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인, "시중에서 뒹구는 이야기 좀 했죠"
1936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전북대 명예교수로 있는 서정인(徐廷仁)은 요즘 30년 가까이 살아온, 전주시 덕진동 호반촌에 있는 집 마당에서 낙엽을 태우고 있다. 18일 통화한 그는 “강의 안 하고 노는 것이 너무 좋다”면서 “그러나 정년하고 나니 더 바쁘다”고 말했다. “우선 전공(專攻)에 치여서 못 읽었던 책도 읽지요. 또 원래 집을 작게 지었더니 터가 넓어서 감나무, 태산목, 목련, 후박 같은 나무들의 가지를 잘라주고 태우는 일들이 참 많소.”
그는 “서(徐) 아무개 하면 어려운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 같지만 이번 소설에는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주변의 사소하고 비천하고 무식한 사람들의 이야기요. 다만 과거의 지식을 갖고 우리의 현실을 보는 것이지요. 주인공들이 동사무소도 가고 강변술집도 가는, 시중에서 뒹구는 이야기요. 사변적인 것은 없지만, 그 현실을 제대로 보는 게 철학이 아닌가 합니다.”
그는 1962년 ‘후송’이 사상계에 당선돼 등단했다. “뛰어난 구성력, 심리묘사, 그리고 실험정신 등을 평가받아온” 그가 그동안 펴낸 책은 ‘강’(1976), ‘달궁’(1987), ‘달궁 둘’(1988), ‘달궁 셋’(1990), ‘지리산 옆에서 살기’(산문집·1990), ‘베네치아에서 만난 사람’(1999), ‘용병대장’(2000), ‘말뚝’(2000) 등이 있고, 대산문학상, 이산문학상을 비롯해 7개의 상을 받았다.
이번 소설을 ‘자기증식형 연작소설’이라고 규정한 문학평론가 김윤식 교수는 “희랍 고전, 그리고 논어를 비롯한 동양고전이 지닌 인류 정신사의 고귀성으로 잡스러운 소설을 끌어올린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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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소설을 ‘달궁’ 시리즈의 세 장편(1987·1988·1990)들과, 저번 장편 ‘용병대장’(2000)을 아우르는 서정인의 대표작이라고 불러보는 이유는, 서정인의 작품을 경험한 독자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의 전모(全貌)를 맛볼 수 있는 요소들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번 책에는 요즘의 세태 비평이 전편을 흐른다. 저자는 비유나 비평이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 노드럽 프라이가 “비평의 본령은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바로 해석이다”라고 말했듯이 서정인은 박상륭 같은 내재율과, 움베르토 에코 같은 종횡무진을 풀어놓으면서 “정의(定義)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작은 틈바구니에”(GK 체스터턴) 독특한 비평을 아로새긴다. 그는 도덕사회, 정의사회, 공평사회를 부르짖는 당대의 깃발들을 희롱하면서 “없는 세상을 위해 지금 있는 세상을 버리랴, 나는 안 버린다”(160쪽)는 다짐을 반복한다.
누구의 아들놈은 몇 년이 넘도록 찾아오지도 않는다는 얘기, 누구의 모친은 개가를 했다는 얘기, 누구는 여자고등학교에 명사특강을 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는 얘기, 문 닫은 음식점에 들어가 밥상 차려내는 얘기들이 두서없이 흐른다. 심지어 나이 차이에 따른 호칭문제, 있는 사람들 별장 얘기, 벌초 얘기도 끼어든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애당초 언어나 문법과는 관계없고, 다만 정황(情況)이 있을 뿐이라는 큰 전제에 기대서 ‘인물’들은 횡설수설한다.
인류역사와 삼라만상에 대한 천의무봉이요 일필휘지 같지만 급기야 연륜이 지친 듯 말이 헛샌다. 서정인은 바로 그 지점, 말이 헛새는 곳에 말맛의 리듬을 살리고, 산문진경의 미학을 독자와 공유한다.
그 리듬을 따라 독자들이 귀와 혀를 풀어놓으면, 서정인은 신화 시절부터 비롯된 역사·철학·문학의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를 언어의 바다 위로 해학이라는 쪽배에 실어 띄운다. 그래야 독(毒)을 품은 말들이 공격성을 포기하고, 비평 또한 퇴로를 열면서 흔들거린다. 그때 “세상에는 둘 다 맞기도 하고, 둘 다 틀리기도 한 것이 많다”(117쪽)는, 고급한 상대주의요, 혼돈스러운 질서인 작가의 생각들이 자리를 잡는 것이다.
문장의 기운은 퍼졌지만 붓끝이 마르지는 않는다. 서정인은 그때가 말 흩뜨리기를 그만둘 때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십 년 웃돈 경험에서 얻은 문학적 악력인 셈이다. 술기운이 뱃속으로 퍼졌지만 아직 취하지는 않은 때처럼(55쪽).
"없는 세상을 위해 지금 있는 세상을 버리랴…"
모구실/ 서정인 소설/ 현대문학/ 418쪽
최인호식으로 말해서, 이상한 일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가슴에 와 닿는 문장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혀에 감기는 문장도 있었다. 등단 42년을 맞는 서정인의 열네 번째 책 ‘모구실’은 독자가 읽어갈수록 입 안에 든 혀가 자꾸 꿈틀거리고, 소설 문장을 소리내서 말하고 싶은 욕망이 간지럼을 탔다. 라디오 연속극으로 낭독해도 좋을 만큼 너무나 이야기스럽고 재미가 넘쳤다.
굳이 연작 형식을 띠면서도 ‘모구실’ ‘진료소‘ ‘수련원’ 같은 3글자 소제목을 따라 열네 토막으로 나뉜 이 작품은 각 토막이 또 울타리를 친 한 가지씩의 이야기 틀을 갖추고 있었다. 이 토막들이 지난 3년 동안 현대문학, 동서문학, 문학과사회, 21세기문학, 창비 같은 문예지에 단편들처럼 발표됐던 것이고, 이번에 저자가 다시 손질해서 장편으로 묶은 것이다.
등장인물은 딱 세 명이다. 쉰을 넘긴 천수건은 대학교수다. 어느날 그는 산간벽촌에 있는 마을 모구실을 찾아간다. 딸이 그곳 보건소의 소장으로 있기 때문이다. 딸은 아비와 소식을 끊고 잠적하다시피 들어와 있다. 그 마을에는 폐교가 하나 있는데 그곳을 지키고 있는 남자가 두번째 중요 인물인 서존만이다. 우연히 만나게 된 천수건과 서존만은 술잔을 기울이고, 이 마을에 허름한 점방집 아들인 조성달이 끼어든다. 그들은 어느새 ‘초면이 구면이고 구면이 초면이 되는’ 술친구다.
세 남자는 진료소, 수련원, 섬진강, 동사무소 같은 곳으로 아주 느릿느릿 장소를 옮겨가며 술판을 벌인다. 그들은 흡사 아라비안나이트의 셰에라자드처럼 이 세상살이에 얽혀 있는 온갖 이야기를 안주 삼으며, 그곳에 동서고금의 신화와 고대역사를 꿰뚫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다시 얹어 놓는다.
'모구실' 발췌모음
“공간과 공간이 만나면 움직임이 없고, 시간과 시간이 부딪치면 형체가 없다. 공간과 시간이 만나야 생명이 태동한다. 살아서 움직인다. 명사는 개념이고, 동사는 생명이다. 멈춤은 야만이고, 움직임은 문화다. 야만의 극치는 죽음이고, 문화의 꽃은 삶이다.”(190쪽)
“비극은 원래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멀면 관심이 없었다. 끈이 너무 질겼냐? 정진연단 연단정진, 정이 다하면 인연이 끊어지고, 인연이 끊어지면 정이 다하고…. 허, 그가 막걸리 한 병에 취했냐? 그는 발을 헛딛고 비틀거렸다.”(28쪽)
“바보상자(TV) 앞에 한 시간 앉아 있던 사람이 그것의 최면으로부터 깨어나자면 그만한 시간이 또 필요하다. …상자는 시청자들을 길들이고 시청자들은 상자를 길들인다. 시청자들은 그들이 만든 상자한테 길들여지고, 상자는 그것이 길들인 시청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 시청자들에 그 상자, 그 상자에 그 시청자들.”(1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