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책은 최근에 많이 번역되어 나왔지만 나는 이 책으로 첫 인연을 맺었다. 

늘 소설을 많이 읽기를 바라지만, 난 항상 에세이에 마음이 간다. 그러는 것을 보면 나도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그렇듯 에세이는 삶을 생각하게 만들고, 성찰하게 만드니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해 수시로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이 책은 그래서 읽을만 하다. 에세이를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새로운 시각에 눈을 뜨게 해 준 책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각 글마다 제목이 '...하다'식의 동사형으로 되어있다. 우리가 어느 때 한 번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있어서 의미를 부여해 본 일이 있는가? 바로 그것을 붙잡아 글을 썼고, 그 속 깊은 맛이 대단하다 싶다.

 게다가 또 한 번 놀라게 되는 건, 에세이집 치고는 그 두께가 만만치 않은데 이런 에세이집은 근래에 보지 못한 것 같다. 물론 난 이렇게 도톰한 책을 좋아해 이 책은 이래저래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었다.   

특이하게도, 저자는 한국에 잠깐 산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경계인으로써의 삶이 작가로써의 정체성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을 하게 만든 것 같다. 특히 난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모르게 일본인에 대해 편견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 이를테면 일본인들은 늘 침략자, 가해자란 의식 말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들도 전쟁의 피해자였고 그로인해 어려움을 겪고 살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저자의 진지한 글쓰기가 난 마음에 든다. 나중에라도 꼭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올해는 오빠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힘든 한 해였다. 아무래도 집안에 누가 아프면 건강서적을 안 볼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렇게도 건강했던 오빠가 갑자기 암에 걸리고 보니 새삼 이 암이란 녀석이 뭔지 알고 싶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전까지는 암은 걸릴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나 걸리는 거지 우리 가족에겐 해당도 안 되는(적어도 아직은) 거라고 치부해 버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래 전, 아버지를 암으로 잃고도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다는 게 왠지 나 자신 스스로에게 속은 것 같아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런 책들이 오빠를 간병하는데 그렇게 많은 도움이 됐던 것도 아니었다. 내가 읽었던 암에 대한 책들 거의 대부분은 병원 치료에 대해 회의적이었는데, 오빠는 알고도 또 모르고도 병원 치료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저 오빠가 그렇게 됐으니 나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다 싶어, 난 어떻게 대처해야할까에 참고가 될만 하다고 할까?

무엇보다 이 책이 마음에 드는 건, 저자가 나이가 적지 않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암도 인생에서 만나질 수 있는 한 과정이려니 하는 긍정적인 태도다. 젊은 의사가 암에 관해 글을 썼다면 처방 위주의 글을 썼을지도 모르지.

사실 오빠가 암이라고 했을 때 우리 집은 거의 초상집 분위기였는데, 이 책을 읽고 그때 우린 좀 오버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동양인들은 죽음에 대해 긍정적이지 못한데다가, 오빠의 나이가 죽기엔 아직 젊은 나이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책 표지가 아주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제목도 그렇고 암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가질 수 있게돼서 나름 좋게 읽었다.

더불어 <의사의 90%는 암을 오해하고 있다>도 좋았다고 생각하는데, 무엇보다 일본 의사들만 해도 그들도 의사임에도 무조건 병원 치료만을 권하지 않는 자세가 마음에 든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고 일부 몇몇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나라는 마치 병원 의사만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것처럼 비쳐질 때가 많아 씁쓸할 때가 있다.

 

바로 소개한 위의 책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나온지 좀 된 책이다. 내가 그다지 책을 계획적으로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이 책은 정말 우연치 않게 읽게된 책인데 상당히 좋다. 출판된 당시에는 나름 지명도가 있던 책으로 알고 있는데, 다른 책 읽느라 읽어 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책이다. 이렇게 생각지도 않게 읽고 감동을 먹으면 횡재한 느낌이든다.

하지만 내가 진짜 말하려 하는 것은 이제부터다.

어제였나? 뉴스에 서점 귀퉁이에도 진열되 보지도 못하고 바로 패기되는 책이 어마어마 하단다. 나올 때는 꽤 비싼 고가였어도 패기될 땐 한 권에 100원 받고 가루가 된단다. 그도 그럴 것이, 한 해 문을 닫는 동네 서점이 너무 많고, 상승세에 있던 인터넷 서점도 최근 판매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불황이면 제일 먼저 줄이는 것이 문화비일테고, 또 그만큼 영세 출판사는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이에 대해 곧 해결방안을 제시할 거라고 하긴 하는데, 과연 실효성이 있을 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볼 때 또 하나 문제점이 있다면, 서점이나 출판사들이 너무 신간 위주로만 마케팅을 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신간이 나왔을 때 반짝 긴장하고 팔지 않으면 언제 묻혀질지 알 수가 없다.

나만해도, 몇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신간에 구애받지 않고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새로 나온 책에 부쩍 관심이 많아졌고, 그것을 읽어주지 않으면 뭔가 뒤쳐지는 것만 같다. 그리고 예전에는 매체가 한정되어 있고, 꼭 발품 팔아 서점에 가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신간에 대한 생명력이 제법 길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같은 년도에 나왔다고 해도 몇 개월 차이도 없는데도 벌써 구간 취급을 받는다.

이것은 아무래도 인터넷의 영향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과연 앞으로도 스테디셀러가 가능할 수 있을지, 가능해도 얼마나 가능할 수 있을지 새삼 의문스러워졌다. 신간만 가지고는 출판사나 서점이나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각 인터넷 서점마다 잘 쓴 리뷰어들에게 시상하는 제도가 있지만, 거진 대부분이 보면 신간 위주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간혹 출판된지 좀 지난 책에도 당선의 영예를 주기도 하는데 그건 어쩌다 가물에 콩나듯 하는 것 같다. 신간도 물론 많이 알려져야겠지만, 그 때문에 잘 만든 책 한 권이 스테디셀러로 가지 못한다면 좀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출판된지 좀 오래 되었어도 한번씩 눈길을 주고, 무엇보다 자발적인 북클럽이 활성화 되어서 좋은 책이 꾸준히 사랑 받을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비근한 예로 외국에선 출판 당시는 별로 빛을 못 봤는데 북클럽에서 찾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그래서 늦게 빛을 보는 책들이 있는데, 그런 것처럼 이때야말로 '독자의 힘'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사실 불행했던 예술가의 삶을 읽는다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다. 언젠가 에밀졸라의 <작품>이란 책을 읽고 기분이 너무 우울해져 읽다가 덮어버린 적이 있다. 이 책도 우울한 것으로 따지자면 에밀졸라의 책 못지 않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 자체가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상당히 잘 쓴 책이다. 특히 작가의 문체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리만큼 매혹적이고, 깊이가 있다.

무엇보다 작가가 중견을 넘어 노장인데 필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들어서도 지치지 않는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는 것이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다. 나이 먹었다고 절필하는 작가들을 가끔 보곤 하는데, 물론 평생 잘 다닌 직장 은퇴도 하는데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왠지 작가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펜을 놓지 말아야 진정한 작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의 입장에서 세상에 쓰고 싶은 글이 얼마나 많은데 절필을 한단 말인가? 

 

올한 해, 영화 때문에 유명해진 소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영화를 소설로 만든 책엔 눈길도 안 주지만, 소설을 영화로 만든 책은 일단 관심을 갖고 보는 타입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는 아직 이 작품을 영화로는 보지 못했다. 

그런데 책을 읽어 본 나는, 일단 작가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관상에 관한 거의 모든 자료를 작품속에 잘도 녹여냈다. 작가에게 정말 관상을 볼 줄 아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했는데, 과연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작가는 관상가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것이 너무 만연해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없지 않았다. 물론 좋게 보자면 관상도 쉬운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도 되었지만. 읽고 있으면 정말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고, 사람을 그냥 지나치게 되질 않는 것 같다. 

 

얼마 전,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이 서거했다. 나는 또 짬짬히 그 나라 국민의 추모 장면을 뉴스를 통해 보곤했는데, 다소 놀라운 장면을 보았다. 그 나라 국민들은 그다지 슬퍼하는 기색없이 오히려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오빠 얘기를 해서 그렇긴 하지만,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을 보면 그게 꼭 슬퍼할 일인가에 대해 다소간의 의문을 갖곤 한다.

물론 두 번 맺어질 수 없는 인연을 죽음으로, 이제 다시는 살아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슬프다 못해 서늘하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축제로 만드는 나라가 있다는 게 자못 부럽기까지 하다.

이 책은 임종에 관한 책이다. 더 정확히는 살아 있는 사람이 임종을 맞이한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올해 역시도 적잖이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안녕을 고하고 떠나갔다. 내년엔 또 어떤 사람들이 우리 곁을 떠나갈까? 죽음을 점점 더 가까이서 느낀다. 축하 할 일에만 너무 좋아하지 말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위로가 되어줄 수 있었으면 한다.

여담이지만, 축하 받을 일에만 축하해 주는 사람은 오래가지 않는다. 슬플 때 말 한마디라도 따뜻히 남겨주는 사람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의 서재에 오빠의 부고를 알렸을 때, 네 분 정도의 서재인이 위로의 말을 남겨 주셨다. 그분들껜 아직도 감사한 마음이 남아 있다. 하지만 내가 한동안 서재 활동을 거의 안한 여파가 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도 종종 서재에 글을 남기긴 하겠지만, 역시 아쉬워 할 일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잊혀지면 잊혀지는대로 한 세상을 살아가는 게 인생이 아니던가?

그대 때문에 또 한 해를 살 수 있어서 고마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그래도 있다는 것에 감사와 위로를 삼아 본다.

한 해 사시느라 수고 많았다고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서재인들에게도 미리 인사를 남겨 본다. 남은 한 해 잘 마무리 하고, 부디 행복한 새해를 맞이하시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놀 2013-12-26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스스로 좋아하는 책 이야기만 쓰지만,
'새로 나온 책' 이야기가 아니면
그닥 눈길을 못 받는다고 느끼곤 해요.

그래도, 이렇게 쓰는 글을
누군가 언젠가 읽으면서
도서관 마실을 하며 챙겨 살피시는 분이 있으리라 믿고,
즐겁게 책 하나 마음에 담으면 될 노릇이라고 생각해요.

올해 마무리 즐거이 하시면서
새해에 또 새롭게 하루하루 누리셔요~

stella.K 2013-12-30 14:34   좋아요 0 | URL
올한 해 함께살기님 덕분에 무사히 잘 넘긴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저의 서재에 관심 가져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고마웠습니다.
함께살기님도 얼마남지 않은 한해 마무리 잘하시고,
또 힘차게 새해 맞으시기 바랍니다.
님의 서재도 더 풍성하고 좋은 일들 가득 넘쳐나길 빌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릴케의 침묵 - 불가능한 고백, 불면의 글쓰기
김운하 지음 / 한권의책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집어들었을 때 나는 공교롭게도 부제가 더 마음을 끌었다. 내가 릴케를 알면 얼마나 알고, 그에게 매료당했다면 얼마나 당했을까?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건 고작 장미를 좋아해 장미가시에 찔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었다는 것 밖에 더 있겠는가? 장미를 좋아해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 확실히 무엇인가를 좋아한다는 건 덫이란 생각이 들기는 한다. 

 

침묵의 의미를 깨닫는 건 또 얼마나 덧없고, 무모한 도전이란 말인가? 이 세대가 과연 침묵을 허용하는 시대란 말인가? 저자는 책 가운데 외로움과 침묵의 정의에 관해 쓰긴 했지만, 이것을 깨닫는 건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닌 성싶다. 

 

오히려 내가 꽂혔던 건 '불가능한 고백, 불면의 글쓰기'였다. 더 정확히는 '불면의 글쓰기'였다. 저자는 그것에 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불면하는 밤의 매혹은 그것이 가져다주는 고통만큼이나 치명적이다. 나는 그런 매혹의 순간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어쩌면 불가능한 기다림인지도 모른다. 침묵하는 밤이 털어놓는 고백 자체가 불가능한 고백인 탓이다. 그러므로 불가능한 고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그것이 바로 불면의 글쓰기다.(101p)      

 

저자가 말하는 불면의 글쓰기는, 확실히 열어보지 못할 판도라의 상자를 독자에게 불쑥 들이미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책은 뭔가 내밀한 고백을 담고 있는 것도 같고, 저자가 읽은 책, 더 정확히는 인문학에 경의를 표하는 것도 같다. 그리고 아직도 일천하기 짝이 없는 나의 지식은 그것을 따라가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그래도 그것과는 별개로 어느 순간 나의 글쓰기에 대한 고백을 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유혹일까? 

 

언제부터 였을까? 내가 글쓰기에 미쳤던 건. 발자크처럼 커피에 중독돼 가며 어느 순간 미치도록 쓴 건 아니었다. 누군가는 미쳐야 미친다고 했다. 작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또 얼마나 두렵고 주저하게 만드는 일이었을까? 그러던 중 교회에서 대본 쓰는 일에 대한 제의를 받았다. 그것도 하필 주일학교 교사하는 일이 너무 안 맞아 그만 둬야겠다고 생각하던 순간에 말이다. 그래서 주일학교 교사를 1년 더 연장하기로 했다.

 

대본 쓰는 일이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지만(난 늘 소설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나에겐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수락을 했던 것이다. 한 1년 동안은 신나게 그 일을 했던 것 같다. 나에게 이런 능력이 숨어 있었나? 나 자신에게 놀라면서 말이다.

 

물론 그 일이 마냥 신났던 것만은 아니다. 맨땅에 헤딩하듯, 한 주에 한 편의 연극 대본을 쓴다는 건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어떤 땐 너무 글이 안 써져 컴퓨터 모니터를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때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것도 살아 있음이라 생각하고 나는 매번 주어진 숙제를 성실하게 해 나갔다. 이렇게 말하면 모르는 사람은 내가 꽤 성실하고, 모범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착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못된다. 단지 곰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사람이 뭔가 한 가지 정도는 잘하는 것이 있다는데 나는 비교적 늦게 그걸 발견해낸 셈일 뿐이다. 

 

하지만 난 그때 잊고 있었던 것이 있다. 나는 대본 쓰는 사람이기 이전에 교사라는 것이다. 그 일을 성실히 했다고해서 나의 교사의 직무를 잘 수행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건 일종의 나를 새롭게 발견해 주는 일이었을 뿐, 교사는 지금 생각해도 확실히 어려운 일 같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 내가 했던 일은 교사의 직무를 바꿔치기 할만큼 대단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즉 이 일을 하느라 교사의 직무를 유기했던 것이 고스란히 내 책임으로 돌아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당시 내가 알았던 제자 녀석이 하나가 있었다. 난 그 녀석을 거의 2년 동안 지켜와 봤지만 이 녀석에 대한 뭔가의 믿음이 보이지 않았다. 이를테면, 제자와 선생이란 신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어느 때 보면 나에게 친근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는한데 선생에 대한 예의나 존경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이 녀석과 멀어지길 바랐지만, 녀석에겐 뭔가 거부할 수 없는 특유의 페로몬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녀석의 페로몬은 선생인 나 사이에 하극상을 낳았고, 또한 그것은 녀석으로 하여금 어떻게 세력을 규합하며,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알게해 준 개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녀석이 그 어린 나이에 그것을 알게 됐다면 그의 영혼에 미칠 영향이 어떨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덕분에 나와 녀석은 조직내에 적지않은 파장을 일으켰고, 결국 조직에서 파직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나로선 조직의 선택을 존중해야 하고, 따라야겠지만 이후 오래도록 과연 그렇게까지 했어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는 남았다. 

 

뭐 좀 할 수 있을 것만 같고, 뭐가 잡힐 것만 같았는데 하필 그때 거미줄에 걸려 넘어지는 형국이라니?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거기서 좌절하지 않고 훗날을 위해 더 공부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무엇보다 글 쓰는 내가 좋았던 것이다. 

 

공부하러 들어간 곳은 어느 창작학원이었는데 거긴 정말 별천지였다. 80년 대 어느 민주화 투사가 경영하는 곳이기도 했고, 역시 민주화 투사 중 한 분이 나의 선생이 되었다. 그때 새삼 깨달았던 건 나는 한때 글 쓰는 사람이길 원치 않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누구든 문학 소년이 아니고, 문학 소녀가 아닌 때가 없다고 하지만 나는 언제부터지 이 꿈을 나의 의식의 수면 저 밑으로 밀어넣어버렸다. 

 

초등학교 시절, 유난히 일찍 찾아 온 사춘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유독 부모님이 서로 싸우는 걸 못견뎌 했다. 엄마는 늘 약자처럼 보였고, 아버지는 늘 강자처럼 보였다. 그래서 언젠가 참다 못해 장문의 편지를 아버지께 드렸는데, 아버지는 뭐 때문이었는지 화를 내지 않고 나의 그런 용기를 칭찬해 주셨다. 덕분에 글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을 무의식으로나마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중학교를 들어가고 그해 늦가을이었던가? 교지에 실을 글을 모집한다고 해서, 나는 시인지 낙서인지도 모를 글을 당시 몰래 짝사랑하던 국어 선생님 손에 직접 쥐어 드렸다(생각해 보면 간접적으로나마 사랑의 연서를 쥐어 드린 건 아닌지?). 나는 당연히 내 글이 교지에 실릴 줄 알았다.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그런데 웬걸, 기대를 가지고 교지의 첫 페이지를 열었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내가 쓴 글은 한 자도 볼 수가 없었다.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럽던지. 선생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확실히 그때부터 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후 몰아 닥쳤던 민주화 운동은 그나마 있었던 나의 문학에 대한 관심을 사그러트리는데 영향을 줬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절의 문학은 온통 참여문학 일색이었으니까. 인간의 상상력을 말살하고, 참여문학만이 문학이라면 차라리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무슨 허무주읜지, 한 번 읽고마는 소설의 일회성을 생각해 볼 때 문학은 더 이상 나에겐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랬던 내가 문학으로 현실에 참여했던 작가를 대하고 보니 얼마나 소견이 좁았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교류는 나름 좋은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1년 후, 나는 내가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야 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존심 생각하고, 상처만 생각하면 다시 못 돌아 갈 곳이다. 이 책도 그것을 말하고 있다.

상처에 대항하는 방식은 실로 여러 가지다. 그중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하는 가장 탁월한 방식은 자기 자신을 끌어안는 것이다. 즉 자기에 대한 자부심을 되찾는 것이다. 상처는 쉽사리 콤플렉스가 되고 우울증과 신경과민, 세상과 피해의식을 낳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상처를 적극적인 에너지로 전환시켜야 한다. 수 많은 예술가와 사상가들은 내면에 대한 각인된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 끝에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192~193p)

 

그리고 난 그 일을 겪은 후 훨씬 더 안정적으로 그 일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 일을 하고 나서 나에겐 적지않은 변화도 생겼다. 유치하고, 시끄럽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드라마도 보고, 영화도 보는 것이다. 행복한 공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내가 넘어진 곳에서 다시 시작했다고 해서 당장에 영광이 찾아 오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제자 녀석의 하극상을 통해 녀석안에 꿈틀대고 있는 뭔가의 악마성을 본 것도 같았다. 하지만 훗날 나는 더 큰 것을 보기도 했다. 녀석의 악마성을 교묘히 이용하는 또 다른 더 큰 권력을 보기도 했으니까. 그렇다면 녀석은 그때를 어떻게 기억할까? 궁금하긴 하다.

 

나는 나대로 조직이 재편될 때 그 새로운 권력에 의해 축출을 당하기도 했다. 물론 외형적으로 볼 때 또 한 번의 좌절을 당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이전만큼은 아니었다. 그건 나만이 당한 일도 아니거니와, 원래 새로운 사람이 수장이 되면 이전에 있었던 사람은 필요에 의해 그 조직에 남아 있기도 하지만, 조직을 떠나기도 한다(자의든, 타의든). 그런 차원이었으니 속상해 할 것도 없다. 단지 그 새로운 수장이 이전과 다른 얼굴로, 없는 죄도 만들어 가며 더 이상 그 조직에 있지 못하도록 만드는 비인격적이고, 추잡한 행동에 분개할 뿐었다. 

 

이를테면, 글쟁이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글쓰기가 좋아 죽겠는데 어딘가 필요로 하는 곳에 속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나 있는 곳에서 내가 목격한 인간의 이면과 진실을 글로 남기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을 지칭함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어느 작가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아라크네의 후예들이라고도 했다.  

 

어쨌든 그 일도 몇십 년 전의 일이다. 그후 나는 그 보다 훨씬 좋은 곳에서 글을 썼지만, 나의 글 쓰기의 욕망은 어느 조직이나 장소가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을 따지는 것은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어디를 가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그들과의 경험과 인연이 나로하여금 글을 쓰도록 만든다. 그것은 항상 좋은 경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쁜 경험이 자극을 준다. 그도 그럴 것이 불만은 나의 힘이라고, 난 항상 인간의 부조리한 면을 보면 글을 쓰고 싶었으니까. 마치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것처럼 말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또 말한다.

글쓰기를 하건 다른 창조적인 일을 하건, 진정으로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최선을 다할 때 그리고 거기에서 성취감을 얻을 때 마음의 상처는 치유된다. 이것은 상처를 내면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외면화시킴으로써 극복하는 방법이다. .....사랑의 상처를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은 다른 사랑을 찾아 열정을 쏟는 것이다. 새로운 대상과 사랑을 주고 받음으로써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상처를 극복하는 대신 오히려 마음 속에서 상처를 극대화하는 경우가 많다. (193p)                                   

그런데 나는 그 일을 지금까지 한 번도 글로 쓰려고 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써야지 하면서 지금까지 쓰지 못했다. 게을러서일까? 거기에 이의를 달지 못한다. 하지만 뭔가 시간이라고 하는 필터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공교롭게도 저자는 위의 글에 앞서 자서전의 불가능함을 얘기했다. 그것은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의 예를 들었는데,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 당대의 유명 인사들의 행태를 고발하면서, 이 모두가 진실임을 거듭 천명했다고 한다. 나아가 자신의 말과 위배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거짓말쟁이며, 협잡꾼이라고 까지 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목졸라 죽이기까지 해야한다고 했다. 과연 무시무시 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의 말을 믿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요는 루소도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과연 가능하냐는 것을 묻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객관성을 들어 진실을 주장하려고 하지만 사실은 주관적인 사고와 감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서전의 불가능함을 말했다('불가능한 고백',177p~).

 

그런 것처럼 나의 이야기는 자서전이란 형태로 글 쓰기가 가능할 것도 같지만 나의 얘기를 믿어 줄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나 자신 조차도 정말 진실을 얘기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또 그때 일을 들쑤셔서 마음이 우울에 빠질지도 모르고, 명예훼손이라고 고발당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엄밀한 의미에서 확실히 '불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상처받을 가능성 속에서 모두 하나라고. 또 상처는 어떤 의미에서는 삶을 내면적으로 더 풍요롭게 해주는 열정의 에너지이기도 하다고. 신이 인간에게 망각이란 선물을 준 까닭은 인간이 얼마나 쉽사리 상처를 받고 그로 인해 치명적인 고통을 겪을 것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동시에 신은 인간에게 그 상처를 극복할 내적인 힘도 부여해주었다. '망각하는 능력'과 '노력하는 힘'은 마음의 상처를 지닌 인간이 신에게서 받은 두 가지 선물이다.(195p)    

  이것이 불가능한 고백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은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건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자신의 말에 책임지겠다는 것이거나, 시간과 망각의 필터링을 통해, 또는 거짓으로 진실을 말하는 좀 더 고도화된 방법을 통해 좀 더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다거나. 그렇다면 나도 이제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구는 글쓰기를 글 감옥이라고도 표현했지만, 그렇게 흘러온 나의 글쓰기 유전은 이제 나의 십자가요, 족쇄 같은 것이 되어버린 것 같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면 받아야 하지 않을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놀 2013-12-22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잖아 그 이야기 찬찬히 쓰실 날 있으리라 생각해요.
즐겁게 기다리셔요.

그나저나 한 주에 하나씩 연극 대본을 써야 했다면...
아이고야... @.@

stella.K 2013-12-23 11:08   좋아요 0 | URL
ㅎㅎ 짧은 연극이었어요. 그러니까 하지.
하긴, 그래도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아요.
그땐 무슨 기운이었는지 그렇게 안해도 되는 걸 스스로 닥달해서 했다니까요.
저는 그렇다쳐도 그당시 주일학교 아이들 선생 잘못 만나 고생 좀 했죠.
그래도 뭐 지네들 좋으니까 선생 쫓아 와 준 거지 지네들 싫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덕분에 연극영화과 간 아이들도 몇 있었어요.^^

페크pek0501 2013-12-24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실 찾기는 어려운 일 같아요. 어쩌면 죽을 때까지 진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단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나의 진실을 모를 때도 있는데 남의 진실은 어찌 알겠습니까.

망각과 노력이라는 선물... 특히 망각이란 선물이 없다면 사는 게 꽤 고통스러울 듯싶어요.
누구에게나 잊고 싶은 일이 있을 것이니까요. 죽은 사람을 못 잊어서 따라 죽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러고 보면 망각이 있다는 게 다행스럽죠.

책 제목을 보니 릴케의 말테의 수기, 가 생각나는군요. 열심히 읽었던 책이었죠. ^^

stella.K 2013-12-24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누구에겐 잊고 싶은 기억을 누군가는 말하고 싶어하죠.
묻어둬서 좋은 사람이 있고, 누구는 말하므로 치유가 되는 사람도 있겠죠?
말테의 수기를 읽으셨군요. 전 아직도 못 읽었는데...ㅠ
 

별점: ★★★

 

대자연의 풍광과 세월의 유장함을 담았다는 점에선 볼만한 영화인 것 같긴하다. 하지만 역시 동성애는 좀 부담스럽긴 하다. 지금이야 미국도 동성애에 관대한 편이지만 두 주인공이 청춘을 보냈던 7,80년 대 동성애가 받아들여졌을리 만무하다. 

동성애를 옹호했다기 보단 한 순간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해 평생 이해받지 못한 고독하고, 쓸쓸한 인간의 내면과 관계를 표현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뭐 대충 그런 생각을 하며 봤다.

 

별점; ★★☆

 

역시 강풀식 감상주의를 비껴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혹시나 했다 역시나로 끝나는 영화다.

특히 영화는 건달 진구를 통해 남자의 야성미를 한껏 뿜어내려고 했던 것 같은데, 폭력은 안 된다고 했다가 결국 폭력을 써야할 때 밥들 많이 묵었냐고 묻는 장면은 확실히 감상적이고, 오버고, 영화의 한계를 느끼게 만든다. 

영화는 마치 5. 18의 전라도 광주를 위로하는 듯도 해 보이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런 식의 감상주의가 오히려 또 한 번 광주의 상처를 건드리고, 어디에도 이해받지 못하는 고아 의식을 표현한 건 아닌지, 엔딩으로 갈수록 김이 빠지고 씁쓸함 느낌마저 든다.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지난 세기 우리는 절대로 그런 사람을 대통령에 세우지 말아야 했다. 아무리 그 시절엔 국민투표가 원천적으로 허락되지 않았던 시절이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도록 국가가 허락했을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이 나라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한 둘일까마는. 

 

나는 전두환이 테러를 그렇게 조직적으로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게 좀 믿기지 않는다. 5. 18을 두고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건가? 전두환은 이런 응징이라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원작이나 감독이 염원해서 만든 작품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뭐란 말인가? 영화에서 전두환은 결코 죽지 않는 무슨 불사조라도 되는 양 유유하기만 하다. 그래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뭔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비록 영화라도 그 시대를 위로 하려면 확실히 하던지, 안 그러면 아예 만들지 말던지 그랬어야 하는 건 아니었을까? 뭔가를 건드리다 마는 건 재채기가 나오려다 마는 답답함에 비유될 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 부언하자면, 영화에 나오는 임슬옹의 연기는 나름 볼만했다. 처음 영화에 출연한 것일텐데 경찰 복장이 의외로 잘 어울려서일까? 어쨌든 기대되는 연기를 했던 것 같다.          

    

별점:    ★★★☆

 

위의 영화가 전라도 사투리가 질펀하더니, 이 영화 역시 그렇다. 그러고 보니 왜 조폭이 등장하는 영화는 하나 같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것일까? 이제야 의문을 품어 본다. 이러다 건달 또는 조폭의 출생지는 전라도는 아닐까? 오해라도 생기면 어쩌나 걱정 아닌 걱정이 든다. 전라도도 건전하고 착하게 사는 사람도 많을텐데 말이다.  

생각해 보니 언젠가 이 영화를 보다가 말았던 것 같다. 이유는 조폭들의 거친 세계를 다룬 것이 좀 거시기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영화를 다시 볼 생각을 했던 건 순전히 감독이 좋아서다. 나는 이로써 현재까지 나온 유하 감독의 작품은 다 챙겨본 것 같은데, 내가 감독을 좋아하는 건, 그는 스토리를 조직적으로 이끌어 가는데 탁월한 감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솔직히 조인성이 보여주는 건달의 이미지는 우리가 익히 봐왔던 인물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난 영화 중반을 지나서 조인성의 친구로 나오는 영화감독 지망생인 남궁민에게 쏠렸는데, 그는 영화로 뜨고 싶은 마음에 친구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자신의 영화에 배치시켰다. 자신의 욕망이 너무 큰 나머지 우정을 배반한 것이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이해가 된다.

작가들은 늘 이야기를 가진 자가 승리한다는 착각이라면 착각. 프라이드라면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뜬금없는 일을 당하게 되면 이 경험을 작품으로 만들 수 없을까를 늘 생각하는 족속들이다. 그러니 친구의 이야기를 어찌 글로 쓰고 영화로 만들고 싶지 않을까? 더구나 평소에도 건달의 세계를 알고 싶어 몸이 달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치뤄야할 댓가는 혹독했다. 나중에 죽을 위기에도 처한다. 하긴 얼마나 무서웠을까? 다른 사람도 아닌 조폭의 응징이니 말이다. 하긴 어떤 작가는 정말로 자신이 작가가 되기를 원한다면 나쁜 사람이되는 것을 결코 두려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가 죽을 위기를 겪었다는 건 어찌보면 진짜 감독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는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이야기를 가진 자가 정말 승리하는건 맞는가 보다. 그는 죽을 위기에서도 죽지 않고 있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피의 승리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또 영화 속 감독이 아닌 진짜 이 영화를 만든 유하 감독의 이야기는 아니었을지 살짝 의문이 생기는 부분이기도 하다.

 

조폭들이 끈끈한 의리로 맺어졌을거란 것엔 의심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원래 의롭지 못한 일,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엔 그런 것이 접착제 역할을 한다. 그래야 서로서로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의리, 의리하다 결국 그 의리에 죽고마는 세계가 그 세계은 아닐지? 조인성과 피 보다 더 진한 의리로 맺어졌다고 생각했던 진구가 조인성을 배반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니까 의리 보다 중요한 것은 생존인 것이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그 세계에선 육감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찌 비열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 어찌보면 사는 것은 '비열한 것'인지도 모른다.

 

별점; ★★★    

 

2001년 개봉작인데, 분위기는 8,90년대를 연상케 한다. 소재주의 영화라는 느낌이 들기는 하는데 나름 볼만은 하다. 

 

 

 

 

 

별점; ★★★☆

 

이런 영화를 보면 우리나라 영화가 얼마나 기술적으로 발전해 있는가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마포대교 폭파 장면은 또 어떻게 만들었을까? 방송국 건물은 또 어떻게 초토화시킨 걸까?

 

영화가 다소 황당하긴 하지만, 중요한 건 역시 주제의식이다. 우린 얼마나 매스컴에 조직적으로 휘둘리며 사는 것일까? 국가 권력의 폭력에 얼마나 맥없이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를 상황속에서 나름 잘 보여주고 있다. 훗날 다시 보고 싶은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이젠 별로 말할 필요는 없어보이긴 하지만, 하정우는 정말 실망시키지 않는 연기를 보여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세트] 이중섭 - 전2권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중섭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중학교 몇 학년이더라? 미술 교과서에 실린 그의 그림 몇 점. 특히 그의 그림 황소는 너무 어리고, 미술에 식견이 없어서일까? 그 그림을 보고도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분명 강렬한 느낌이긴 한데 그것 외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왜 그는 그리도 소를 좋아했던 것일까? 

 

솔직히 나는 화가 이중섭을 알게된 후에도 그가 무엇을 즐겨 그렸는지에 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도 같다. 물론 그가 그린 황소는 하도 이미지가 강렬해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겠지만, 그 보다 나는 그의 죽음이 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시절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그가 짧은 생애를 살다 갔으며, 죽을 때 담배를 피우며 그림을 그리다 앉은 자리에서 담뱃재를 떨구며 죽었다고 들었으니까.진정 화가다운 죽음 아닌가? 자기 일을 좋아해 그 일에 충실해서 그 일을 하다 죽으면 얼마나 복된 죽음일까,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그의 죽음에 대한 환상은 이 책을 읽으므로 깨지긴 했지만, 만일 그 환상이 사실이었다면 나는 여전히 그를 신비로운 존재로 여겼을 것이다. 

 

읽은 소감부터 얘기하자면, 책은 정말로 잘 썼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노작가의 노련한 문학적 향취가 여지없이 드러난 수작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역시 소설은 작가의 문체에만 언제까지나 취해 있을 수 없는 것 같다. 작가가 인물을 너무나 생생하게 살리고 있어서일까? 언제나 그렇듯이, 예술가들은 왜 그리 불행할까에 결국 귀착되고 만다. 누군가는 이상을 가리켜 박제가 된 천채라고 하지만 그런 불행한 천재는 의외로 많다. 또한 이 책을 읽으므로 그런 또 하나의 천재를 마주한 것 같아 결국 마음이 무거워지고 말았다. 

 

천성적으로 의지가 박약한 것일까? 그가 살았던 시대가 그를 불행하게 만든 것일까? 천재는 불행할거란 덧씌워진 이미지에서 그 역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가 불행했으니 당연 주변인물도 행복할 수마는 없을 것이다. 특히 그의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의 삶은 그로인해 더욱 실존주의자가 되어갈 수 밖엔 없었으리라. 일본 출신. 사랑은 국경도 넘는다지만, 그와 그녀의 시대는 한국인 남자와 일본인 여자의 사랑을 결코 좋게 봐 줄 수 없는 시대였다. 그나마 한국인 여자가 일본인 남자와 결혼하는 건 봐 줄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인 여자가 한국인 남자와 결혼하는 건 양국의 사람들에겐 죄악시되는 시대다. 그래도 그들은 사랑을 했다. 아마도 그래서 사랑은 국경을 넘는다고 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의 무게는 같을 수 없는 것일까? 똑같이 사랑을 한다고 해도 누군가는 조금 더 많이 사랑하게 되어있고,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더 많은 희생을 하게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중섭이 아닌 그의 일본인 아내 남덕의 몫이었다.

 

그래서 남편만큼의 실력은 아니어도 프랑스 유학을 떠날만큼 그녀도 미술에선 실력있는 재원이었지만 그것을 미련없이 포기했고, 그에게서 두 아이를 낳아 키우는 평범한 아낙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요즘에도 없을리 없겠지만 우린 또 그런 사람을 얼마나 불편한 시선으로 보는 걸까? 확실히 격세지감이다. 

 

그런데 천재가 그렇듯 그도 한 가지 밖에는 잘하는 것이 없다. 바로 그림 그리는 일. 그리고 인간과의 사리분별을 논하지 않는 순수한 사귐. 그리고 가정을 재대로 돌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책과 자유에 대한 열망. 이 모든 것이 또 그녀를 얼마나 힘들 게 만들었는지 그는 얼마나 알까? 하지만 그도 자신의 삶의 날개가 무거워 점점 나락으로 떨어진다.

 

게다가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허수는 또 그 유명한 모짜르트와 살리에르를 연상케도 한다. 그래도 천재는 둔감하다고 했던가? 중섭은 그다지 허수를 의식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난 여기서 의문을 가져 본다. 과연 허수는 실재인물이었을까? 아니면 작가가 설정한 가상의 인물이었을까? 

 

말미에 허수는 중섭에 대한 자신의 시기와 질투를 고백하고 있던데, 이 소설은 이중섭을 조명하고 있는 것 같아도 다분히 여성 그러니까 남덕의 시각을 투영하고 있다. 그것은 또 작가의 관점일 터. 만일 이 이야기가 남덕이 아닌 허수나 이중섭과 친했다던 구상 시인의 관점에서 그려졌다면 어땠을까? 허수의 관점에서 썼다면 좀 더 정치적이었을지 모르고, 구상의 관점에서 씌였다면 우정이 강조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남덕의 관점에서 씌였던 게 맞는 것 같긴 하다. 사랑은 반드시 명분과 충돌하고, 외로움은 실존의 문제와 맞닿아 있으며, 모든 이야기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완벽해질 것이다.

 

여담 같지만, 왜 여자는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치지 않는 사람에게 부나비처럼 뛰어드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는 사랑 하나뿐이 없는데, 왜 남자는 사랑이 전부가 될 수 없는가? 왜 여자는 한 가지 밖에 잘 할 수 없는 외눈박이 남자에게 끌려하는가? 역시 미스터리란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나는 이중섭이 소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소야말로 우리 민족과 가장 가까운 상징과도 같은 동물 아니던가? 일본을 상징하는 동물은 아무리 생각해도 소는 아니다. 그런 한국 남자를 소 같이 사랑했던 일본 여자. 그녀에게도 한국인의 정서가 흐르긴 했었을까? 늘 그림과 민족주의 사이에서 고민했던 이중섭의 영혼과 남덕의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잘 표현되어 있다.

 

리뷰를 쓰려고 이중섭이란 이름으로 검색을 해 보았더니 그에 대한 책이 의외로 많이 나와있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풍성한 느낌을 주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를 몰라 의문이 증폭되기도 한다. 훗날 그의 평전을 한 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놀 2013-12-12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을 깨닫도록 일깨울는지 몰라요.
머스마들이 너무 바보스러우니까요.
사랑이 있으면 그림도 더욱 빛이 나고
삶은 한결 아름다울 수 있겠지요.

stella.K 2013-12-14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스마..ㅋㅋㅋ 그렇죠?
근데 여자는 바람이나면 가정이고 뭐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지만,
남자들은 바람을 펴도 가정은 안 버린다잖아요.
그게 맞는 말인지는 전 잘 모르겠으나(흑, 뭔 말을 하는 건지...ㅠ).
아무튼 이 소설은 천재에게 덧씌워진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좀 아쉬웠어요. 이중섭에게나 소설이나.
천재는 왜 그렇게 비운스러운 건지...
피카소처럼 장수하면서 행복한 천재는 왜 그렇게 없는 걸까요?

노이에자이트 2013-12-22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문희 씨는 늦은 나이에 데뷔해서 지금도 노익장을 과시하니 대단합니다.요 몇 년 동안은 예술가들을 소재로 한 작품을 쓰더군요.

stella.K 2013-12-23 11:07   좋아요 0 | URL
아, 최문희 씨가 늦게 등단했군요.
저도 이 분 나이 알고 깜짝 놀랐어요.
나이들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확실히 복인 것 같아요.^^
 
의사에게 기대지 않고 사는 법 - 일본 최고의 명의가 알려주는
아쓰미 가즈히코 지음, 이진원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문득 이 책을 읽고 있으니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새삼 깨달았다. 

병원 신세 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병원 신세를 지고 싶지 않다는 거지, 의사에게 기대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다. 저자도 주치의 말고도 서드 오피니언을 두라고 권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을 원하는 것도 끌림 때문이기도 하지만, 필요에 의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내가 컴퓨터를 사용하게 된 세월이 거의 15년을 헤아리는데, 그동안 이상 없이 쓰지는 않았다. 어떤 경우 먹통이 되기도 했고, 어떤 경우는 와이파이가 안 돼서 애를 먹기도 한다. 그때마다 해결사는 나의 동생이었다. 그쪽 방면으론 좀 바싹하니까. 기계치인 나는 그때마다 이런 동생이 있음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인지. 만일 동생이 없었더라면 컴퓨터가 이상징후를 보일 때마다 어떻게 했을까? 인터넷을 거의 하루도 하지 않는 날이 없는 이 시대에 말이다. 하지만 동생을 끌려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이상한 거지. 거기에 의사가 있다면 금상첨화지 않을까? 

 

나이가 들으니 집안에 의사 한 명쯤 있는 사람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살다 어찌될지 모르니 다급할 땐 손쉽게 도움을 청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의사에게 기대지 않고 사는 게 좋긴 하지만, 평생 그럴 수는 없으니 기댈만한 의사가 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인간은 역시 homohospital(병원에 다니는 인간)일까? 평생 병원에 다니지 않게 되길 바랬지만 그 바람은 내 인생 10살이 채 되기 전부터 깨지고 말았다. 그나마 장기 입원이 아니라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내 인생 최장 입원기록은 그 10살 되던 해, 한 달간 입원한 기록이다. 그것도 그렇게 말해주니까 그런 줄 알지, 병원에 있으면 시간이 세로로 가는지 거꾸로 가는지 모른다. 내 느낌엔 한 석 달 입원한 것 같은데 말이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건, 그때 난 병원에 안 갈려고 무척 발버둥을 쳤던 것 같다. 병원에 가면 무조건 주사놓고 아플 거라는 생각에 그런 거였는데, 막상 있어보니 생각 보다 그렇게 아픈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의 인식은 여간해서 바뀌지 않는가 보다. 어렸을 적 입원 경험도 있으니 성인이 되면 좀 다르지 않을까 싶기도한데 그러지 못했다. 십몇 년 전 병원에 심한 두통으로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분명 응급 상황이었는데도 나는 미련스러울 정도로 버티다 버티다 결국 구급차를 타고 갔던 것이다.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두통이 일반적이지 않고, 약을 먹어도 낫지 않는다면 가급적 지체하지 말고 병원에 빨리 가 보는 것이 좋다.      

 

아무튼 나는 이렇게 병원엘 가는 것을 지옥에 가는 것만큼이나 싫어한다. 살아오는 동안 병원 신세 한 번 안 졌다는 사람이 있다면 무슨 계급장처럼 부럽다. 자꾸 마음은 병원에서 멀어지고 싶은데, 몸은 병원과 가까워져야 할 운명이 되어가고 있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데 좀 더 솔직해지자. 내가 정말 무조건 병원에 가는 것을 싫어하는 것일까? 물론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무조건은 아니다. 다쳐서 피를 흘리고 있는데 무조건 안 갈 수는 없지 않는가? 요즘 병원은 옛날 병원과 달라서 인테리어가 잘 돼 있고, 사람들도 친절해 딱딱하다는 인상도 없다. 문제는 적재적소란 말이 있듯이, 언제 가야하고, 언제 가지 말아야 하는지를 잘 모르겠더란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는 꼭 병원에 갔어야만 했다. 두 경우 다 의사는 조금만 늦었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고 말했으니까. 물론 긴 세월을 두고 있긴 하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두 번 들으니 그것도 의사들이 자신의 위신을 좋게하기 위해 의례껏 하는 소리 같아 별로 마음에 두고 있지는 않지만, 두 번 다 응급상황이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또 그렇지 않은 것이, 작년 이맘 때 나는 갑자기 몸이 안 좋아 졌었다. 그래서 정말 또 다시 병원에 실려 가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하다못해 이러다 죽는 것은 아닌지 겁 먹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두통으로 병원 신세를 졌던 그때 의사는 앞으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런 증세가 더 빨리 자주 나타날 수 있을 거라고 경고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문제의 두통을 또 다시 겪게 되는 줄만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웬걸, 나는 그때를 정점으로 다행히도 서서히 회복을 보이고 있었고, 지금은 생활하는데 별 지장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책은, 인체의 자연치유력을 얘기하면서 병원에 가지 않더라도 자연적으로 낫게되는 병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저자만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치유를 연구하고 믿는 의사들 하나 같이 하는 얘기다. 그 말이 맞다면 작년에 나는 그렇게 몸이 안 좋아졌을 때 무턱대고 병원에 갔으면 얼마나 억울할 뻔 했을까. 하다못해 지금까지 내 인생 두 번의 병원 신세도 자연치유력을 믿는다면 굳이 안 가도 되는 걸 갔던 것은 아닐까? 의문스러울 정도다. 

 

내가 의사였거나, 집안에 누가 의사였다면 몸의 갑작스런 반응에 그렇게 많이 당황했을 것 같지 않은데,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몸의 상태와 성급한 마음이 조건반사처럼 병원을 생각하게 된다. 하다못해 나는 웬만해서 안 갈 것을 남에겐 너무나 쉽게 병원에 가 보라고 권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젠 몸에 이상이 생겼다고 무조건 겁부터 먹을 나이는 아니라고 본다.  

 

책 역시 딱히 언제 병원에 가 보라고 권하지도 않는다. 굳이 가야한다면 '액년' 그러니까 운수가 나쁜 해에 가 보라고 충고한다. 남자의 경우 25세, 42세, 61세고, 여자는 19세, 33세, 37세 전후다. 물론 이 액년에 나쁜 일이 더 많이 발생한다는 통계는 없지만, 의학적으로 봤을 때 40세 전후한 액년에는 건강검진을 받는 것이 좋다고 권하고 있다(139p). 나의 경우도 저자가 제시한 해에 특별히 몸의 이상징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있다고 해도 그 나이를 비껴가고 있다. 하지만 40세 전후해서 건강검진을 받으라는 말은 일리는 있어 보인다. 내 몸 40년이면, 자축하고 위로하는 의미에서라도 건강검진을 받아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올해 유난히도 이 책을 비롯해 건강 서적을 많이 읽게 되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일본 의사의 저작물을 많이 읽게 됐는데,  그들의 하나 같은 공통점은 병원을 너무 좋아하지 말라는 것이다. 약 또한 너무 좋아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비해 우리나라의 경우는 TV에 출연하는 의사마다 병원에 오라고 거의 홍보 수준으로 말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특히 암을 다룰 때 항암제가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고, 민간요법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병원에 오라고 하는 것이다. 글쎄, 내가 그런 책만 읽어서 그런가? 아니면 상대적으로 우리나라 매스컴이 병원을 맹신하도록 조장하고 있어서일까? 아무튼 확실히 일본과 한국은 뭔가 많이 달라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이 겉표지에 실린 저자의 사진이 확실히 인생을 통달한 편안한 느낌의 할아버지다. 심장 전공의라기 보단 꼭 한의학을 전공했을 것만 같다. 그래서일까? 책도 거의 놀라우리만치 간결하고 깔끔하단 느낌마져 든다. 내용도 거의 특별할 것도 없어보인다. 그냥 건강 서적을 유의해서 읽어 온 사람이라면 한 번 요점 정리하는 느낌이랄까?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의사 생활을 오래 한 경험 때문일까? 매 글 말미에 의사의 사명 내지는 인간적 조언을 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이런 의사가 요즘엔 맞지 않으니 이런 말을 했겠지 싶다. 과연 이런 자본주의 세상에서 인술을 펼치는 의사가 그렇게도 없는 것일까?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놀 2013-12-11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일본도 '병원 광고 홍수'였을 테지만, 이제는 일본 시민 의식이 높아지고, 일본에서 의사 되는 사람도 의식이 높아지니, 이런 책이 꾸준히 나오고, 한국사람도 조금씩 의식이 높아지니 이제 이런 책도 번역이 되리라 느껴요.

다만, 한국 의사는 아직 의식이 높아지지 못했기에, 한국 의사는 이런 책 못 쓰지요.

일본에는 '티벳에 가서 티벳 의사가 된 사람'도 있답니다. 이런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기도 하고요.

stella.K 2013-12-12 16:50   좋아요 0 | URL
오, 그런 사람이 있군요.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페크pek0501 2013-12-12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연치유력에 대해서 의사로부터 직접 들었어요.
제가 몸에 문제가 생겨 병원에 갔을 때인데 약을 주더라고요.
제가 물었죠. 만약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니냐고요.
그랬더니 자연치유가 된다고 하더라고요.
넘어져서 몸에 상처가 나는 경우에도 약 바르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치유되듯이
그런가 봐요. 자연치유란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 가요.

나이 들면서 자신 없어지는 것, 건강인 것 같아요.^^

stella.K 2013-12-12 16:52   좋아요 0 | URL
그럼 약 안 드셨겠네요.

맞아요. 예전엔 무조건 나이드는 거 싫었는데,
지금은 나이들어도 좋다. 아프지 않게만 살았으면으로 바뀌는 것 같아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