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리고 비가 옴.


1. 엄마 마중


일기예보엔 오후에 비가 온다고 했는데 정오도 되기 전에 비가 부슬부슬 온다. 그렇지 않아도 울엄니는 아침 밥상을 물리자 외출복으로 갈아 입고 집을 나섰다. 장을 보고 나선 것이다. 그것도 그먼 경동시장으로. 그곳은 물건이 싸기로 유명해 운동삼아 자주 가는 곳이긴 하다. 이번 주부턴 더위가 한풀 꺾였는데 어제 날씨도 좋더만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 집을 나설 건 뭐란 말인가. 그것도 우산도 없이. 


대충 돌아 올 시간 보다 조금 앞서 우산을 들고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비가 오니 대충 장을 보고 일찍 버스를 타지 않을까 싶었는데 웬걸 얄짜없다. 시간을 꽉 채운다. 집을 나설 때만해도 비가 제법 와 안 나갈 수가 없었는데 기다리는 동안 비가 또 잦아든다. 니미럴, 어쩌라고. 그래도 이왕 나왔으니 같이 들어가야지 별 수 있나. 


이제 노구를 이끌고 먼 곳에 가서 장을 봐 가지고 오는 일은 안하면 좋겠다 싶다. 특히 비가 올지 말지 꾸물거리는 날엔. 하긴 아침 먹은 것 설거지하면서 내가 입을 잘못 놀리긴 했다. 들은대로 비가 오후에 온다고 했고, 엄마는 그 말만 믿고 비 오기 전에 얼른 다녀온다는 계획이었으니. 더구나 얼마 전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마냥 잔뜩 흐렸는데도 비는 오지 않았다. 오늘도 그러지 않을까 했던 거지. 하지만 예상은 완전이 빗나갔다. 솔직히 귀찮지만 엄마 마중을 나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내가 앞으로 이럴 수 있는 날이 얼마나 있을까를 생각하면 말이다.


예상대로 엄마는 잔뜩 지고 들고 어느 버스에선가 내린다. 나는 그중 하나를 얼른 받아 들었는데 역시 묵직하다. 엄마는 무겁다며 건네주기를 망설였는데 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뭐 이 정도 가지고..." 했지만 솔직히 무겁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정류장에서 집까지의 거리가 10분 이내에 있다는 정도. 오늘은 그나마 내가 이렇게 들어주기나 했지 여느 때처럼 날만 좋았다면 엄마는 그냥 들고 올 판이다. 점점 장 보는 일을 귀찮아 하면서도 걸음은 나 보다 빠르다. 울엄마는 수퍼맘.                   


2.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이 책에 대한 번역 이야기가 눈에 띈다. 관심있는 분은 읽어 보시길. 


 번역·검수까지 15년 대작업… “텍스트가 끌어당기면 또 도전” [나의 삶 나의 길] (msn.com)


난 그다지 철학과는 친하지 않아 이 책이 나왔을 때 잘 생겼다는 것 외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책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익히 잘 알고 있는 몽테뉴의 '수상록'이라니까 알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알라디너들 한 질 장만했다고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던데 아직 이렇다 할 리뷰는 안 올라오고 있다. 암튼 점 하나 어떻게 찍느냐에라 의미가 달라진다고, 갑자기 관심이 간다. 무엇보다 이 책은 15년에 걸쳐 번역되었다고 한다. 번역만 10년. 검수 5년. 번역을 맡은 심민화 교수는 번역하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다신 안 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또 일을 붙든다. 그런 거 보면 천직은 아닐까 싶다. 인간의 일치고 쉬운 일이 어딨겠는가. 다신 안한다고 하면서도 다시하게 되면 그게 천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 엊그제 글을 마칠 때 아웃님들의 독서 버킷리스트를 공개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몇몇 분들이 답글을 달아주셨다.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버킷리스트도 버킷리스트이지만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죽음을 얘기했다는 게 난 좋았다. 


우리나라는 예나 지금이나 죽음을 얘기하는 걸 금기로 하지 않나. 하지만 죽음도 삶의 한 과정이라면 일상처럼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우린 죽음을 금기시 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생을 마감하고 싶은지를 잘 몰라한다고 한다. 그건 나도 예외는 아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생각해 볼 수 있다지 않은가. 죽음을 얘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장수하거나 죽음을 피해가는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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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8-25 2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스텔라님 이야기에 공감하며 ㅎㅎ 어머님들 꼭 그러시죠. 무거운 거 잔뜩 들고. 힘도 제가 더 센데 짐도 기어이 들고 오겠다 하시고 ㅠㅠ 엄마마중이란 말은 언제 봐도 뭔가 찡합니다 ㅠㅠ

stella.K 2022-08-26 18:50   좋아요 2 | URL
저는 엄마 보다 힘도 약하고 엄마 같이 살지도 못해요.
아마 우리 엄마 같으신 분은 우리대가 마지막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죠?ㅠ

거리의화가 2022-08-25 21: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할텐데 여전히 어려운 것 같아요ㅠㅠ 그래도 죽을 때 주변에 피해는 안끼치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에쎄 15년에 걸쳐 한 번역 감수 작업이라면 정성이 어마무시하겠네요. 그동안 외면하고 있었는데 저도 주문을 해야하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노고로 쓴 책이라니^^*

stella.K 2022-08-26 18:57   좋아요 2 | URL
맞아요. 그게 젤 숙제예요.
솔직히 저 역시도 남에게 피해 안 주면서 피해 안 받고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그럴 수 없겠죠?
혹시 살면서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봐줘야 한다면 그냥
나에게 복을 쌓는 거려니 해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저도 이 책 별 생각없었는데 그렇게 고생했다니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라도 사야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되면 버킷리스트 하나 더 늦는 거겠죠? ㅎㅎ

바람돌이 2022-08-26 0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어머니들은 왜 그러실까요? 무겁고 힘든데 꼭 멀리 있는 시장을 가고 꼭 버스나 지하철을 타시고.... 그래도 스텔라님은 우산들고 마중을 나가신다니 효녀셔요. 진짜로.... 저는 맨날 가지마라 가더라도 택시타라 잔소리만.... ㅠㅠ

에세는 저는 책이 아무리 예뻐도 도저히 읽을 자신이 없어서 패스했어요. ㅠㅠ

stella.K 2022-08-26 19:08   좋아요 1 | URL
효녀는요. 솔직히 귀찮죠. 접는 우산이라도 가져 갔다면
그것 믿고 안 나갔을지도 몰라요. 근데 비 쫄딱 맞고 들어오게
할 수는 없잖아요. 아침에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후회가 되더군요. 엄마도 말씀은 안 하셨지만 제가 나오게 만들었다고
부담스러워 하시는 것 같더군요.
저희는 부담 서로 안 주고 안 받기 뭐 그런 주의거든요.ㅋ
가족은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책은 안 사려고 하는데 모처에서 이벤트 신청하면 보내주는
곳이 있어 미친 척하고 1권만이라도 신청해 볼까 고민하고 있어요.ㅋ

책읽는나무 2022-08-26 09: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님들의 장바구니!!ㅜㅜ
늘 장을 봐다가 식구들 해 먹이고 싶은 마음은 영원하신가 봅니다. 다들 노령이신 어머님들 장을 보러 나서는 모습 안타까워하는 얘기 종종 듣게 되더라구요.
전 이제 에세 마지막 3 권만 사면 한 질 다 갖추게 됩니다ㅋㅋㅋ
저도 번역에 힘 썼다는 광고문구를 본 것 같아 사야지~일단 사야지~ 했던 것 같아요.
몽테뉴 철학가의 책이다 보니...읽으려고 선뜻 책이 펼쳐지진 않던데 책이 예뻐서 계속 쓰다듬고는 있습니다ㅋㅋ

stella.K 2022-08-26 19:14   좋아요 2 | URL
역시 알뜰살뜰한 책나무님!
저도 일단 한 권만이라고 애지중지 사랑을 줘 볼까 생각중이어요.ㅋㅋ

페크pek0501 2022-08-26 14: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몽테뉴의 ‘수상록‘을 한 권짜리로 갖고 있음에도 그 시리즈를 사고 싶더라고요.
그 책 세 권을 완독하고 나면 사유가 깊어질 것 같은 착각도 들고 말이죠. 어쨌든 뿌듯한 독서가 될 것 같아요.
저는 죽음을 생각하면 제가 남겨 놓게 될 노트, 일기장, 그리고 알라딘 블로그, 이런 것들이 걱정되더라고요. 뭐 떠나는 자가 그런 걱정은 쓸데없긴 하지만요. 죽음을 생각하면 초연해지기 어렵더라고요. ^^

stella.K 2022-08-26 19:23   좋아요 1 | URL
확실히 깊어지죠. 사유에 고전만한 게 또 있나요?^^

저도 그 생각해요. 가급적 흔적을 남기지 말고 다 정리하고 갈 수 있을까?
새나 산짐승들은 죽을 때가 되면 산속 깊숙히 숨는다는 말도 들은 것 같은데
인간은 살아 있을 때나 죽을 때나 흔적을 너무 많이 남기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가급적 뭘 안 남기는 방향으로 해야할 것 같은데
그러면 생각의 진보를 이룰 수 없잖아요.
인간은 확실히 문제적 존재인 것 같습니다.ㅠ

수상록 어떤가요? 기존에 나와 있는 건 번역이 안 좋다는 말이 있긴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