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커피를 마신다. 그자체는 연극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커피에 독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것은 연극이 될 수 있다."

                                                                                 -뒤렌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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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과 원더우먼에 이은 최강 커플!

6백만불의 사나이(스티브 오스틴)와 소모즈(린제이 와그너)입니다.

(6백만물의 사나이 더빙은 양지운이 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후에 양지운의 얼굴을 보고는 완전 깼다는......-.-;)  

어깨까지 내리 덮는 카라(?)에 앞단추 풀어 헤친 셔츠, 그리고 왕잠자리 썬그라스, 그리고 나팔 바지 펄럭이며 날아 댕기던 6백만불의 사나이(항상 한 쪽 눈을 슬며시 찡그리고 있었는데....아 멋졌죠~ ^^)야 원래 완벽한 인간이었고, 전 소머즈를 더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소머즈 역의 린지 와그너는 정말 너무도 예뻤지요~) 

소머즈는 원래 6백만불의 사나이의 약혼자로 곧 결혼할 사이였지만, 스카이 다이빙 중 불의의 사고로 죽었었죠.

그러다 소머즈는 미국방성의 비밀 작전 계획 하에  6백만불의 사나이처럼 힘과 스피드를 지닌 바이오인간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소머즈의 오프닝 장면 기억나십니까?

소머즈가 바이오우먼으로 거듭나게 되는 수술 장면과 수술 후에 , 인간의 신체적 능력을 뛰어 넘는 갖가지 능력들을 보여 주었죠.

예를 들면 물건들을 한 손으로 으스러뜨린다거나 러닝 머신 위에서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리 뛰는 장면 등을 보여 주었었죠. ^^   

 특히 소머즈는  6백만불의 사나이보다 뛰어난 청각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뚜두두두두~'하는 효과음과 함께 소머즈의 귀가 클로즈업 되면서리 나쁜 놈들의 밀담을 도청하는 장면은 외화 소머즈의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이었습니다.

또 하나 쏘머즈가 나쁜 놈들의 낌새를 느끼고 달려가는 장면과 바닥에서 높은 담을 '훌쩍' 뛰어 넘는 장면 등은 매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장면이었는데, 항상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되었던 게 생각납니다.~ ^^

언제 이 영화들 다시 안 해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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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2 0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4-03-12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영광입니다. 저같은 사람이 감히...근데 차력당이 뭐죠? 쏠키님 서재 들리면 알 수 있겠죠. 곧 들리겠습니다.

stella.K 2004-03-20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6백만불의 사나이를 보았다. KBS2의 <나노인간 제이크>에서 워낙에 말미에 봤기 때문에 그 유명한 초능력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를 다시 본 순간,"으흑~!"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 늙어 있었던 것이다. 정말 파파 할아버지.
하기야 그 영화가 인기를 끌었던 때가 70년 대 후반 무렵쯤이니까 벌써 20년도 더 넘지 않았는가. 그 사람도 그렇게 말하겠지. "나의 팬이 아줌마가 다 됐군."
6백만불의 사나이가 저렇게 늙었으니 소머즈는 또 어떨까? 저 국장 아저씨는...아, 옛날이여!
그때 6백만불의 사나이 흉내 낸다고 높은 절벽에서 뛰어내린 아이도 있었다지 아마.

waho 2004-05-01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억의 영화군요...소머즈 너무 이뻐요
 
 전출처 : 카를 > 에라스무스의 생애

에라스무스로서 대표된 북방 휴머니즘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근대적 방법에 의한 인쇄술이 보급됨에 따라서 보다 대중화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종교개혁의 에라스무스의 위치는 루터의 우월한 지위에 압도되어 크게 주목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방의 휴머니즘의 양상이 특히 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종교개혁을 지향하여 전개된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에라스무스의 역사적 역할은 결코 가볍게 평가될 수 없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바로 에라스무스의 사고와 저술의 기반을 이루었으며 본질적으로 중세사회가 가진 모든 특징에 대한 반발이었다. 따라서 에라스무스는 모든 성서 휴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권위적인 카톨릭교회에 대하여 도전함으로써 그의 개혁사상을 펴 나갔던 것이다. 그는 교회의 부패한 실천과 타성화된 형식주의를 개혁할 것을 역설했을 뿐 아니라 사회의 도덕 및 인간성 일반에 관한 검토와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비록 방법에서 루터와 같이 직접적인 교황에 대한 도전은 아니었지만 그도 역시 일생을 부패한 신앙의 일소에 바쳤다. 찬란한 명예가 주어진 종교혁명가는 아니었으나 죽을 때까지 학자였던 에라스무스의 중도적인 개혁사상을 살펴봄으로서 당시의 유럽사상의 흐름과 대비하여 그의 사상을 알아보고자 한다.

본 론

1.청년기의 에라스무스

에라스무스는 1466년 10월 27일에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시에서 성직자의 사생아로서 탄생하였다. 그는 당시의 국제어였던 라틴어로 쓴 유명한 「광우신 예찬」을 비롯하여 그 밖의 많은 저작과 헤아릴 수 없는 서한을 남기고 승리의 장년시대와 고독한 노년시대를 거쳤고 결국엔 루터의 위광과 투지의 그늘에 가려서 1536년 7월 12일 스위스 바젤에서 휴머니스트로서의 일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1495년 가을 에라스무스는 그가 생활하던 수도원을 벗어났다. 몽테규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얻기 위하여 수도원 당국의 허가아래 파리에 갔었다. 불쾌한 인상과 회상으로 찬 이때의 생활은 그래도 위대한 사상가로서의 발돋움을 위한 자유였다.

에라스무스의 인품에는 아주 독특한 점이 있었다. 그는 본래 체질상 투쟁형이 아니었다. 그는 본능적인 자기방어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방안의 물건들에 대해 신경질적인 근심과 불평을 하였고 그의 허약한 신체는 생리와 위생에 있어 그를 날카롭게 했을 뿐 아니라 정신적인 결벽성에까지 영향을 준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물질적으로나 도덕적 의미의 순수성을 스스로에게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언제 어디서나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순수성과 청결은 그 자신의 섬세한 감각과 허약한 신체와 함께 비공격적인 비판 형식인 풍자와 비유를 선택하게 하였다고 생각된다. 부정과 불의, 미신을 향해서 격렬한 비난을 퍼붓게 될 때에 그는 먼저 재빨리 체질적으로 이것을 느꼈으며 날카로운 풍자와 완곡한 조롱을 함으로써 자신의 공격을 세련시켰다.

그러므로 중세사회와 교회에 대한 그의 공격은 풍자가 갖는 보호색 때문에 같은 수준의 지성인들 이외에는 발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우둔한 고위 성직자들을 때때로 즐겁게 까지 하였다. 이러한 풍자는 당시 휴머니스트들의 공통된 무기였다. 영국의 토머스 모어(Thomas More)는 히슬로데이를 등장시켜 그가 이상국으로 생각하는 유토피아를 묘사하였다. 독일의 스봐비아의 휴머니스트인 브란트는 성직자들을 정신적 바보로 비판하였다. 휴머니스트적인 풍자는 에라스무스의 탁월한 문체, 교묘한 표현, 풍부한 고전지식 등으로 윤색되어 있었다. 에라스무스의 거의 모든 저작에서 이런 풍자성이 깔려 있으므로 적당히 여과된 후에야 진지하게 고찰 될 수 있는 복잡한 것이 되고 말았다. 휴머니스트들의 표현방식은 그들이 처해 있는 시대의 특성 때문에 거의 필연적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교회의 권위에 반항하여할 때 풍자는 비판과 공격을 합리화하면서도 동시에 박해와 규탄의 안전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기방위는 양자택일의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간도를 마련해 놓는 성곽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에라스무스는 말하기를 현명한 사람들은 가끔 사물을 얻는 것보다 차라리 잃어버리기를 택한다. 그것은 그들을 그렇게 함으로써 덜 희생이 된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적극적 행동보다도 순수객관으로서의 입장을 암시하고 있다. 에라스무스는 22세때에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원에 입적하였다. 한 때는 세속에 대한 멸시란 글을 쓰기도 하였으며 수도원에서의 은둔생활에 만족하였으나 그의 자유정신은 마침내 그로 하여금 이탈리아 여행을 동경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불행하고 어두운 청춘을 가진 에라스무스가 식량을 위하여 아부하지 않으면 안 될 때 그의 정신적 바탕은 왜곡되고 그 날카로운 지성은 풍자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풍자적인 저술방식이 전적으로 자유의지의 정진의 결과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확신하고 그 자신의 자유를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겼다. 그는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서는 이탈리아에 정착할 수 있었고 또는 영국에 안주할 법도 하였기 때문이다.

2.휴머니스트로서의 현실비판

에라스무스의 개혁사상은 그의 모든 저작을 통하여 현실의 종교문제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종교개혁을 위한 방법으로서 그는 결코 혁명적 수반인 폭력과 파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화와 재건을 위한 온건한 수단을 제시하였다. 그는 부패한 교회를 고치는데 회초리가 필요하지만 권위를 파괴함이 없이 종교를 순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택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중 일반의 신앙에의 비판은 일반적으로 중세 사람들의 신앙은 거의 미신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들은 파괴에 대한 속죄와 게으른 의무에 대한 용서를 바라는 마음에서 성모나 성자에게 기도드리는 것이 일반신앙의 주된 것이었다. 더욱이 이러한 대중의 변질된 신앙에 대하여 교회측은 극히 타성적인 관례로써 대하였다. 예를 들면 성서의 최중요부분인 복음서나 사주서간은 교회 미사 때 독통되는 정도로밖에 일반 대중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았고 그것도 고의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도록 음조를 붙였다. 성서의 필본은 드물었을 뿐 아니라 그것조차도 수도원 도서실 안에 갇혀 있는 수가 많았으므로 다만 직업적인 신학자들에게 공재될 실정이었다.

중세의 일반대중의 크리스트교 신앙은 기적 및 성모를 비롯한 특별한 성서에 대한 미신적인 사구로 되어 버리고 말았다. 에라스무스는 이러한 일반적인 비종교적 풍조에 대하여 진정한 크리스트교도는 세례를 받았다거나 교회에 가는 사람이라기 보다도 마음속에 깊이 내적으로 그리스도를 느끼며 경건한 행위로서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하였다. 에라스무스는 개혁 내지 보다 위험한 어떤 변화를 바랬으며 이것은 영국에서 토머스 모어가 희망한 것과 일치하였다. 그는 신약성서 번역이 준 영향은 단 하나의 촛불이 아주 넓은 세계를 비춘 것처럼 큰 것이었다. 신학자들의 잘못된 성서 해석과 형식화된 논리를 한층 공격적으로 비판한 것은 에라스무스의 신약 역본의 주석에서였다. 그에 의하면 당시의 신학자들은 마음대로 밀가루 반죽 이기듯이 성서를 뜯어 고치고 거기서 나온 그들의 결론만이 유일불가침의 것임을 인정하고 말솜시거나 언변사용에 까지 신경을 쓰고 섬세한 주의와 천착을 가하였으며 심지어 냄비로써 끓인다 와 냄비 안에서 끓인다. 의 두 가지 어법이 동일한 동일한 뜻을 갖는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이단을 몰릴 정도라는 것이다.

3. 저작활동과 작품사상

에라스무스는 고전연구에 몰두하여 훗날의 그의 저술을 명쾌하고 우아하게 할 라틴어에 정통한 공부를 하였다. 33세부터 저술을 위한 준비를 마치면서 이후 계속하여 자신의 휴머니즘을 표현하는 저술을 발표하였다. 1503년 처음으로 인쇄된 「크리스트교 군인의 경감」Enchiridon Militis Christiani에 뒤이어 세 번째 영국방문시의 큰 수확인 「우신 예찬」Encomium Moriae,1511 은 사회의 퇴폐와 수도성직자의 부패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것으로서 대단히 유고한 문체와 간결한 표현으로 되어 있다.

크리스트교 세계에의 커다란 도전인 우신예찬에 뒤이어 그의 성서 휴머니즘의 원칙에 입각하여 그리스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신약성서를 1516년에 많은 부가설명과 주역을 달아서 직접 번역한 최초의 것이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그리고 또한 그것이 중세를 통하여 확고부동했던 권위적인 종래의 성서판의 부정확성을 폭로하였다는 점에 더욱 중요한 의의가 있다. 따라서 그것이 출판되었을 때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후로 성서의 원전비판의 시초를 이루어 놓았다. 신학자로서의 에라스무스는 결코 카톨릭교회나 교황의 궁극적인 권위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휴머니스트의 입장에서 당시의 형식에 지나치게 구애를 받는 수도성직자들과 무모한 사변에 몰두하는 신학자들을 비판하여 그릇 해석된 성서의 권위를 바로 세우려고 하였다. 에라스무스는 각별히 크리스트교적 휴머니즘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크리스트교를 중세교회의 독단과 형식주의에서 해방하여 소박하고 순수한 원시크리스트교로 환원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나아가서는 그것으로서 일상행활을 지도할 윤리적, 도덕적인 기준이 될 것을 희망하였다.

그는 성서의 중세이래의 권위인 종래 성서의 오역을 깨닫고 신약성서의 원문 성서가 일부 지식인과 성직자에게만 애독되고 독점될 것이 아니라 널리 일반대중에게도 읽혀져야 함을 강조 하였다. 이러한 단순하고 소박한 크리스트교에 대한 그의 의도는 전혀 이해되지 않고 종래 성서를 절대시하고 그리스어에 무지하였던 완고한 파리의 신학자들은 그의 신약성서의 번역 출판에 일제히 비난을 가하였다.

4. 휴머니스트로서의 사상

찬반의 양방향의 결정을 회피하고 광신을 싫어한 에라스무스에게는 다만 하나의 확실한 신념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그의 휴머니스트적인 훈련과 학문을 구사하여 성서의 진실한 의미를 파악하고 복음주의에 입각하여 원초적 크리스트교 세계를 찾고자 하는 신념이었다. 이러한 신념 때문에 전유럽적인 분쟁속에서 루터와 카톨릭교회의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초연하게 자기 입장을 지켰다.

후년 루터가 에라스무스를 진실한 크리스트교인이 아니라고 비난하고 동시에 카톨릭교회측에서는 루터의 공모자로 의심했을 때 그는 결연히 그의 성서에 대한 신념을 표명하였다. 그는 루터의 성공이 가장 겸손한 사람까지도 망쳐 놓을 것이다라고 비판하고 이단자를 공격할 때의 성제롬(St. Jerome)처럼 그들의 비난을 들어도 크리스트교 신앙을 위하여 자기 희생을 할 것이라고 확연히 선언하였다. 16세기 초 유럽의 종교계의 모순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고 장차 커다란 동란 속으로 몰고 갈 사태에 이르렀다. 반란의 기운이 더 돌았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결코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노선을 가야하고 또 어느 정도로 배후 지지자를 찾을 수 있다는 확실성을 가지고 안전하게 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남에 대한 공격과 자신이 받는 공격을 어느 쪽이든 다 같이 싫어하고 용의주도하게 중용의 길을 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항상 펜을 사용하여 유혈을 보지 않게 하고 아무도 공격하지 않으며 설사 공격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아무도 노엽게 만들지 않도록 희망하였는 데도 불구하고 그의 적수들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狂遇의 확인은 휴머니스트 공통의 비행동성을 설명한다. 중세는 몽매의 시대요 광우에 찬 시대였다. 에라스무스는 이러한 광우를 철저히 인식하여 계몽하고 인도하여야만 하였다. 권위에 대한 맹종과 형식주의에 의한 광신 이것은 제거되어야 하였다. 휴머니스트들은 지성을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인쇄술의 보급에 힘입어 이러한 광우의 시대는 광명 속으로 이끌려 나가게 되었으며 대중의 비판력은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어에 의하여 원초적인 크리스트교 세계를 밝히고 각언집성을 하여 고전고대의 현명한 말들을 값싸게 동시대인들에게 전하여 계발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시대차체 안에 잠재해 있는 정신적 동경의 심볼이었으며 본질을 개량하려는 각 시대가 모두 그 이상을 우선 한 인물에게 투향하듯이 그를 시대정신의 전위오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에라스무스의 세계는 편견도 없고 작당도 없다. 카톨릭교회와 투터의 양측의 진리를 다 같이 인정하고 어느 한 편에만 예속되려고 하지 않았다. 루터에 가담하지 않고 중세교회 정신에 알맞는 코스모폴리탄의 양상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그는 종교를 위한 소란, 혁명, 전쟁이란 것은 자기 모순에 빠지는 것으로 확신하였다. 이런 점이 루터파와의 분지점의 하나일 것이다. 정말로 에라스무스의 세계주의는 한편으로 크리스트교에 내재하는 진편성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에라스무스의 명석한 지성과 관조적인 휴머니즘은 그로 하여금 이른바 프로테스탄트의 개혁운동의 과중에 휩쓸리지 않게 하였다. 그의 본명은 어디까지나 휴머니즘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진편적인 조화의 세계에 폭풍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는 다만 현재교회의 도덕적 개혁을 지향하기를 주장하였으며 크리스트교 본래의 영적 순수성을 부활시키고자 할 따름이었다.

논의나 합의를 거쳐서 합리적인 해결을 바라는 경향은 종교와 사회의 개량에 관심을 가졌던 대부분의 휴머니스트들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유럽 전체를 종교적인 혼돈으로 몰고 들어갈 폭풍의 전야에 있어서도 고전세계의 이상이던 중용과 조화를 표방하면서 세계주의 이상을 굳건히 지키려는 순수한 학자의 모습이었다.


결 론

중세가 종말을 고하려던 14세기와 15세기는 무한한 중대성을 갖고 있었다. 왜냐면 전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모든 사상이 붕괴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대성은 중세적 요소와 근대적 요소와의 갈등에서 더욱 심각해지고 그 가운데서 새 시대의 출발점이 확정되어 갔다. 이와 같은 시기에 에라스무스가 루터에 앞서서 개혁의 준비를 이룩하여 놓았지만 그는 끝끝내 휴머니스트로서의 한계를 넘지 못하였다.

진실로 그는 음성이 될 수는 있었으나 선구자는 될 수 없었다. 에라스무스의 개혁사상은 결정을 요청받은 순간에는 언제나 중용을 택하며 조정을 고수하는 그런 것이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조류가 북방에 들어온 이래로 그것을 종교적 개혁운동으로 이끌어 나간 휴머니스트들이 궁극에 가서는 고전 고대가 지향한 조화와 중용, 평화와 타협의 범주 안에 머물러 있게 된 것은 혁명적 효과에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는 휴머니즘의 본질이며 동시에 자체의 비극의 요인이었다.

에라스무스 자신으로 말하면 그후 1세기 동안의 서구 전체의 분란으로 확대될 운동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사회의 도덕적 혁신과 시대의 요청에 따라 충실히 끝까지 그 자신의 개혁사상을 고수하여 민중의 자유정신에의 각성을 지도하였다. 휴머니즘의 본질은 결코 혁명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에라스무스는 교회개혁의 도화선에 불을 붙임으로서 개척자로서의 극히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고 하지만 그는 대단히 평화적이며 화해적인 성질 때문에 교회와의 공공연한 작별을 두려워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시기에 서제에 틀어 박혀 확정하게 어느 편에도 가담하기를 거절하였다.

에라스무스의 평판은 17세기말에 나아지기 시작했다. 학자들이 성서 원문에 좀더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가 종교적 헌신과 교회에 대한 복종을 공언한 것은 기회주의적인 방편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에라스무스에 대한 이런 견해는 정통과 비평가들의 혹평에 역설적으로 오랫동안 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비록 그가 폭풍이 불어 왔을 때 몸을 빼기는 하였으나 아무도 에라스무스만큼 대중들을 상대로 종교의 개혁을 위한 준비를 많이 해 놓은 사람은 없었다.

에라스무스는 네덜란드인으로서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로서 그리고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의 카톨릭교도로서 자신의 다양한 자기 정체성을 융합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여전히 카톨릭의 울타리 안에 머물고자 했고 유럽 문화의 자유주의 전통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출 처 : [인터넷] http://myhome.naver.com/sw016/f-0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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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게더 - [할인행사]
첸 카이거 감독, 탕 윤 외 출연 / (주)다우리 엔터테인먼트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음악을 소재로한 영화는 특별히 그 울림이 크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음악을 소재로한 대표적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데우스>나 <샤인>을 들을 수가 있을 것 같은데, 물론 그 영화는 동시에 어느 특정인의 전기(傳記)를 다뤘다는 점이 더 두드러진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전기는 아닌 것 같다. 그런데도 나 개인적으론 다른 어떤 영화보다 울림이 컷던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그 정서가 맞아 떨어진다. 어쩌면 중국 영환데도 우리나라 정서와 흡사한지. 정을 그리워 하면서 정을 배반하는 베이징이란 도시가 주는 인상이 흡사 서울을 보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붉은 것을 좋아하는 민족답게 화면엔 붉은 색채가 돋보인다.

또한 주인공의 아버지는 어떠한가? 자식하나 성공시켜 보겠다고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간이라도 빼줄 아버지의 이미지는 우리나라 여느 시골 출신의 아버지와 이미지가 그 맥락을 같이한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빼어난 바이올린 솜씨에 빠져들 것만 같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역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답게 그의 생각이나 행동도 독특하다.

그리고 베이징역에서 우연히 알게된 직업이 확실히 뭔지모를 사치스러운 여자와의 만남. 양념격이라고는 하지만 나름대로 재밌는 설정이다.

그리고 콩쿨의 비리도 잘도 다룬다. 하다못해 협연자와 은사와의 관계도 실소를 자아내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뭐니 뭐니해도 이 영화를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건 역시 부성애이다. 부성애 영화의 대표적 작품으론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 영화에 비할 건 못 되지만, 자식이 도시물을 먹고 아버지는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면, 주인공은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를 부끄러워 할 수도 있는데 여기선 마지막까지 그러지 않는다. 그것이 이 영화가 갖는 미덕이 아닌가 싶다. 

나는 개인적으로 중국의 감독을 그다지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첸 카이거 감독의 작품은 조금은 난해해 그의 작품을 별로 즐겨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충분히 애정이 갔고,  본인 스스로도 참 편안하게 만들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채로운 건 그가 직접 출연했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감독이 직접 출연한 영화는 왠지 무게가 더 실려 보인다. '첸 카이거 감독이 그렇게 생겼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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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비발~* > 우리나라 기상 관측의 역사

스텔라님의 질문에 문득 궁금해졌다... 해서 찾아보니,

우리의 선조들은 이미 조선시대 세종23년(1441년)에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발명하여 강우량을 정량적으로 측정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앞선 선진 기상기술을 실현하였다. 이는 이탈리아의 Benedetto Castelli가 제작한 우량계(1639년) 보다 무려 198년이나 앞선 것이다.

비가 내릴 때 그 양을 정확하게 측정하였다는 것은 과학사에서 여간 중요한 일이 아니다.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그것에서 법칙성을 찾는 것이 과학일진대 그 관찰에는 좀더 정확한 방법이 중요하다. 17세기 서양에서는 과학이 폭발하듯 크게 발달하기 시작했는데, 그 배경의 하나가 바로 그런 정확한 관찰방법의 확립이었다. 우량계뿐만 아니라 온도계, 기압계, 습도계 등이 이때 나왔는가 하면, 정확한 시계도 만들어져 여러 실험에서 시간을 재기 시작하였다. 이런 측정장치가 거의 다 17세기부터 서양에서 나왔지만, 우량계로서의 측우기만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측우기는 세계과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우리 역사의 쾌거이자 자랑인 것이다.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뒤돌아 본 지난 20세기 우리의 역사는 밝음과 어둠이 극명하게 교차한다. 그 전반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압제에 이어 6·25동란으로 말미암은 동족상잔 등 어둠의 연속이었고, 그 후반은 조국근대화의 뿌리가 내려 민족웅비의 바탕을 구축하는 등의 밝은 역사를 기록하였다.

그 한가운데서 우리의 기상기술은 1904년 부산 등 5개소에 임시관측소 설치를 계기로 기상관측을 시작함으로써 근대 기상업무의 뿌리를 내렸고, 점진적이지만 끊임없는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면서 최근에 이르러 자동기상관측망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한편, 기상용 슈퍼컴 등의 인프라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선진기술을 모방하며 토착화를 시도함으로써 기술현대화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고 한다. 그리고 Q&A에도 똑같은 걸 궁금해하는 질의자가 있었다.

제목 우리나라 기상 관측의 역사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등록자 이윤희 등록일 2003-03-03 14:38
질의내용 우리 나라에서 언제부터 기상관측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구체적으로 강수 기온 바람 일사량 습도를 언제부터 관측했으며 어떤 방법으로 관측했나요??




이윤희님의 질의에 대한 1번째 답변 입니다.
답변내용 우리나라 기상관측 역사에 대해 질의하여 주셨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나라의 근대기상관측은 1904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과거 조선시대에도 측우기 등을 사용하여 우량을 관측한 기록은 있으나 체계적인 기상관측의 시작으로 보긴 어렵고, 1904년 일본 중앙기상대의 임시관측소 형태로 강수량을 포함한 전체 기상요소에 대한 관측과 기록, 정기적인 자료집의 발간업무가 시작되었습니다.
관측지점은 5개소 목포, 부산, 인천, 원산, 용암포, 관측요소는 기압, 온도, 바람, 운량, 습도, 우량 등을 관측하였습니다.
일사계를 통한 일사량의 관측은 1969년 수원부터 관측한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과거기상요소의 관측은 장비 및 기술등의 낙후로 인해 전문성이 다소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기반을 토대로 현재 첨단장비 및 기술을 이용한 관측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답변부서 기후국   기후예측과 등록자 김진상
답변일 2003-03-04 09:52 첨부파일  
분야
(대분류/소분류)
관측 / 지상관측

이상! 정말 달게 잘 때 전화해서 깨워놓고 아주아주 옛날 주인 찾는 건 정말 싫다!!! 세상에 전화 바뀐 지가 언제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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