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평전 완결판 낸 소설가 김원일
'뛰어난 소수는 찬연히 부활한다'
"10대 후반에 '어릿광대...'보고 동경하던 예술가 전형 찾아내"



▲ 김원일
10대 후반의 김원일은 조잡한 인쇄의 그림 한 장을 벽에 붙여놓고 망연히 바라보곤 했다. 피카소의 ‘어릿광대로 분장한 화가 살바도’(1923년). 어디서 묻어들어왔는지도 모르는 그림이었다.

“이룰 수 없는 꿈만 키우던 시절, 젊고 아름다운 어릿광대의 모습은 내가 동경하던 예술가 모습의 전형으로 비쳤습니다.” 내성적인 청년 김원일은 그 그림을 열심히 베껴 그렸다. 모딜리아니의 연인 에뷔테른의 긴 얼굴과 배우 제임스 딘의 옆모습 사진을 베끼던 시절이었다. 가난 때문에 화가의 꿈을 접은 김원일은 소설의 길로 들어선다.

원고지 2600매 분량의 피카소(1881~1973년) 평전, ‘김원일의 피카소’(이룸)에는 화가를 꿈꿨던 소설가의 그림 사랑이 녹아 있다. “문학의 길로 나서지 않았다면 화가가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는 “자주 그림을 옆에 두고 소설을 쓴다”고 말했다. 피카소의 30대 중반까지를 담아 2년 전 펴냈던 ‘발견자 피카소’를 대폭 개정하고, 다루는 시기도 전 생애로 늘렸다. 피카소의 작품 232점을 비롯, 동시대 작가 35명의 작품 67점의 도판을 수록했다.


▲ 피카소의 ‘어릿광대로 분장한 화가 살바도’(1923년, 130.5×97㎝, 스위스 바젤미술관). 청년 김원일이 연필화로 모사하며 예술가의 꿈을 키웠던 작품이다.
“피카소를 거치지 않고는 현대미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살면서 그는 사망하기까지 쉴 틈 없이 자신의 세계를 새로 세우고 거푸 깨부수었죠. 그처럼 부단한 변모와 실험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그리고 그 소용돌이친 피카소의 내면을 풀어보고 싶었습니다.”

작가는 버림받은 자의 슬픔을 내면에서 끌어낸 ‘청색시대’, 슬픔을 따뜻하게 껴안은 ‘분홍색시대’를 거쳐 브라크와 함께 시작한 입체주의로 오늘날 추상주의 예술의 효시가 된 이후에도 새로운 실험을 계속한 피카소의 생애와 예술을 추적했다. 가난과 고통, 그리고 열정으로 가득찬 삶에서, 결정적인 순간들은 등장인물의 대화나 심리묘사를 동원해 소설처럼 극적으로 전개했다.

피카소의 천재성은 어디서 나온다고 보는가. “이미 ‘있어온 것의 재창조’를 통한 자기화(自己化)의 발견에 있다”고 작가는 풀이했다. 세잔, 반 고흐, 고갱 등의 기법이 피카소에 와서 어떻게 변형되고 재창조되었는가를 읽는 것이 피카소 그림 감상의 키워드라는 것이다.

피카소는 그림으로 일기를 쓰듯 자신의 일상, 주변인물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피카소의 작품에는 그의 삶이 녹아 있죠. 시인을 좋아하고 그들로부터 영감을 얻은 피카소 주변에는 늘 시인이 떠나지 않았죠. 평생 친구였던 막스 자코브를 비롯, 기욤 아폴리네르, 폴 엘뤼아르 같은 인물이 그들입니다. 올리비에, 올가, 마리 테레즈 등 새로운 여자를 만날 때마다 작품 경향도 바뀌었죠.” 피카소를 평하는 글에서 작가의 예술관도 드러난다. 현대미술의 걸작이지만 발표 당시에는 혹평을 받은 ‘아비뇽의 아가씨들’(1907년)에 대한 평이 그렇다. “당대 대중사회에서 너무 앞서 갔다고 해서 훗날 다 인정받는 것은 아니지만, 뛰어난 소수는 찬연히 부활한다”는 지적이 그 예다.

“이제 소설 쓰기는 쉬고 남의 좋은 글이나 읽으며 여생을 살고 싶다고 나태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피카소의 그림을 들춰보면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저의 갈 길을 피카소가 넌지시 암시해준 셈이지요.”

(최홍렬기자 hrchoi@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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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la 2004-04-20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은 꼭 사서 보고 싶네요...

stella.K 2004-04-20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찮은 것 같아서 올리긴 했지만, 쪽수나 가격이 만만찮네요.

김여흔 2004-04-21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 찜해뒀답니다. ^^

stella.K 2004-04-21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흔님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비로그인 2004-04-21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전작을 꿈꾸는 작가 중 한 명인 김원일...
전 김원일의 그림도 참 좋던데...그가 동료 문인들을 그린 그림을 보면, 단순한 가운데서도 특징을 아주 잘 잡아내잖아요. 저도 이 책 보관함으로 담아 갑니다! ^^

stella.K 2004-04-21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흔님 vs 냉열사님의 리뷰. 재밌겠는데요. 두분, 보관만하시마시고 어여 어여 읽으십시오!^^
 

불문학의 뮤즈 탐구서 '흰 비너스 검은 비너스'
그녀의 향기…감미로운 구원인가, 무자비한 고문인가


▲ 시인 보들레르가 데생한 애인 잔 뒤발
사랑은 인간을, 흔들면서 지배한다. 그중 가장 크게 흔들리는 인간이 예술가들이다. 불문학자이자 시인인 이가림 인하대 교수는 ‘흰 비너스 검은 비너스-프랑스 문학 속의 매혹의 여인들’(문학수첩·262쪽·8000원)에서 프랑스 문학사를 훑어 내리며 시인·작가들의 넋을 송두리째 빼앗은 매혹의 뮤즈들을 탐구한다.

이가림이 꼽은 대표적 프랑스 작가는 낭만주의의 거장들인 라마르틴 네르발 뮈세에서 시작해서 상징주의의 대명사인 보들레르 베를렌을 거쳐, 새로운 에스프리의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를 각각 대표하는 아폴리네르 엘뤼아르 같은 일곱 문호에 이른다.

그들을 흔들고 지나갔던 사랑의 여인들은 피부색을 뛰어넘는다.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시대의 전형적인 미인, 아름다움의 극치로 이상화된 ‘흰 비너스’들만이 불멸의 여인상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가림이 대표적으로 꼽은 ‘검은 비너스’는 보들레르(1821~1867)의 여인이었던 잔 뒤발(식민지 태생의 흑백혼혈녀). 보들레르 자신이 ‘검은 비너스’라고 불렀던 이 여인은 “위험한 향기의 꽃”이다. 엘뤼아르(1895~1952)에게는 ‘오렌지처럼 푸른 대지’에 비유될 정도로 “신선하고 투명한 육체를 지닌” 갈라(러시아 여성) 같은 초현실주의적 꿈의 화신도 있었다.


▲ 보들레르

이가림은 이 여인들이 시인의 영혼에 어떻게 다가와, 어떻게 충돌했으며, 그 결과는 어떤 문학적 형상화로 남겨졌는지를 생생한 현장담을 통해 추적한다. 수년 동안 프랑스에 살았던 이가림은 “그들의 고향, 생가, 연애 장소, 무덤 등을 찾아다녔다”면서 “불멸의 뮤즈로서 살아 숨쉬는 현존성과 체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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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18~30
  배신자의 두 모습
 

하루 24시간 안에 낮과 밤이 있듯이, 인간의 내면에 전혀 다른 두 개의 얼굴이 있습니다. 바로 ‘충성과 배신’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 직장, 사회생활에서 항상 충성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배신이라는 딱지가 붙어 다닙니다.

 

배신자의 두 모습

배신하는 사람에게서 두 가지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배신행위를 끝까지 위장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배신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의지를 갖고 스스로 배신합니다. 배신하는 행위에 대한 집념은 아무도 꺾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의지를 갖고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유형의 첫 사람이 인류를 죄악으로 내몰았던 아담과 이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열두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다락방에 모여 최후의 만찬을 가졌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이 자리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인해 십자가를 지게 되심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가룟 유다에게 배신의 길을 가지 않도록 배려하십니다.

마지막 만찬을 가지실 때 예수님께서 중요한 두 사람을 좌우에 앉히십니다. 곧 가룟 유다와 요한입니다. 가룟 유다를 옆에 앉히신 이유는 그의 배신을 아시고 마음을 돌이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도 가룟 유다는 아닌 척합니다. “내 떡을 먹는 자”라고 지적하셔도 ‘내니이까’라고 되묻는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에게서 예수님을 배신하려는 의지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8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가룟 유다가 의지를 갖고 예수님을 배신하기로 결정한 점입니다. 배신의 궁극적인 이유는 예수님을 팔아서 십자가에 넘기는 것입니다.
불신앙의 배후에 의지적 자기 결정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시편 41편 9절을 인용하셔서 구약의 예언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41편은 다윗이 기록한 것으로 악한 자에게 배신당하고 느낀 고통을 기록한 시가입니다. 다윗은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나에게 신세를 지고 나의 녹을 먹던 사람들이 배신합니다.

실제로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 배신당하고 왕위에서 쫓겨납니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빼앗을 때 음모를 꾸미고 도와준 사람이 바로 아히도벨입니다. 그는 다윗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참모였습니다. 그가 배후에서 압살롬을 조종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왕위를 빼앗은 장본인입니다. 사무엘하 17장 23절에 아히도벨의 운명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압살롬에게 버림을 받은 후 고향으로 돌아와 자결합니다.
이와 같이 가룟 유다도 시편 41편 9절 말씀을 인용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함께 일한다고 나의 편이 아니며, 나에게 신세를 입고 녹을 먹었다고 영원한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날 그들은 배신의 칼을 빼들고 죽이며 모든 재산을 빼앗아 갈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기회

예수님께서 3년 동안 가룟 유다를 데리고 다니시며 많은 것을 가르치시는 가운데 그 마음을 돌이키시려 여러 번 기회를 주셨습니다. 24시간 후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데 최후의 만찬을 갖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아 회개의 기회를 거부합니다. 철저하게 위장한 배신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19절 말씀을 봅니다.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께서 일이 이뤄지기 전에 미리 말씀해 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의 배신을 막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스스로 선택한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의 배신행위를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아담이 스스로 선택한 일을 행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가룟 유다는 배신의 칼을 빼들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완력으로 얼마든지 유다의 행위를 제압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물리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완력으로 무릎을 꿇게 할 수는 있지만, 회개를 시킬 수는 없습니다. 겁을 줘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것을 진정한 회개라 할 수 없습니다. 회개는 스스로 가던 길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끝까지 가룟 유다가 회개하지 않았을 때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무겁고 고독하셨을까요? 마치 자식이 회개하지 않았을 때 부모의 심정과 같았을 것입니다. 비록 자식일지라도 방탕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부모인들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런 성향이 아담에게, 가룟 유다에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앞으로 될 일을 미리 말씀하신 이유는 가룟 유다의 배신행위가 제자들의 공동체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스승을 팔아넘겨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들고, 제자들의 공동체가 풍비박산 나게 되는 일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또 나중에 제자들은 이런 반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엄청난 일을 모르고 계셨단 말인가?’ 19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 하셨지만, 가룟 유다는 자신의 길로 갔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믿음에 흔들림이 없도록 미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용서하시길 원하셔서 마지막 순간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신 사실을 언젠가 제자들이 알게 되고 주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인류의 메시아이시며 구원자이심을 믿게 하시려고 미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20절 말씀을 읽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끝까지 품으시려 하신 이유는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구원의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진리를 바꾸지 못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고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이나 장차 믿고 따를 사람들에 의해 구원의 진리는 계속 선포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배신해도, 천지가 뒤바뀌어도, 만인이 넘어져도 결코 변할 수 없는 진리 중에 하나는 바로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잊혀진 구원의 메시지

예언을 마치신 예수님의 마음은 심히 민망하셨습니다. 여기서 ‘민망하다’라는 말은 여러 감정이 뒤섞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힘 있는 자가 고독할 때 힘을 사용하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그러나 있는 힘을 사용하지 않을 때 고독해집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고독입니다.
돈도 많고 권력도 막강한 사람은 간단하게 상대방을 없앨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 하지 않는 게 겸손입니다. 가진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상대방을 살릴 수 있는데, 이를 외면하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여기에 가진 자의 고독이 있고 힘 있는 자의 아픔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가 문 밖으로 나갈 때까지 강구하십니다. 생각을 바꾸고 회개하여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저는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사건’을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음직하고 보암직해서 따 먹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 사건에는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의 범죄 현장을 보시고 얼마든지 막으실 수 있을 텐데 그냥 두셨습니다. 이는 가룟 유다의 배신과 연관이 됩니다. 2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1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지만, 실은 가룟 유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심적으로 너무 힘드셨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마지막 성만찬을 갖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사랑하는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배신할 것에 대해 매우 힘들어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에 대해 괴로워하십니다. 타락한 자식이 가출해 돌아오지 않을 때 아버지의 심정과 같은 것입니다. 자식이 돌아가지 않겠다는데, 아버지는 어찌하지 못하고 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독한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가 재산을 상속할 때 옆집의 모범생 아들이 아니라 불효자일지언정 자기 자식에게 물려줍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아들이 조금만 잘해 준다면 아버지는 매우 좋아하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몸만 살짝 돌려도 그분께서 너무 좋아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복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원해야 합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가룟 유다는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지를 꺾지 않았고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 더욱 위장으로 일관했습니다. 22, 23절 말씀을 봅니다.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당시 유대인들은 식사를 할 때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음식을 먹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만찬에서 가룟 유다는 옆으로 누워 예수님의 품에 안긴 것입니다. 그때 유다가 ‘주님, 사실 제가 이런 마음을 먹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면 문제는 간단해집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께서 찾으셨을 때 즉시 ‘하나님, 제가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와 자존심은 항상 다른 방향으로 돌아갑니다.

 

선택의 순간

아직도 베드로는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품에 안겨 ‘내니이까’라고 묻는 가룟 유다 한 사람뿐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24, 25절 말씀을 봅니다.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마지막 선택의 기회가 지나가고 나면 모든 것이 끝이 납니다. 종말과 심판이 오기 전에 다가온 구원의 기회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26~30절 말씀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영적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배신은 타락의 신호입니다. 배신은 불순종 때문에 오는 것이지만, 순종해야 함을 알면서도 하지 않을 때 배신하게 되고 마귀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27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찍어다 주시는 떡 한 조각을 가룟 유다가 받자마자 사탄이 그의 속으로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먼저 가룟 유다 속으로 들어갔다고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은 아담과 이브를 유혹할 수 있어도 그들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 즉시 사탄이 들어갔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지적 선택입니다.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온다면 사탄은 그 자리에서 미끄러져 나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고 의지적으로 불순종한다면, 곧 사탄이 들어오게 됩니다.
둘째, 구원 받기를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믿을까 말까, 갈까 말까’로 갈등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의지를 갖고 예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면 축복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주님을 거부하면 사탄의 세력이 봇물처럼 밀려와 지배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모든 이론, 이성, 지식, 경험을 뛰어넘게 됩니다. 그런 것으로 예수님을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는 이유도 갖고 있지만, 믿지 않는 이유도 믿는 만큼 댈 수 있습니다. 샤르트르, 지드, 러셀 등 실존주의 지성인들은 그냥 신을 믿게 된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충분한 과정을 거친 후에 그 존재를 믿게 된 것입니다.
이성의 끝이 신앙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논리의 끝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우리는 의지적으로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순종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지막으로 30절 말씀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아주 상징성이 많은 표현입니다. 저는 성도님들께 한 가지를 권면합니다. 하루 일과에서 밤이 되면 편안한 상태에서 속히 잠자리에 드십시오. 모든 나쁜 짓들은 밤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밤에 자도록 하셨습니다. 밤늦게 자는 사람은 정신병,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습니다. 밤에 할 일은 잠을 자며 휴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떡 조각을 가지고 나갔을 때 밤이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2~14). 이 말씀으로 어거스틴은 탕자의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우리는 밤의 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벽의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의지를 주님 앞에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배신의 벽 앞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의지를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돌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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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4-17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개인적으로, 이 전에 가룟 유다에 대해 이 만큼 탁월한 분석을 한 설교는 들어보지 못 했다. 듣고나서 언젠가 가룟 유다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영화<패션 오브 지저스 크라이스트>를 하고 있다. 내 후배는 그 영화 속의 유다를 정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난 안타깝게도 아직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 거기서 유다가 어떻게 그려졌을지 정말 궁금하다.
 

"자신의 영적 힘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습니까?"

"많지"

"한 가지만 말씀해 주십시오."

"단 하루 동안에 얼마나 자주 마음이 어지럽혀지는가를 알아내어라."

                                                                                    -안소니 드 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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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우리가 하는 말은

                    역겨운 냄새가 아닌

                   향기로운 말로

                   향기로운 여운을 남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말들이

                   이웃의 가슴에 꽂히는

                   기쁨의 꽃이 되고, 평화의 노래가 되어

                   세상이 조금씩 더 밝아지게 하소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리 없는

                   험담과 헛된 소문을 실어나르지 않는

                   깨끗한 마음으로

                   깨끗한 말을 하게 하소서

 

                    나보다 먼저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사랑의 마음으로

                    사랑의 말을 하게 하시고

                    남의 나쁜 점 보다는

                    좋은 점을 먼저 보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긍정적인 말을 하게하소서

 

                   매일 정성껏 물을 주어

                   한포기의 난초를 가꾸듯

                   침묵과 기도의 샘에서 길어올린

                   지혜의 맑은 물로

                   우리의 말씨를 가다듬게 하소서

                   겸손의 그윽한 향기 그 안에 스며들게 하소서

                                        

                                                           -이해인, <꽃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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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흔 2004-04-16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지혜의 맑은 물,로 나의 말씨를 가다듬을 수 있다면 ...

stella.K 2004-04-16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하루에 단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이란 생각해 봤어요.
나의 말은 얼마나 오염되어있는지? 내가 얼마나 말을 조심하고 있는지 반성하고 있었답니다.
참, 언젠가 여흔님 리뷰 읽었어요. 이 책 읽을려고 샀는데 마침 님이 전에 쓰셨더라구요. 읽고 반가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