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책을 처음 접한 건 <나의 대중문화 표류기>란 책에서 였다. 그 책은 저자가 어린 시절부터 접해왔던 책이나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에 관한 생각들과 향수를 풀어낸 책으로 한 개인이 향유한 문화를 통해 하나의 자서전 내지 연대기로도 읽혀 재미있으며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저자는 참 부지런한 사람인가 보다. 앞서 말한 책이 올봄에 나왔는데 여름이 채 가기도 전에 한 권의 책을 더 냈다. 바로 이 책이다. 사실 문학을 나름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그 스펙트럼이 그리 넓지 못한 나는 기껏해야 순수 문학에 한정되어 있을 뿐, 하드보일드 문학을 말할 때 따라 나오는 레이먼드 챈들러나 헤밍웨이는 아직 읽지도 못했다. '하드보일드' 문학라... 항상 느끼는 거지만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그런데 이 책은 제목부터가 하드보일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말하자면 저자가 읽은 이쪽 방면의 책에 대한 정리를 하고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이 나의 의문을 풀어 줄 수 있을까? 그런데 왠걸, 내가 이 하드보일드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했나 보다. 막상 책을 펴보니 저자가 읽어 온 장르문학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하드보일드는 '창작의 한 태도로 현실의 냉혹하고 비정한 일을 감상에 빠지지 않고 간결한 문체로 묘사하는 수법'을 의미하지 않는가? 하긴, 책 제목에 하드보일드 대신 장르문학을 넣으면 조금은 없어 보이긴 할 것이다.
요즘 심심찮게 명사들의 책 읽기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렇게 장르문학만을 따로 엄선해서 보여주는 것도 나름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그 시도는 이 책의 저자가 처음은 아닌 듯 싶다. 이미 2011년 장르문학 매니아였던 고 홍윤 씨가 실아생전 '물만두'란 닉네임으로 블로그 활동을 하고 있을 때 그녀가 쓴 리뷰들를 모아 펴낸 <물만두의 추리책방>이 더 앞서고 있으니. 또한 이전에 장르문학 서평집이 있다는 소식을 들어 본적이 없으니 우리나라 최초는 아니었을까?
사실 우리나라에서 장르문학은 꽤 오랫동안 변방의 문학으로 취급 받아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나마 지난 90년 대를 거쳐오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해 지금은 인식이 꽤 많이 좋아진 것 같다. 하지만 안타까운 건 국내 작가가 주목 받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고, 주로 외국 작가를 소개하는 정도여서 그 점은 아직도 아쉽다.
그런데 나는 왜 책을 고르려 할 때 장르문학은 마지막까지 선택을 미루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꼭 장르문학이 다른 문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 된 이유에서만도 아닐 것이다. 왜 그런가를 생각해 봤더니, 나는 이 분야에 대해 지극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무서운 영화를 보면 그날 밤 가위 눌린다는 속설이 있는 것처럼 장르문학을 읽으면 내 영혼이 나쁜 악마에게 점령 당할 것만 같아 읽기가 꺼려지는 것이다. 게다가 책을 읽을 때 생을 관조하고, 통찰하는 이야기를 읽어도 부족한 판에 그렇게 음습하고, 칙칙한 이야기를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인가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난 이 분야의 책을 아직도 쉽게 좋아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장르 문학은 영화나 드라마에선 액션이나 미스터리, 스릴러라고 붙일 법한데 이런 분야도 극히 가려 보는 마당에 내가 장르문학을 볼 확률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물만두님이 살아계셨을 때 이렇게 장르문학에 쑥맥인 나 같은 독자에게 추천할만한 책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때 물만두님은 정말 매니아답게 나를 위한 추천 목록을 알려 준 기억이 난다. 더불어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 귀 기울여 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범죄는 그 시대를, 그 순간을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을 읽기에 가장 좋은 재료다. 범죄를 통해서 언제나 서로를 죽여왔던 인간의 깊숙한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고, 범죄란 가장 흥미진진한 이 시대의 축소판이다(7p).
무엇보다 나는 저자의 앞선 책에서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는데 이 분야에 관해서도 이토록이나 많은 책을 읽어 왔을 줄은 몰랐다. 이 책에서 다룬 책은 40권 쯤 되지만 굴비를 엮듯 관련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상당하다 싶다. 특히 요즘 장르문학에서 핫한 작가의 작품을 다룰 땐 아예 작가론에 버금하는 글을 쓰고 있어 나 같은 장르문학 문외한에겐 적지않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국내에 가장 많이 번역되고 있는 작가 중 하나인 히가시노 게이고나, <87분서> 시리즈 또는 <살인의 쐐기>를 쓴 나에겐 다소 생소한 에드 맥베인에 관해 쓴 글은 가히 탁월하다 싶고 당장 읽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이 책은 저자의 전작 <나의 대중문화 표류기>에 비하면 읽는 맛은 다소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분야의)책을 어떻게 하면 잘 읽을 수 있을까, 특별히 내가 모르는 분야에 대한 안내서로 손색이 없다. 저자의 성실한 책 읽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