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배심원
아시베 다쿠 지음, 김수현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장르소설을 읽었다.

아니 어쩌면 오랜만이랄 것도 없다. 다른 책에 밀려 나는 장르소설은 웬만해선 읽는 법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또 이 책은 웬만하다는 얘기일 수도 있겠다. 웬만해서 잘 안 읽는 나에게 읽어 볼 생각을 하게 했으니 말이다.

표지도 그렇고, 작년에 봤던 법정을 소재로한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재밌게 본지라 기대하고 본 책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기대한 것만큼은 만족은 주지 못한 것 같다.

초반 소설의 얼개는 다소 황당하지만 그런대로 잘 짜여졌다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가면서 영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그 중심이 모호해지는 느낌이다. 

주인공이 다카미 료이치 같기도 한데 그렇다면 그가 힘있게 소설을 끝까지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주인공이 이 사람인가 싶다가도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변호사 모리에. 물론 주인공이 꼭 하나일 필요는 없겠지만 도대체 이 사람이 하는 일이 뭔지가 잘 와 닿지 않았다. 물론 이 사람의 과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배심원들을 설득해야 하는 것인데 그 설득력이 약하지 않나 하는 것이다.

소설 속 배심원의 설득은 또한 독자들의 설득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이미 어느 정도 성공을 입증한 것 같긴 하다만, 나 같은 벽창호는 뭐가 뭔지 통 감이 와닿질 않는다.  

가끔 보는 법정 드라마를 보면 판사든, 변호사든 법정 변론을 하다 결국 마지막 최후변론에선 감성에 호소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런 인간적인 설득과 마무리가 이 작품에 있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물론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닐테지만 그래도 이 작품이 의도한 바가 있다면 어쨌거나 나름의 설득력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의 저자 자체가 너무 현실감 없는 도입을 감행했기 때문에 어느 부분에서 설득의 힘을 줬는지 독자로선 알 길이 없다.

물론 흔히 장르에서 보여지는 그 놈의 '트릭'이라는 것만 가지고 얘기를 하자면 난 할 말이 없다. 그것도 트릭이라면 트릭일테니까.

하지만 이제까지 있어 오지 않았던 일번 사법에 배심원제의 도입을 위해 이 소설을 썼다면 없는 사실에만 얘기할 것이 아니라 있어야만 하는 설득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즉 작가의 논점은 다른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선 배심원제도가 있는데, 일본은 없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 소설을 쓴 것이 아닌가?

이것은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최근 우리나라에 시민 참여재판이란 게 생겼는데 그것이 바로 배심원제도인 줄 알고 있다. 나는 그런 게 생겨 내심 좋아했는데 얼마 전 친구에게 들으니 그렇게 참여는 할 수 있어도 그것이 실제 재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란다. 그냥 일종의 참고는 할 수 있어도 최종 구형에선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글쎄 시범 단계라 그럴 수도 있겠고, 결국 법조인들이 그리 호락호락 그런 자리를 쉽게 시민에게 내어줄리 없을 테니 어쨌거나 그 친구의 말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을 본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분명 법조인들도 정의를 위해 일하고, 배심원제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차마 자신들이 나서지 못하는 일을 작가는 여러 가지 취재와 문학적 소양으로 그것을 형상화 낼 수 있다. 또한 그럼으로 일반인(독자)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다. 

그런 점에서는 이 작가는 앞선 의식으로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고 본다. 이렇게 작가는 사회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이 이루어낸 성과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 분야에서 좀 더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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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3-01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심원제도가 있는 나라의 영화를 볼 때 부럽더라고요.
아무리 법 공부를 많이 한 법조인들이라고 해도 주관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할 터이니
그런 제도가 필요한 게 아닐까 싶었어요.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삶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주관성이란 게
있기 마련일 텐데요. 그래서 객관성 확보를 위해 사람 수가 많은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것이고,
다양한 종류의 직업의 사람들이라는 것도 장점일 수 있고요.

저는 글을 읽고 거의 공감을 누르는데요, 그 이유는 제가 알고 지내는 블로거들 대부분이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해서죠. ^^

stella.K 2014-03-01 15:51   좋아요 0 | URL
아유, 무슨 과찬의 말씀을...ㅠ
솔직히 내용을 다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라 리뷰를 쓰기가
좀 막막 하더라구요.
그래도 상 받고 하는 거 보면 저도 글 쓰는데 조금 용기를 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실은 하나도 못 쓰면서...ㅋㅋㅋ
암튼 저도 언제고 국민 참여 재판이란 거 함 해봤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에 배심원 제도가 잘 정착됐으면 좋겠구요.^^
 

소치 동계 올림픽이 종반을 향해 가고 있다.

오늘은 우리의 자랑스런 김연아 선수가 은매달을 땃다.

이걸 가지고 말이 많은데 본인은 정작 태평한 얼굴이다. 나 같아도 속이 상할 것 같은데 김연아 선수는 어떻게 그렇게 편할 수 있는지. 메달 색깔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말이 진심이긴 진심이었나 보다. 확실히 그녀는 피겨를 즐기며 해 왔었다는 게 믿어진다.

 

지금쯤 그녀 마음은 어떨까를 생각해 본다. 그동안 너무 고생했을 테니까, 국가 대표니까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그녀의 마음이 어떨지 자꾸 더듬고 미루어 생각해 보고 싶어진다.

물론 시원 섭섭하겠지.

7살 때부터 단 하루도 스케이트를 발에서 신지 않은 날이 없었을 것이고, 어쩌면 그 나이 또래들이 즐겨 신을만한 예쁜 구두를 포기하고, 신발 보다 더 많이 신었을 스케이트를 이제 안 신어도 좋을까?

도대체 앞으로 스케이트를 타지 않으면 그녀는 뭐하며 지내게 될까? 궁금하기도 하고 웬지 모르게 괜히 내가 더 아쉽다.

 

그게 또 김연아 선수 뿐이랴?

이번 대회를 끝으로 선수 생활을 끝내는 선수들이 있다. 그들의 마음은 또 어떨까 생각해 본다.

특히 이규혁 선수가 많이 생각이 난다.

선수 생활을 통틀어 6번의 올림픽을 참가했다니 대단하지만, 다른 모든 대회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의 성적을 내고도 정작 올림픽에선 메달과 인연이 없던 선수.

하지만 누가 감히 그 선수를 불운의 선수라 말할 수 있으랴? 그렇다고 영웅이 아니겠는가? 이규혁 선수는 영웅 맞다.

 

또한 안현수 선수에 대한 생각은 여러 갈래다.

이 성적으로 봐선 애초에 목표로 했던 10위권 진입은 어려워 보이는데, 우리가 안현수 선수를 잘 보호해 주고 잘 키워줬더라면 턱걸이는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본인도 메달을 딸 때마다 그것이 원래의 조국이 아닌 러시아에 바치는 것에 대해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정확한 속사정이야 알 길이 없지만, 우리나라가 확실히 선수의 육성과 보호는 미성숙한 책임은 면키가 어려울 것이다.  

 

솔직히 올림픽 자체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좀 복잡하다. 물론 국위를 선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은 부인할 수 없겠지만, 그것도 알고 보면 자본주의의 꽃은 아니겠는가? 또한 서양에서 시작이 된 만큼 동양 국가의 선수들은 들러리란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젊을 때 한 때 운동선수로서 올림픽 무대에 서 보는 것이 꿈이어서 오늘도 피와 땀을 쏟아낸 선수들을 생각하면 이런 말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들의 레이스를 보면서 울지 않아도 저절로 눈물이 난다. 아침마다 TV에서 그들의 소식을 접하면서 처음엔 내 뺨에 흐르는 눈물이 하품하느라 흘리는 눈물인지, 저들의 환희와 고생이 느껴져 흘리는 눈물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확실히 후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게 지는 해와 뜨는 해가 있음을 우리는 안다.

우리가 언제 제2의 김연아와 이상화와 이규혁을 볼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오늘도 자신의 뼈를 깎고 있을 것이다. 

제발 그들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다 같이 격려하고 위로하는 분위기였으면 좋겠다.

 

우리 선수들, 정말 장하고 수고 많이했다.

그들이 있어 이 며칠 행복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태극전사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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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4-02-22 0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달에 이토록 목을 매고,
금덩이 메달이 아니면 죽을듯이 달려드는 나라는
지구별에 대한민국만 있지 않나 싶어요.

겨울올림픽 종목이 몇 가지만 있지 않은데
한국선수가 나가지 않은 종목은 아예 방송일정도 없고
피겨 경기만 있지 않는데
피겨 경기 아닌 이야기는 아예 찾아볼 수도 없고,
그렇게 잔뜩 부담만 안겨 주면
선수로서도 힘이 들리라 느껴요.

은메달이나 동메달, 4등도 얼마나 값지고 아름다운가를
모두들 잊어버리는구나 싶어요.

stella.K 2014-02-26 12:13   좋아요 0 | URL
그놈의 중계권료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시청자도 가능성 있는 종목에나 관심있지 가능성 없는 것엔
관심도 없잖아요.
올림픽 대회에 나간 건 자체가 굉장한 거죠.
예전엔 올림픽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요즘 선수들은 마인드가 경기 자체를 즐긴다더군요.
바람직한 것 같아요.
올림픽 이후에도 삶은 계속 되잖아요. 너무 목매달 필요없죠.
 

★★★★

전쟁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이 영화는 왠지 끌려서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요즘 일제 시대에 관심이 많은지라.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 감독은 전쟁씬을 정말 잘 찍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전작도 그랬지만 이 영화에선 한층 더 완성된 영상을 보여준다. 

솔직히 이제 좀 전쟁씬은 그만 보여줘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 거의 전쟁씬의 끝판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 그래서 강제규 감독은 정말 영화를 찍을 줄 아는 사람이란 생각에 이의를 달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솔직히 약간의 민족주의(?)를 가장한 휴머니즘이 베어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하겠다. 이를테면, 장동건과 오다기리 조의 대결씬이 그것인데 장동건은 오다기리 조를 죽이고 그 싸움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그를 죽이지 않는다. 자신을 괴롭힌 일본놈 아닌가? 무슨 마음에선지 탈출을 함께 하며 동지애를 보여준다. 그들은 일본에서나 주종관계였지 제 3국에서는 너나 할 것 없는 포로였던 것이다.

 

만약에 일본에서 이와 비슷한 영화를 찍는다면 그도 비슷한 영화를 찍지 않을까? 조선인을 불쌍해서 살려주는 일말의 정의감을 보여주는 그렇고 그런 영화 말이다. 

하긴, 요즘 일본은 우경화가 극에 달하고 있으니 그런 영화 조차도 만들지 못할 것이다. 

 

이 영화는 감독이 우연히 보게된 사진 한 장이 모티프가 되어서 영화로 만들고, 후에 책으로 나왔다고 하는데 또 정확히는 이 책의 저자 아버지가 간직한 사진 하나가 발단이 되었다고 한다.

영화로 만들었다 후에 책으로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긴하고, 나 같은 경우 책으로 먼저 것을 나중에 영화로 만드는 건 선호 하지만, 영화에서 책으로 나오는 건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런데 이 작품은 웬지 책으로도 읽고 싶단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다. 영화는 전쟁의 참상을 주로 많이 그렸는데, 책은 그것 말고도 얘기거리가 더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장동건과 오다기리 조의 연기가 확실히 볼만하다. 특히 장동건이 조금도 꿀리지 않고 당당하게 일본어로 뇌까리는 씬이 종종 나오곤 하는데 왠지 멋있다 못해 섹시하다는 느낌마져 든다. 오다기리 조의 연기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영화는 280억이나 들였다는데 개봉 당시는 그다지 성적이 좋지 않아다고 한다. 좀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전에 본 설국열차 보다 좋다고 보는데. 요즘 재개봉 하는 영화도 많던데 이 영화도 언젠가 다시 개봉해서 만회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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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1 0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1 1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번역 예찬 - 번역가의 삶과 매혹이 담긴 강의노트
이디스 그로스먼 지음, 공진호 옮김 / 현암사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에 대한 느낌은 일단 생각 보다 읽기가 녹녹치 않다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번역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도우려 했을 것이다. 

책에서도 보면, '오늘 날 출판이 처한 참담한 상황이 너무 많은 출판사가 번역가에게 거만하게 굴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일축해버리는 유감스러운 풍조 등은 차치하더라도, 많은 독자가 번역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37p).'고 꼬집었다.  

 

이 글을 대했을 때 나는 과연 번역자를 어떻게 생각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 역시 번역가를 조금이라도 이렇게 생각해 본적이 있었을까?

 

이런 것은 있다. 독자들 중엔 번역서를 안 읽는다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반대로 국내 서적은 잘 안 읽는다는 사람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번역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느니 원서를 읽겠다든가 번역이 필요없는 우리나라 작가가 쓴 책을 읽겠다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우리나라 저자들은(물론 다 그런 건 아닐테지만) 시야가 좁고, 어떤 사고의 틀에 갖혀 있어 답답해서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전자든, 후자든 책을 읽는 수준 꽤 높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 그런 것을 파악하고 있었더란 말인가?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배부른 소리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뭔가를 배우려고 책을 읽는 것이 아닌가? 그 책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촛점을 맞추지 않고 번역이 어떠느니, 저자가 어떠느니 하는 건 책을 읽는 자의 올바른 자세는 아닐 것이다.  

 

단지 이런 것은 있을 수 있겠지. 독자도 인간이니 내가 좋아하는 작가와 나와는 안 맞는 작가. 나와 안 맞는 작가는 그저 안 맞는 작가일 뿐이지 그 작가가 넓은 사고를 가졌는지 안 가졌는지는 가릴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저자는 책에서 자국어로된 책들이 넘쳐나는데 남의 나라 책을 번역할 필요가 있냐고 물어 본다. 이런 질문이 좀 생뚱맞은 건 사실이다. 무슨 국수주의도 아니고. 그것에 대해 괴테는 이렇게 말했단다.

'한 나라의 문학이 다른 나라의 문학에서 받을 수 있는 영향과 기여를 막는다면, 결국 그 나라의 문학은 스스로 고갈되고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의 질은 낮아지기 마련이라고(33p). 나 역시 괴테의 말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고민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터넷 서점을 서핑하다 보면 가끔 어떤 독자의 혹평을 보게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어떤 번역본을 보고, 이게 번역이냐, 제2의 창작이냐며 비아냥을 보는 것이다. 만약 그 번역자가 보면 어떤 마음이 들까 괜히 내가 뜨끔해진다. 물론 그렇게 쓴 리뷰어의 진위 여부를 좀 더 따져봐야겠지만, 번역은 단순히 외국어를 자국어로 옮기는 것이냐 아니면 이 책에서 말한대로 제 2의 창작으로 규정하느냐다. 책은 후자에 무게를 더 실어줬고, 나 역시 그것에 동의한다. 이를테면 번역엔 두 갈래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원작자의 의도를 중시해야 한다는 오리지널리스트이고 다른 하나는 번역문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액티비스트다. 전자는 아주 미세하고 사소한 원문상의 차이까지 존중하여 번역어로 최대한 정확하게 되살리려 힘쓴다. 후자는 자의적 정확성 보다는 조옮김한 음악과 같은 새 작품의 매력에 관심을 기울인다. 훌륭한 번역가라면 양쪽을 모두 겸비해야 한다. 번역은 언어와 언어간의 의미의 이동이 아니라 두 언어가 주고받는 문답이라고 페비어는 썼다(59p).

 

이 글을 읽었을 때 번역가도 역시 녹녹치 않은 직업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칭찬 보다는 욕을 더 많이 듣는 직업은 아닐까 싶다는 것이다. 페비어가 말했던대로 전자와 후자의 조화 즉 50대 50의 조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번역하는 책마다 이 비율이 정확히 맞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어떤 책은 51대 49가 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책은 40대 60 또는 30대 70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 이것은 번역가는 그래도 비율에 맞추느라 노력했는데 독자가 그렇게 안 봐주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앞서 얘기한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번역서는 있어야 한다는 것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번역가나 독자나 출판사나 말이다. 중요한 건 서로의 신뢰도를 높여 나가는 것이겠지.      

자주 나타나는 건 '번역투'란 조롱인데, 나는 솔직히 어떤 걸 두고 번역투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저자는 번역을 제2의 창작으로 규정하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작가들마다 자신의 특유의 문체가 있는 것처럼 번역자에게도 특유의 문체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작가에게 특유의 문체는 인정을 받으면서 번역가에겐 그것이 번역투로 조롱을 받는다면 좀 억울하긴 할 것이다.

 

단지 난 독자로서 그런 불만은 있다. 문체가 너무 조악한 경우다. 이 책의 원서는 어떻길래 번역이 이럴까? 한숨이 나온다. 그리고 그런 번역자가 다음에도 번역서를 낸다면 인정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거의 드러나지 않을만큼 우리나라 번역의 수준은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80년 대 번역으로 그 이름을 알리며 번역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던 제 1세대들, 안정효나 이윤기 또는 정영목 씨 이후 지금까지 번역 전문가들의 활약상은 가히 눈이 부시다고 생각한다. 또 좋은 번역자가 쓴 책만을 골라 읽는 독자의 안목도 세졌다.   

 

그런데 이 책을 대하고 보니 분명 번역가들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왜 그들은 원작자의 이름에 묻혀 자기 목소리를 낼 생각을 안하는지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번역가들에 대한 이해와 위상이 높아지지 않았을까? 

 

하나님이 바벨탑을 쌓는 인간을 보시고 인간의 언어를 흩어 놓으셨다고 했다. 그건 분명 인간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긴 하지만 번역가들에겐 분명 복음 즉 기쁜 소식이었을 것이다. 그들도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우리나라가 책 출판 10위 안에 드는 강국이라고는 하지만 번역된 책 보다 번역 안 된 책들이 더 많다. 그러니 번역자가 할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니 부디 원작자의 이름 뒤에 숨지 마시라. 

 

재미있는 건, 저자는 책에서 자신의 '돈기호테 번역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번역을 하기로 해 놓고 그야말로 앞이 캄캄했다고 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풉하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번역가도 이러는구나 싶었다. 솔직히 창작을 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느낄 것이다. 글을 쓸 때 완벽하게 뭘 알아서 쓰지마는 않는다. 글을 쓰다보면 안개낀 미로를 헤매는 것 같은 때가 있고, 어떤 땐 시작부터 어떻게 시작하지? 하며 막막해 하다 쓰는 경우도 있다.

하다못해 책 한 권 읽고 리뷰 쓰는 일 조차도 바로 쓰지 못하고 여기 저기 인터넷을 한동안 주유하다 쓰는 것을 보면 베껴 쓰는 일이 아니면 모든 글 쓰는 일은 다 어렵다.    

 

그리고 저자는 또 말한다. 번역을 잘 하기 위해 작품과 작가에 대한 자료들을 모아야 했는가에 대해. 당연 그럴 필요는 없다. 그랬다면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 연구자가 되는 것이겠지. 그리고 번역을 하다보면 운 좋게도 저자와 만나게 되는 최상의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그럴 때는 저자와 함께 노래하는 기분이라고 적고 있다(95p). 그 기분이 어떨지 감히 상상해 본다. 그래서 번역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책이 200 페이지도 안 되면서 쉽게 읽혀지지는 않는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알 것 같다. 책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번역자의 삶과 고충에 대해서도 좀 알아야할 것 같다. 읽어 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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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4-02-16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들려주려는 이야기를 알아채지 못하면 번역이 엉터리가 되겠지요. 왜냐하면, '직역'으로는 번역이 안 되니까요. 그렇다고, 문장을 '의역'으로만 옮기면, 이때에는 번역이 아닌 창작이 되니, 직역과 의역은 '오역'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고 말아요.

무엇보다도, 번역을 하려면, 제 나라 말을 잘 할 줄 알아야 해요. 영어를 잘 안다 한들 한국말을 제대로 모르면, 번역가가 영어로 된 책을 잘 이해했어도, 이 책을 한국말로 읽을 독자한테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겠지요.

다시 말하자면, 외국말을 전공해서 번역하는 사람이 꽤 많기는 해도, 막상 한국말을 함께 슬기롭게 익혀서 번역하는 번역가는 뜻밖에 퍽 적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쓰는 '비유'를 번역가가 공부하지 않으면, 번역이 엉터리가 될 테지요. 아무나 '이상한 나라 앨리스'를 번역하지 못해요. 영국이라는 나라가 흘러온 깊은 역사와 문화를 알지 못하면, 이 작품을 번역하지 못해요.

상품 해설서를 번역하는 일이 아니라, 인문책이나 문학책을 번역한다면, 마땅히 작가를 잘 알지 못하고서는 번역이 제대로 안 되겠지요.

한국말을 제대로 모르면서 번역만 하기에 '번역투'가 생깁니다. 그런데, 한국말을 제대로 모르면서 창작하는 사람도 많으니...

stella.K 2014-02-16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맞아요. 그래서 번역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도 우리나라에 원작자만큼 잘 알려진 번역자도 드물게는 나타나고 있으니
이 계통으론 좀 더 지켜봐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마지막 말씀은 저도 좀 찔리네요. ㅋㅠㅠ

페크pek0501 2014-02-18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좋은 주제에 대해 쓰셨네요.
"저자는 책에서 자국어로된 책들이 넘쳐나는데 남의 나라 책을 번역할 필요가 있냐고 물어 본다."
- 이건 굉장히 위험한 발언인 것 같아요.
당연히 남의 나라 책도 번역하고 읽고 해야죠.
남들은 우리를 아는데 우리는 남들을 모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외국영화를 보면서 우리나라와 다른 그들만의 문화를 보는 게 재밌더라고요.
가령 우리의 명절이라고 할 만한 크리스마스에 그냥 시어머니께 며느리가 간단히 인사하고
밥 한 끼 먹고 마는 그런 문화 같은 것이라든지,
이혼한 부부가 마치 친구처럼 만나고 새로 결혼한 배우자를 소개하는 것이라든지...
아이와 외할아버지가 친구처럼 대등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든지(아이가 할아버지의 이름도 부르잖아요.)그런 걸 보면서(또는 좋은 번역서를 보면서) 바람직하다고 할 만한 좋은 문화라면 외국 문화라 할지라도 우리가 배우고 흡수하는 게 좋단 생각이에요. 그러면서 좋은 문화를 형성해 나간다면 좋잖아요.
그러면 자연히 그와 대칭되었던 나쁜 문화들은 사라지겠죠.
물론 나쁜 문화는 우리 것이든 남의 것이든 비판해야겠지요. 사람도 비판...

(단, 남을 비판할 땐 '겸손하기'가 중요하다는 걸 요즘 새삼 느끼고 있어요.)
좋은 주제를 쓰셔서 님 덕분에 여러 생각을 하고 갑니다.
응원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stella.K 2014-02-18 18:51   좋아요 0 | URL
그렇지 않아도 리뷰엔 미쳐 쓰지 못했는데, 책에선 미국은 번역서를 잘 안 내기로
유명하다고 해요. 그도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지만 그건 정말 잘못된 생각이죠.
미국은 그렇게 오만을 부리다가 언젠가 뒤쳐지게 될 거예요. 그죠?ㅋ

2014-02-18 15: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18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유의 밥상 - 평범한 한 끼가 선물한 살아갈 이유
염창환.송진선 지음 / 예담 / 201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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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췌장암 선고를 받은 후 그를 위한 상차림은 내 담당이 되었다. 

우리 집은 오래도록 엄마가 음식을 해 놓으면 차려 먹는 것은 스스로 알아서 차려 먹는 주의라 우린 한 집에 살아도 언제, 뭘 차려 먹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다. 

그렇다고 오빠와 나 사이가 세상에 둘도 없는 애틋한 오누이 지간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나이가 많아도 장가는 커녕 집에서 독립할 줄 모르는 오빠에 대해 나는 적잖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오빠가 성격이 좋아 가족들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집안 식구를 '소 닭 보듯' 했다. 어쩌면 그리도 벽창호 같던지. 

그게 어쩌면 오래 전 사업 실패로 가산을 탕진한 것에 대한 후유증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득이나 과묵한 성격에 장남으로서 회생의 길은 오래도록 보이지 않았으니 가족들 볼 낫도 없고 점점 더 두터운 마음의 벽돌을 쌓아 갔을 것이다. 아무리 가족이어도 그런 사람을 오래도록 참고 인내하기란 쉽지 않다.   

아직 암인 줄은 모르고, 오빠의 몸이 첫 전조증상을 보이기 시작하던 날(사실은 그게 첫 번째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빠는 그 보다 더 오래 전에 뭔가를 감지했을 것이다. 단지 별거 아니려니 과묵한 성격이었으니 표현을 안하고 있었을 뿐이었겠지)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작년 설이었다. 무슨 일인지 하루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언니네 식구들이 아침 일찍 도착해 놀다가 저녁무렵 돌아가는데도 나와 보질 않는 것이었다. 그걸 이상하게 여긴 엄마가 그때서야 물어 보니 속이 아파서라고 했다. 엄마와 나는 뭔가를 잘못 먹고 크게 얹혔다고 생각했다. 생전 뭘 잘못 먹고 탈이 나 본적이 없는 오빠였는데 그런 오빠도 이제 늙는구나 싶었다. 

그래도 하루종일 뭘 못 먹었으니 이때쯤 뭘 먹겠지 싶었는데 차려라도 달라는 듯 꼼짝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밥상을 차려주긴 했지만 순간 부아가 났다. 나도 피곤해 죽겠는데 누가 누구더러 밥상을 차려 달라는 말인가? 그렇다고 화가 난다고 해서 화를 쏟아 부을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엄마의 화살이 나에게 쏟아질테니까. 그래서 애꿎은 반찬그룻에 화를 풀곤 했다. 그걸 밥상 위에 일부러 요란하게 놓는 것이었다.

그런 내 기분을 오빠가 몰랐을까? 알았을 것이다. 밥을 빌어 먹으러 온 거지에게도 그렇게 줘서는 안 되는 법인데, 음식도 좋은 마음으로 담아 줘야 그 사람이 먹고 건강해진다는데 그때 내가 그렇게 화를 내서일까? 그것이 오빠가 건강한 사람으로써 먹은 마지막 밥상이었을 것이다. 

아니다.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먹은 첫 끼니는 아니었을까? 오빠는 그 이후로 선고를 받을 때까지 쭉 죽으로 버티고 있었으니까. 그 이후는 말 할 것도 없고.

정 없는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 준다는 게 얼마나 어색한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하지만 또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뭘 해 준다는 것은 정이 있어서가 아니다. 해 주다 보면 정이 생기기도 한다. 그걸 오빠와 난 오래도록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영문도 모르고 죽으로만 버텼던 오빠가 첫 퇴원을 해서 먹은 건 밥이었다. 담당 의사가 죽만 먹으려 하지 말고 밥을 먹으라고 권하길래 그러기로 하고 밥을 먹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예전만큼은 못 먹겠지만 그래도 반 공기는 먹지 않을까 싶은데 그 반 공기에서 반을 또 덜어내는 것을 보고 나는 다시 한 번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전까지 오빠는 무엇이든지 수북히 담아 먹곤 했다. 그랬던 오빠가 이것 밖에 못 먹는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오빠를 위한 밥상을 매일 차리면서 오빠가 식탁에 나와 앉아 먹으면 나는 내 방에 들어 와 울거나 한숨을 내쉬는 날이 많아졌다. 밥 공기에 4분의 1을 먹기를 몇 번을 숟가락을 들었나 놨다를  했고, 그나마 오빠가 숭늉은 목넘김이 좋은 것 같아 끼니 때면 거의 빠지지 않고 식탁에 놔주곤 했다.

오빠가 일평생 좋아했던 음식은 라면 포함한 면류였다.  

라면 한 번에 먹으면 하나 가지곤 부족해 꼭 두 개씩 끊여먹곤 했다. 저녁에 퇴근하고 들어와 마땅히 먹을만한 반찬이 없으면 으레 라면을 먹곤 했다. 그 라면은 누구에게도 뺏기기 싫었는지 엄마가 라면을 사 놓으면 사 놓는 족족 다 털어 먹고도 부족하면 직접 몇 개를 사서는 자기 방에 쟁여두고 먹었다.

나는 바로 오빠의 이런 점이 마음에 안 들었다. 자기가 라면을 먹었으면 먹은 것만큼 채워 두기도 해야지 자기 배만 챙기는 건 어느 계산법이란 말인가? 한 마디로 가족을 위해 희생할 줄 모르는 점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빠에 대해 섭섭해 하던 내가 오빠를 위해 울고 있는 것이다. 옛날처럼 라면 욕심내도 좋으니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차라리 좋겠다 싶었다. 그런 오빠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게 잘 믿기지가 않았다.

솔직히 오빠에 대한 나의 감정은 섭섭함이 지나쳐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 나는 오빠 보다 먼저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먼저 죽어서 동생에게 자신이 얼마나 무심했는지 가슴 깊이 후회하며 살게 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걸 생각한 것이 죄였을까? 오히려 그 벌을 내가 받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오빠가 정말 세상을 떠나자 알았다. 내가 오빠에게 그렇게 못 되게 굴었던 건 사랑 때문이었다는 걸. 평생 그 누구에게도 사랑 같은 건 구걸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오빠가 없고보니 내가 오빠를 향한 마음 하나, 생각 하나가 사실은 사랑 받지 못해 생긴 거란 걸 그제야 깨닫 게 되었다.  

건강 할 땐 사랑이 그렇게 중요한 줄 모른다. 물론 사람이 건강을 잃으면 인생에 있어서 막대한 손해를 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건강한게 과연 좋기만 한 것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한다. 건강을 잃어 떠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서 더 끈끈한 유대 관계를 갖게 되는 경우도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런 것을 보면 아프다는게 꼭 나쁜 것만도 아니라는 걸 오빠를 간호하면서 새삼 깨달았다.  

 

이 책 또한 바로 그런 책이다.

죽음이 아니면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진실들이 오롯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 참 특이하다. 그 진실의 이야기가 음식과 관련이 되어져 쓰여졌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식사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쓰여져 있는데, 꽤 감동스럽고 가슴저미기까지 한다. 책은 말한다.

우리가 일상처럼 하는 말 중에 '먹는 즐거움'이란 말이 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행복한 일은 음식과 함께할 때 그 기쁨이 배가 되고, 슬픈 일은 맛있는 음식으로 충격을 줄일 수 있다. .....

몸의 병으로 음식 섭취 자체가 불가능해진 사람들에게 '먹을 수 있다'라는 지극히 평범한 일이 마지막 희망이자 목표가 되기도 하고, 때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이유가 된다. (32p) 

 

그래서 죽음이 아니면 평상시에는 가족이라도 마주칠 일 없을 것만 같던 사람들이 호스피스 병동에서 음식을 앞에 놓고 극적인 화해를 하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안녕을 고하고, 떠나 보내기도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가슴저미는 애틋한 광경인가.

평소 자신을 거들떠도 보지 않던 남편을 위해 손수 병간호에 나선 어느 여인의 사연이 눈에 밟힌다('그녀의 막장인생 드라마'181p). 나와 어느 부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감정이입이 된다. 

죽음이 아니면 화해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다. 그래서 죽음은 삶 보다 위대한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인간을 화해와 용서로 이끄니까.

나도 그랬다. 오빠가 죽는다는데 오빠에 대한 케케묵은 감정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고 오빠를 향한 연민만이 남았다. 이렇게 될 것을 난 왜 그렇게 오빠를 미워했던 것일까?

오빠가 죽기 한 달여를 앞두고 나는 거의 매일 오빠를 보러 병원에 갔었다.

그때 오빠의 입맛은 들쑥날쑥이었다. 그때는 이미 밥을 끊은지도 오래됐고, 곡기를 끊을 수 없으니 엄마는 죽을 쒔다.  녹두죽,  잣죽, 전복죽, 야채죽 등을 번갈아 쒀서 조그만 용기에 조금씩 나눠 담으면 난 그것을 들고 오빠를 보러 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거의 대부분은 못 먹겠다고 퇴짜 맞고 집으로 다시 가져 오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오빠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가져 온 죽을 맛있게 다 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더니 질문이 많아졌다. 나에게 이것저것 성경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 그게 참 낮설기도 했지만 동시에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오빠에 대한 정을 새삼 떠올리게 만들어 마음이 순간 복잡했다.

그리고 내가 믿는 하나님께 살짝 원망이 들기도 했다. 오빠에게 이런 마음을 주시려면 좀 더 일찍 주실 일이지 왜 이런 마지막 순간에 이토록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겁니까!

사람이 죽을 때가 가까우면 마음이 변한다더니 오빠는 그때 완전 무장해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힘들테니 보호자를 위한 간이침대에 누워 쉬라고까지 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게 나와 오빠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오빠의 죽음에 가장 가슴이 무너졌을 사람은 엄마였을 것이다. 평생 우리를 먹이고, 입혔던 사람.

이 자식 먼저 앞 세우자고 그렇게 힘들 게 낳아 두 젖 물리지 않았을 텐데 어쩌자고 그 아들은 머리 하얀 어미를 두고 먼저 간 걸까?

멋 없고, 정 없던 아들이긴 했지만 그냥 무탈하게 살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리라고 생각했단다. 그런 아들이 암에 걸렸다고 했을 때 당신은 새파랗게 질려 병원에서 오자마자 오열했었다.  죄라면 낳고 먹이고 입힌 죄 뿐인데 왜 오래 살아 이런 몹쓸 꼴을 봐야하는 거냐고 엄마는 한탄 했었다. 

 그런 엄마가 아들이 투병에 들어가면서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구운 굴비를 50이 다 된 아들을 위해 직접 찢어 가시를 발라 밥 숟가락에 올려주기 까지 하는 것이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과연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을 실감했다. 또한 오빠를 보면서는 자식은 몇 살을 먹어도 부모님 앞에선 한 없는 어린 아이라는 알았다. 그렇게 병든 아들이라도 죽어 없는 것 보다 살아 있는 것이 낫을 것이다.

우리 시대 부모님은 달리 이렇다 할 삶의 재주가 없으셨다. 그저 하루하루 가족과 함께 먹고 사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이 더 중요했을까? 당신의 손으로 밥상 차려내며 사셨던 우리네 어머니들에게 자식을 먼저 앞세운다는 건 확실히 가혹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때는 순서가 없는 것을.

아들을 그렇게 먼저 보내놓고 엄마는 모란 시장으로 김칫거리를 사러 나가셨다. 무슨 정신이 있어 그렇게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슬프면 슬픈대로 목놓아 울지 김칫거리가 뭐 그리 급하다고 그렇게 길을 나섰던 것일까? 

처음엔 말리기도 했지만 나중엔 못 이기는 척 말아 버렸다. 그것도 당신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식이라면 그렇게 하도록 놔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아들을 잃은 슬픔을 길에 쏟아 버리지 못하고 못내 집에 돌아와 쏟아내는 것이었다.  

김칫거리는 산 사람을 위한 거지만 당신의 마음은 죽은 아들에게 가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식구들이 아니면 삶의 의미가 없는 게 엄마고, 모성애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땐 먹는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저렇게 난리법석인가 짜증날 때도 더러는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우리를 위해 해 준 음식의 나날 중 그렇게 오빠와 나를 화해로 이끈 그 하루의 음식이 숨어 있는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쩌면 엄마는 그 하루를 위해 전부를 희생하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오빠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죽으면 엄마가 해 주는 음식을 더 이상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지금쯤 천국에서 엄마의 음식을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책은 말한다.

 

우리는 먹는다는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지 자주 잊는다. 먹을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가. 늘 기억하려 한다. 먹기 싫다는 이유로 생각 없이 남기는 음식이 지금 몸이 아픈 누군가에게는 죽기 전 꼭 먹고 싶은 마지막 희망의 음식일 수도 있음을.
(37p)

 이 책은 작년에 오빠를 잃고 읽었던 김여환의 <죽기전에 더 늦기 전에>와 많이 닮아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책 모두 다 호스피스와 관련된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김여환의 책이 호스피스와 웰다잉에 대해 (실제적인 사례와 함께) 이해를 돕는 책이라면, 이 책은 앞에서 말했던대로 죽어가는 자의 마지막 음식이 죽은 자와 남아 있는 자를 어떻게 위로하고, 연결시키는지를 에세이 형식으로 썼다. 

사실 읽다보면 우울하고, 슬퍼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린 언제든 죽는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한다. 살기 위해 기를 쓰고 살지 말고, 잘 죽기 위해 살면 삶을 사는 수준이 확실히 달라진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다 갑자기 들이닥치면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아는 사람은 안다. 그건 죽음을 항상 생각해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어떤 사람이 별이 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나중에 죽음이 나를 찾아 온다해도 덜 당황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이 참 고맙다.       

작가는 언제 또 이런 책을 기획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글을 썼던 것일까? 이 책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별 가족들이 위로를 받았을까를 생각하면 나도 작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작가는 모름지기 이렇게 휴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공저자인 염정환 교수도 참 남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완화 의학을 전공하고 호스피스 활동에 헌신하는 또 한 사람의 진정한 의사를 알게 된 것 같아 반가웠다. 

앞서 소개한 김여환 씨나 염정환 교수는 우리나라의 호스피스에 대한 잘못 된 인식을 바꾸는데 앞장서는 사람들이다. 

호스피스 병동하면 죽음의 마지막 종착역쯤으로 생각하고 가기를 거부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호스피스는 라틴어의 손님이란 말에서 유래된 말로써, 끝이 아니라, 통증을 완화하여 환자가 삶의 여유를 찾는 곳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인생의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269p) 이라고 한다.  그러니 정말 호스피스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야겠고, 이 분야에서 일하겠다는 의사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세상에 나쁜 의사도 있겠지만 염정환 교수처럼 사람의 아픔을 보듬는 의사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에게도 독자의 한 사람으로써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 책과 더불어 김여환의 <죽기전에 더 늦기 전에>도 함께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두 책 모두 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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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0 15: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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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0 16: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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