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 친구가 몽골로 갔습니다.
남편이 몽골 주재원으로 발령이나 먼저 떠나고, 이제 그 친구와 두 자녀가 함께 살기 위해 간 것입니다. 글쎄요, 말로는 한 2년 있을 거라는데 그건 가서 살아봐야 아는 일이고, 솔직히 조금 허전합니다.
이 친구와는 12,3년 알고 지낸 사인데, 물론 국내에 살고 있다고 해서 더 잘 만나고 사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친구도 시집 가기 전이나 자주 만나는 거지, 그동안 1년에 한 두 번이나 만나는가요? 어느 해는 1년에 한번도 못 만나고 서로 전화로만 살아 있는 안부를 물은 적도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멀어지고 연락이 끊어진 친구도 몇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왜 이렇게 되나 이쉽기도 하지만, 그것이 순리라면 맡기는 수 밖에요. 서로의 끌림과 관심이 있지 않은 다음에야 일부러 인위적으로 가까워질려고 노력하는 것도 부질없다 싶기도 합니다.
이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 나를 보고 해바라기 마냥 밝게 웃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내가 그렇게도 좋았을까요? 우리가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이미 학교 졸업하고 막 사회 초년병으로 세상의 파도를 타야했을 때 과연 새로운 친구 하나 제대로 사귀어 볼 마음의 여유나 있었을까요? 솔직히 저는 이 친구가 좋긴 했지만 마냥 호들갑 떨만큼 좋지는 않았습니다. 이러다가도 또 어느 때가 되면 헤어지게 될 걸 대책없이 좋아하다 그 마음을 추스르기도 어려울 것 같아 마음의 문을 반만 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친구가 나를 좋아했던 건, 제가 자기와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해서 좋아했지요. 서로 다르기도 했지만, 날이 서 있고 그러면서 동시에 정이 많은 면은 그 친구와 제가 같은 면이기도 합니다.
그 친구는 늘 나의 긍정적인 면들을 한결 같이 봐 줬던 친구이기도 합니다. 오래된 친구는 때가 되면 멀어지고, 좀 사귈만한 친구들은 좀 안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단점도 쿡쿡 찔러대곤 하는데, 어떻게 이 친구는 그럴 수 있는 것인지, 항상 깊이 공감해주고, 격려만 해 주는 고마운 친구입니다.
하지만 어떤 땐 이렇게 좋은 면만을 봐 주는 그 친구에게 왠지 모를 안타까움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주 만난 건 고작 1,2년 정돈데 그때 저는 이 친구에게 너무 좋은 면만 보여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얼마나 못되고, 사람들에게 쌀쌀맞게 구는지 그 친구는 알지 못합니다. 꼭 바랐던 건 아니지만, 이런 모습도 보고 그러고도 나를 여전히 친구로써 좋아해 줄지 말지를 결정해 준다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묘한 욕심 같은 게 제 안에 있었던 거죠.
하지만 이 친구가 저를 좋아해 주는 건 거의 신앙과도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절대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수함'을 말하는 거죠. 그렇게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순수하게 나를 좋아해 주던 친구가 몽골로 떠난 것입니다.
그 친구나 그 친구의 남편이나 우리나라 최고학부를 나와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 가정을 꾸리고 살지만, 너무 깊은 곳에서 삶을 체득하고, 몸부림쳐야 하는 감수성을 가졌기에 결혼 초기는 그다지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남편은 더 없이 좋은 사람을 만났지만, 시댁 식구 특히 동서와의 갈등. 너무도 잘나고 독특한 면을 가진 아들 때문에 겪어야 했던 마음 고생, 교회에서 받는 스트레스 등등, 때문에 한동안 우울증에 속병까지 덤으로 떠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것을 그저 덤덤히 듣고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저는 이 친구는 어쩌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유유히 신앙에 의지해서 살아야 할 사람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글쎄요, 세상에 결혼해야 할 사람이 따로 있고, 결혼하지 말아야할 사람이 따로 있을까요? 하지만 그때는 정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친구는 언제까지나 자신의 상태를 이대로 방치해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시댁 식구들 앞에 자기선언도 하고, 상담 공부도 하고, 장구도 배우며, 시야를 외부로 돌리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몰랐던 자기 자신 을 발견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친구는 자신을 치유해 나가기 시작했고, 지금은 예전에 제가 이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 봤던 그 해바라기 같은 얼굴을 회복했습니다. 정말 절망과 상처의 바다를 헤엄쳐 나온 사람의 얼굴이 저런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 드는 생각은 결혼하는 사람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은 결혼한 그 친구가 얼마나 편안해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친구가 몽골을 간다고 했을 때 이 친구를 위해 무엇을 선물하면 좋을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책 선물 만큼은 피하고 싶었는데 불현듯 이 책을 선물해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념의 인간 야곱>과 <신앙의 사람 요셉>을요.
저자가 카톨릭 신부이기도 한데 마침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작년 저는 소위 말하는 '내맘대로 좋은 책' 베스트에 꼽기도 했구요.
성서에서, 야곱은 요셉의 아버지이기도 한데, 둘 다 자기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타국에서 힘들 게 삶을 산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야곱은 점점 쇠하여 간 사람이지만, 요셉은 점점 성하여 간 사람으로 둘이 묘한 대조를 이루기도 하지요. 아마도 이 두 권의 책이 먼길 떠나는 친구에게 여러모로 신앙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선물했습니다.
몽골은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척박한 땅입니다. 물론 최근 경제 부흥 운동으로 성장하는 나라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에 비하면 아직도 한참 뒤져있을 뿐만 아니라, 고산지대에 겨울엔 영화 20도 아래로 떨어지는 날도 많아 모자를 쓰지 않으면 머리에 혈관이 터져나갈 수도 있는 나라라고 합니다. 한동안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넓은 땅에 교회 찾기가 쉽지 않을텐데 마침 작고 소박한 교회를 만났다고 좋아했습니다. 그런 친구에게 이 책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분명 저도 강한 뭔가의 이끌림에 선물을 한 것이니 전혀 무해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친구에게 이 책들을 선물하면서 저는 이런 쪽지를 남겼었습니다.
oo야, 이책은, 작년에 나에게 많은 도전과 은혜를 준 책이야.
분명 하나님이 너를 몽골에 보내시는 뜻이 계시리라 믿는다.
그 길에 이 책들이 도움이 되길 바래.
그리고 넌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주신 최고의 친구라고 생각해.
언제나 꿋꿋했고, 은혜안에 살기를 원했던 너를 기억할게. 잘가라, 친구!^^
그러자 친구는 순간 누시울이 붉어졌다고 했습니다. 잘 다녀오라 말하지 않고 잘 가라고 해서 약간 뜨아했다고 했습니다. 글쎄요, 보내는 사람의 마음은 그런가 봅니다. 다시 못 올 곳을 떠나는 것처럼. 다시 돌아 왔을 때 내가 거기 그대로 있을지 약속도 못하겠으니. 무의식 중에라도 그렇게 썼나 봅니다. 어차피 사람의 인생이 순례자인 것을, 우리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 누가 알겠습니까? 다만 잘 가란 말밖에.
그 친구가 그곳에서도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넓고, 자신이 얼마나 행복하고, 복된 삶을 살고 있는지 새록새록 알아 갔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쪽에서 그 친구는 저쪽에서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또 어느 지점에선가 만나겠지요.
지금쯤 공항에서 그리운 남편과 반가운 해후를 했겠군요.
아, 이제는 제가 누시울이 붉어질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