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djuna.nkino.com

왕가위의 최신작 [2046]은 2046년의 미래를 무대로 한 SF를 쓰는 1960년대 홍콩 작가의 이야기입니다. 양조위가 연기한 이 작가는 아마 [화양연화]에서 양조위가 연기했던 무협 작가 선생과 동일인물일 겁니다. 같은 사람이라면 실연이 멀쩡한 사람을 망쳤다고 말할 수밖에 없군요. 이 영화의 느끼한 바람둥이 차우 선생은 [화양연화]의 순정파 유부남 아저씨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차우 선생은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네 사람의 여자들을 거칩니다. 검은 장갑을 낀 도박사인 수리첸, 이전에 알고 지낸 것이 분명한 미미, 같은 호텔의 이웃에 사는 바이 링, 호텔 주인의 딸인 왕진웬, 가끔 그는 그가 이전에 사랑했던 옛 여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얼핏 보면 차우 선생의 이야기는 우디 앨런적인 패러독스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바이 링은 차우 선생을 사랑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런 그녀를 외면합니다. 반대로 왕진웬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영감의 원천이 됩니다. 이 영화에서 차우 선생과 만나는 여자들은 모두 다양한 이유로 그와 엮여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왕가위의 영화들이 대부분 그렇듯, [2046]은 시간과 기억에 대한 묵상입니다. 과거 시대를 사는 작가가 미래를 상상하며 소설을 쓴다는 설정부터 그런 주제를 위한 그럴싸한 골격을 만들어주죠. 물론 그렇다고 이 영화가 그 주제에 대해 엄청 깊이있는 사색을 끌어내는 건 아닙니다. 왕가위는 언제나처럼 주제에서 달짝지근하고 얄팍한 도회적 감상을 끌어내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가끔 꽤 깊이있는 심리 묘사와 같은 것이 나오기도 하지만 왕가위식 산만한 편집 속에서 의미를 잃어버리죠.

[2046]은 그 중 자아도취가 심한 영화인데, 그건 이 영화가 그의 이전 작품들에서 소스를 끌어내고 미완으로 남겨둔 이야기들을 마무리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2046]은 두 시간 넘게 지속되는 영화적 자위 행위입니다. 물론 그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연륜을 쌓았으니 자기가 20년 동안 벌려놓았던 세계를 정리하고 싶기도 했을 겁니다. 일종의 팬 서비스일 수도 있겠죠.

팬서비스이건, 자위 행위이건, 전 상관없습니다. 저에게 [2046]이 구체적인 메시지나 묵상인 척하고 내뱉은 중얼거림은 모두 60년대라는 시대를 배경으로 장쯔이, 왕비, 공리, 유가령, 장만옥과 같은 배우들을 근사하게 찍기 위한 핑계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 목적을 거의 완벽하게 달성했습니다. 끝을 살짝 올린 아이라이너를 하고 장난스러운 유혹을 던지는 장쯔이에서부터 호텔 옥상에서 60년대 식으로 근사하게 담배를 피워대는 요정같은 모습의 왕비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의 '예쁜 여자 찍기'는 성공적입니다. 저처럼 예쁜 사람들을 많이 보기 위해 영화를 본 관객들은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을 거예요. 하긴 그 이상을 기대하며 극장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요? (04/10/28)

DJUNA

          

**혹평에 가까운데,사실 어느정도는 맞는 말이기도 하다.이번 2046은 신규팬들을 위한 보여주기가 아니라 듀나의 말처럼 왕가위의 팬들을 위한 팬서비스가 맞다.왕가위의 전 작품들에 대한느낌이 조금씩 묻어있다.나는 그래서 무척 좋았다.그때의 영화들을 떠올릴 수 있었으니까.무엇보다 장만옥을 볼 수 있었으니까.그래도 화양연화의 장만옥보단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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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ika 2004-10-29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연이 멀쩡한 사람을 망쳤다. - ㅋㅋ 맞아요...이게 화영연화 의 2편 격인데, 그때의 양조위랑 많이 분위기가 틀리더군요...
예전 씨네21을 매주 사볼때는 관심있게 읽은 듀나의 글인데, 요샌 씨네21도 끊어서 오랫만에 듀냐의 글 읽었습니다.

stella.K 2004-10-29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말이어요. 듀나. 이 사람 할 말은 다하는 사람 같아요. 거침없이...^^

urblue 2004-10-29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만옥 나온 장면 너무 짧았다구요.
장만옥과 기무라 타쿠야가 칸에서 영화보고 화냈다는 말도 있습니다.
찍은 시간에 비해 나온 시간이 지나치게 짧아서요.
그나마 기무라 타쿠야는 새로 찍어서 이번에 더 들어가긴 했지만 장만옥은...흑..제가 사랑하는 장만옥은...

stella.K 2004-10-29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만옥을 좋아하시는군요. 블루님. 저도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