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의 침묵 - 불가능한 고백, 불면의 글쓰기
김운하 지음 / 한권의책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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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집어들었을 때 나는 공교롭게도 부제가 더 마음을 끌었다. 내가 릴케를 알면 얼마나 알고, 그에게 매료당했다면 얼마나 당했을까?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건 고작 장미를 좋아해 장미가시에 찔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었다는 것 밖에 더 있겠는가? 장미를 좋아해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 확실히 무엇인가를 좋아한다는 건 덫이란 생각이 들기는 한다. 

 

침묵의 의미를 깨닫는 건 또 얼마나 덧없고, 무모한 도전이란 말인가? 이 세대가 과연 침묵을 허용하는 시대란 말인가? 저자는 책 가운데 외로움과 침묵의 정의에 관해 쓰긴 했지만, 이것을 깨닫는 건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닌 성싶다. 

 

오히려 내가 꽂혔던 건 '불가능한 고백, 불면의 글쓰기'였다. 더 정확히는 '불면의 글쓰기'였다. 저자는 그것에 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불면하는 밤의 매혹은 그것이 가져다주는 고통만큼이나 치명적이다. 나는 그런 매혹의 순간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어쩌면 불가능한 기다림인지도 모른다. 침묵하는 밤이 털어놓는 고백 자체가 불가능한 고백인 탓이다. 그러므로 불가능한 고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그것이 바로 불면의 글쓰기다.(101p)      

 

저자가 말하는 불면의 글쓰기는, 확실히 열어보지 못할 판도라의 상자를 독자에게 불쑥 들이미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책은 뭔가 내밀한 고백을 담고 있는 것도 같고, 저자가 읽은 책, 더 정확히는 인문학에 경의를 표하는 것도 같다. 그리고 아직도 일천하기 짝이 없는 나의 지식은 그것을 따라가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그래도 그것과는 별개로 어느 순간 나의 글쓰기에 대한 고백을 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유혹일까? 

 

언제부터 였을까? 내가 글쓰기에 미쳤던 건. 발자크처럼 커피에 중독돼 가며 어느 순간 미치도록 쓴 건 아니었다. 누군가는 미쳐야 미친다고 했다. 작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또 얼마나 두렵고 주저하게 만드는 일이었을까? 그러던 중 교회에서 대본 쓰는 일에 대한 제의를 받았다. 그것도 하필 주일학교 교사하는 일이 너무 안 맞아 그만 둬야겠다고 생각하던 순간에 말이다. 그래서 주일학교 교사를 1년 더 연장하기로 했다.

 

대본 쓰는 일이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지만(난 늘 소설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나에겐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수락을 했던 것이다. 한 1년 동안은 신나게 그 일을 했던 것 같다. 나에게 이런 능력이 숨어 있었나? 나 자신에게 놀라면서 말이다.

 

물론 그 일이 마냥 신났던 것만은 아니다. 맨땅에 헤딩하듯, 한 주에 한 편의 연극 대본을 쓴다는 건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어떤 땐 너무 글이 안 써져 컴퓨터 모니터를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때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것도 살아 있음이라 생각하고 나는 매번 주어진 숙제를 성실하게 해 나갔다. 이렇게 말하면 모르는 사람은 내가 꽤 성실하고, 모범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착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못된다. 단지 곰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사람이 뭔가 한 가지 정도는 잘하는 것이 있다는데 나는 비교적 늦게 그걸 발견해낸 셈일 뿐이다. 

 

하지만 난 그때 잊고 있었던 것이 있다. 나는 대본 쓰는 사람이기 이전에 교사라는 것이다. 그 일을 성실히 했다고해서 나의 교사의 직무를 잘 수행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건 일종의 나를 새롭게 발견해 주는 일이었을 뿐, 교사는 지금 생각해도 확실히 어려운 일 같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 내가 했던 일은 교사의 직무를 바꿔치기 할만큼 대단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즉 이 일을 하느라 교사의 직무를 유기했던 것이 고스란히 내 책임으로 돌아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당시 내가 알았던 제자 녀석이 하나가 있었다. 난 그 녀석을 거의 2년 동안 지켜와 봤지만 이 녀석에 대한 뭔가의 믿음이 보이지 않았다. 이를테면, 제자와 선생이란 신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어느 때 보면 나에게 친근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는한데 선생에 대한 예의나 존경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이 녀석과 멀어지길 바랐지만, 녀석에겐 뭔가 거부할 수 없는 특유의 페로몬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녀석의 페로몬은 선생인 나 사이에 하극상을 낳았고, 또한 그것은 녀석으로 하여금 어떻게 세력을 규합하며,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알게해 준 개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녀석이 그 어린 나이에 그것을 알게 됐다면 그의 영혼에 미칠 영향이 어떨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덕분에 나와 녀석은 조직내에 적지않은 파장을 일으켰고, 결국 조직에서 파직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나로선 조직의 선택을 존중해야 하고, 따라야겠지만 이후 오래도록 과연 그렇게까지 했어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는 남았다. 

 

뭐 좀 할 수 있을 것만 같고, 뭐가 잡힐 것만 같았는데 하필 그때 거미줄에 걸려 넘어지는 형국이라니?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거기서 좌절하지 않고 훗날을 위해 더 공부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무엇보다 글 쓰는 내가 좋았던 것이다. 

 

공부하러 들어간 곳은 어느 창작학원이었는데 거긴 정말 별천지였다. 80년 대 어느 민주화 투사가 경영하는 곳이기도 했고, 역시 민주화 투사 중 한 분이 나의 선생이 되었다. 그때 새삼 깨달았던 건 나는 한때 글 쓰는 사람이길 원치 않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누구든 문학 소년이 아니고, 문학 소녀가 아닌 때가 없다고 하지만 나는 언제부터지 이 꿈을 나의 의식의 수면 저 밑으로 밀어넣어버렸다. 

 

초등학교 시절, 유난히 일찍 찾아 온 사춘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유독 부모님이 서로 싸우는 걸 못견뎌 했다. 엄마는 늘 약자처럼 보였고, 아버지는 늘 강자처럼 보였다. 그래서 언젠가 참다 못해 장문의 편지를 아버지께 드렸는데, 아버지는 뭐 때문이었는지 화를 내지 않고 나의 그런 용기를 칭찬해 주셨다. 덕분에 글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을 무의식으로나마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중학교를 들어가고 그해 늦가을이었던가? 교지에 실을 글을 모집한다고 해서, 나는 시인지 낙서인지도 모를 글을 당시 몰래 짝사랑하던 국어 선생님 손에 직접 쥐어 드렸다(생각해 보면 간접적으로나마 사랑의 연서를 쥐어 드린 건 아닌지?). 나는 당연히 내 글이 교지에 실릴 줄 알았다.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그런데 웬걸, 기대를 가지고 교지의 첫 페이지를 열었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내가 쓴 글은 한 자도 볼 수가 없었다.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럽던지. 선생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확실히 그때부터 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후 몰아 닥쳤던 민주화 운동은 그나마 있었던 나의 문학에 대한 관심을 사그러트리는데 영향을 줬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절의 문학은 온통 참여문학 일색이었으니까. 인간의 상상력을 말살하고, 참여문학만이 문학이라면 차라리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무슨 허무주읜지, 한 번 읽고마는 소설의 일회성을 생각해 볼 때 문학은 더 이상 나에겐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랬던 내가 문학으로 현실에 참여했던 작가를 대하고 보니 얼마나 소견이 좁았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교류는 나름 좋은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1년 후, 나는 내가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야 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존심 생각하고, 상처만 생각하면 다시 못 돌아 갈 곳이다. 이 책도 그것을 말하고 있다.

상처에 대항하는 방식은 실로 여러 가지다. 그중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하는 가장 탁월한 방식은 자기 자신을 끌어안는 것이다. 즉 자기에 대한 자부심을 되찾는 것이다. 상처는 쉽사리 콤플렉스가 되고 우울증과 신경과민, 세상과 피해의식을 낳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상처를 적극적인 에너지로 전환시켜야 한다. 수 많은 예술가와 사상가들은 내면에 대한 각인된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 끝에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192~193p)

 

그리고 난 그 일을 겪은 후 훨씬 더 안정적으로 그 일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 일을 하고 나서 나에겐 적지않은 변화도 생겼다. 유치하고, 시끄럽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드라마도 보고, 영화도 보는 것이다. 행복한 공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내가 넘어진 곳에서 다시 시작했다고 해서 당장에 영광이 찾아 오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제자 녀석의 하극상을 통해 녀석안에 꿈틀대고 있는 뭔가의 악마성을 본 것도 같았다. 하지만 훗날 나는 더 큰 것을 보기도 했다. 녀석의 악마성을 교묘히 이용하는 또 다른 더 큰 권력을 보기도 했으니까. 그렇다면 녀석은 그때를 어떻게 기억할까? 궁금하긴 하다.

 

나는 나대로 조직이 재편될 때 그 새로운 권력에 의해 축출을 당하기도 했다. 물론 외형적으로 볼 때 또 한 번의 좌절을 당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이전만큼은 아니었다. 그건 나만이 당한 일도 아니거니와, 원래 새로운 사람이 수장이 되면 이전에 있었던 사람은 필요에 의해 그 조직에 남아 있기도 하지만, 조직을 떠나기도 한다(자의든, 타의든). 그런 차원이었으니 속상해 할 것도 없다. 단지 그 새로운 수장이 이전과 다른 얼굴로, 없는 죄도 만들어 가며 더 이상 그 조직에 있지 못하도록 만드는 비인격적이고, 추잡한 행동에 분개할 뿐었다. 

 

이를테면, 글쟁이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글쓰기가 좋아 죽겠는데 어딘가 필요로 하는 곳에 속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나 있는 곳에서 내가 목격한 인간의 이면과 진실을 글로 남기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을 지칭함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어느 작가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아라크네의 후예들이라고도 했다.  

 

어쨌든 그 일도 몇십 년 전의 일이다. 그후 나는 그 보다 훨씬 좋은 곳에서 글을 썼지만, 나의 글 쓰기의 욕망은 어느 조직이나 장소가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을 따지는 것은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어디를 가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그들과의 경험과 인연이 나로하여금 글을 쓰도록 만든다. 그것은 항상 좋은 경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쁜 경험이 자극을 준다. 그도 그럴 것이 불만은 나의 힘이라고, 난 항상 인간의 부조리한 면을 보면 글을 쓰고 싶었으니까. 마치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것처럼 말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또 말한다.

글쓰기를 하건 다른 창조적인 일을 하건, 진정으로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최선을 다할 때 그리고 거기에서 성취감을 얻을 때 마음의 상처는 치유된다. 이것은 상처를 내면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외면화시킴으로써 극복하는 방법이다. .....사랑의 상처를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은 다른 사랑을 찾아 열정을 쏟는 것이다. 새로운 대상과 사랑을 주고 받음으로써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상처를 극복하는 대신 오히려 마음 속에서 상처를 극대화하는 경우가 많다. (193p)                                   

그런데 나는 그 일을 지금까지 한 번도 글로 쓰려고 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써야지 하면서 지금까지 쓰지 못했다. 게을러서일까? 거기에 이의를 달지 못한다. 하지만 뭔가 시간이라고 하는 필터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공교롭게도 저자는 위의 글에 앞서 자서전의 불가능함을 얘기했다. 그것은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의 예를 들었는데,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 당대의 유명 인사들의 행태를 고발하면서, 이 모두가 진실임을 거듭 천명했다고 한다. 나아가 자신의 말과 위배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거짓말쟁이며, 협잡꾼이라고 까지 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목졸라 죽이기까지 해야한다고 했다. 과연 무시무시 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의 말을 믿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요는 루소도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과연 가능하냐는 것을 묻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객관성을 들어 진실을 주장하려고 하지만 사실은 주관적인 사고와 감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서전의 불가능함을 말했다('불가능한 고백',177p~).

 

그런 것처럼 나의 이야기는 자서전이란 형태로 글 쓰기가 가능할 것도 같지만 나의 얘기를 믿어 줄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나 자신 조차도 정말 진실을 얘기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또 그때 일을 들쑤셔서 마음이 우울에 빠질지도 모르고, 명예훼손이라고 고발당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엄밀한 의미에서 확실히 '불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상처받을 가능성 속에서 모두 하나라고. 또 상처는 어떤 의미에서는 삶을 내면적으로 더 풍요롭게 해주는 열정의 에너지이기도 하다고. 신이 인간에게 망각이란 선물을 준 까닭은 인간이 얼마나 쉽사리 상처를 받고 그로 인해 치명적인 고통을 겪을 것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동시에 신은 인간에게 그 상처를 극복할 내적인 힘도 부여해주었다. '망각하는 능력'과 '노력하는 힘'은 마음의 상처를 지닌 인간이 신에게서 받은 두 가지 선물이다.(195p)    

  이것이 불가능한 고백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은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건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자신의 말에 책임지겠다는 것이거나, 시간과 망각의 필터링을 통해, 또는 거짓으로 진실을 말하는 좀 더 고도화된 방법을 통해 좀 더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다거나. 그렇다면 나도 이제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구는 글쓰기를 글 감옥이라고도 표현했지만, 그렇게 흘러온 나의 글쓰기 유전은 이제 나의 십자가요, 족쇄 같은 것이 되어버린 것 같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면 받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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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22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잖아 그 이야기 찬찬히 쓰실 날 있으리라 생각해요.
즐겁게 기다리셔요.

그나저나 한 주에 하나씩 연극 대본을 써야 했다면...
아이고야... @.@

stella.K 2013-12-23 11:08   좋아요 0 | URL
ㅎㅎ 짧은 연극이었어요. 그러니까 하지.
하긴, 그래도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아요.
그땐 무슨 기운이었는지 그렇게 안해도 되는 걸 스스로 닥달해서 했다니까요.
저는 그렇다쳐도 그당시 주일학교 아이들 선생 잘못 만나 고생 좀 했죠.
그래도 뭐 지네들 좋으니까 선생 쫓아 와 준 거지 지네들 싫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덕분에 연극영화과 간 아이들도 몇 있었어요.^^

페크pek0501 2013-12-24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실 찾기는 어려운 일 같아요. 어쩌면 죽을 때까지 진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단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나의 진실을 모를 때도 있는데 남의 진실은 어찌 알겠습니까.

망각과 노력이라는 선물... 특히 망각이란 선물이 없다면 사는 게 꽤 고통스러울 듯싶어요.
누구에게나 잊고 싶은 일이 있을 것이니까요. 죽은 사람을 못 잊어서 따라 죽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러고 보면 망각이 있다는 게 다행스럽죠.

책 제목을 보니 릴케의 말테의 수기, 가 생각나는군요. 열심히 읽었던 책이었죠. ^^

stella.K 2013-12-24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누구에겐 잊고 싶은 기억을 누군가는 말하고 싶어하죠.
묻어둬서 좋은 사람이 있고, 누구는 말하므로 치유가 되는 사람도 있겠죠?
말테의 수기를 읽으셨군요. 전 아직도 못 읽었는데...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