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교회 잔혹사
옥성호 지음 / 박하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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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래 전 한 영화의 제목에서 따 온 거라는 건 확실해 보이는데 그것을 교회와 접목시켰으니 저자를 생각할 때, 이 사람 뭔가 작정을 해도 단단히 작정했구나 싶었다. 

 

더구나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이 교회를 탄압하기 위해서 쓴 거라면 그럴 수 있겠거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저자는 크리스찬이다. 크리스찬이 이렇게 자극적인 제목을 써도 되는 것일까? 요즘 시쳇말로 삽질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해 보면, 저자의 지금까지의 책을 돌아보건데 이런 책을 저자가 아니면 누가 쓸까? 일부 수긍이 가기도 한다. 저자의 책들은 일부 몇 권의 책을 제외하면 교회와 기독교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서슬퍼런 책들이 많다. 그리고 난 그런 책들이 싫지 않았다. 이 책도 그런 맥락의 책은 아닐까? 기대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더구나 소설의 배경이 되는 교회가 요즘 언론과 반대 세력의 질타를 받으며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교회가 아니던가? 공방이 뜨거워 배경이 되는 S교회에서는 이 책에 명예훼손 여부를 검토한 후 고소를 할지 말지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모르긴 해도 판매중지가 불가피 하니 그러기 전에 읽어 두는 게 좋겠다 싶기도 했다(그런데 아직까지는 그런 불행한 사태엔 이르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난 나의 느낌부터 얘기하자면 글쎄, 제목과 내용이 그다지 매치가 되는 느낌은 아니다. 즉 이 만한 소설에 그런 제목이 필요할까? 다른 제목을 했어도 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저자가 전문 소설가는 아니니 그런 것을 감안한다면 이만큼 쓴 것도 나름 나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야기의 구조나 등장인물도 (소설가가 아니어서인지는 몰라도) 깊이가 없고 왠지 급조했다는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교회가 기업화되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려고 했던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도 결국 목사의 자녀고, 현재 주의 종이 되기 위한 수련의 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무래도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싯점이 S 교회의 현재를 배경으로 했다는 걸 부인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소설과 겹쳐 보인다.  

 

어쨌거나 그렇게 생각해 보면 교회의 기업화에 대한 우려는 못해도 20년 전부터 논의가 되어왔던 거지 김건축 목사(S 교회로 보면 지금의 담임 목사)가 부임한 최근의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20년 전이라고 한다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S교회에 선대 목사님이 살아 계셨을 때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빠진 것이 있다. 그것은 김건축 목사가 담임 목사로 부임하기 전 교회에 대해 선대 목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목회를 해 왔는지 그 행적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는 거다. 물론 미루어 짐작은 할 수 있지만, 독자더러 미루어 짐작하게 만드는 것과 작가가 확실하게 다루는 것과는 엄격한 차이가 있다.

 

나는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왜 작가가 이것을 빠트렸느냐는 것이다. 둘 중 하나 아니었을까? 생각을 못했거나, 다루었다면 작가의 아버지를 직간접으로라도 표현 해야하니까 어떤 식으로라도 피해 가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완벽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보인다. 

 

또한 소설의 서초교회든 지금의 S 교회든 대중심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 사람의 마음은  그렇다.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땐 알게 모르게 비판도 하고, 흉도 보지만 그러다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그 사람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정이 남아 있어 이 사람이 살아생전에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이 부족했는지 거의 기억 못할 정도가 되어버린다. 

 

적어도 내가 보는 S교회는 아직도 선대 목사에 대한 추모의 정이 남아 있어서 그 분의 그림자가 교회에 깔려있다. 물론 나도 그분을 존경한다. 하지만 안타까운 건 그분이 돌아가시고나니 그 분의 빈자리가 너무 컸던 건지 마치 그분은 완벽한 인격에 완벽한 목회를 하셨던 것처럼 느껴져 조금 심하게 말하면 지금은 거의 우상처럼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분을 여간해서 놓아 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선대 목사는 그렇게 완벽한 분이 아니셨다. 물론 그분은 완벽을 향해 몸부림 쳤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추모의 정이 너무 강해 그 모든 것을 뛰어 넘어 보인다. 그래서 이런 가설도 가능하다. 즉 지금 겪고 있는 S 교회의 문제가 대중심리로 볼 때 자꾸만 현재의 담임 목사와 비교가 되고, 담임 목사는 살아 있으니 그가 잘못한 것은 더 크게 보이고, 상대적으로 선대 목사는 돌아갔으니 그 분의 잘한 면은 점점 더 부각되는 것이라면? (현 담임 목사를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담임 목사(소설에서 김건축 목사)가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 선대 목사와 다른 것이라면 어쩔 것인가?         

 

재미있는 건, 소설에 보면 살생부가 나온다. 새로운 목사가 부임을 했으니 물갈이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지만, 기존에 있는 사람이라면 살생부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살생부가 목사의 세계에서만 존재할까?(그 부분을 읽는데 난 약간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지 않다. 실제로 난 그 문제가 된 S 교회 살생부에 내 이름이 올라간 경험이 있다. 15년 전 일이긴 하다. 그렇다고 내가 그때 무슨 직원이었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나는 그때 일개 주일학교 교사였을 뿐이다. 단지 그동안 주일학교를 담당한 전임 목사가 사임을 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목사가 오면서 나를 살생부에 기록해 둔 것이다. 몰론 그 목사는 전부터 나를 알고 있는 목사다. 

 

같은 목사들끼리는 직급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바뀌면 그 내각도 바뀌는데 자기 좋은 사람으로 배치하는 거야 어느 회사 조직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봉사하는 성도에게 무슨 살생부일까 믿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이 분이 살생을 하는 것이다. 얌전히 가만히만 둬도 열심히 봉사할 사람들을 전임 목사의 내각 구성원이라는 이유만으로 갖은 중상모략을 일삼아 내치는 것이었다. 그 목사님 지금 뭐하냐구? 어느 수도권 지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목사로 맹활약 중이시다.

 

그렇다고 그 살생부의 목사님이 주일학교을 오래 역임했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2년인가 3년도 못 되어 교회를 나와 개척했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오래 있을 것도 아니면서 그런 소동극(?)을 벌이다니. 허탈한 웃음과 함께 대단하다는 말 밖엔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나를 비롯한 그 살생부에 있었던 사람들이 그 목사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 사람들도 아니었다. 일개 주일학교 교사가 하나님의 종에게 어찌감히 역심을 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난 살생부의 목사가 자신의 권위는 들어내고 싶어 안달 난 발정난 개처럼 보였다. 그게 S 교회 선대 목사가 아직 생존해 계셨을 때 내가 목도하고 직접 겪였던 일이다. 물론 선대 목사님은 결코 알 리 없는 일이겠지만, 그때도 S 교회는 결코 작은 교회가 아니었다. 물론 지금의 규모 보단 훨씬 작지만 그때도 그런 조짐이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이것이 문제라면 사실은 선대 목사님이 계셨을 때 이걸 지적했어야 한다. 

 

저자에겐 좀 미안한 얘기지만 이런 식의 소설을 쓴다면 오히려 나 같은 사람이 써야되지 않을까? 나는 교회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니까. 어쨌거나 그렇게 생각하니 작가는 어느 특정인을 의식해서 쓴 것도 같고, 큰 교회의 문제를 일반화 해서 쓴 것도 같다. 그런 교회 목사가 한 둘이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저자가 TV 인터뷰에 나온 걸 봤는데, 그는 이 이야기가 전혀 없는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사실만을 전하는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논지를 슬쩍 피해가며 얘기한 것을 보았다. 왜 그런지를 이 책을 보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난 그 살생부의 목사가 교회를 떠나 가는 것을 보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오늘 날의 주의 종이라는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건 자신이 목사라는 이유만으로 교회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이다. 교회는 목사의 교회가 아니다. 교회가 누구의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때 확실히 알았다. 하나님과 성도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왜냐하면, 나는 S 교회에 남았고, 그 목사는 S 교회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실에 목사는 그야말로 종처럼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그 목사가 그걸 알고 떠났을까? 아니. 모르긴 해도 그때도 모르고 떠났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모를 것이다. 죽을 때쯤에 깨달으려나? 그래도 지금 S 교회가 당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며 조금의 경각심을 갖긴 하겠지. 하지만 그 근간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S 교회를 다니면서 제일 많이 고민했던 건 왜 교회가 이상적인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그냥 조직처럼 느껴지느냐는 것이었다. 교회에서 직분 맡은 것이 무슨 큰 벼슬을 한 것마냥 편을 가르고, 세력을 규합하고 등등. 물론 선대 목사님이 교회에 대한 고민을 많이했겠지. 하지만 그 고민이 나에게까지 전달되지는 못한 채 난 한동안 이런 고민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선대 목사가 세상을 떠나고, 교회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 정리가 될 때쯤 교회의 일련의 사태들을 목도해야 했다. 그 세월이 또한 20년이다. 정리라기 보단 포기할 것 포기하고, 하나님께 맡길 것 맡기고 한 것이지만.

 

책은 어떠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은 채 마무리를 짓고 있는데, 실제의 서초교회는 이 보다 훨씬 시끄럽다. 분열되고 쪼개졌다. 이것을 두고 기존의 S 교회는 반대파라고 말하고 있고, 교회를 나온 사람들은 개혁파라고 한다. 누구의 표현이 맞는 걸까? 그리고 정말 누가 옳은 걸까? 이것 때문에 교회 잘 다니던 집안의 가족들도 갈라져 누구는 기존 교회를 누구는 개혁파 또는 반대파 교회를 다니고 있단다. 가장 연합과 일치를 보여야 하는 교회가 이렇게 되어버렸다.  

 

선대 목사는 누구 보다 교회의 회복을 위해 일생을 바쳤고, 한때 목사의 2대 세습이 사회 문제가 되면서 그건 합당치 않다고 해서 지금의 담임 목사를 추대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결국 이 사단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것도 저자인 선대 목사의 아들에 의해서. 그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물론 현 담임 목사도 죄 없다 하진 못하겠지. 죄 없는 사람이 어딨겠는가? 그런데 개혁파라고 하는 교회가 과연 담임 목사가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길래 이토록 집요하고 끈질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사람이 죄는 탓해도 인격은 모독하지 말아야 할 텐데 이미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물론 그들도 처음엔 저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들의 주장이 먹히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수위와 강도가 점점 세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괴물을 없애려다 자신 괴물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악한 것을 선한 것으로 개선시키는 것이 개혁이 될 수는 없는 것인가? 개혁파라고 하는 그들이 적어도 그런 의지를 보여줬더라면 나는 지금의 교회를 떠나 그들에게 합류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들은 교회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한다. 하지만 이제 누구도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런지는 꽤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시위는 언제 끝날지 모른다. 그렇다면 교회 앞에서 시위하는 게 과연 그들이 말하는 올바른 개혁일까? 

 

저자는 말했다. 우리 사회를 잔혹하게 만드는 성역과 금기가 사라지도록 하기 위해 책을 썼다고. 나도 이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지금 교회에서 떨어져나간 소위 개혁파가 선대 목사를 잊지 못해 주일날 목사님의 지나간 VOD를 틀며 예배를 드린다면 그게 하나님의 위한 교회인 것인지, 선대 목사를 우상화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인지 묻고 싶다. 그도 교회가 하나님과 성도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S 교회를 옹호하느냐면 그렇지는 않다. 나도 교회가 지나치게 커지는 것에 있어서 경계하는 쪽이다. 문제가 일어났을 때  예전 같으면 뭐 이런 교회가 다 있냐고, 이 교회가 아니면 다닐 교회가 없느냐 하며 교회를 떠났을지 모르고, 아니면 교회에 희망이 없다고 아예 교회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 교회를 여전히 다니는 건 앞서도 말했지만 교회가 목사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과 성도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마지막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잘 믿어놓고 실망해서 교회를 안 나간다면 그건 내 손해고, 내 책임이다.

 

여기저기서 문제의 징후를 감지한다. 무엇보다 구관이 명관이었던 건지 같은 교회 성도들이라고 해도 옛날의 그 사람들 같지가 않다. 어쩌면 그리도 자신이 믿는 하나님 외엔 뵈는 것이 없는 사람이 그리도 많아진 건지. 이것을 견디기도 쉽지는 않다. 하지만 그들이 변화될 것이라는 믿음 갖지 않는다면 교회를 다니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좀 이제 21세기를 사니 거기에 맞는 사고 방식을 가져야하지 않나? 대형 교회가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문제시 하는 것 또한 위험하다. 대형교회는 대형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런데 대형교회가 작은 교회를 잠식한다거나 성장을 방해한다는 식의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 빨리 이것부터 치유하고 대형교회와 소형교회가 나가야할 바를 모색해야 한다.

 

오늘 날 교회가 왜 그처럼 많고 작은 교회가 대형교회에 맥을 못추는데 그게 다 주의 종들이라는 목사들이 벌여놓은 일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서로 떠넘기고 있다. 왜 그런 일에 허비하고 있는 걸까? 성도들이 무조건 대형교회만 선호한다고 누가 그러던가? 목사라는 사람들이 본질을 놓쳐버리면 애꿎게 피해를 보는 쪽은 성도라는 걸 목사들이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루터와 칼빈이 일으켰다는 종교개혁은 오늘 날 21세기에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회 앞에서 피켓 시위하고, 선대 목사 VOD 틀고, 법원에 고소하고 이 정도 가지고 개혁한다고 어디가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도 좋은 취지에서 교회에서 분리돼 나왔겠지만 불가피하게 조직을 만들다 보면 그들 안에서도 내분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도 그들이 피켓들고 시위하고, 비판과 고소를 여전히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이 정말로 교회의 개혁을 원한다면 개혁된 모습을 보여주라. 그래서 따라하고 싶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또한 교회 바깥에서 그러는 건 하나도 소용이 없다.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토록이나 좋은 의도라면 말이다.

 

내가 아는 교회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이상사회의 모범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교회에 대해선 목사나 신학자들이 더 잘 알겠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교회는 유토피아는 아니었다. 누구든 다 오라면서 말이다.

 

교회는 어두운 것과 밝은 면이 함께 존재하는 곳이다. 또한 교회는 인내해야 하는 곳이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다 공존해 있기에 한 사람이 교회에서 개과천선했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또 이상하고, 미성숙한 사람들이 그렇게 되기까지 기다려줘야 한다. 그 이상하고 미성숙한 사람이 성도만 있는 것도 벅찬데 집사들에게도 있고, 장로들에게도 있으며, 심지어 목사들의 세계에도 있다. 

 

미성숙하다는 이유만으로, 선대 목사와 같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피켓들고 시위해서 변화될 것 같으면 나도 했을 것이다. 교회가 크면 큰만큼 시련도 있다. 선대 목사님을 생각한다면 현 담임 목사를 위해 기도부터 해야하는 게 원칙 아닌가? 선대 목사님도 다 성도들의 기도로 목회하신 분 아닌가? 

 

할 말은 많은데 이쯤 해 둬야할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몰랐는데 지금 새로 지은 교회 앞에 노송이 있는데 그게 거의 600년이란다. 우린 이제 길어야 100년을 살 뿐인데 600년 동안 인간의 여러가지 것들을 다 봤겠지. 그리고도 저리 조용히 있는 건 그게  단순히사람이 아닌 나무라서 그런 걸까? 

 

책에도 소나무야, 소나무야 하며 바비킴의 노래를 살짝 넣던데 저자는 그걸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해 넣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은 성도여야 하는 것 아닌가?

 

말없이 교회를 다니는 것이 담임 목사가 좋아서만이 아니다. 개혁파 교인들이 불쌍해서만도 아니다. 못난 소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못 낫기에 그저 교회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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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6-04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회 역시 여러 사람들이 모여 드는 곳이라 문제가 없을 수 없군요.
목사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부족한 인간임을 목사 스스로도 인정해야 할 것 같아요.
어릴 때 목사 설교를 들어보면 그야말로 '능력자'인 것 같았는데...
이젠 그보다 더한 사람도 그렇게 보이지 않죠.
'인간'을 알고 나니 차라리 그 어리석음에 연민이 생깁니다.

며칠 미세먼지로 창문도 못 열고 고생했는데,
오늘 날씨는 매우 맑음, 입니다. 좋은 공기 마시며 많이 걸어야겠어요.
님도 좋은 공기를 만끽하시길...

stella.K 2014-06-04 13:45   좋아요 0 | URL
무플이 될지도 모르는 리뷰에 댓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ㅋ
이 책 읽으니까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나더군요.
그런데 언니도 교회 다니시나 봐요. 전 안 다니시는 줄 알았거든요.
요즘 교회 보면 안타까운 일이 많죠.
옛날엔 나라도 구하는 신앙이었는데 말이죠.ㅠ
제가 교회 다니면서 겪은 이야기를 쓰라면 저 리뷰에 쓴 건 조족지혈이어요.

저자를 나쁘다고 할 생각은 없는데
전엔 서슬시퍼런 카리스마가 있어 좋았는데 지금은 뭔가 도가 넘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안타까워요.
카리스마도 자신의 자리를 지켰을 때나 멋있는 거지 지키지 못하고 있으면
방종내지는 허세란 느낌이 들어 씁쓸해요.
저도 내친김에 제 글을 쓸까봐요.
빛을 보고 안 보고를 떠나 기록이라는 건 중요한 거니까.ㅎ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독서를 꾸준히 하니 생각이 깊어지는 느낌이어서 좋았다. 책 속에 길이 있다더니 정말 뭔가를 발견할 것만 같아 자꾸 읽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작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책은 나에게 있어 선악과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자유의지를 시험하고자 에덴동산 중앙에 심어 두셨다던 그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다던 선악과.

 

오늘 날 책도 그런 것 같다. 책의 디자인이나 내용이 왜 그리도 설레고 탐스럽고 고혹적이기 까지 한 건지? 어떤 책은 정말 읽으면 금방이라도 지혜로워지고 똑똑해질 것만 같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눈이 밝아져 서로의 벗은 몸을 봤고, 또한 그로 인해 하나님은 남자에게는 일하는 수고로움을 여자에겐 해산의 고통을 더하셨다고 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과연 아담과 하와가 따 먹었다던 선악과는 나쁜 것이기만 한 것일까? 오히려 그 원죄가 누구에겐 하나님께 도전하는 영적 교만이기도 하겠지만, 누구에겐 오히려 온갖 고뇌와 몸부림으로 신께 더 가까이 가려는 매개물은 아니었을까?

 

책 역시도 그런 것 같다. 어떤 사람에겐 책이란 읽으면 읽을수록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어떤 사람에겐 지적 교만으로 가득 차게 만드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 같다.  

 

고백하건대, 그 시절 나는 책을 읽고 생각이 깊어지는 건 좋았지만 지적 교만이 자라고 있는 건 몰랐다 

 

아버지와 엄마는 툭하면 잘 싸웠다. 그때 언니가 벌써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니까 아버지와 엄마가 부부로 산지도 족히 15년쯤은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엄마가 언제부터 싸우고 살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만하면 지칠 때도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그분들의 싸움은 여간해서 잦아드는 법이 없었다.

 

남자와 여자는 금성과 화성만큼 서로 달라 싸울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내가 조금이라도 일찍 알았더라면 사는 게 좀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을 알리 없던 나는 두 분이 싸우는 게 정말 싫었다. 용기가 있으면 가출이라도 해 보겠는데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건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 그럴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이 소란함과 냉전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고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 보였다.

 

솔직히 어렸을 땐 그리 논리적 이지가 못해 아버지와 엄마가 싸우는 게 나 때문이라는 근거 없는 죄책감에도 시달리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서도 밝혔지만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몸이 안 좋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1] 나는 그것이 아버지와 엄마를 끊임없이 불화하게 만들었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중에 내가 다시 건강을 회복했을 때도 아버지와 엄마의 싸움은 여전했다. 그러니까 나 때문도 아니었다.

 

두 분이 싸우면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씩 말도 안하고 지냈다. 그것이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얼마나 괴롭고 처량 맞아 보이는 지 두 분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 이젠 나라도 그것을 깨닫게 해 드리는 수 밖에.

 

위로 언니도 있고, 오빠도 있지만 이런 일엔 나설 생각도 안 했고, 그 둘은 독서를 좋아하지 않아 별로 문리를 깨우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나마 문제의 심각성과 문리를 깨우치는 중인 내가 나서는 것이 날 것 같았다. 사람이 아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나의 앎이 뭔가 두 분의 평화에 기여할 수만 있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가화만사성이라고 집안이 평안해야 우리 4남매도 좀 기를 피고 학교도 다니지 않겠는가? 가뜩이나 싫어하는 학교를 이렇게 편치 않은 마음으로 다니고 있으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그래서 난 아버지께 아버님전상서를 썼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건, 나를 비롯한 우리 4남매는 워낙 아버지를 어려워하면서 자랐기 때문에 맨 정신으로 아버지 얼굴을 보며 얘기할 수는 없을 것 같고, 엄마와 아버지의 싸움엔 두 분이 똑같이 잘못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엄마는 여자고 약한 존재가 아닌가?[2]

 

또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가부장, 가부장 하는데 가정이 화목하냐 못하냐는 여자의 책임 보다는 남자에게 있다. 그래서 당연 그 상서는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다    

 

그때 뭐라고 썼는지는 기억엔 없다. 아마도 엄마와 잘 지내달라는 부탁의 편지를 썼겠지. 그것도 16절지도 아닌 8절지 갱지에 빽빽이 썼는데, 그래도 확실히 기억이 나는 건 맨 마지막에 저는 아버지를 존경합니다.’란 다소 낯간지러운 글 한 줄을 참가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편지를 드리고 하룬가 이틀 후에 아버지에게서 반응이 왔다.

 

그날 따라 아버진 맨 정신으론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건지 술이 다소 거나하게 취해서는 내 편지를 읽었고 감동해서 눈물까지 흘렸다고 했다. 순간 난 아, 이만하면 성공이구나 했다. 솔직히 나도 아버지에게 그렇게 해 보기는 처음이라 어떤 결과를 얻을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어려워만 하고 자랐으니 야단을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한테서 그런 반응을 얻으니 안도했고 흡족한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술을 안 드셨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난 원래부터 아버지가 술 취한 모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그만도 충분했다 

 

그런데 그때 또 아버지가 물었다. 너의 꿈이 뭐냐고. 난 아버지에게서 그런 질문을 받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있었다. 작가라고. 그러자 아버지는 작가? 그렇구나. 작가. 그래. 작가 해. 넌 충분히 작가가 될 수 있어.” 하는 것이었다.

 

물론 아버지가 그런다고 내가 당장 작가가 되는 건 아니지만 그날 나는 조그마나마 작가가 뭐 하는 사람일지를 알 것만 같았다. 그렇다. 작가는 모름지기 이렇게 자기 부모라도 서로 싸우면 화해하게 만드는 즉 글로써 평화의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작가는 대의를 위해 위험을 무릅쓸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기도 했다. 역시 작가는 멋있는 일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후에 아버지와 엄마가 더 이상 싸우지 않았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여전히 싸웠다. 그렇다면 그날 흘렸다던 아버지의 눈물은 뭐란 말인가?

 

세월이 흘러 나도 중학생이 되었다. 그때 또 한 번 아버님전상서를 올렸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엄마의 결혼 생활이 거의 20년에 가까워지고 있던 무렵이었다.

 

그런데 난 머리가 나쁜 것 같긴 했다. 그렇게 한 번의 아버님전상서를 올리고 몇 년간 지켜 보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냥 포기하면 될 것을 뭐라고 그 같은 일을 또 했더란 말인가 

 

아마 모르긴 해도 그때 나는 작가의 꿈이 그 어느 때 보다 확고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그러지 않았나? 작가 하라고. 미래의 작가로써 작가도 고집이 있다는 것을 보여 드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뭐 꼭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뭐든지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쉬운 법이다.

 

그때도 뭐라고 썼는지는 역시 기억에 없다. 아버지께 드리는 첫 번째 편지엔 그래도 말미에 존경한다는 말이라도 썼지만 두 번째 편지엔 뭐라고 마무리를 했는지 기억에 없다. 어쨌든 짐작은 했겠지만 결과는 첫 번째와 달라 참패였다.

 

무엇보다 처음에 아버지는 감동의 눈물까지 흘렸다고 했는데 이번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게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 차라리 아버지한테 야단을 맞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걱정이 되어 엄마와 상의를 했다. 결국 엄마와 관련이 있는 일이기도 하니 엄마가 무슨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엄마는 심리학자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궁금하면 아버지께 직접 물어 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난 좀 어이가 없긴 했다. 아버지랑 한 이불 덮고 산 세월이 몇 년인데 그렇게 남 얘기하듯 하는 걸까? 좀 믿을만한 정보 좀 흘려주면 안 되나? 내가 이렇게 엄마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또 어찌 생각해 보면 그것이 최선인 것도 사실이다. 모르면 물어야지 별 수 있는가? 물론 거기엔 엄마의 약간의 코치가 있긴 했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용기를 내 아버지를 내 방으로 모신 후 얼마 전 드렸던 글 읽으시고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때서야 기다렸다는 듯 네가 왜 엄마와 아버지 사이에 끼어 들어 참견이냐며 화를 버럭 내시는 것이었다.

 

순간 난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뒤통수를 얻어 맞는 느낌이었다. 내가 무슨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쩌면 그렇게 사람을 무안하게 하는 것인지 속이 상했다. 하지만 아버지 입장에서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잘 한다, 잘 한다 하면 진짜 잘하는 줄 착각하는 것이 또한 인간인지라 이러다 내가 어떻게 인생을 망칠지 모른다고 생각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도 생각이 짧았다. 물론 싸움은 좋은 것이 아니겠지만 인간이 살면서 어떻게 싸우지 않고 살 수 있을까? 형제들과도 하루가 멀다고 싸우는데.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나의 집이 아니다. 엄마와 아버지의 집이다. 나야 엄마와 아버지의 자식이란 이유로 얹혀 사는 것 아닌가? 생각하기에 따라선 두 분의 집에서 두 분이 싸울 수도 있다는 걸 그땐 생각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어찌 보면 두 분의 권리 같은 것 일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은 싸움을 통해 관계가 파괴되기도 하지만 다듬어지기도 한다는 걸 그때 난 미쳐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뭐가 그리 잘났다고 아버지를 훈계하려 했던 걸까?

 

어쨌거나 그러면서 아버지는 앞으로 엄마와 싸우던 말던 참견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나는 무슨 자존심인지 성경 말씀을 들이대며 성경에 보면 해 질 때까지 화를 품고 있지 말라고 했는데 도대체 며칠째냐고 따졌다.

 

그때는 아버지도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던 때이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성경을 들이대며 내 행동의 정당성을 꽤나 내세우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성경이 그러라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물론 나도 애초에 아버지를 그런 식으로 궁지에 몰아 넣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창피하기도 하고, 뭔가 빠져나갈 구멍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홧김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자 아버진 엄마와 화해하는 것도 나고, 싸우는 것도 나니 더 이상 참견하지 말라고 하곤 내 방을 훅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부부 싸움이 이젠 부녀 싸움이 될 판이었다.

 

나는 분하고 속상한 마음에 훌쩍대고 울었다. 엄마는 엄마대로 괜히 부녀 간에 싸움을 부추긴 것 같아 미안했던지 뭘 그런 걸 가지고 우냐며 위로하는 척 했다. 나는 속에서, ‘, 다 엄마 때문이야.’라고 하고 싶지만 말아버렸다.

 

아무튼 그래도 반쪽 짜리 성과는 있었던 걸까? 두 분은 얼마 못 가서 화해를 했다. 그렇게 두 분이 싸우다가도 때가 되면 언제 그랬냐 싶게 화해할 걸 뭐 때문에 싸우는 건지?

 

또 모를 일이다. 그 화해 끝에 두 분 중 한 분이, 이제 자식 새끼 머리 커 놓으니까 내 집에서 싸움도 맘대로 못한다고 투덜대셨을지. 그랬다면 그건 아버지일 확률이 높고, 그러면 엄마는 맞장구라도 칠 요량으로 그러게 말이예요. 어디서 족보에도 없는 자식이 나와 가지고……” 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난 그건 나의 영원한 선악과 책 때문이라고 말하리라.

 

하지만 나는 그 일을 두고두고 생각할 때 아버지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지만 그 물을 베고 안 베고도 역시 철저하게 두 사람의 몫인 것 같다. 그것은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다.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는 건 새만은 아니니까.[3]   

 

 

그렇다면 나의 똑같은 행동에 아버지의 첫 번째 반응과 두 번째 반응이 서로 달랐던 것은 뭘까?

 

추측컨대, 첫 번째는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 4남매는 아버지를 어려워하면서 자랐다. 그래서 아버지와는 눈도 잘 마주치질 못했다. 아버지 역시도 이런 자식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몰랐을 것이다. 그러다 내가 의외로 편지로 재롱 아닌 재롱을 부렸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을 것이다. 무엇 보다 그날 딸의 꿈이 뭔지를 알지 않았는가?

 

하지만 아버지의 두 번째 반응은 내가 그만큼 컸으니 당신에 대한 이해도 깊어질 줄 아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같은 것을 가지고 투정이나 부렸으니 얼마나 섭섭하셨을까? 그런데 난 정말 그 알량한 몇 줄의 글 가지고 아버지를 또 한 번 감동시킬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대의명분 보다 앞서야 하는 것이 인간이해일 텐데 아버지를 이해하기엔 나는 아직도 너무 어렸던 것이다. 그러니 책 좀 읽고 뭐 좀 알 것 같다는 이 생각은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가?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것이 없었던 거겠지.

 

싸움도 관심이 있으니 할 수 있는 것일 게다. 사랑이 식어버린 사람이 서로 싸우는 것 봤나? 아버지와 엄마는 꼭 30년 사셨다. 그 삶을 볼 때 안 싸웠던 세월은 합해봐야 10년이나 될까? 그래도 두 분은 끝까지 가정을 지켰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그런데 나는 자식으로서 두 분께 무엇을 바랐던 걸까?   

 

어쨌거나 난 그 후 아버지 말대로 더 이상 편지 같은 건 쓰지 않았다. 그리고 두 분이 싸우던 말던 더 이상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런데 언제였을까? 그때도 엄마와 아버지가 말 다툼을 했다. 하지만 이번엔 아버지도 늙는 것일까? 그렇게 싸워도 생전 우리 앞에선 엄마 험담을 하지 않던 아버지가 (엄마는 외출해서 집에 없었고)우리에게 고기를 구어 주면서 험담을 하는 것이었다. 순간 난 입맛이 떨어졌다. 이런 것도 집안이 화목해야 맛있는 거지 고기를 씹는 건지 고무를 씹는 건지 알 수가 없었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그러는 건 아버지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몇 마디의 볼멘 소리로 아버지 말을 막았다. 그러자 당신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지금에 와서 후회가 남는다. 그때 왜 난 아버지 말을 끝까지 들어 드리지 못했을까? 부부 싸움은 하면 좀 어떤가? 어차피 세상엔 화목한 가정 보단 그렇지 못한 가정이 더 많을 것이다.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생이 불행할 거라고 어떻게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가?

 

누구는 가정을 군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무리를 이루고 있는 작은 섬. 평소 아무 일도 없을 땐 관심도 없다 무슨 일이 있으면 함께 뭉치고 힘이 되어주기도 하는. 거기에 화목이란 어떤 의미일까? 요즘 ‘…의 역습또는 ‘…의 배신이란 역설의 논리를 담은 책이 나오기도 하는데, 가정이 늘 화목해야 한다는 것도 일종의 강박 같은 것은 아닐까? 그 말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누구는 결혼을 찬란한 오해로 시작해서 처절한 이해로 끝나는 거라고 하지 않는가?

 

어쨌거나 그때 아버지는 외로웠을 것이다. 아무리 엄마와 오래 살았어도 다 이해 받을 수 없어서 여전히 싸우고 있는 당신이 헛헛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을 자식이 이제 웬만큼 컸으니 이해해 줄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쓸 줄 알았던 자식. 그래서 어찌 보면 당신을 가장 잘 이해해 줄 것만 같은 자식이 오히려 그러고 나오니 섭섭하고 어색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책은 많이 읽었다고 자랑할 것이 못 되는 것 같다. 인간을 이해하려는 마음 없이 1만 권의 독서를 했다고 자랑한들 뭐하겠는가? 작가의 꿈은 가져서 뭐하겠는가?             

        



[1] 그때 나는 오른쪽 팔과 다리가 마비되는 불운을 겪었고, 생활하는 대는 거의 불편함은 없지만 난 그때부터 장애 3급이란 꼬리표를 달았다.   

[2]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나의 이런 생각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엄마의 생존 전략에 휘말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엄마도 아버지와 싸우니 얼마나 속이 상했겠는가? 그러면 스트레스를 누구에게든 쏟아 놓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여자는 수다로 스트레스를 푼다지 않는가? 물론 엄마는 우리들에게 직접 대놓고는 안 하더라도 전화로나 누군가 집에 놀러 오는 사람(친척이든 친한 사람이든)에게 그 동안 남편에게 받은 압박과 설움을 쏟아 놓는 것이다. 물론 그럴 때 그 대상이 남자일 리는 없다. 아이는 어른의 대화에 낄 수 없다는 불문율이 있다고 해도 오다 가다 이것을 들을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듣고만 있어도 여자는 꽤 불행한 존재라고 알게 모르게 세뇌를 당하는 것이다. 더구나 나는 여자고, 가재는 게 편 아닌가? 그러니까 그때 나는 아버지에게 엄마를 변호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3] 헤세의 <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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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5-28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내용과 관련된 몇 책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저도 가끔 충고를 받습니다. 책을 너무 많이 읽지 말라고요.

우리 부모님 세대는 (심하게 강조하면 현세대와 고려시대를 산 것과 같이) 우리와 다른 세상을 살았기 때문에 소통도 공감도 안 될 수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저의 교만이겠지만) 딸 아이보다 제가 지적 우위에 있기 때문에 딸 아이의 관계에 책임이 저에게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 이유로 부모님과의 관계 책임도 저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stella.K 2014-05-29 11:41   좋아요 0 | URL
그래서 제가 이 페이퍼를 통해 고백록을 쓰는 것 아니겠습니까?ㅎㅎ
사람을 이해한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 같아요.

마립간님 그리 말씀하시니 생각난 건데,
그런 사람이 있다더군요. 너무 많은 책을 읽어서 미쳐버린 사람.
그런데 저는 미칠 정도로 많이 안 읽어봐서 그런지 과연 많이
읽었다고 문젤까 싶기도 해요.
배워서 남 준다고 알면 아는 만큼 인류 사회를 위해 써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고 순환이 안 되서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해요.
너무 비약인가요?ㅋㅋ
하긴, 지식도 공해가 되면 안 되겠죠.
중요한 건 지성인이 되야하는데 말이죠.^^

페크pek0501 2014-05-30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를 편지 글로써 해결하려는 것으로 보아 으음~~ 글 쓰게 될, 심상치 않은 조짐 같아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거죠.ㅋ

그래서 자식이 크면 부부싸움도 맘대로 할 수 없다는 거죠. 그래서 밖에 나가 싸우고 들어오는 부부가 있더라고요. 요즘 폰 문자로 싸우는 방법도 있죠. ^^
제 나이쯤 되고 보면 싸울 일도 없어요. 귀찮기도 하고... 어지간히 맞춰지기도 했고...ㅋㅋ


stella.K 2014-05-31 13:00   좋아요 0 | URL
그 떡잎이 자라서 지금은 누렇게 변했어요. 언제 떨어질지 몰라요.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하고...ㅎㅎ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부부관계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는...

푸른기침 2014-06-28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잠시 왜 책을 읽나하고 잠시 생각에 빠졌습니다.
한 때는 미친것처럼 책만 읽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젠 책을 버리는 것이 목표가 되었네요.
책을 읽는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공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내 주변과 사람들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절실한 시대엔 더더욱 그러하고요^^
물론 너무 낭만적인 생각이지만요.

stella.K 2014-06-28 16:10   좋아요 0 | URL
우리는 그 낭만을 복원할 필요가 있지요.^^
 
당신의 책을 가져라 - 지식경영시대의 책쓰기 특강
송숙희 지음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팽개쳐 둔 책

 

글 쓰기에 관심있는 사람치고 그 분야의 책 한 권쯤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분명 나도 대여섯 권은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손 재주 없는 사람이 연장 탓하고, 공부 못하는 사람이 참고서 탓한다고, 글 못 쓰는 사람이 쓰라는 글은 안 쓰도 글 쓰기에 관한 책만 열심히 본다는 말이 있다.   

 

그래도 나에게 있어서 글 쓰기에 관한 책을 얼마만에 한 번씩 읽어주면 묘하게도 활력을 얻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글 쓰기에 관한 책은 글 쓰는 사람들에겐 비타민 같은 거란 생각이 든다. 모름지기 어떤 분야든 그 분야에 관한 책은 희비가 엇갈리고, 성패가 확실히 좌우 되지만 그 분야를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즉 노하우에 관한 책은 못해도 기본은 한다. 그러니까 요즘 글 좀 써 봤다는 사람들이 글 쓰기 노하우에 관한 책을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책은 몇년 전 아는 지인의 사무실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가져 온 책이다. 나도 글 잘 쓰길 몸살나게 바라는 위인이니 이런 책을 발견하면 그냥을 못 넘어가는 건 당연했다. 마침 그 지인도 흔쾌히 내 준 터라 가져 왔지만 나는 몇 장 읽다가 방 한구석에 방치해 두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글 쓰기에 관한 책이라고 하지만 나는 주로 소설 쓰기에 관해 관심이 많은데 뭔가 자기계발류의 책처럼 다루고 있는 것 같아 막상 읽을 마음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안 읽었으면 큰일 날뻔한 책 

 

그런데 최근 책정리를 하다 문득 이 책을 발견하고 한 번 마음 잡고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이 책 안 읽었으면 큰 일 날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저자가 이토록이나 독자로 하여금 자기 책을 가지라고 열정적으로 설득하고 있는 것인지, 그 설득에 감동하고 나도 정말 내 책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마구 드는 것이다. 

 

솔직히 그동안 읽으려다 포기했던 건 자기계발류인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나에 관해 쓸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에 대해 뭘 써야할지 정말 막연했다.

 

하지만 정말로 없느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머리가 터져나가리만큼 쓰고 싶은 글은 많은데 이것을 도무지 글로 풀어낼 수 없어 끙끙거렸던 날이 어디 한 두 해인가? 그런 사람을 '그라포마니아'라고 한단다. 즉, 뭔가를 책으로 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나 욕구. 

 

그렇게 나는 오래도록 이 욕구를 풀어내지 못했다. 게으르기도 하거니와 과연 내가 쓰려고 하는 글이 과연 책으로 나올 것이며, 읽어 줄 사람이 있기나 할 것인가? 거기에 대해 책에서 저자는 롱펠로의의 시를 인용한다.

"허공을 향해 화살을 쏘았네.

화살이 떨어진 곳이 어딘지 몰랐네(중략)

먼 훗날 뒷동산 참나무에서

나는 아직도 부러지지 않고 박혀있는 그 화살을 찾았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내 얘기가 뭐가 도움이 되겠어란 생각은 미리부터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안톤 체호프도 한마디 거든다.

"짚신도 짝이 있듯이 아무리 형편없는 작품도 읽는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두려워 말라"

 이 말은 확실히 나에겐 용기가 되는 말이다. 솔직히 글 쓰기에 관한 책을 꽤 읽었다고 생각하는데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몰라도 이렇게 말해주는 저자는 아직까지 못 만난 것 같다.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하게 돼 있다는 말도 있는데, 내 글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하는 이 오래되고 케케묵은 생각은 저 말 앞게 어찌보면 글을 쓰지 않기 위한 구실처럼도 느껴진다.

 

 

또한 이런 모든 생각을 뒤로하고 일단 써 보자고 독하게 마음 먹고 달려들지만, 왜 그리도 본론을 말하기 위해 서론이 끝나지 않고 있는 것인지, 클라이막스는 저만치 있는데 전개는 왜 그리도 장황한 것인지 결국 쓰다가 지레 지쳐 손을 놓은 적도 여러 번이다.  

 

이것에 대해 저자는 꼭 처음부터 단계를 밟으며 쓰려고 하지 말라고 한다. 그것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도 그의 인터뷰에서 했던 얘기다. 어디든 자기가 쓰고 싶은 부분부터 원고지를 채워 나가는 것이다.

"하고 싶은 것부터 해라. 결국 중요한 것까지 다 하게 된다."(182p)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글 쓰기 작업을 최대한 편하고 자유롭게 하라는 말일 것이다. 

 

나에겐 위로가 되어 준 책  

 

이 책은 많은 부분에서 실제적인 조언과 지침을 주는 책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나에겐 위로가 되어준 책이기도 한다. 특히 저자의 <미루기를 조장하는 절대미신 5가지>는 정말 음미해 볼만 하다. 그중 "쓰다가 안 쓰면 아니 쓴 만 못하다."란 생각 때문에 아예 시작 조차도 못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설혹 어떻게든 쓰기 시작은 했지만 중간에 길을 잃어버리고 헤메다 결국 손을 놓아버린 글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러고나면, 난 역시 안 돼하며 자괴감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완강하게 말한다. 

천만에! (쓰면)쓴 만큼 이익이다. 한계효용이라는 경제학이론도 있다. 쓰다 말다 하더라도 일단 써라. (182p)      

그런데도 쓰다가 안 쓰면 아니 쓴만 못하다는 말은 남들도 흔히 하는 말이다. 안 그래도 스스로도 자괴감에 빠져 있는데 남들 조차 그런 말을 해서 2차로 상처를 더 조장한다. 그럴 땐 저자의 저 말을 기억하면 좋겠다. 그것도 못하겠으면 경제학 이론 "한계효용"만이라도 기억하자.    

  

그런데 이 분야에 관한 책이 하나 같이 공통적으로 얘기하는 것 하나가 있다. 그것은 그냥 써라!다. 이 책도 그것을 그냥 비껴가지 않는다. 이제 이 말은 하도 많이 들은 말이라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다. 하지만 이 말이 정말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라고 정말 느껴진다면 그 사람은 정말 책을 써 낼 사람은 아닐까? 아닌 사람은 귀에 딱지도 안 앉을 테니까. 그리고 이 말처럼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말이 또 있을까?

 

글은 왜 쓰냐고 묻는다면 쓰는 것 자체가 나에겐 위안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쓰는 것을 통해서만이 진실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더불어 누군가 내게 작가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최근 이 타이틀을 달고 나온 책도 있지만), 나는 그야말로 아주 단순하게 말할 것이다. (책이 될)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은 많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것과 하고 싶어하는 것엔 많은 차이가 있다. 이제 하고 싶어 하지만 말고 그냥 해라! 이 세상 어딘가 누군가는 당신의 얘기를 좋아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어라.

 

출판 관계자 여러분께...    

 

요즘엔 출판 환경이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지긴 했다. 예전엔 정말 저명한 작가, 학자, 번역가들처럼 검증된 사람만 글을 쓸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반인들도 책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책을 내 본 경험이 전혀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이렇게 된 것엔 인터넷, 특별히 카페나 블로그 활동이 주효했다고 보는데 그렇더라도 역시 한 개인이 책을 내는 건 녹녹치는 않다. 꼭 이 책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책도 알고보면 처음엔 얼마나 많이 퇴짜를 맞았는지는 심심치 않게 듣는 바다.

 

그런 걸 보면 책을 출판한다는 건 정말 복불복이란 생각이 든다. 이렇게 한쪽에선 책을 쓰라고 하면서 정작 이 의지를 꺾는 건 출판사는 아닌가 싶기도 하다. 누구보다도 좋은 책 내길 바라는 출판사가 이렇게나 안목이 없다니? 하며 혀를 끌끌차고 싶을 정도다. 그래서 출판 에이전시가 없는 우리나라로선 작가지망생들이 죽어라고 신춘문예나 무슨무슨 문학상에 목숨을 거는 거 아니겠는가? 난 정말 예전엔 작가가 되려면 꼭 이 관문을 거쳐야 작가가 되는 줄 알았다. 

 

자비 출판이란 것도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것에 관한 편견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우선 돈 있는 사람의 허영처럼도 느껴지고, 출판사의 정식 절차가 오죽 자신이 없으면 자비 출판을 하는가 하는 생각도 작용할 수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책을 쓰고자 원하는 평범한 사람이 사각지대에 놓일 수 있는 위험요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꺼진 불도 다시 보랬다고, 아무리 퇴짜 맞은 원고라도 다시 한 번 더 봐 주었으면 한다. 또한 아무리 자본주의 세상이라고 하지만 꼭 승률이 있는 원고만 목 빼고 있지말고 여러 다양한 시도를 해 줬으면 한다. 출판 관계자들도 자신들의 안목을 100%로 신뢰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물론 전문가의 눈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글을 쓸 환경을 만들 것인가?         

 

사실 책은 세 가지가 충족이 되어야 한다. 우선 작가가 좋은 책을 쓰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출판사가 좀 더 열린 마음을 가져줘야 하고, 독자 역시 좋아하는 분야, 좋아하는 작가의 책만 읽지 말고 여러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며 특별히 이제 막 책을 낸 사람들의 책을 읽고 여기저기 소문을 내줘야 한다. 그렇게 해야하는 이유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언제 책을 내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나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다니! 책을 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생각 보다 크다. 그러니 아무리 블로그나 SNS가 편하게 자신의 신변잡기를 자유롭게 쓰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만 운영하지 말고 자신이 잘 알고 있거나 관심있는 한 가지 주제에 깊이 있는 글을 정기적으로 올려 보라. 그 어떤 것이어도 좋다. 누구는 코 파기 가지고도 글을 썼다니 않는가?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책을 내자고 연락을 받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걸 혼자하고 있으려니 진척도 느리고 힘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글을 쓸 수 있는 여러 가지 환경 조성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고, 또 이미 검증된 방법을 소개하고 있어 도움이 많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나는 나름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다. 혼자하지 말고 그룹으로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물론 글쓰기가 혼자하는 작업인 것은 사실이지만 글 쓸 주제가 있고 습작이 아닌 출판을 목적으로 글을 쓰는데 초보 작가들은 혼자 하기가 어렵고 진척이 더딜 것이다. 그럴 땐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끼리 그룹으로 작업을 해 보면 어떨까? 모임을 인도하는 출판 전문인 하나 있으면 좋고, 없을 경우엔 이런 책 하나 메뉴얼로 삼고 같이 하면 좋지 않을까?

 

나는 요즘 글 쓰는 작업에 있어서는 무궁화란 생각이 든다. 무궁화는 낮에는 활짝 피지만 밤이되면 봉오리를 오무리고 있는 꽃이 아닌가? 그렇게 내일이 있기에 오늘 희망으로 잠을 자지만 다음 날이 되면 여전히 꽃처럼 살지만 그 자리를 맴돌고 있거나 믿을 수 없을만큼 조금 글을 쓰고 하루를 마감한다. 그걸 반복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나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사람을 위해 하는 말이다.  

 

언니처럼, 누나처럼...             

 

책이 어느 장 하나 허투로 쓰여진 부분이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정말 프로답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인용 부분이 인상에 남는데, 이걸 어떻게 다 정리해서 이렇게 적재적시에 써먹는 걸까? 부럽기도 하고, 셈이 나기도 한다. 

 

읽으면서 책을 내려면 정말 적극적이고 용이주도한 사람이 되야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비근한 예로, 나는 쓰고자 원하는 내용만 충실히 쓰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것은 출판사에서 해 주는 것 아닌가 하는 부분까지도 사실은 저자가 해야하는 것임을 세심하고 명료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런 것이 마치 깐깐하면서도 인정많은 언니 같고, 누나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저자는 친절하게도 자신이 현재 운영중인 카페 주소를 알려주며 필요하면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하라고 권한다. 

 

이 책은 현재 인터넷 서점에선 품절로 나오고 있다. 이런 좋은 책이 품절이란 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기 책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강추하고 싶은 책이다.      

     

리처드 J 라이더와 데이비드 A 샤패로는 <새로운 선택을 위한 선택>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라면 당신 꿈의 본질, 평생 과업인 게 분명하다고 속개한다.
배운 기억은 없지만 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일
별로 노력하지 않고도 탁월하게 잘 하는 일
당신이 남들의 솜씨를 지켜보기보다 다른 사람이 주로 당신의 솜씨를 지켜보는 일
빨리 배우고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지는 일 31P

'제대로 사는 인간'이란 정말 중요한 것에 힘을 몰아주고 나머지는 대충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한다. 에디슨은 평균 스무 시간씩 일했는데 그는 그것을 일이라 여기지 않고 공부라 불렀다.(4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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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5-25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글쓰기에 관한 책을 수십 권 읽지 않았을까 싶어요. 세어 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제 독서목록을 보면 그럴 것 같아요. 처음 글을 쓰려고 했던 초창기엔 이런 책을 많이 봤거든요.
제가 독서를 늦게 시작한 편이라 남보다 못한 어떤 열등감 때문에 그런 것도 같아요.

요즘은 이런 책을 사 볼 땐 그저 복습한다는 기분으로 가볍게 읽으려 해요. 님의 말씀처럼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아 주기도 하고요. 어쨌든 여전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에요.

"'제대로 사는 인간'이란 정말 중요한 것에 힘을 몰아주고 나머지는 대충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한다." - 이 문장에 꽂혔어요. 제게 필요한 말 같아서요. 일상이 복잡하여 한 방향으로만 갈 수 없는 현실이에요. 그래서 이 문장에 위안을 받습니다.

stella.K 2014-05-25 13:56   좋아요 0 | URL
요즘엔 글쓰기도 글쓰기지만 작가들의 삶을 다룬 책에 관심이 더 많이
가더군요.
그런데 이 책 정말 열심히 썼는데 공감이 많이 없네요.
글 속에서 저자의 열정이 느껴졌는데 말예요.ㅠ
정말 프로더라구요.

밑줄긋기 통합하니까 별로 안 좋은 것 같아요.
한 페이퍼에 다 넣으면 너무 길어 지잖아요.
페이지 넣기도 없어졌어요. 투덜투덜~ㅠ
 

이야기는 힘이 세다  

 

사람의 유전자엔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하는 성질이 있다고 한다. 그 말이 맞기는 맞는가 보다. 유년 시절 아무나 보면 옛날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또 그만큼 이야기를 잘 해 주는 사람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잘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 우리는 흔히 옛날 이야기는 할머니가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선생님이 아닐까? 선생님은 아는 것도 많을 테니 그런 기대가 많은 거겠지. 이왕 선생님 얘기가 나왔으니 내 인생의 선생님들을 얘기해 볼까 한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신을 가르쳐준 선생님을 잊을 수 있을까? 물론 스승의 은혜란 노래도 있긴 하지만 솔직히 은혜를 헤아려 보라고 하면 제자 된 입장에서 그것이 다소 버거울 때가 있다. 물론 그분들의 특징이나 일화들을 생각해 보라면 얼마든지 하겠지만 말이다.  

 

예를 들면, 나는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 유치원에 가는 대신 피아노 개인 교습을 받은 적이 있다. 즉 이 선생님이 내 생애 최초의 선생님인 셈이다. 그 선생님은 종종 유난히 희고 긴 팔과 손가락으로 피아노 앞에 앉은 나의 등 뒤에서 서서 내가 쳐야 할 피아노 곡에 몸소 시범을 보여주곤 했다. 그럴 때면 선생님에게서 향수냄샌지 비누냄샌지 모를 냄새가 났고, 또한 선생님이 피아노를 칠 때면 건반과 손톱이 탁탁 부딪히는 소리가 났는데 난 그 모두를 좋아했다. 특히 선생님의 손톱에서 나는 소리를 듣다 보면 잠이 저절로 올 것만 같고 나는 왜 저런 소리가 나지 않을까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만 빼면 나는 피아노 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가끔씩 선생님과 갈등을 빚곤 했는데, 유난히 피아노가 잘 안 쳐지는 날엔 영락없이 선생님께 혼이 나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피아노를 마치고 선생님 집을 나설 때 (닭똥 같은 눈물은 이미 피아노 칠 때 한 차례 흘렸고)볼멘 소리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일 안 올 거예요.” 한다. 그러면 선생님도 차갑게 그래. 오지 마.”하곤 내 등뒤에서 대문을 쾅 닫히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러면 그게 또 얼마나 서럽던지.

 

하지만 그 다음 날 나는 어김 없이 피아노를 배우러 선생님 댁에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전날 선생님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엄마한테 말하지 않았다. 그랬다가 엄마는 오히려 나를 혼낼 게 뻔했기 때문에. 그러니 또 그렇게 집을 나설 수 밖에.  

 

그렇지 않아도 내 덩치 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피아노에 주눅들어 있었는데 할 수만 있으면 엄마와 피아노 그리고 선생님과 평화롭게 잘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전날 무슨 일이 있었냐 싶게 집을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다행히도 선생님 역시 전날 있었던 일 가지고 뭐라고 그러진 않는다. 정말 쉽지 않은 인생의 서막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좀 무서웠다. 아이들이 조금만 잘못해도 꾸짖는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그 분은 선생님으로서 학생들을 어떻게 다룰지 나름 아는 분 갖기도 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건, 선생님이 갑자기 무슨 일을 하다 외마디 울음 소리를 내고는 그대로 교탁에 머리를 파묻고 한동안 꼼짝도 안 하는 것이다. 선생님은 그런 모습을 이후에도 몇 번인가 보이셨는데 그런 때가 되면 아이들은 떠들다가도 찬물을 끼얹듯 일순간 조용해진다. 그리고 아이들은 저마다 선생님이 울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선생님은 몸을 일으키시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하던 일을 마저 하곤 했다.

 

나는 또 그게 걱정돼 심각하게 언니에게 말했더니 언니는 선생님이 피곤해서 그러는 걸 거라며 별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기는 것이었다. , 하여간 언니는 일생 도움이 안 된다.

 

하긴, 한 반에 80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바글대고 있었으니 힘들기도 하시겠지. 하지만 선생님의 그런 모습은 확실이 반전이긴 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엄하게 다루기로 정평이 나신 분이 그런 약한 면도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도 가끔 선생님을 떠올리면 그때 어딘가 아프셨던 건 아닐까? 아니면 유난히 사는 게 힘들고 고달프셨던 걸까?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만난 담임 선생님은 남자 분이셨다. 그렇다고 눈에 확 띄는 미남 선생님을 생각하면 안 된다. 그야말로 그 시절 전형적인 아저씨상 그 자체였다.

 

난 그 선생님이 1학년 때 선생님 보다 낫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나에게 매를 대신 적이 없었고 오히려 예뻐해 주셨다. 하지만 나 아닌 몇몇 아이들에겐 아주 무섭게 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얘기는 하지 않겠지만 그렇게 하신 것이 일벌백계의 전형을 보이기 위한 선생님 나름의 교육 방법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가끔 웃긴 이야기도 해 주셨는데 난 선생님이 그렇게 몇몇 아이들을 거칠 게 다뤘다는 점 때문이었는지 나를 예뻐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좋은 선생님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3학년 때 만났던 선생님이야말로 내가 막연하게 그렸던 좋은 선생님의 전형을 보여준 분이 아닌가 한다.

 

초등학교 3학년쯤 되니 아이들도 나름의 촌티를 벗고 제법 학생티가 나지 않았을까? 그도 그럴 것이, 자기들 밑으로 두 학년이나 후배들이 생겼고, 학교생활도 제법 익숙해졌을 테니 나름의 관록이 붙었을 테지. 그리고 그에 걸맞게 어느 나른한 봄날 공부하기 싫은 아이가 총대를 매듯 선생님, 옛날 이야기 해 주세요.” 하면 연이어 전염 돼 반 아이 전체가 일제히 옛날 얘기해 달라고 아우성을 쳤을지 모를 일이다. 또 그렇지 않으면 선생님이 인심이라도 쓰듯 자청해 언제가 들려줘야지 한 이야기로 아이들을 사로잡았던 것은 아닐까?

 

그 어느 쪽이어도 좋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시작된 이야기는 뜻밖에도 고대 이스라엘 이야기이다.

옛날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면 대부분 우리나라 전래동화 같은 건데 일단 이국적인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 나라에서 총리대신까지 올랐던 요셉이란 사람의 이야기다. 형들과 잘 지내지 못해 온갖 누명과 설움 속에도 신앙의 정절과 근면함으로 일궈낸 인간 승리이자 영웅의 이야기는 내 어린 마음에도 신선함을 넘어 묵직한 감동으로 전해져 왔다. 난 너무 감동스러워 선생님의 이야기를 아예 외워버릴 정도였다.

 

그게 또 어느 정도냐면 기러기 새끼는 알을 깨고 나오는 순간 제일 먼저 보는 사물을 자기 어미로 인식한다. 거기서 나온 말이 각인 효과라고 하지 않던가? 그처럼 난 한동안 마치 오래 전부터 그 얘기가 나를 위한 이야기처럼 나의 모든 것이 점령당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훗날 내가 기독교에 귀의하고 성경이란 것을 처음 읽기 시작한 중학교 3학년 어느 날 창세기를 읽었을 때 전기에 감전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바로 거기에 그 옛날 선생님이 들려 주셨던 요셉 이야기가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가끔 그 선생님을 떠올릴 때면 그 이야기의 출처가 어디에 있을까 궁금했었다.

 

나는 또 그때야 비로소 그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선생님의 의도를 알았다. 선생님은 그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이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길 바랬을 뿐 아니라 신앙을 갖게 되길 바라셨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어느 특정 종교를 선전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보다 난 어린 시절 들은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고 싶다.                   

 

아무튼 성인이 되어 요셉의 이야기는 여러 각도에서 연구되고 표현 된다는 것을 알았다. 하긴 나도 이렇게 감동스러운데 세상에 이야기를 다룰 줄 안다는 작가들이 이런 이야기를 가만 놔 둘 리가 없다. 그 중 가장 어린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작품은 앤드류 로이드 웨버와 팀 라이스[1]가 콤비를 이루어서 만든 뮤지컬<어메이징 조셉 드림 코트>이 아닐까 한다. 나는 언젠가 이것을 우연히 TV를 통해 본적이 있는데 정말 환호하리만치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또한 2001년도에 독일 문학의 거장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살림 간)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그 작품은 한 권의 분량이 무려 4백 쪽 넘었고, 그런 책이 7권이나 된다. 성경에 요셉에 관한 분량은 몇 장 되지 않는데 어떻게 그렇게 방대한 저작으로 남길 수 있는지 그저 놀랍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무엇보다 그 책은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기 위해 썼다기 보다 신화적 관점에서 썼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에 비해 송봉모 신부가 쓴 <신앙의 인간 요셉>(바오로딸 간)란 책은 그야말로 요셉이라고 하는 성서 인물을 깊이 있게 묵상하고 쓴 책인데 개인적으로 이 책이 감동이 있고 무척 마음에 든다.

 

이렇게 요셉 이야기를 대할 때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이 생각이 난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온유하게 대해 주셨던 모란꽃 같은 선생님이셨다.

 

하지만 왜 사람마다 그런 거 있지 않나? 나에게 좋은 사람은 오래 곁에 있어주지 않는다는 묘한 징크스 같은 거 말이다. 그래서일까? 그 선생님과 나와의 인연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난 그 해 여름이 시작될 무렵 몸이 급격히 안 좋아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고, 또 가을엔 살던 곳에서 이사를 해 아예 학교를 옮겨야 했다.          

 

그렇다고 성격이 좋아 사람들을 잘 챙기는 스타일도 못 되어 선생님은 늘 가슴 속에만 있지 한 번도 찾아 뵙지도 못했다. 물론 찾아 뵙지 못하는 선생님이 어디 그 선생님뿐이겠는가? 제자가 되어 훗날 잘 찾아 뵙지도 못할 거면서 선생님이 좋은 분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확실히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분들도 알고 보면 아이들에게 정 안 줄려고 노력하며 사시는 줄도 모른다. 사제지간이래 봤자 길면 1, 2년이고 짧으면 몇 개월이다. 그래도 어떻게 나를 가르쳐 준 선생님들을 잊을 수 있겠는가? 거기에 덤으로 평생 가슴에 잊지 못할 이야기를 새겨 주신 선생님을 잊지 않고 살고 있다면 그도 복된 인생이겠다 싶기도 하다.

 

이렇게 이야기는 힘이 세다. 영혼까지도 사로잡으니 말이다. 하지만 또 그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은 더 세지 않을까? 이렇게 오래도록 선생님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야기를 선물해라. 그럼 그 사람이 오래도록 잊지 않고 당신을 기억할 것이다. 

그나저나 그 선생님은 잘 계신지 모르겠다.          

                 

 

       



[1] 이들은 세계적인 뮤지컬계의 거장들로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에비타>, <캐츠> 등을 작사 작곡한 사람들이고, 이들은 정말 탁월한 스토리텔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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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2 00: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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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2 13: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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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기침 2014-06-28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셉과 그 형제들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토마스 만의 작품입니다.^^
이젠 없앤 책이지만 이리 표지라도 보니 마음이 찡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생각을 던져준 작품이지만 이젠 읽을 형편이 안되네요 ㅠ
멋진 주말요

stella.K 2014-06-28 16:09   좋아요 0 | URL
와~ 푸른기침님은 저를 어디까지 놀라게 하실 건가요?ㅎ
이 책을 아시는군요. 왜 없애셨습니까?
저는 완독은 아직 못하고 있습니다만
7권까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좋은 책은 못 버리겠더라구요.ㅠㅋ

푸른기침 2014-06-28 16:15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이 가지고 계신 책이 필요없어지는 순간이 오면 제게 넘기심이 ㅋ
예전에 <요셉과 그 형제들 깊이읽기>를 놓고 읽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가끔 추억만으로도 설렙니다.
근데 예전 닉네임에도 K가 들어갔나요.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stella.K 2014-06-28 16:27   좋아요 0 | URL
ㅎㅎ 그땐 K가 아니라 09가 붙었죠.
근데 저도 궁금한 게 있습니다.
지금의 닉넴 전에 어떤 이름이셨는지?
날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옛 이름이면 제가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2014-06-28 1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8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8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4-06-29 14:31   좋아요 0 | URL
제 기억도 아직 쓸만하긴 하군요.ㅋ
 

어제 문득 내가 졸업한 중학교 홈페이지를 들어가 봤다. 마침 지난 날을 추억하는 글을 쓰다가 딱 나의 중학교 시절에 멈췄고, 내친김에 어떤가 싶어 들어간 것이다.

 

내가 중학교 시절엔 개인용 컴퓨터가 활성화 되기 이전이라 학교 홈페이지는 감히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다.

 

그 시절 나는 꼭 한 분의 선생님을 짝사랑 했는데 국어 선생님이었다. 그 선생님 이후로 난 그 어떤 선생님도 좋아해 본적이 없는데, 과연 그 분이 아직도 거기 계실까? 아니 기대하는 마음도 없었다. 그냥 학교 사진이나 좀 볼까 하는 생각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선생님이 계셨다. 그 선생님 말고도 그 시절 몇 분의 선생님이 아직도 계셨다. 무엇보다 놀랐던 건 그 시절 체육을 가르치셨던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이 되셨다.

 

깐깐했던 음악 선생님. 유난히 삐지길 잘하셨던 과학 선생님. 개그맨 주병진을 닮은 한문 선생님이 계셨다.

 

그 선생님들의 존함을 대하니 내 마음은 마냥 중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담임선생님들 존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동안 학교를 옮기셨거나 이런 저런 사정으로 퇴직을 하셨거나 했나 보다.

 

나는 왠만해서 사람을 보고 한 눈에 반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그 시절 국어 선생님은 이상하게도 처음 보는 순간 내 마음에 들어왔다. 그렇다고 잘 생긴 것도 아니었다.

 

남자 얼굴치고 갸름한 얼굴에 검은 테 안경을 쓰고 다소는 어벙한 표정이 지적이면서도 순수해 보였다. 

선생님을 좋아하는 덕분에 나의 국어 성적은 나름 나쁘지 않았다. 

어느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하교를 하는 나에게 선샌님은 버스 정류장까지 우산을 같이 쓰고 가자는 걸 나는 한사코 거절했었다. 부끄럽고 쑥스러워서. 

 

선생님은 하는 수 없이 다른 아이와 함께 우산을 같이 쓰며 빗속으로 총총히 사라지셨다. 그렇게 사라져간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며 후회했다. 못 이기는 척 그 분의 우산 밑으로 들어 설 걸. 바보.   

 

그러나 곧 그렇게 하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의 결혼 소식을 들었으니까. 곧 결혼하실 선생님을 좋아하면 뭐 하나 싶어서.

 

하지만 지금은 그때가 다시 온다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 본다. 글쎄..그때는 거절했으니 이번엔 정말 선생님 우산 밑으로 들어가지 않을까?

 

문득 지금은 많이 늙으셨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만 먹으면 집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면 얼마 가지 않아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나는 벌써 몇십 년째 못 가고 있었다. 

 

그렇게 늙어버린 선생님을 나는 뵐 수 있을까? 그 보다 이렇게 나이들어버린 제자가 선생님을 뵙는다는 게 더 자신이 없다.

 

그리고 또 생각해 본다. 교사의 정년이 언제까지였더라? 모르긴 해도 선생님의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선생님이 정년이 되어 학교를 떠나시면 뵐 수 있는 기회는 더 희박해 진다.

 

다시 뵈면 나를 알아 보실까? 무슨 말을 하게 될까?

마음이 몹시 흔들렸다.

용기가 없어 뵐 수 없다면 학교 교정만이라도 밟고 싶다. 그러나 우연히 마주치면 인사 드려야겠지.

어제부터 나의 마음은 몇번이고 학교 교정을 서성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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