는 여행을 떠난 수의사의 얘기라는 말에 나는 그가 마치 혁명을 준비했던 20세기의 가장 완벽한 사람이라고 하는 체게바라가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속초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유럽으로 관통하는 그의 여행 경로에 군침이 흐른다. 넓디넓은 사막과 황무지를 가르며 달리는 오토바이를 떠올리면 사실 잠깐의 소름이 돋기는 했지만 그 황무지를 달려 만나게 될 도시들의 황홀한 만남은 얼마나 짜릿할 것인가.

언젠가 자전거를 타고 일본 여행을 한 어느 청년의 얘기를 보면서 걷다가 아닌 다른 수단을 통한 여행의 매력에 부러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걷는 것이 힘들고 많이 외롭다고 느꼈던 작년 제주도의 여행을 통해 혼자 떠나는 장기 여행이 얼마나 많은 외로움을 견디며 지내야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몇 달씩 혹은 일 년 넘게 혼자 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즐거운 한때를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 시간들보다 스스로 견뎌야 할 외로움과의 싸움에 더 많은 이해와 안쓰러움을 가질 수 있었다.

 

새로운 도시와의 만남 때문에 그의 여행이 부러운 것보다 오토바이를 타고 밤이 되면 1인용 텐트에서 잠을 청할 수 있는 그 자유로움이 가장 부럽다. 위험하다는 생각은 황무지 건너편으로 보내고 잠을 청할 수 있는 자유. 여자가 아직은 이렇게 여행을 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기 때문이고 물론 남자들도 위험한 도시들이 있기는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더 위험한 여행이 있기 때문에 그가 오토바이로 경계를 넘을 때마다 그의 데워지는 엔진에 부러울 수밖에 없다. 유럽 어느 나라에서 만난 여자 바이크 여행가를 만나서 생각이 드는 그 나라의 안전한 치안과 자유에 부럽다는 생각에 나는 더 없는 갈망을 느낀다.

“나와 마찬가지로 캠핑장에서 야영을 하면서 혼자 여행 중이었다. 여자 혼자서 장기간 오토바이 여행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과 안전한 치안상태, 그리고 여성의 자의식 등 모든 면이 부러웠다.” (p56)

 

 

오토바이를 통해 대륙을 넘는다는 것은 걷는 여행보다 더 어려웠던 순간이 많은 것 같다. 속도를 내고 비포장도로에서 전복되었던 그의 오토바이 때문에 한 달 때로는 넉 달을 깁스를 하고 낯선 도시에 머물러야 했고 오토바이의 부속이 없어 며칠을 기다려 수리를 해야 했지만 역시 여행이 주는 가장 큰 묘미, 사람과의 만남은 행복해 보였다.

 

아시아를 시작해 유럽, 유럽을 시작해 아프리카. 다시 아메리카 대륙의 모든 경계를 넘었던 그는 어떤 경계들을 또 넘고 있을까.

칠레, 우수아이아의 도시 그 세상의 끝에서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지면을 통해 느끼지 못했던 그 막막한 세상의 끝을 알고 싶다.

 

“ 그 도로의 공허 앞에서 나는 얼마나 나 자신이었나. 우리 행위의 주체가 각성한 자아가 아니라 무의식적 자아일 때 인간은 동물과 다를 것이 없다. 그곳에서 나는 완벽하게 혼자였고, 그것은 나에게 세상 모든 것과 동등한 나의 무게를 느끼게 해주었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우리는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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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오스 - 피의 맹세 스토리콜렉터 5
크리스토퍼 판즈워스 지음, 이미정 옮김 / 북로드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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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해결 해 줄 뱀파이어가 있어서 강력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 뱀파이어가 너무 탐이 난다. 그런 상상만 해도 막강한 나의 지원군이 있다는 생각만으로 흥분이 되는 사실이 아닐까. 그것으로 인해 생기는 권력은 탐욕을 부르고 갈망은 욕망으로 바뀌어 인간을 새로운 악으로 소모시켜 사라지게 할지도 모르겠다.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것 같은 이야기가 현재 일어났던 일들과 함께 만나서 마치 정말로 비밀 벙커에 그런 존재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상상하게 만드는 소재임은 틀림없다.

 

죽은 시체로 좀비를 만들고, 대통령을 위해 막강한 세력을 대항하는 뱀파이어의 얘기의 이 소설은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소재일 것이고 당연히 영화사는 그런 얘기를 가만 둘리가 없다. 소설이 영화로 다시 탄생하게 되었다는 얘기는 놀랍지 않다.

 

나는 좀비나 뱀파이어 영화를 잘 보지 못한다. 무엇보다 피가 낭자한 얘기는 정말 싫어서 그런 장르의 영화는 보지도 않는데 이 소설의 묘사에 섬뜩한 기분으로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보다 캐릭터의 힘이라고 생각된다.

뱀파이어 영화를 거의 본적이 없으니 너무나 아름다웠다는 탐 크루즈나 브레드 피트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지만 백 살이 넘게 대통령과 피의 맹세를 통해 그림자 속에서 어둠의 세력과 싸워 나가는 뱀파이어 케이드의 모습은 정말 섹시하기까지 하다. 이런 매력적인 역에 어떤 배우가 연기를 할지 참 궁금하기까지 하다.

그런 반명 케이드와 운명을 함께해야 하는 정치인 잭은 이상하게도 외국 배우가 아닌 밉상 전현무가 떠오르는 것일까. 마지막 장면은 그에게 너무나 안 어울리지만 이상하게 어울리는 잭과 전현무였다.

 

인물 설정이 확실하니 구성이 문제가 될 텐데 뱀파이어가 비밀병기가 되어 어둠의 세력과 싸워 나간다는 허무맹랑한 설정이 이상하게도 끌린다. 권선징악의 관점에서 볼 때 뱀파이어 케이드는 분명 악의 축에 있을 테지만 그는 선을 권하는 뱀파이어이로 그와 대립을 두는 콘라트 박사의 얘기는 또 다른 축으로 흥미를 끄는 구성임에 틀림없다. 콘라트의 얘기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콘라트의 등장은 뱀파이어 케이드 보다 훨씬 강력한 스릴을 가지고 있다.

한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잭과 케이드와의 어색한 만남이 쭉 연결될 것 같은 시리즈물로도 충분한 캐릭터의 탄생이다. 또 다른 시리즈물의 탄생이다.

 

여름나절 시원한 스릴러 한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며칠이었다. 보통은 책을 읽으면서 많은 포스트잇을 붙이면서 읽는 편인데 이 책은 단 한 개의 포스트잇도 붙여있지 않다. 그만큼 빨리 읽히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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