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밥상 - 평범한 한 끼가 선물한 살아갈 이유
염창환.송진선 지음 / 예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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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췌장암 선고를 받은 후 그를 위한 상차림은 내 담당이 되었다. 

우리 집은 오래도록 엄마가 음식을 해 놓으면 차려 먹는 것은 스스로 알아서 차려 먹는 주의라 우린 한 집에 살아도 언제, 뭘 차려 먹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다. 

그렇다고 오빠와 나 사이가 세상에 둘도 없는 애틋한 오누이 지간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나이가 많아도 장가는 커녕 집에서 독립할 줄 모르는 오빠에 대해 나는 적잖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오빠가 성격이 좋아 가족들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집안 식구를 '소 닭 보듯' 했다. 어쩌면 그리도 벽창호 같던지. 

그게 어쩌면 오래 전 사업 실패로 가산을 탕진한 것에 대한 후유증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득이나 과묵한 성격에 장남으로서 회생의 길은 오래도록 보이지 않았으니 가족들 볼 낫도 없고 점점 더 두터운 마음의 벽돌을 쌓아 갔을 것이다. 아무리 가족이어도 그런 사람을 오래도록 참고 인내하기란 쉽지 않다.   

아직 암인 줄은 모르고, 오빠의 몸이 첫 전조증상을 보이기 시작하던 날(사실은 그게 첫 번째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빠는 그 보다 더 오래 전에 뭔가를 감지했을 것이다. 단지 별거 아니려니 과묵한 성격이었으니 표현을 안하고 있었을 뿐이었겠지)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작년 설이었다. 무슨 일인지 하루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언니네 식구들이 아침 일찍 도착해 놀다가 저녁무렵 돌아가는데도 나와 보질 않는 것이었다. 그걸 이상하게 여긴 엄마가 그때서야 물어 보니 속이 아파서라고 했다. 엄마와 나는 뭔가를 잘못 먹고 크게 얹혔다고 생각했다. 생전 뭘 잘못 먹고 탈이 나 본적이 없는 오빠였는데 그런 오빠도 이제 늙는구나 싶었다. 

그래도 하루종일 뭘 못 먹었으니 이때쯤 뭘 먹겠지 싶었는데 차려라도 달라는 듯 꼼짝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밥상을 차려주긴 했지만 순간 부아가 났다. 나도 피곤해 죽겠는데 누가 누구더러 밥상을 차려 달라는 말인가? 그렇다고 화가 난다고 해서 화를 쏟아 부을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엄마의 화살이 나에게 쏟아질테니까. 그래서 애꿎은 반찬그룻에 화를 풀곤 했다. 그걸 밥상 위에 일부러 요란하게 놓는 것이었다.

그런 내 기분을 오빠가 몰랐을까? 알았을 것이다. 밥을 빌어 먹으러 온 거지에게도 그렇게 줘서는 안 되는 법인데, 음식도 좋은 마음으로 담아 줘야 그 사람이 먹고 건강해진다는데 그때 내가 그렇게 화를 내서일까? 그것이 오빠가 건강한 사람으로써 먹은 마지막 밥상이었을 것이다. 

아니다.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먹은 첫 끼니는 아니었을까? 오빠는 그 이후로 선고를 받을 때까지 쭉 죽으로 버티고 있었으니까. 그 이후는 말 할 것도 없고.

정 없는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 준다는 게 얼마나 어색한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하지만 또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뭘 해 준다는 것은 정이 있어서가 아니다. 해 주다 보면 정이 생기기도 한다. 그걸 오빠와 난 오래도록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영문도 모르고 죽으로만 버텼던 오빠가 첫 퇴원을 해서 먹은 건 밥이었다. 담당 의사가 죽만 먹으려 하지 말고 밥을 먹으라고 권하길래 그러기로 하고 밥을 먹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예전만큼은 못 먹겠지만 그래도 반 공기는 먹지 않을까 싶은데 그 반 공기에서 반을 또 덜어내는 것을 보고 나는 다시 한 번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전까지 오빠는 무엇이든지 수북히 담아 먹곤 했다. 그랬던 오빠가 이것 밖에 못 먹는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오빠를 위한 밥상을 매일 차리면서 오빠가 식탁에 나와 앉아 먹으면 나는 내 방에 들어 와 울거나 한숨을 내쉬는 날이 많아졌다. 밥 공기에 4분의 1을 먹기를 몇 번을 숟가락을 들었나 놨다를  했고, 그나마 오빠가 숭늉은 목넘김이 좋은 것 같아 끼니 때면 거의 빠지지 않고 식탁에 놔주곤 했다.

오빠가 일평생 좋아했던 음식은 라면 포함한 면류였다.  

라면 한 번에 먹으면 하나 가지곤 부족해 꼭 두 개씩 끊여먹곤 했다. 저녁에 퇴근하고 들어와 마땅히 먹을만한 반찬이 없으면 으레 라면을 먹곤 했다. 그 라면은 누구에게도 뺏기기 싫었는지 엄마가 라면을 사 놓으면 사 놓는 족족 다 털어 먹고도 부족하면 직접 몇 개를 사서는 자기 방에 쟁여두고 먹었다.

나는 바로 오빠의 이런 점이 마음에 안 들었다. 자기가 라면을 먹었으면 먹은 것만큼 채워 두기도 해야지 자기 배만 챙기는 건 어느 계산법이란 말인가? 한 마디로 가족을 위해 희생할 줄 모르는 점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빠에 대해 섭섭해 하던 내가 오빠를 위해 울고 있는 것이다. 옛날처럼 라면 욕심내도 좋으니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차라리 좋겠다 싶었다. 그런 오빠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게 잘 믿기지가 않았다.

솔직히 오빠에 대한 나의 감정은 섭섭함이 지나쳐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 나는 오빠 보다 먼저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먼저 죽어서 동생에게 자신이 얼마나 무심했는지 가슴 깊이 후회하며 살게 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걸 생각한 것이 죄였을까? 오히려 그 벌을 내가 받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오빠가 정말 세상을 떠나자 알았다. 내가 오빠에게 그렇게 못 되게 굴었던 건 사랑 때문이었다는 걸. 평생 그 누구에게도 사랑 같은 건 구걸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오빠가 없고보니 내가 오빠를 향한 마음 하나, 생각 하나가 사실은 사랑 받지 못해 생긴 거란 걸 그제야 깨닫 게 되었다.  

건강 할 땐 사랑이 그렇게 중요한 줄 모른다. 물론 사람이 건강을 잃으면 인생에 있어서 막대한 손해를 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건강한게 과연 좋기만 한 것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한다. 건강을 잃어 떠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서 더 끈끈한 유대 관계를 갖게 되는 경우도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런 것을 보면 아프다는게 꼭 나쁜 것만도 아니라는 걸 오빠를 간호하면서 새삼 깨달았다.  

 

이 책 또한 바로 그런 책이다.

죽음이 아니면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진실들이 오롯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 참 특이하다. 그 진실의 이야기가 음식과 관련이 되어져 쓰여졌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식사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쓰여져 있는데, 꽤 감동스럽고 가슴저미기까지 한다. 책은 말한다.

우리가 일상처럼 하는 말 중에 '먹는 즐거움'이란 말이 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행복한 일은 음식과 함께할 때 그 기쁨이 배가 되고, 슬픈 일은 맛있는 음식으로 충격을 줄일 수 있다. .....

몸의 병으로 음식 섭취 자체가 불가능해진 사람들에게 '먹을 수 있다'라는 지극히 평범한 일이 마지막 희망이자 목표가 되기도 하고, 때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이유가 된다. (32p) 

 

그래서 죽음이 아니면 평상시에는 가족이라도 마주칠 일 없을 것만 같던 사람들이 호스피스 병동에서 음식을 앞에 놓고 극적인 화해를 하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안녕을 고하고, 떠나 보내기도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가슴저미는 애틋한 광경인가.

평소 자신을 거들떠도 보지 않던 남편을 위해 손수 병간호에 나선 어느 여인의 사연이 눈에 밟힌다('그녀의 막장인생 드라마'181p). 나와 어느 부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감정이입이 된다. 

죽음이 아니면 화해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다. 그래서 죽음은 삶 보다 위대한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인간을 화해와 용서로 이끄니까.

나도 그랬다. 오빠가 죽는다는데 오빠에 대한 케케묵은 감정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고 오빠를 향한 연민만이 남았다. 이렇게 될 것을 난 왜 그렇게 오빠를 미워했던 것일까?

오빠가 죽기 한 달여를 앞두고 나는 거의 매일 오빠를 보러 병원에 갔었다.

그때 오빠의 입맛은 들쑥날쑥이었다. 그때는 이미 밥을 끊은지도 오래됐고, 곡기를 끊을 수 없으니 엄마는 죽을 쒔다.  녹두죽,  잣죽, 전복죽, 야채죽 등을 번갈아 쒀서 조그만 용기에 조금씩 나눠 담으면 난 그것을 들고 오빠를 보러 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거의 대부분은 못 먹겠다고 퇴짜 맞고 집으로 다시 가져 오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오빠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가져 온 죽을 맛있게 다 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더니 질문이 많아졌다. 나에게 이것저것 성경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 그게 참 낮설기도 했지만 동시에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오빠에 대한 정을 새삼 떠올리게 만들어 마음이 순간 복잡했다.

그리고 내가 믿는 하나님께 살짝 원망이 들기도 했다. 오빠에게 이런 마음을 주시려면 좀 더 일찍 주실 일이지 왜 이런 마지막 순간에 이토록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겁니까!

사람이 죽을 때가 가까우면 마음이 변한다더니 오빠는 그때 완전 무장해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힘들테니 보호자를 위한 간이침대에 누워 쉬라고까지 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게 나와 오빠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오빠의 죽음에 가장 가슴이 무너졌을 사람은 엄마였을 것이다. 평생 우리를 먹이고, 입혔던 사람.

이 자식 먼저 앞 세우자고 그렇게 힘들 게 낳아 두 젖 물리지 않았을 텐데 어쩌자고 그 아들은 머리 하얀 어미를 두고 먼저 간 걸까?

멋 없고, 정 없던 아들이긴 했지만 그냥 무탈하게 살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리라고 생각했단다. 그런 아들이 암에 걸렸다고 했을 때 당신은 새파랗게 질려 병원에서 오자마자 오열했었다.  죄라면 낳고 먹이고 입힌 죄 뿐인데 왜 오래 살아 이런 몹쓸 꼴을 봐야하는 거냐고 엄마는 한탄 했었다. 

 그런 엄마가 아들이 투병에 들어가면서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구운 굴비를 50이 다 된 아들을 위해 직접 찢어 가시를 발라 밥 숟가락에 올려주기 까지 하는 것이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과연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을 실감했다. 또한 오빠를 보면서는 자식은 몇 살을 먹어도 부모님 앞에선 한 없는 어린 아이라는 알았다. 그렇게 병든 아들이라도 죽어 없는 것 보다 살아 있는 것이 낫을 것이다.

우리 시대 부모님은 달리 이렇다 할 삶의 재주가 없으셨다. 그저 하루하루 가족과 함께 먹고 사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이 더 중요했을까? 당신의 손으로 밥상 차려내며 사셨던 우리네 어머니들에게 자식을 먼저 앞세운다는 건 확실히 가혹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때는 순서가 없는 것을.

아들을 그렇게 먼저 보내놓고 엄마는 모란 시장으로 김칫거리를 사러 나가셨다. 무슨 정신이 있어 그렇게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슬프면 슬픈대로 목놓아 울지 김칫거리가 뭐 그리 급하다고 그렇게 길을 나섰던 것일까? 

처음엔 말리기도 했지만 나중엔 못 이기는 척 말아 버렸다. 그것도 당신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식이라면 그렇게 하도록 놔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아들을 잃은 슬픔을 길에 쏟아 버리지 못하고 못내 집에 돌아와 쏟아내는 것이었다.  

김칫거리는 산 사람을 위한 거지만 당신의 마음은 죽은 아들에게 가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식구들이 아니면 삶의 의미가 없는 게 엄마고, 모성애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땐 먹는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저렇게 난리법석인가 짜증날 때도 더러는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우리를 위해 해 준 음식의 나날 중 그렇게 오빠와 나를 화해로 이끈 그 하루의 음식이 숨어 있는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쩌면 엄마는 그 하루를 위해 전부를 희생하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오빠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죽으면 엄마가 해 주는 음식을 더 이상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지금쯤 천국에서 엄마의 음식을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책은 말한다.

 

우리는 먹는다는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지 자주 잊는다. 먹을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가. 늘 기억하려 한다. 먹기 싫다는 이유로 생각 없이 남기는 음식이 지금 몸이 아픈 누군가에게는 죽기 전 꼭 먹고 싶은 마지막 희망의 음식일 수도 있음을.
(37p)

 이 책은 작년에 오빠를 잃고 읽었던 김여환의 <죽기전에 더 늦기 전에>와 많이 닮아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책 모두 다 호스피스와 관련된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김여환의 책이 호스피스와 웰다잉에 대해 (실제적인 사례와 함께) 이해를 돕는 책이라면, 이 책은 앞에서 말했던대로 죽어가는 자의 마지막 음식이 죽은 자와 남아 있는 자를 어떻게 위로하고, 연결시키는지를 에세이 형식으로 썼다. 

사실 읽다보면 우울하고, 슬퍼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린 언제든 죽는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한다. 살기 위해 기를 쓰고 살지 말고, 잘 죽기 위해 살면 삶을 사는 수준이 확실히 달라진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다 갑자기 들이닥치면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아는 사람은 안다. 그건 죽음을 항상 생각해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어떤 사람이 별이 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나중에 죽음이 나를 찾아 온다해도 덜 당황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이 참 고맙다.       

작가는 언제 또 이런 책을 기획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글을 썼던 것일까? 이 책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별 가족들이 위로를 받았을까를 생각하면 나도 작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작가는 모름지기 이렇게 휴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공저자인 염정환 교수도 참 남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완화 의학을 전공하고 호스피스 활동에 헌신하는 또 한 사람의 진정한 의사를 알게 된 것 같아 반가웠다. 

앞서 소개한 김여환 씨나 염정환 교수는 우리나라의 호스피스에 대한 잘못 된 인식을 바꾸는데 앞장서는 사람들이다. 

호스피스 병동하면 죽음의 마지막 종착역쯤으로 생각하고 가기를 거부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호스피스는 라틴어의 손님이란 말에서 유래된 말로써, 끝이 아니라, 통증을 완화하여 환자가 삶의 여유를 찾는 곳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인생의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269p) 이라고 한다.  그러니 정말 호스피스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야겠고, 이 분야에서 일하겠다는 의사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세상에 나쁜 의사도 있겠지만 염정환 교수처럼 사람의 아픔을 보듬는 의사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에게도 독자의 한 사람으로써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 책과 더불어 김여환의 <죽기전에 더 늦기 전에>도 함께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두 책 모두 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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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0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10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