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아베를 쏘다
김정현 지음 / 열림원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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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2004년 한일월드컵을 양국이 함께 치르게 되었다고 했을 때 만감이 교차했다. 왜 이렇게 되야되는 것일까? 그전에 올림픽도 치뤄보고, 아시안게임도 치러봤는데 하물며 월드컵 하나 자국의 힘으로 치루지 못할까? 도대체 세계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어떻게 보길래 이런 결정이 났을까 의아스러웠다. 

뭐 좋은 뜻으로 받아 들일려면 받아 들일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역사적으로도 그다지 좋은 관계는 아니었으니 이 기회에 우호적 관계가 돼라고 그런 건 아니겠는가?  

그런데 또 보면 꼭 그런 선한 의도만 있었을까? 그건 마치 담임 선생이 유독 싸우는 같은 반 악동 두 명에게 뭔가 둘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미션 하나를 주고(그래봐야 교실청소나 주번이 다겠지만) 그러면 친해질까 아닐까를 지켜보겠다는 의도와 같은 건 아니었을까? 의심이 많은 나로선 별 오만가지 생각을 다 했다.

솔직히 나 같으면 안 했으면 안했지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월드컵이 보통 기횐가? 한 번 치르면 100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는 국제 경기다. 함부로 고사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나마 우리가 일본 보다 앞선 기량으로 대회를 마쳤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독도 문제며, 위안부 문제 등 마치 찰거머리처럼 달라 붙어 온갖 문제란 문제는 다 일으켜 놓고 해 볼 테면 해 봐. 뭐 그런 식이다. 도대체 일본과 우리나라는 무슨 마가 끼었길래 이러는 것일까? 이제 좀 청산할 거 청산하고 쿨하게 각자의 길을 가면 안 되는 걸까? 오죽하면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다고 외치며 죽어 갔던 것처럼, 누구라도 혀를 깨물며 나는 일본이 싫어요라고 외치며 죽으면 이 문제가 해결이 될까? 하긴, 그래봐야 웃음거리 밖엔 되지 않겠지.

지난 여름을 지내오면서 한 국무총리 후보가 민족 비하 발언을 했다고 결국 총리 후보를 사퇴 했다. 하지만 우리 엄마 세대만 하더라도 솔직히 맞는 말이라고 한다. 적어도 부인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전후 맥락은 동영상을 보지 않아 뭐라 말하기가 어렵지만 그도 마냥 우리나라를 비하 하자고 했던 말은 아닐 것이라고 본다.
언제적 동영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요즘 그런 말을 하면 오해의 소지는 있어 보이긴 한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앞서가는 민족인데. 더구나 남의 집 애는 흉 봐도 되지만 우리 집 애 흉 보면 기분 나쁜 것도 사실 아닌가?  

김연아를 비롯한 스포츠 스타들 한류 스타들 그들이 한국을 알린 건 사실이지만 정말로 애국한 건가? 그건 좀 생각해 볼 일이다. 그냥 돈 번 거고 겸해서 나라도 알린 것 아닌가? 일부에서는 어떤 아이돌이 부른 노래가 하도 좋아 그걸 애국가로 지정해 달란다. 재밌자고 한 건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좀 해도 너무 하지 않나 싶다. 나도 애국의 길에 대해 학교에서 따로 배운 기억은 없지만 이 정도는 아니지 않나 싶다. 나라를 되찾겠다고 피를 토하며 쓰러져갔던 우리의 조상님이 알면 경천동지 할 일은 아닐까 싶다.

나라를 지키는 방법. 어떻게 하는 것이 애국하는 길인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저 무조건 일본의 만행에 비난만 한다고 해결될 문제인가? 그건 누군가가 나는 일본이 싫어요 했다가 오히려 웃음을 사는 것 보다 더 웃긴 일이 될 수도 있다. 요즘엔 이승복처럼 공산당이 싫어요 해서 먹힐 시대가 아니란 말이다. 

적어도 난 이 책의 출현이 반가웠다. 
우린 흔히 우리나라와 일본의 역사를 독일과 홀로코스트의 역사에 비유하곤 하는데, 즉 독일은 자신의 역사를 반성하고 용서를 구했는데 일본은 그럴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도 잊을만 하면 한 번씩 출판이 영화 또는 기타 공연에서 자기네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들을 한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얼마만한 노력을 기울였을까?   

물론 찾아 보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물이 그다지 많아 보이진 않아 보인다. 그나마 뮤지컬에서 <명성황후>나 같은 안중근을 다룬 <영웅> 정도와 최근엔 이순신 장군이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는 정도다. 그런데 이렇게 나름 문학계에서 지명도 있는 작가가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것이 반가웠던 것이다. 그러므로써 안중근이란 역사적 인물이 다시 조명을 받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작가의 말이 좀 비장하게 들린다. 작가는 그러지 않아도 그의 100주년 기념으로 어느 극단에서 대본으로 써 달라는 걸 고사했다고 한다. 나름 성인이라 할 수 있는 분의 일대기를 쓴다는 것이 굉장한 부담이었나 보다. 그러나 그는 소설로 완성해 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안중근도 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니 책을 끝낼 수 있었다고. 

그러나 독자인 내가 읽어 본 바에 의하면 안중근은 그냥 평범한 인간은 아니었다. 무학이었고, 무직이었지만 상당한 학식을 가지고 있었고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특별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또 어쩌면 작가의 입김일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안중근의 평전과 자서전을 바탕으로 썼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결코 입김만으로는 그렇게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등을 죽일 수 있었고, 재판정에서 일본이 우리나라에 지은 죄에 대해 15가지로 말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이 책은 약간의 판타지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즉 첫 장면이 안중근이 아베를 만나는 장면과 마지막엔 그가 아베를 총으로 쏴 중태에 빠트리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선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으로 처음에 나는 작가가 너무 무리한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했다. 그냥 안중근의 전기 소설로 써도 무방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엔딩에서 저자가 왜 그런 시도를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이를테면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한 지금의 일본 아베 수상에 대한 분노와 우리가 완성해야 할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역설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알겠지만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그가 옥중에 있을 때 초안을 작성한 것으로 완성을 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결국 국가 원수를 죽인 혐의가 인정돼 31세의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니까. 그리고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가 죽었다고 해서 그의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의 저항정신, 그의 삶은 오늘 날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동양평화론도 잊혀지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안중근이 만일 살아있다면 정말 또 살인을 저질렀을까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결코 이등박문에게 총을 겨누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을 의연히 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록 소설이긴 하지만 안중근이 아베에게 총을 쐈다고 했을 때 작가가 안중근을 두 번 살인자로 만드는구나 했다. 이 설정을 과연 그가 살아 있다면 받아 들였을까?

그런데 과연 그도 고개를 끄덕였을 것 같다.
무엇보다 그는 이등을 죽이겠다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었다. 이등을 죽임으로 인해서 자신이 체포되고 재판정에 설 때 그렇게 일본의 15가지 죄과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그 일을 감행했다. 마찬가지로 아직도 깨닫지 못하거나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일본을 위해 그는 기꺼이 암살범이 되길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안중근이 우리나라에서나 영웅으로 칭송하지 아직도 일본이 자신들의 죄과를 인정하지 않으니 사건으로만 보자면 여전히 미제의 사건일 뿐이다. 해결되지 못한 미제의 사건으로 남는다는 건 일본에게 사과 받아야 할 부채가 남아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안중근은 기꺼이 또 다시 저격을 감행할 것이란 말이다. 그뿐 아니라 그가 이등을 저격하고 보여준 그의 태도나 행동들은 비장하면서도 가히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는 또 그러한 태도와 행동들을 보여 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가슴에 해결되지 않는 의구심이 남아 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우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 왔기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하는 것이다. 그게 단순히 오랑캐 기질이니 침략적 기질이니 하는 것으로 설명이 되는 것일까?

안중근이 죽기 전 그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보면 가슴이 아프다.

아들 중근에게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내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317P)
  
세상에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 어미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어미는 물 한 모금인들 편안히 마셨겠는가? 또한 어미뿐이겠는가? 그의 아내와 가족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또한 그렇게 죽어간 사람이 수천, 수만인데 이게 단순히 오랑캐 같은 일본의 침략과 만행 때문이라고만 해도 되느냐는 말이다.
역사이래로 우리의 국왕과 지도자들은 나라를 온전히 지킬 마음이 있었을까? 그런 의문 또한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강대국의 틈바구니 어쩌구 하면서 나라의 지형의 문제로만 돌려도 되는 것인가? 과연 우리는 나라를 지킬 의지가 있었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누구는, 일본은 우리가 우리나라를 아는 것 보다 우리나라를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과연 무서운 말이다. 그러니까 일본이 그런 헛소리를 해도 된다고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어디가서 김연아가 애국을 하니, 어느 아이돌 노래 가지고 애국가로 삼자. 한류가 우리나라를 지켜줄 것이다 이런 철없는 소리 함부로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학교를 떠나 온지가 너무 오래되긴 됐다보다 이제까지 한국사가 필수가 아니었단다. 우리가 역사가 아니면 어디서 애국의 길을 배우겠는가? 과연 우리나라 교육은 재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 책이 조금 더 재밌고 흥미로웠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긴 한다. 이왕 판타지를 구사하겠다면 말이다. 좀 허구의 인물도 넣고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또 그러기엔 작가는 진실을 추구하고 싶었고, 더불어 자신의 생각도 논리적으로 세우길 바랐던 것 같다.
그래도 이만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노고가 느껴진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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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8-31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정현 저자가 '아버지'란 장편소설을 쓴 작가가 맞네요. 저자 사진을 보니..,
그 책이 베스트셀러였던 옛날, 제가 그 책을 읽고 실망했다는 거죠. 밑줄을 그을 데가 하나도 없었어요...
이 사람, 소설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구나, 했어요.
논픽션을 읽는 느낌이랄까요. 문학의 맛이 하나도 안 났어요.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이젠 문장이 많이 좋아졌겠죠?

어느 책에서 그러는데 문장력은 얼마든지 노력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하네요.
글 잘 쓰기 위한 사고력이야 독서로 그리고 체험으로 커버해야겠지만...
저도 '노력'이란 놈을 가져볼까 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stella.K 2014-08-31 18:15   좋아요 0 | URL
헉,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인기 작가가 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예나 지금이나 지나치게 주목받고 잘 팔리는 소설은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버릇이 있긴 하죠.
아무튼 아버지가 대박을 칠 때 저는 안 봤고
마침 안중근에 관심있고, 작가도 알겸 기회가 있어 보게된 거예요.
어떤 리뷰어가 언니 비슷한 지적을 하긴 했어요.
이게 소설 맞냐고. 특히 판타지.
그런데 저는 이맘도 읽기에 나쁘지는 않다고 봤어요.
물론 이 보다 더 잘 쓴 전기 소설을 읽는다면 또 다를지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작가가 대본을 쓰지 않는 건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설 쓰기와 대본 쓰기는 좀 다른데 작가가 자기 자신을 잘 알았던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14-09-04 17:35   좋아요 0 | URL
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베스트셀러는 내용만 좋으면 되지 문장력은 상관 없지요.
중년 남성인 아버지를 그렇게 구체적으로 그린 작품이 없었거든요. '아버지'라는 소설로 대중은 아버지의 고독한 위치를 알게 된 거죠.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서 관심 갖게 된 거죠. 그전까진 주로 어머니, 모성... 뭐 이런 데에 주목한 소설이 많았죠.

예를 들면 명퇴, 라는 말이 처음 나올 때 누군가가 회사에서 명퇴 당한 중년 남자를 사실적으로 잘 그려 냈다면(문장력이 탁월하지 않아도) 그것도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겠지요. 독자들의 공감만 얻을 수 있다면요. 대중은 탁월한 문장력을 보고 책을 사기보단 내용을 보고 사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 같이 글을 쓰는 사람들은 문장력을 따지겠지만요...
결과적으로 김정현 작가가 그 시대와 딱 맞는 소재를 잘 선택한 결과 같아요.(그때 명퇴, 라는 말이 있었나 헷갈림.) 이것을 소재주의라고도 하지요. 잘 선택한 소재로 덕을 보는 거요. '88만원 세대' 같은 책이 그래요. 이 책처럼 시대와 어울리는 내용으로 얼마든지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지요. 문장력은 베스트셀러에서 중요한 변수가 아니고, 문학상 수상작으로 뽑을 땐 중요한 변수겠지만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stella.K 2014-09-04 19:01   좋아요 0 | URL
오, 맞아요. 이렇게 명쾌할수가?
꼭 언니한테 과외수업 받는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아직도 세월호 유가족들만 보면 눈물이 난다.

어제는 교황 프란치스코 방한 취재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는데

단식 농성중이던 한 아빠가 교황을 만나 편지를 전해주는 장면이 나왔다. 

그런데 순간 툭하고 눈물이 터져 버렸다. 

애초에 그 일이 없었다면 그도 지금 여느 때와 똑같이 생업 전선에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리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것이다.

평생 자식을 지켜 주지 못했다는 미안한 마음 가지고 살아갈 그를 생각하니

새삼 아빠의 무게가 저리도 무거운 것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 

지금은 자식을 잃은 슬픔 때문에 저렇게 몸부림 친다지만

언제가 저 무게를 내려놓고 

남아 있는 가족들과 함께 그래도 살만했다고,

아주 나쁘지마는 않았다고 말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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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상처를 줬음에도

오히려 상처 받았다고 뒤집어 씌우고 엄살 떠는 사람이다.

잘못한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사과하지도 않고, 일을 수습하지도 않고, 관계회복을 위해 노력도 않고

그저 수수방관하며 숨어 있는 사람이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계속 남탓만 하고

자신은 무조건 베풀기만 했는데 돌아오는 건 상처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도대체 그가 무엇을 누구에게 얼마나 베풀었기에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때까지 알아왔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모두 차단해 버린다.

가끔 그가 생각이 나지만 난 이내 잊기로 한다.

그렇게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은 자신의 영혼도 해치지만

남의 영혼까지도 잠식시켜버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만나지 않는 것이 좋다.

또한 더불어 남의 영혼을 생각해 나 또한 그런 사람으로 살아오지 않았나

삼가할 일이다.

지난 세월 동안 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살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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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4-08-24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사람 떠오르네요.

stella.K 2014-08-25 12:24   좋아요 0 | URL
헉, 누규...?
전 그저 제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어서 쓴 것 뿐인데...

saint236 2014-09-02 20:42   좋아요 0 | URL
만인의 그분이요...상하이에도 가시고, 맥너겟에도 계신 그분...패스트푸드 어디에나 계신 그분이요....

stella.K 2014-09-02 20:50   좋아요 0 | URL
잉..? 맥 할아버지요? 어떻게 그럴 수가...ㅋ

페크pek0501 2014-08-27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주위에 어떤 사람들이 배치되어 있는가가 행복에 있어서 중요한 변수죠.
어떤 사람을 알고 지내는가가 중요하다는 거죠.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을 굳이 만날 필요가 있겠나 싶어요. - 저도 같은 생각...

드라마 보면 나오잖아요. 알지 말아야 할 사람을 알아 가지고 불행 속으로 빠지는 것.
괜히 깡패는 알아 가지고 협박 받고, 악녀를 알아 가지고 피해 보고...

우린 잘 지내자고요... ^^

2014-08-28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한국에서 죽기 싫다 - 살면서 괴로운 나라, 죽을 때 비참한 나라
윤영호 지음 / 엘도라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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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좀 극단적이란 생각을 했다.
한국도 이제 살만해졌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한다. 적어도 예전에 비하면 말이다.
하지만 이 살만해졌다는 것은 또 무엇을 근간으로 두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는 따져 볼 일이다. 예전엔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다면 적어도 요즘엔 굶어 죽는 사람은 없으니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일 게다.  
하지만 사람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됐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잘 먹고, 잘 살기도 해야겠지만 잘 죽기도 해야한다. 
바로 이 책은 우리나라가 그동안 얼마나 잘 죽게 되었는가에 대한 보고서로 읽힌다. 
물론 책을 읽어보면 웰다잉, 즉 잘 죽는 분야에 대해서는 아직도 우리나라가 가야할 길은 다소 멀어보인다.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온 게 어디냐 싶기도 하다.

한국도 동양에 속한 나리고, 동양은 특히 서양에 비해 죽음에 대한 사관이 긍정적이지가 못하다.
그래서일까? 아직도 연명치료에 의존하는 일이 많고, 의식적으로 죽음을 밀어내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다고 해서 죽음이 우리 곁은 오지 않는 것이 아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죽음이 우리를 잠식해 버린다.
청년 때 노후를 대비해야 하고, 부자일 때 가난하게 될지도 모를 때를 대비해서 재산을 잘 관리해야 하는 것처럼, 우린 건강하게 살아 있을 때 죽음을 대비해야 한다. 이것을 대비하지 못해 건강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우린 얼마나 많이 보는가?
가족 중 누군가를 떠나 보내고 실의에 빠져 우울증에 시달리고, 같이 따라 죽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언제까지 죽음에 대해 쉬쉬하고, 밀어만 둘 것인가? 이제는 죽음에 대해 말할 때다. 

슬픔도 익숙해지면 견딜만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하더라도 가족이나 친척 중 전장이나 피난길에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될까? 그땐 죽는 일이 다반사여서 산 사람의 눈에선 눈물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 죽는 일이 그리 흔한 일인가? 
더구나 책에 씌여진 대로, 예전엔 집에서 죽음을 맞은 경우가 많아 자녀들은 물론이고, 손자들도 죽음을 보게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것이 병원 장례식장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린 손자가 죽음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고 단절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로인해 아이들은 삶만을 생각하지 죽음은 생각하지 못한 채 성인이 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나는 내 나이 26살이 될 때까지 죽음을 본적이 없다. 그리고 그 나이되도록 죽음을 목도하지 못한 것에 대해 나름 안도와 뭔지 모를 감사함을 가지고 살았다. 누군가의 임종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괴롭고 슬픈 일일까를 생각하면 이 익숙치 않은 것을 할 수만 있다면 길게 유예받고 싶었다. 하지만 내 나이 26살 때 맞닥트려야만 했던 아버지의 죽음은 슬프기도 하지만 충격적이기도 했다.
어떻게 이렇게 아무런 대책도 없이 아버지를 잃어버린 수가 있을까? 더구나 나는 신앙을 가졌음에도 아버지가 기적적으로 낫게 되기만을 기도했지, 아버지의 남은 삶의 나나을 위해 또는 고통을 위해 기도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무런 방비없이 맞은 아버지의 죽음은 생각했던 것 보다 뒤통수를 후려치는 뭔가가 있었다. 

그리고 22년만인 작년에 오빠의 죽음을 마주해야만 했다. 물론 그 사이 죽음의 소식을 듣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은 다 병원 장례식장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충격은 좀 덜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전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였음에도 오빠의 죽음 역시 내겐 익숙한 것 아니지만 임종을 대하는 건 아버지 때와는 좀 달라졌던 건 사실이다.

우선, 당연히 오빠의 쾌유를 빌었겠지만 혹시 죽게 되더라도 살아 있는 동안 만큼은 평안하기를 빌었고, 죽을 때 너무 고통스럽지 않기를 빌었다. 그랬더니 그나마 아버지 때 보단 조금은 담담하게 오빠를 보내 줄 수가 있었다. 
또한 오빠가 임종을 맞기까지 아버지와 달랐던 건 임종 장소였다. 아버지는 당시 입원하고 계셨던 병원에서 임종을 맞았지만, 오빠는 강릉에 있는 갈바리 의원이란 곳에서 임종을 맞았다. 갈바리 의원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호스피스 전문 병원이다. 
사실 이곳이 1965년에 개원했다고 하니 그 역사가 꽤 된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오빠의 임종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그만큼 우리가 몰랐거나 안 알려진 것이다.
만일 22년 전에 알았더라면 아버지를 그쪽으로 모셨을까?
아니다. 그래도 못 모셨을 것이다. 당시 엄마 때문에 아버지가 암에 걸린 것도 아닌데, 친가 특히 고모들과 할머니가 서슬이 시퍼래서 무조건 그곳으로 가는 것을 반대했을 것이다. 죽음을 부정한다고 해서 죽을 사람이 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만큼 또 그 시절은 죽음에 대해 무지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호스피스 전문 병원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 갈바리 병원도 얼마만에 찾아 낸 곳이던가. 그동안 오빠가 입원해 있었던 병원에서는 오빠가 어서 퇴원해 주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그 병원은 3차 진료기관이니 오빠 같은 환자는 장기로 입원해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였다. 이해 못할 것은 없지만, 당시로는 섭섭하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다. 다리품 팔아 알아봤지만 오빠 같은 중환자가 가 있을만한 곳은 마땅치 않았다. 우리는 병원에서 오빠한테 할 짓 못할 짓 다해놓고 이제 희망이 없으니 더 이상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런 큰 병원에서 호스피스 시설이 없어,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환자를 강제 퇴원시키려 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가급적 버텨볼 때까지 버텨 볼려고 했다. 까짓 거, 우리가 우리 돈 내고 환자를 안전하게 보호하겠다는데 자기네들이 무슨 권리로 퇴원하라 마라냐고 하면서 말이다.
거기엔 이해상반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병원측에선, 원래 병원이 균이 많은 곳이니 면역력이 떨어진 환자가 위험할 수 있으며, 정서적으로도 오래 있는 건 안 좋다는 것이다. 그건 또 맞는 이야기이긴 하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지만, 갈바리 의원은 거의 악전고투 끝에 발견한 곳이고 오빠를 그곳으로 내려보낼 때까지도 그곳이 호스피스 병원이란 걸 말하지도 못했다. 그때까지도 오빠가 자신이 왜 호스피스 병원을 가야하는 것이냐고 반발하거나 충격을 받으면 어쩌나 겁이나서 말을 못했던 것이다. 그냥 암환자들을 위한 요양원이라고 했다.

이 책에도 바로 이와 비슷한 점을 다루고 있다. 이젠 각 대학병원에서도 호스피스 시설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장례식장은 그렇게 크게 지어놓고, 죽으면 오라고 해 놓고(이것도 알고 보면 얼마나 모순된 말인가?) 왜 임종대기 환자에 대해선 나몰라라 하는 것인가? 물론 그나마 오빠 같은 경우는 운이 좋아 그곳에서 임종을 맞았지만 그것도 대기자가 많아 까닥하면 가보지도 못하고 임종을 맞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곳은 강릉에 있다. 서울에서 강릉. 건강한 사람이라면 거뜬히 갈 수 있는 곳이지만 환자가 가기는 역시 쉽지 않은 곳이다. 그때 뭐 때문인지 구급차 이용도 용이하지가 않아 대신 승차감이 좋은 차를 빌렸다. 더구나 오빠가 그곳을 갈 때는 적지 않은 비도 내렸다. 정말 자칫하면 그곳에 가기도 전에 객사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왜 이렇게 죽을 곳 찾아 가기가 이토록 힘들어야 하는 것인가?
입원했던 병원이 호스피스 시설도 함께 운영했다면 그런 힘든 일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병원이 호스피스 시설까지 갖추고 있는 줄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병원과 친하지 않으니 몰랐던 것이다.   

또한 환자에게 죽음을 말할 것이냐지, 아니냐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평소 건강하고, 제 3자의 입장이라면 당연히 환자에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나의 문제가 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차마 입이 안 떨어지는 것이다. 담당 의사는 그런 보호자의 입장을 생각해 자신이 말해주겠노라고 해서 믿다가 뒤통수를 맞았다. 왜냐하면, 나중에 무슨 대화를 하다가 오빠가 그때까지도 자신이 그냥 위험하고, 중한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지 몇 개월 후면 죽을 거란 걸 몰랐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도 의사는 어느 때가 되면 환자 본인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들도 환자에게 차마 확실한 얘기를 못하는 것이다. 이건 확실히 직무유기란 생각이 들었다. 오빠 같은 환자를 한 두 번 다뤄 보는 것도 아닐 텐데 그렇다면 매번 이런 식일 것 아닌가? 책에 의하면, 선진국에선 의사가 이 부분을 밝히도록 법으로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비해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이 문제가 첨예한 건, 환자가 알아서 더 나빠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다. 의사가 알리고 싶어도 보호자가 못하도록 막는 경우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환자가 알았다고 해서 일시적으로 나빠지는 경우는 있어도 대체로 결과는 긍정적이라고 한다. 그래야 스스로 자신의 마지막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빠도 마지막엔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마지막에 이를 때까지 이것을 쉽게 받아 들이지 못한 채 두려웠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 우리 살아있는 사람이 충분한 위로와 안정을 주지 못한 건 지금도 두고 두고 후회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의사나 가족만 원망할 수는 없다. 의사는 생명을 담당하고 있으니 책임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자신의 삶도 자신의 것이듯, 죽음도 자신의 것이다. 그러니 (물론 용기가 필요하겠지만)내 생명이 얼마나 남은 거냐고 물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을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지 상담(컨설팅) 받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또 그러기 위해선 평소 죽음에 대해 삶 만큼이나 자주 말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빠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다.
오빠의 죽음은 아버지 때와는 또 달랐다. 아버지 때는 무조건 슬프기만 하고, 인생이 그저 허무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어선지 굉장히 현실적이 됐다. 
나 역시 오빠처럼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을 수도 있다. 그럴 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의사나 가족들이 어려워 할 것을 생각해 내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물어봐야 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은 치료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 
물론 연명치료 같은 건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 하루라도 더 살아 보겠다고 몸에 바늘 꽂고, 호흡기 꽂고 그렇게 내 몸을 혹사시키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벗어버릴 몸이지만 가급적 갈 때까지 깨끗하게 있다 벗어버리고 가고 싶다.  
무엇보다 의사은 환자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처음엔 여러 가지 가능성을 들어 적극적인 치료를 권한다. 미리부터 단정 짓기도 뭐하지 않는가? 처음부터 비관적으로 몰고 가는 것도 부담스럽고. 또한 이런 자본주의 세상에서 어느 정도 병원에 이익도 내야겠으니 유도를 하는 것이다
보호자 역시 안타까운 마음과 의학에 대해 아는 바도 없으니 의사가 권하는 것은 무조건 다 해 달라고 한다.   
그러니 환자 본인과 보호자가 어떻게 할 건지를 결정하고 주도적이 되야 이런 모든 것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죽음에 맞서 싸우는 것도 용기지만, 죽지 않겠다고 바둥거리는 것도 얼마나 불편한지 알지 않는가? 이건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지만 그 결과는 엄청나다. 그래서 이러한 책이 필요한 줄도 모르겠다.

책은, 꼭 자신이 죽기 전에 버킷 리스트를 만들라고 권한다. 그것은 나도 오빠 죽음 이후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다.
무엇보다 난 내가 죽은 후 남아 있는 사람이 나의 삶의 흔적을 치우게 하고 싶지 않다. 내 주위에 가족이 하나도 없어 전문업체에서 해 주는 거라면 모를까. 빨리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치울까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건 저 책무더기가 아닐까 싶다. 살면서 가장 놓지 못하고, 나의 유일한 소유물이며, 사치품인 책을 가족들이 치우게 하면 너무 힘들게 하는 것 같아 편치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오빠의 마지막 모습 중 기억에 남는 건, 오빠가 응급실에서 병상이 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때 잡았다던 엄마의 손이다. 물론 난 그걸 엄마에게서 얘기로만 들었는데, 그건 평소의 오빠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이다. 모르긴 해도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이 두렵기도 했거니와 그 순간만큼은 자신을 낳아 준 엄마의 손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 손을 잡지 않는다면 또 언제 엄마의 손을 잡아 볼지 알 수 없는 일이고, 그 조차 하지 않는다면 떠나는 자신이나 남아 있을 엄마에게 너무 아쉬울 것 같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평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해야 한다. 하지만 우린 그러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책에 나온 내용대로 가족과 친지들에게 사랑의 메모를 남겨둘 일이다. 그리고 남아 있을 가족들에게 내가 지금 떠남이 꼭 슬픈 것은 아니라고 말해둬야할 것 같다. 남아 있는 가족들에겐 이별이지만, 난 이제 그동안 헤어져있던 먼저 간 가족들을 만나러 가니 좋다고 말해 주므로 그들을 위로하고 싶다. 
그 밖에 나의 버킷 리스트는 뭐가 있을까? 

오래 전, 미국의 어느 저명한 목사님이 자신이 죽기 전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장례식 때 들으라고 하곤 세상을 떠났단다. 가족들은 고인의 말대로 장례식 때 고인의 녹음한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는데, 평소 유머 감각이 뛰어난 고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히려 장례식장이 웃음 바다가 됐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삶은 이렇게도 완성이 되는 거구나 싶기도 했다. 

내가 왜 지금 죽어야 하는 거냐고 따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래도 급사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할 수 있는 건 나름의 복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국가의 책임은 이런 의지가 있는 개인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행복하게 태어나게 하는 것도 국가의 몫이지만, 만족하게 죽을 수 있게 하는 것에도 국가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덕목이란 말이다. 
경제적으로 잘 사는 것만이 선진국의 조건은 아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 얼마나 잘 태어나, 얼마나 잘 살게 해 줄 것이며, 얼마나 잘 죽게 해 줄 것이냐가 선진국의 조건인 것이다. 
아마도 태어나는 문제와 죽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OECD국가 중 우리나라가 최하위인 것마는 분명해 보인다. 영아유기의 문제, 자살의 문제 등이 이토록이나 해결이 안 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서 책의 표현대로 한국은 '살면서 괴로운 나라요, 죽을 때 비참한 나라'임에 틀림없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막상 책을 읽어보면 지난 수십 년간 이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나름의 흔적들이 보여 아주 비관스럽지마는 않다. 아마도 저자가 이 분야를 연구해 온 사람으로 겸손해서 그런 제목을 쓰지 않았나 한다.
책은 비교적 어떻게 임종을 맞을 것인가에 대해 상세하게 나와 있다. 분명히 길은 있다. 보기엔 화려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맞는 좋은 삶의 마무리의 길은 찾아보면 있다. 너무 국가에만 의존하거나 기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제 정부가 국민을 만족시킨 일이 있었는가?
개인적으로 잘 마무리하고, 잘 죽는 방법 중 추천하고 싶은 건 신앙을 가지라고 권하고 싶다. 아무래도 그것이 그나마 정부가 베풀어 주는 그것 보단 조금은 낫지 싶다. 죽음을 비교한 여러 문건 중에, 신앙이 있는 죽음이 없는 죽음 보다 훨씬 평안하고 안정적이라는 보고는 이미 오래 전에 보도된 바 있다. 
실제로 나의 오빠도 살아 있을 땐 비신앙인체로 살다 죽기 바로 전에 하나님을 영접하고
평안한 임종을 맞았다. 

이 책은 읽기에 따라선 약간 건조하고 딱딱할 수도 있지만 읽어 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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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피플 북스토리 재팬 클래식 플러스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스토리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키의 단편집을 읽기는 얼마만인가? 난 하루키 팬은 아니지만 이렇게 저렇게 읽어 온 바에 의하면, 하루키는 장편 보단 단편을 잘 쓰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아주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이란 단편집이나, 아예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단편집 등을 읽어보면 정말 아기자기 하면서 그만의 독특함이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치즈 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을 읽고 있노라면 정말 하늘에서 깨가 부슬부슬 쏟아질 것만 같고, 꽤 사랑스런 소설이란 생각을 했다.

 

나는 그 기대와 설렘을 안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읽어 가면서 느꼈던 건, 몽환적이면서도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독특함은 여전했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기대했던 감동은 그다지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의 최근작도 아니고, 오히려 작가의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 걸 다시 한 번 재편집한 책인데, 하루키는 이 단편 소설들을 쓰고 있을 즈음 '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이란 소설도 썼을 것이다. 그런데 난 어쩌면 그리도 치즈케이크만을 편애했던 것일까?  

 

특히 이 책에서 한 작품인가를 제외하고 섹스 얘기가 안 나오는 작품이 없다. 그만큼 그건 그의 주특라고 생각하는데, 난 거기서 내가 하루키를 너무 많이 알아 버렸구나 하며 식상해 버리고 말았다. 이는 내가 '치즈케이크...'를 좋게 기억하는 건 아마도 섹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언젠가 그는 한 인터뷰에서, 본인은 섹스를 그다지 즐겨하지 않는다고 했던 걸 기억한다. 솔직히 그렇게도 생겼다. 그의 외모도 외모지만 그의 생활은 거의 수도승에 가깝지 않은가? 어느 하나 흐트러짐이 없다. 작가가 되려면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삶을 경주하는 작가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드라마나 영화 같은데서 담배나 뻑뻑 피워대고, 인스턴트 음식으로 대충 떼우는 고시생과 혼동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 물론 작가지망생의 이미지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는 자신의 작품에 섹스는 거의 빠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게 또 아주 묘사가 뛰어나고, 감동(?)스러우냐면 그렇지도 않다. 지극히 단순하고 일상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솔직히 없어도 되는 건 아닐까? 어떤 땐 좀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뭘까? 한번쯤 뇌까리게 된다.

 

글쎄, 나도 모를 일이지. 작가 자신이 정확히 얘기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 식대로 추측을 해 본다. 그건 하루키가 섹스를 (수컷의 그것처럼)지극히 일상적으로 생각하거나, 소설에서 섹스 이야기가 빠지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거나 그렇지 않을까?

 

뭐 같은 예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 같은 경우 오래 전, 습작품으로 유년 시절의 성심리를 소재로 한 작품을 쓴 적이 있었다. 워크숍 작품으로 기한 내 내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어떤 작품을 쓸까 고심 끝에 그것을 소재로 했던 것이다.

운이 좋았던지 나는 대체로 좋은 평점을 받았다.

 

그때 깨달았다.  짧은 시간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써라.

더구나 나는 성인의 그것이 아니라 유년에 있는 아이의 그것으로 잡았던 게 유효했던 것 같다. 좋은 점수를 받아서 좋긴 했지만, 내가 뭐 섹스중독자도 아니고 이것에 맛들여 글을 쓸 때 계속 이런 걸 쓰면 어쩌나 겁이 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 후 나는 그 작품을 다시 꺼내보지 않았고, 결국 흐지부지 어디론가 사라져 지금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좀 아쉽긴 하다. 그거라도 붙들고 있다가 훗날 등단을 노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건, 그 이야기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쓴 소설이니 어렴풋하게라도 기억이 남아 있어야 할 텐데 작품을 쓴 기억만 나지 내용은 전혀 기억에 없다. 

 

남자는 섹스를 일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여자는 마음이 동해야 몸도 따라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하루키가 알았더라면 그래서 여성 독자를 조금이라도 배려한다면 섹스를 과연 그런 식으로 표현했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더 의미롭게 표현했거나 아예 없는 것으로 하지 않았을까? 

 

남자가 섹스를 말하는 것도 참 여러 가지라는 걸 나는 비교적 최근에야 알았다. 보통 신앙을 가진 남자들은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하지만 그들도 어딘가에서는 할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전, 어느 중년의 집사가 무슨 모임에서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나름 진지하게 하는 걸 들었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순간 섹스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비해 어떤 타입은 일부러 들어보라는 식으로 마구 지껄이기도 한다. 그땐 여자라곤 나 하나였고 시커먼 남자들이 서너 명 있었다. 그리고 가볍게 한 잔 하는 자리였다. 공교롭게도 그는 나를 그다지 안 좋아한다는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없는 남자였다. 우리가 뭐 10대 20대도 아니고, 새삼 내외할 것도 없지 않냐해서 까발리는데, 그건 공교롭게도 자기 와이프와 새로운 체위에 돌입하려다 냅다 차였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못 들어 줄 건 없지만, 우리나라 말은 팩트가 아니라 뉘앙스라는 거. 나는 속으로, 이 인간이 이 타임에서 왜 이런 주둥이를 놀리는 걸까?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웃고 넘겼는데 속으론, '재밌냐? 니 와이프가 너 이러고 다니는 거 아냐?' 했다.

 

그런데 비해 하루키처럼 일상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그냥 식욕을 채우고, 스포츠 하듯 하는 것. 뭐 그런 것 말이다.

 

그러고 보면 하루키는 그렇게 매력적인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긴, 그의 사진에 찍힌 얼굴을 보고 매력적이라고 느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는 그냥 작가일 뿐이다.

 

최근 새롭게 시작한 노희경의 드라마가 있다. 거기서 보면 조인성이 작가로 나온다. 그것도 추리작가. 작가란 누가 보기엔 개떡 같은 상황도 교묘하게 이용하고 울거먹는 족속들이다. 그게 다른 사람 이야기라면 화낼 필요도 없는데, 이것이 내 상황을 이용해 먹는 거라면 정말 화가 많이 날 것이다. 그때 우리의 공효진이 그런 말을 한다. 이 상황이 재밌냐고, 재미있어서 니 작품에 써 먹을 생각하냐고. 그러자 조인성이 멋있게 한방 날린다. 그래. 그렇다. 나의 상처도 작품에 이용해 먹는데, 남의 상처 좀 이용해 먹는 게 뭐 어떠냐고.

 

그게 좀 치사하긴 하지만 맞는 얘기다. 세상에 비밀이 어딨겠는가? 4사람 내지 6 사람만 건너면 우린 다 아는 사람들이라는데. 하지만 중요한 건, 나의 아픔이 그 누군가에겐 약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상처 받은 위로자라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독자들은 소설을 읽는 것인지도 모르고. 

 

지금까지 하루키에 대해선 많이 알려진 부분이 있고, 여기 실린 작품들은 비교적 그의 초기에 해당하는 작품이고 보면,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처럼 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작품이 몇 눈에 띈다. 이를테면, '우리들 시대의 포크로어- 고도 자본주의'라든지, '잠' 같은 작품은 확연히 그런 게 느껴진다.

 

특히 '잠'에서의 주인공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느낀 부분들을 묘사하는 이라든지, 불면증 때문에 잠에 대한 책들을 뒤적인 것을 읽으면 이건 정말 하루키가 언젠가 한 번은 불면증에 시달렸고 그것을 달래려고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잠을 연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만든다.

 

또한 '우리들 시대의 포크로어-' 같은 작품은 작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 보는 것 같고(이때도 섹스 얘기를 하는데 정말 재미없게 쓴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다). 즉 말하자면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서 고백록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행여나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독자나 인터뷰어에게 부탁하건데 이거 당신 이야기냐, 아니냐 그런 걸로 작가를 짜증나게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작가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요리하는 사람들이다. 내 이야기, 남의 이야기 구분하지 않는다. 다른 물어 볼 것도 많은데 그런 촌스러운 질문으로 귀한 기회를 허비하는가.   

 

그런데 얼마 전에 안 사실인데, 일본에선 하루키가 우리나라만큼 인기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 나라에선 안티도 많다고 한다. 그런데 비해 우리나라는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느낌이다. 우리나라의 한 권위있는 출판사는 그의 작품을 세계 명작  목록에 넣었다고 해서 구설수(?)에 올랐다고 하는데, 나 개인으로도 하루키는 확실히 좀 애매한데가 있는 작가는 아닌가 싶다. 적어도 그의 작품은 기존의 잣대와 사고방식으로 평가할 수 있는 작가는 아닌 것 같다. 그만큼 새로운 사고방식과 열린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작가는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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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8-13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책이군요. 이런 책이 나왔는지 몰랐어요.
그의 책은 몇 권 읽었는데 좋았던 것도 있고 그저 그런 것도 있었어요.
작가라고 해서 다 잘 쓸 수는 없는 거겠죠.

늦여름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에요. 만끽하시길...

아, 공감3 중에서 하나는 제가 누른 거랍니다. ㅋㅋ

stella.K 2014-08-13 12:24   좋아요 0 | URL
아, 오랜만이십니다.
저도 하루키는 별론데 워낙에 매스컴에서 띄워주는 게 있어서
그 부분은 좀 마땅치 않아요.
그냥 열심히 쓰는 작가로는 인정을 해 주겠는데 말이죠.
전 단편집이 좋았는데 오랜만에 읽었지만 그도 별로더군요.

이 리뷰 오랫동안 공감1이었는데 갑자기 3으로 올라가 있어서 놀랐어요.
그중 언니가 누르신 거군요. 고맙습니다. ^^

2014-08-13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