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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흐르는 경복궁
박순 지음 / 한언출판사 / 2023년 1월
평점 :
이 책은 조선의 임금과 함께 개국 공신들의 이름이 대거 등장한다. 이 책은 경복궁을 창건하고 그 안에 있는 각 전각과 루에 담긴 뜻과 의미를 되새기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엔 정도전이나 하륜, 서거정, 이이나 이황 같은 내로라하는 문필가들이 지은 시와 그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경복궁에 시가 있었다니. 미처 알지 못했다. 경복궁은 알다시피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 (君子萬年 介爾景福)'의 그 경복에서 따온 말로 정도전이 지은 이름이다. 백성과 함께 크나큰 복을 누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안에 '근정전'은 어떠한가. 부지런할 근(勤)에 다스릴 정(政)으로 이것 역시 정도전이 지었으며, 부지런히 정사에 힘쓰라는 의미에서 지었다고 한다. 경복궁의 상징이고, 임금과 신하의 모든 사무가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정도전이 이 근정전을 두고 이런 글을 썼다.
천하의 일이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게으르면 망하는 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정사와 같은 큰일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인군이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부지런해야 하는 까닭을 일지 못한다면 끝내 그 부지런함은 번잡하고 까다롭게만 될 뿐이므로 볼만한 것이 못될 것입니다.
선유들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행하고, 낮에는 어진이에게 묻고, 저녁에는 명령할 일들을 가다듬고, 밤에는 편안히 쉰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인군의 부지런함입니다. ......(하략)
그만큼 정도전은 얼마나 임금이 부지런히 정사를 살피기를 바랐는지 알 것도 같다.
사정전도 있었다. 규모는 근정전만 하지는 않았지만 이곳 역시 실제의 정사를 관장하는 집무공간이었다. 한마디로 '정사를 생각하는 곳'이었다. 정도전은 이를 두고,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잃는다고 했다.
경회루 누각은 하륜이 지었다. 하륜은 정도전과 함께 고려 말 이색에게서 성리학을 배운 기라성 같은 수재 중 한 사람으로 나이는 정도전보다 5살이 어리다. 경회루는 태종 때 지어진 것으로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경사스러운 모임 즉 연회를 뜻하며 외국 사신을 맞이하고, 임금과 신하가 연회를 벌이는 공간이었다. 하륜의 <경회루기>를 보면, 태종이 정도전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했을 때 아버지 태조에게 지은 불효를 조금이나마 속죄하는 마음에서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것도 태조가 승하한지 4년 뒤에야 완공되었다고 한다.
경회루는 박자청이란 사람이 설계했는데 특별히 저자는 그를 꼭 기억해 주길 바랐다. 그는 당대 천재 건축가였다. 사실 박자청의 본래 신분은 노비였다. 하지만 그는 건축, 토목 공사에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훗날 정 2품 판한성부사(오늘 날 사울시장에 해당)까지 역임했다. 이쯤 되면 누군가 떠오르지 않나? 맞다. 장영실이다. 처음 신분도 같은 노비였지만 그는 훗날 탁월한 과학자가 된다. 물론 장영실은 세종 시대 사람이고, 그는 그 이전의 사람이다. 저자는 박자청이 장영실 못지않은 사람인데 후대의 사람들이 기억을 못 해 주는 것 같아 아쉬워한다. 앞으로 장영실하면 박자청도 함께 기억해야겠다.
그리고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을 모셨던 고급관료였던 서거정은 경회루를 두고 이런 시를 지었다. 그것을 한글로 풀어보면,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시니
만물이 기뻐한다네
이예 즐거워서 음복하고자
질서 정연히 화려한 주연 베푸니
훈풍은 전각에 서늘하게 불어오고
밝은 태양은 중천에 높이 떴도다
천재일우로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 만나서
지극히 즐거움에 감히 편치 못하여
인의로써 처신한다네
그 밖에도 황홍헌, 이이 등도 경회루를 두고 글을 남기기도 했으니 경회루는 경복궁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이었나 보다.
사정전은 왕과 신하가 한가로이 만나 서로 대화를 나누던 일종의 거실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술자리도 벌이기도 했다고 하니 경회루보다 작았던 모양이다. 말이 좋아 군신 간의 한담이지 세조가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면 그 앞에서 물 한 모금 제대로 삼켰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세조를 두고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인재만큼은 잘 등용하길 바랐나 보다.
좌불안석하며 현인을 구하였고 이미 적임자를 얻었는데
더구나 때맞춰 내리는 비가 온 나라를 두루 적셨네
용 같고 범 같은 영재에게 술잔을 듬뿍 내리니
기쁘고 흡족한 연회에서 빙빙 돌진 말게나
이런 시를 지은 것을 보면 천하의 세조도 영재를 등용하는 일에 깨나 고민이 많았나 보다. 이 시는 당대 불세출의 영재 김수온을 등용하고 지은 시로 그래서였을까, 김수온은 세종부터 세조는 물론이고 성종까지 주요 요직을 거쳤다고 한다.
사정전에 이황은 이런 글을 썼다.
삼가 바라건대 들보를 올린 뒤 수많은 복들 찾아들고 백신들 옹위하여 전각은 강릉(산마루와 구릉)처럼 오래가고 국세는 반석처럼 안정되며, 전하의 성스러움과 공경함이 날로 드높아져 새롭고 또 새로워져 그치지 않으며, 덕 있는 정치는 바람으로 휩쓸리듯 널리 퍼져 황폐하지 말며, 사방의 기운 화평하여 육진의 질병 쓸어내고, 백성의 풍속 순박하며 해마다 풍년 되어 굶주림이 없어지며, 천자께 드린 문안 은총을 받으며 상제의 보살핌이 길이 자손에 전하소서
라고 썼다. 알다시피 상량문은 기원의 글을 쓴다. 그 바람과 기원이 어디 사정전에게만 있겠는가. 경복궁 전체가 태평성세를 기원하며 지었을 것이다. 주요 전각이 불에 타기도 했다. 태조 3년 만에 임금의 침실이라던 강녕전과 사정전, 흠경각이 모두 불에 탔다. 그뿐인가, 임진왜란 때도 타 고종 때야 비로소 복원하기도 했다. 왜 그처럼 오랜 시차를 두고 복원이 이루어졌는지 모르겠다. 지난 2008년이었던가? 어처구니 없게도 한 취객에 의해 숭례문이 불에 탔을 때도 안타까움이 컸는데 경복궁을 거쳐 간 임금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감히 상상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복궁은 조선이란 나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음에도 말없이 오늘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경복궁 한 번 안 가 본 사람이 있을까.
나 역시 두어 번 갔고 그곳을 지나다닌 적도 있는데, 너무 지식 없이 무심하게 다녔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역사하면 사람의한 역사를 되짚어 보곤 했는데 경복궁 같은 사적을 통해 역사를 볼 수도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나름 읽어 볼 만한 책이긴 한데 좋게 말하면 친절하고, 나쁘게 말하면 설명이 좀 장황하다는 느낌도 든다. 난 그저 시만 온전히 음미하는 그런 책인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