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퍼
고정욱 지음 / 생각학교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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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다 살다 이 나이에 청소년 도서를 다 읽어 본다. 청소년 시절을 보낸 지가 언젠데. 물론 나도 그 시절 책을 안 읽은 건 아니다. 하지만 주로 고전을 청소년 눈높이에 맞춘 것이나 아니면 일반 책을 기웃거렸을 뿐 청소년 문학이라고 하는 장르는 읽은 기억은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 책이 나에겐 처음으로 읽는 청소년 문학인지도 모른다. 사실 나 때는 청소년 문학이 지금처럼 다양하지도 않았고 장르로도 인정받지도 못했다. (어쩌면 성장 문학을 청소년 문학과 혼용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은 좀 다르지 않나?) 게다가 내가 쓸데없이 고차원이어서 있어도 유치하다고 안 읽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이제 와 있는 이 책은 완전 내 스타일이다. 글씨도 크고, 200 페이지가 조금 넘는 것이 읽는데 부담도 없다. 스토리도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교훈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껏 난 뭐 때문에 이마에 내 천(川) 자를 그리며 힘들게 ㅜ책을 읽어왔는지 모르겠단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말하지만 가끔은 어렵고 힘든 책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쉽고 편한 책만 읽으면 독서에 힘이 붙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책은 역사와 교육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고나 할까.

이 책의 주인공 박창식은 정말로 행운의 아이란 생각이 든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시간 여행을 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창식이 행운의 아이가 될 만큼 똑똑하고 착하고 심성 바른 아이냐면 그렇지도 않다. 사춘기 아이답게 뭔가의 불만과 반항기가 가득하다. 한창 친구가 좋을 나이인데도 별로 또래와 어울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결정적인 건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다. 아버지가 회사에서 내부 고발자가 되어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그것을 술로 풀고 엄마와도 이혼한 상태다. 그러니 그 영향이 고스란히 창식에게로 간다. 그나마 할머니가 유일한 위로가 되어주지만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할머니께 심술을 부리기도 한다.

그날도 아버지와 싸우고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1928년에 와 있다. 그것도 북한의 평안도 정주다. 얼마나 황당할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자신의 신분이 오산중학교 학생이라는 정도. 하지만 그는 현재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정주이라니! 물론 원래 학교가 정주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

북한은 싫지만 그렇게 되고 보니 김소월과 백석 그리고 이중섭이 창식과 동기가 되어있다. 와, 이건 웬 행운인가? (아무리 허구하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사람을 무려 세 사람이나 친구로 만나다니! 놀라웠던 건, 나는 위의 세 분이 같은 학교 동기동창이란 걸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게다가 이승훈 선생이 교장이고, 김억 선생이 문학 동아리 지도교사다. 이 정도면 그 학교가 어떤 학교인지 가히 상상이 갈 만도 하다. 그 학교를 졸업했거나 현재 다니고 있는 학생은 어깨에 힘을 줘도 무방하겠구나 싶다.

그때는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거의 10년을 바라보는 시점이기도 하다. 재밌는 건 창식이 친구들과 함께 이웃 여학교 학생들과 미팅을 하기도 하는데 그 험악한 시절에도 낭만은 있었구나 싶다. 그래도 험한 시절은 험한 시절이다. 말순이 창식과 짝이 되고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말순이 언니로부터 전보를 받는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다) 다쳐서 위독한 상태니 급히 오라는 것이다. 즉 말순의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다 다친 것이다. 창식은 얼떨결에 말순이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동행하고 거기서 민족 독립의 열망과 긴급함을 목도하게 된다.

그런데 저자는 주인공 박창식을 어떻게 창조해낸 것일까. 사실 박창식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다. 저자는 이야기 말미에 <오산학교 백 년사>란 책에 박창식을 짧게 언급해 놓았다. 그러니까 거기서 힌트를 얻어 이 이야기를 구상했을 것이다. 이야기의 구성이며, 인물 캐릭터까지 정말 이야기를 다루는 솜씨가 탁월하다. (사실 '오산학교 백 년사'는 일반 서점에선 없는 걸로 나온다. 하지만 국립 중앙도서관이나 일부 대학 도서관엔 있다고 한다. 이런 책은 일반에도 많이 알려지면 좋지 않을까?)

영어에 '세렌디피티(serendipity)'란 단어가 있다. (같은 제목의 영화로 유명해진 단어다.) 완전한 우연으로부터 중대한 발견이나 발명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의미 한한다. 이 단어는 창식에게도 독자인 나에게도 둘 다 적용되는 단어는 아닐까 싶다. 창식은 분명 1928년을 경험해 본 이상 그때를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달라졌을 거다. 무엇보다 그림에 관심 있는 창식으로선 당대 유명한 화가 이중섭을 만났다는 건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또한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나라가 중요하다고 100번을 외치면 뭐 하겠는가? 한 번의 경험이 확실하지. 물론 어느 누구도 시간 여행은 할 수 없겠지만 책을 통해 우리는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창식은 그 뾰족하고 반항기 가득한 성격이 다듬어지고 한층 어른스러워진다. 그런데 이런 경험은 창식이만 하는 건 아니다. 물론 우리도 창식이처럼 시간 여행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설혹 가능하다고 해도 권할만한 일은 아닐 것 같다. 어쩌면 그 경험은 해로울 수도 있을 것 같다. 현재와 과거를 인지하는 능력이 붕괴되면서 미쳐버리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 타임 슬립은 타임 슬립이고, 오히려 현실을 열심히 살면 그런 세렌디피티의 기적은 우연을 가장해서 오지 않을까.

이 책은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구성을 통해 (보통은 시나리오는 과학이라고 해서 이 점이 강조되기도 하는데 소설도 역시 그렇다.) 읽는 맛이 좋다. 독자가 이럴진대 저자도 소위 쓰는 손맛을 느끼지 않았을까. 저자는 유명한 '까칠한 재석이 시리즈'의 작가로도 유명한데 급관심이 간다. 기회 있는 대로 한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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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4-10-11 1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스텔라님도 곧바로 청소년문학을 읽으셨군요. 이 리뷰 읽다보니까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생각이 나는 건 왜일까요. 과거 유명인들과 조우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겹쳤나봐요 ㅋㅋ

stella.K 2024-10-11 20:17   좋아요 1 | URL
ㅎㅎ 아무래도 그런 느낌이 나긴하죠?
그래도 우리나라고 오산학교 3인방의 청소년 시절을
다뤘다는 점에서 저는 이 작품에 별 반 개는 더 주고 싶습니다. ㅋㅋ
한마디로 구성이 좋은 작품이란 생각이 들어요.
간간히 아이다운 유머러스한 문장도 좋고.^^

푸른기침 2024-10-11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살다 살다 이 나이에 <청소년 도서를 읽고 쓴 생각 글>을 읽게 되는군요.

좋은 영어 단어와 그와 얽힌 영화도 얻어 가고, 제가 살짝 쿵 좋아하는 백석, 이중섭 이름도 발음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계절이 오는 어귀 쯤이라 생각했는데, 잠시 정신을 차려보니 계절의 한 복판에 와 있네요.

아침 저녁, 쌀쌀하지만, 이쁜 하늘이 보이는 요즘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맘껏 시간을 즐기시기를...
이만, 꾸벅~~~~~

stella.K 2024-10-11 20:20   좋아요 0 | URL
저 3인방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겠죠?
영어 단어 좋으셨습니까? 저도 이 단어 생각하고 좋았습니다. ㅋ

정말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고 있죠?
푸른기침도 감기걸려 기침하시마시고 늘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또 뵙게되길!^^

니르바나 2024-10-11 2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점퍼 재미있게 읽으셨군요.
그런데 오산학교는 평양이 아니라 평안북도 정주에 있었고,
이승훈은 오산학교 교장이 아니고 설립자입니다.
검색해보면 우리가 잘 아는 조만식, 유영모, 홍명희 선생이 교장을 지내셨고,
함석헌이 오산 학교에서 유영모 선생을 만났습니다.
오산학교는 우리가 잘 아는 인물들이 교사와 학생으로 있었던 민족의 학교 였습니다.

stella.K 2024-10-11 21:17   좋아요 1 | URL
ㅎㅎ맞아요! 정주! 이번에도 니르바나님의 예리함을 피해가지 못했네요.
북한하면 평양 아니면 함경도를 떠올리는지라 무의식적으로 이러네요 ㅠㅠ
근데 이 책에선 이승훈을 교장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알고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그땐 설립자가 교장도하지 않았을까요?
암튼 검색이라도 하고 쓸 걸 스스로 무식이 탄로나게 만들고 큰 일 났습니다.ㅠ ㅎㅎ

니르바나 2024-10-12 02:20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제가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정말입니다)
다만 제 서재에 있는 마이페이퍼 첫째 카테고리에 있는 私淑(사숙)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유영모 선생님을 나의 스승으로 생각하고 지내다보니 남강 이승훈-다석 유영모-함석헌 선생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편이라 이 분들에 대해 여러권의 책을 읽다보니 알게 된 사실입니다.
민족지사들이 모이는 학교라 일제의 탄압으로 결국 폐교된 오산학교다 보니 남강 이승훈 선생이 사이사이 교장 역할을 했는지도 모르죠.
니르바나가 짧은 안목으로 검열한다고 생각마시고 그냥 스텔라님 글에 댓글을 재미있게 단다고 귀엽게 봐주세요.ㅎㅎ

stella.K 2024-10-12 09:51   좋아요 1 | URL
아이고, 감히 제가 어떻게 니르바나님을 귀엽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제가 부탁드릴 일이죠. 실수하더라도 그냥 넘어가지 마시고 꼭 말씀해 주세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될 것 아니겠습니까.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24-10-15 1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정욱 작가의 동화를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주 특별한 우리 형‘, 같은...
저도 동화책이나 청소년 책을 많이 읽지 못해서 기회가 닿는 대로 읽어 볼 생각을 합니다.
청소년 책이 괜찮은 책이 많더라고요. 정채봉 작가의 책도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두루두루 읽어 보고 싶은데 한정된 시간만 남다 보니 마음만 앞서고 있네요. 그래도 알라딘에 들어와 제가 읽지 못한 책에 대한 리뷰를 볼 수 있어 좋습니다.^^

stella.K 2024-10-15 19:39   좋아요 0 | URL
고정욱 작가의 ‘아주 특별한 우리 형‘이 있었나요?
저는 워낙 ‘까칠한 재석이‘ 시리즈가 워낙 유명해서 다른 건 대충봤어요.
그러게요. 저는 전에 청소년 문학 문제 많다는 말을 들어서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그도 읽어보니까 재밌더라구요.
인물 설정할 때 도움이될 것 같기도해요.
고정욱 작가 노련하고 영리한 작가라는 생각이들었어요.
전 이날까지 정채봉 작가의 책은 유명하다는 것만 알지 읽어 볼 생각도
안하고 있었어요.ㅠ 유명하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텐데 말이죠.
TV는 딱 중2의 IQ에 맞춰있다잖아요. 그래야 모든 연령계층의
사람을 커버할 수 있다고 하던데 책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하더라구요.
특별히 어려운 책을 읽을 양이 아니라면요. 저도 점점 그쪽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싶기도해요. ㅎ

레삭매냐 2024-10-30 07: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 번의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 -
매우 격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청소년들을 위한 책이었군요.
잘 쓰인 책이라고 하니 호기심
만발이네요.

쓰는 손맛, 작가에 대한 찬사네요.

stella.K 2024-10-30 15:01   좋아요 1 | URL
혹시 읽게된다면 그냥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읽어주세요. 어른의 눈높이라면 약간 실망하실 수도 있어요. ㅎ 그래도 작가가 소월과 백석과 중섭의 청소년 시절을 그렸다는 건 높이 살만하다고 생각합니다.^^

yamoo 2024-11-02 1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정욱 작가에게 실제로 작문 수업인가 들은 적이 있어요. 학부때요. 키가 무척 작은데, 목발을 짚고 다녀서(두 다리가 없는 듯) 정말 충격적인 만남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당시 학부 2학년 때였는데...이 분을 몰랐을 때였고, 동화작가로만 자기를 소개하시더라구요. 깐깐하기 이를 데 없었고, 자신감에 찬 수업...목소리도 카랑카랑 했던 기억이 있는데....아직도 건재하시군요!

stella.K 2024-11-02 10:26   좋아요 0 | URL
아, 만나 보신 적이 있으시군요. 소아마비를 앓으셔서 다리가 안 좋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지금까지 책 내신 거 보면 무척 열심히 사시는 분 같더군요. 어떠실지 감히 상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