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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볼프강 카이저 지음, 이지혜 옮김 / 아모르문디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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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아들고 표지에 심취했다. 이 기괴하고 요상한 그림은 무엇이란 말이냐. 너무나 많은 상징을 가지고 있는 그림이라 이해하지 못하는 나 스스로의 자괴감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마음이 간절하기만 하다. 불편하고 쉽게 와 닿지 않는 그림들이나 영화의 한 장면들은 빨리 지나쳐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지극히 정상적인 것들만 좋아하는 평범한 나 같은 사람들은 영화도 피 철철 넘치는 하드고어 장르는 피해서 선택해 보는 편이다. 그림 또한 예쁜 것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는 그런 그림들을 보고 있는 순간을 즐긴다고 볼 수 있겠다. 문학 또한 스릴러 장르와 내가 맞지 않는 부분도 영화를 고르는 기준과 부합한다. 이런 예술 장면 속에 지극히 평범하지 않는 부분들, 그로테스크한 부분을 배제 한다면 예술이 자유로워 질 수 있을까.

문학과 영화, 그림들 속에 그로테스크한 부분들이 삽입되면서 좀더 자유롭고 큰 범주를 넘어 설 수 있었던 것 같다.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라는 책은 명제를 확실히 하고 시작한다. 우리가 말하는 그로테스크란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시작하는 것은 방대한 예술 분야를 들어가기 위한 범위를 정하는 것과 같다.

 

“이 책의 목적은 다소 어렴풋하게나마 이어져 온 용어의 역사에 기대어 그로테스크가 과연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이 원칙을 기준 삼음으로써 주제의 범위는 물론 15세기 후반부터 현대까지로 시간적 범위도 한정할 수 있었다.” (P26)

 

"그로테스크[grotesque]: 이탈리아어 ‘그로타(grotta, 동굴)’에서 유래한 말로 15세기 말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곳곳에서 발굴된 특정한 고대 장식미술을 지칭하는 용어.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괴기한 것, 극도로 부자연한 것, 흉측하고 우스꽝스러운 것’ 등을 형용하는 말로 사용된다." (P42)

 

독일의 문학 평론가 볼프강 카이저가 1950년대에 펴낸 이 책의 현대 미술과 문학에 포함된 부분은 21세기와는 사실 많이 동떨어져 있는 부분도 있다. 50년대에 모은 자료들의 정의를 부정 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 부분의 예술 부분들은 벌써 근대에 있는 범주에 속해 버렸기 때문이다. 볼프강이 느꼈을 현대의 예술은 이제 근대의 예술이 되었고 그렇게 놀랄 만큼 그로테스크가 아니다. 언젠가 일본의 영화감독의 영화 한 장면을 보면서 경악 할 수밖에 없었던 그 부분 또한 볼프강이 정의한 그로테스크라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 이론서를 만날 때마다 미학 부분에 너무 부족한 학식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그런 마음을 먹으며 더 매진하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열정이 없다는 것에 더 부끄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광범위한 예술의 범주 안에 그로테스크가 자리 잡은 부분과 그로테스크의 확장으로 인한 예술의 완결성을 얼마나 가지게 되었는지 그 부분도 알기가 쉽지 않은 부분이다.

 

많은 예를 들어 놓은 작품 속에 가장 와 닿았던 작품은 당연히 카프카였다. 그 이후의 작품들과 작가들에게는 사실 1950년대에 나온 이 책의 예들이라면 상당한 고전들인데 그 고전들을 만날 수 없었던 내 지난날이 아쉽기만 했다고 해야 할까.

 

예술 범주 안에서 만나게 되었던 그로테스크의 범주들은 점점 확장되고 있다는 것만 확실히 느낄 뿐, 저자가 내세운 미술 작품역시 많이 접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아쉽기만 했다.

손철주 작가의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는 작품의 제목을 탓한 적이 있었는데 어쩜 그 말이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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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보면 옛 생각난다] 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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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우리 그림에 대한 남다른 생각들을 더 많이 할 것 같다. 그리고 <옛 그린 보면 옛 생각난다.>는 이 책을 만나고 나면 이상하게도 오주석의 책들이 더 그리워지는 것은 무슨 이유 일까.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는 책을 이미 스테디셀러로 만들어 낸 저자 손철주의 또 다른 그림 감상에 관한 책은 여백의 미를 느껴야 하는 우리 그림의 긴 여백의 의미를 부여 넣어주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로 나눠 놓은 주제에 따라 그림들을 분류하고 그림들을 감상해 나가는데 꼭 이 주제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그림을 소개하고 그림의 시대적인 상황과 그것에 따른 해석을 하는 책이 아닌 만큼 자유롭게 읽을 수 있어서 분류는 의미가 없다. 한편의 그림, 그림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간혹 쓰지 않는 우리나라 단어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함께 맞는다. 이런 단어들이 있었을까 생각되는 사라지는 단어들과의 조우도 그림과 함께 만나는 새로운 발견이다.

 

손철주의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는 책은 사실 내게는 많이 공감이 가지 않았던 책이었다. 무엇보다 제목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는 만큼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부분, 그리고 느낀 만큼 보일 수 있다는 반론을 들 수 있는 제목이라는 생각에 미천한 독자의 불만이었던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책은 그림에 대한 소개의 소제목에 홀랑 그동안의 반감이 사라져 버렸던 부분이 있었다.

작가 미상의 <서생과 처녀>라는 제목의 그림은 방안에 글 읽는 서생을 문 밖에 몰래 서서 지켜보는 처녀의 그림이다. 이 그림을 저자는 달아 놓은 소제목은 <연기 없이 타는 가슴>이었다. 얼마나 문학적인 표현인가. 사모하는 마음이 깊어 타들어 가는 그 가슴은 연기가 없다는 표현. 그림과 다르게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신윤복의 <처네 쓴 여인>의 그림은 <헤어진 여인의 뒷모습>이라는 소제목을 달아 놓았다. 여인이 어딜 가는 것인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인지도 알 수 없지만 뒤돌아 가는 여인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은 모두가 같은 것일까. 그녀의 모습이 너무 보고 싶어서 그림을 뒤집어 보았다는 청나라 시인 진초남의 호기심에 웃을 수밖에 없다. 나 또한 그녀의 처연한 모습에 다독이고 싶어 그녀를 돌려 세워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니 말이다.

“불러 봐도 돌아서지 않으니 어리석세도 그림 뒤집어서 본다네.” P201

 

청화 백자로 만든 잔받침의 사진이 가장 눈에 들어온다. 청탁을 받는 자리에 앉은 누군가 거절을 하기위한 그 자리에 살며시 마셔본 잔 아래 깔려 있는 시구가 속마음을 들킬 것 같아 술이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 청탁을 하러 온 사람과 거절하는 사람과의 자리에 슬기롭게 해결하기 위한 지혜가 이런 것이 아닐까.

 

향수, 추억, 그리움들은 모든 사물에 담겨있다. 추억을 간직한 사물들은 살아가는 어떤 이유를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잊고 있는 과거의 어떤 사람들을 꺼내 올 수 있다. 그것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겠지만 행복해 질수도 있겠다. 그래서 오래된 물건들은 정겹거나 아득한것인가 보다. 헤어지는 여인의 뒷모습이라는 소제목의 신윤복의 그림을 보다가 오래전 누군가와 헤어지고 돌아갔던 나의 지난 모습을 생각해 내고 말았다. 그날들, 누군가와 함께하지 않았던 어떤 밤 그 밤의 시간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나의 뒷모습도 그녀처럼 처연했을까.

 

오랜만에 수묵화의 은은한 맛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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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스테이너블 엑설런스 - 미래를 선점하는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 코드
아론 크래머.재커리 캐러벨 지음, 이진원 옮김 / 더난출판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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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는 리바이스와의 제류를 통해 타이드 콜드워터를 찬물에서 조금만 써도 뜨거운 물에서 많이 쓸 때만큼 좋은 세탁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소비자들에게 알라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쏟았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물을 데우는 데 드는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병과 상자의 크기가 줄어든 농축세제에 들어가는 포장 재료량을 줄일 수 있었다. P151>

 

기업이 자신의 이윤을 남기기 위해 생산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생산량에 따라 파괴되는 자연과 환경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부분에서 많은 대기업들은 무감각하며 책임감이 없다. 이윤의 지속적인 성장, 지속가능성을 유지시키기 위해 환경과 이윤, 생산이라는 트라이앵글 속에서 문제 해결책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기업들은 얼마나 하고 있을까.

 

공짜로 주어졌던 자연, 그 속에서 생겨났던 에너지와 물의 고갈에 대한 얘기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자연의 고갈에 따른 생산 가격은 상승 할 것이고 결국 그 모든 것은 소비자의 몫이 될 것이다. 기업이 지속가능성을 두고 자연을 보호해줘야 할 이유가 어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인터넷 쇼핑몰을 다니다 보면 값이 싼 옷들이 참 많이도 나와 있다.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가격의 옷들을 한찰 입고 버리자는 생각으로 많이들 사들였던 나였는데 어느 프로에서 지구를 가장 크게 병들게 하는 이런 값싼 옷들이라는 것에 놀랐다. 원단을 만들기 위해 석유가 필요하고 많은 원단을 뽑아내기 위해 많은 석유가 쓰였고 그 석유가 태워지며 일차적으로 공기와 대기는 더워졌고 더러워졌다. 그리고 많은 옷들을 빨래를 하며 많은 물이 소비가 되었으며 나처럼 한철 입고 버려지는 옷들은 지구를 아프게 했다. 소비에 대한 철학이 없었다. 중국 또한 성장을 자국의 성장을 위한 철학이 없었고 유럽과 미국등지에서 주문되는 많은 양의 제품들을 쏟아내기 위해 중국의 국토는 가장 심각하게 병들어 갔다. 중국의 성장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된 것이 환경의 파괴일 것이다. 그들에게도 필요한 지속가능성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말하는 지속가능성 기업이란 투자자, 고객, 종업원 모두에게 가치를 선사하는 기업이이고, 단순히 경영이 잘되는 기업이기도 하다는(P12) 저자의 말에 공감 할 수밖에 없다.

지속가능한 발전은 미래 세대가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현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발전이다 P12

 

지속가능한 기업을 만들기 위한 기업들의 노력은 눈물겹다. 확장되어 가는 시장 속에서 기업인들에게 동기 부여를 하여 내부의 변화를 주어 발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기업들의 첫 번째 이윤추구의 목적을 위해서 많이 희생된 것들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이제부터라도 친환경 생산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지금 우리 세대에서 끝날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예능 프로에서 나만 아니면 된다는 무책임한 말은 없어져야 한다. 모두가 함께 공유하고 함께 사는 세상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라는 개념을 회복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위해서 기업은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며 확장해 나가는 반면 기업의 제품을 소비하고 있는 우리 소비자들은 더욱더 소비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소비자의 현명한 소비가 기업의 윤리를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도 해 본다.

 

책의 소제목 중에 가장 눈에 들어 왔던 것은

<미래를 이해한다는 건 낯선 목소리를 청취한다는 의미다>라는 부분이었다.

상사 일수록 자신의 신념과 생각이 먼저가 되고 타인의 말을 수용한다는 부분보다 자신의 신념이 꺾였다는 생각에 더 고무적인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을 많이 본적이 있었다. 우리의 미래를 더 확장해 나가기 위해서 낯선 목소리에 귀 기우려야 할 때이다. 기업들 또한 그렇고 소비자들 또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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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대중문화>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것_ 이스타 샤이프

예술, 대중문화에 대한 시선을 옮긴것을 너무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은 모르는 예술 작가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다.  

<알프스의 화가, 풍경화의 거장 조반니 세간티니>  

스위스라는 나라는 알지만 스위스라는 나라의 모습을 담아낸 화가의 만남은 없었다. 그래서 였는지 책속에 수록된 그림들을의 만남은 떨리기만 하다. 더운 여름 더욱 느긋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을것 같은 알프스의 기운을 던저줄것만 같다.  

 

 

 

안도다다오의 도시 방황 _ 안도 다다오 

이런 이력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질투가 난다. 분명 그 스스로도 노력을 했겠지만 프로 권투 선수의 이력을 가진 세계적인 건축가는 독학으로 그 모든것을 이뤄냈다는 그 부분...그저 놀랍고 존경스러울 뿐이다. 그의 천재성이 들어나는 세계 각곳에 세워진 그의 천재성을 담아낸 건물들의 철학을 들어보는것은 어쩜 질투가 나서 읽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푸슈킨 선집 _ 알렉산드르 푸슈킨 _ 민음사

반가운 민음사 시리즈가 나왔다.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살리에르가 담긴 희곡이다.  

나는 천재 모챠르트보다 살리에리에 더 정이 많이 간다. 나는 늘 어떤 재주보다 갈망이 더 많아 그것에 닿을수 없는 서러움이 더 커 괴로운 삶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였는지 살리에리에 더 공감이 가고 연민이 생긴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근간이 된 희곡이라니 끌린다. 누구에게나 있는 그 갈망이 어떻게 표현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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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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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를 덮고 있는 글 중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최인호의 첫 전작소설이라는 단어였다. 전작소설이라니? 글의 서두 부분을 읽으면서 작가에게 이 소설이 어떤 소설인지 마음이 먹먹해졌다. 사실 작가 최인호의 암투병 얘기도 책 때문에 알게 되었고, 그의 화려한 작가 이력에 나는 유독 그가 자신은 현대소설 작가라고 말했던 그런 소설만 골라 읽었다는 것에 놀랐다. 나는 그가 쓴 시대소설, 역사 소설을 읽지 못했다. 그 유명한 <상도>, <해신>,<유림>은 나의 책 목록에 적혀 있지도 않은 소설들이다.

아주 많이 조숙했던 나는 중학교 2학년때 학교에서 이문열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를 읽고 이상 문학상 수상작을 뒤지다가 처음 최인호의 작품을 읽었다. 고등학교 2학년때 문단에 등단한 그의 필력도 사실 부러웠지만 매번 독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상업적인 작품의 구성미에 나는 더 높은 평가를 해 주고 싶었다. 어쩜 이런 소재들을 이렇게 맛깔나게 잘 찾아오는 것일까. 타고난 문장력이야 그렇다 치지만 소재의 발굴은 작가의 미덕인 것을 모두 갖춘 사람은 대체 뭐란 말인가 했었던 그의 작품들을 읽을 수 있었던 날들을 떠올리고 나니 나는 역시 그의 시대상을 다룬 소설보다 현대 소설에 더 매혹되어 있었다.

 

주인공 K의 이야기로 토요일, 일요일 그리고 월요일로 이어지는 자아의 분열과 자아를 다시 찾아가는 얘기는 거울의 뒷모습이다. 내가 오른손을 들면 거울 속에는 왼손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다가오는 모습. 익숙하지만 전혀 다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주인공 K는 아침 눈을 뜨면서 자신이 하지 않았을 행동들 하나씩 발견한다. 주말은 절대 울리지 않는 알람소리가 울리는가 하면 아내와의 잠자리에서의 실수들도 이상하다. 그리고 그가 사용하는 화장품의 브랜드도 바뀌어 있다. 마치 나의 집이지만 내가 아닌 나와 취향이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은 공간의 착각을 만들어 낸다. 나는 어떤 사람이라는 생각보다 왜 내가 하지 않았을 그런 행동들을 느끼게 되는 것인지 궁금해 하기 시작하며 서서히 K는 자신의 행적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분명 자신의 공간이고 자신의 시간이지만 K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생각에 잃어버렸던 핸드폰을 찾고, 십여 년 동안 만나지 않았던 누이를 만나고 자신의 핸드폰을 주었던 낯선 사내를 만나고 그 사내에게서 받은 핸드폰에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아내의 낯선 영상이 찍혀있는 것을 발견하면서 자신의 행적을 따라간다. 그것은 마치 작가가 그동안 많은 작품을 써 왔던 자신의 시간을 돌이켜보는 것과 같다. 지난 시간을 추억하거나 지나쳐왔던 기억들을 다시 들춰내고 있는 것 같다. 암투병을 하면서 손톱이 빠지는 아픔을 견디면서도 두달 동안 써 내려간 이 소설 속에는 작가의 지나쳐왔던 낯선 자신과의 조우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열심히 글을 쓰고 쓰는 작품마다 영화가 되었던 자신과 아픔을 견디고 있어야 하는 자신과의 조우. 낯선 도시 속에서 자아를 찾아가는 K가 작가 최인호가 아니었을까.

 

십여 년 만에 만난 누이에게서 느끼는 욕정과 욕망, 친구H의 욕설과 배신, 그의 정부 간호사의 갈구들은 모두 나의 이면 속에 잠들어 있는 제 2의 나의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생각하게 된다.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만난 다는 것, 너무 낯설고 무서워졌다.

 

소설이 흥미롭게 읽히지만 리뷰를 쓰기에 만만찮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벌써 몇 번을 썼다 지웠다가 하고 있으니 말이다. 살인 사건 하나 일어나지 않지만 긴장감 잔뜩 가지고 있는 것은 읽다가 나의 또 다른 자아와 만나는 일이 내게도 던져질 것 같아서일까.

<나는 곧 ‘나’가 되었으며, K1과 K2는 합체하여 온전한 하나의 ‘K'가 되었다>는 그의 말에 눈물이 맺혔다. 마치 작가 최인호가 아프지 않은 자신과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의 멋진 소설을 더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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