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뉴스를 보는데 문학 평론가 임헌영 선생님이 조정래 선생의 <아리랑>을 소개하기 위해 나왔다. 그런데 너무 많이 늙으셨다. 


내가 선생님을 언제 뵈었더라? 

거의 25년 전쯤 되었을 것 같다. 연극 대본을 쓰다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져 할 일이 없어졌을 때 뭔가의 돌파구를 찾다가 만나 뵙게 됐던 선생님. 그땐 저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너무 많이 야위신 것 같다. 선생님의 트레이드 마크인 눈썹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시다.


분명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유감이지만 떨어지고 보니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알고 나락도 떨어질만 하구나 했다. 그때 떨어지지 않았다면 저런 신선 같은 선생님을 어디 가서 뵐 수 있었을까. 모처에서 두 달 동안 매주 한 번씩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져었다. 워낙에 방대한 지식의 소유자시라 강의를 하셔야 하는데 이름만 강의고 입만 여셨다하면 청산유수셨다. 


선생님의 청산유수는 강의실에서만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강의가 끝나면 점심 자리에서 이어지기도 했다.말씀을 워낙 자분자분하게 하셔서 듣고 있으면 필시 빨려들어가거나 졸거나 둘중 하나였다. 그렇지 않아도 강의 전부터 소문이 자자했다. 아무 때나 들을 수 있는 흔한 강의 아니라고. (물론 유료 강의였는데 만만한 가격이기도 했다.) 선생님은 가끔 19금에 해당하는 말씀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셔서 그 앞에서 헛기침을하거나 얼굴을 붉히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지금도 그 입담은 여전하시겠지?


그 뉴스는 공교롭게도 '새로나온 책' 코너에서 유성호 작가와 함께 나눈 자서전 같은 대화집이 나왔다고 소개한다. 선생님은 무엇보다 우리 문학사와 민족사에 큰 획을 그으셨던 분이다. 무엇보다 <친일인명사전>을 2009년도에 출간하면서 근현대사의 반성적 자료를 구축하는데 크게 기여하셨다고 한다. 또한 문인간첩단 사건과 남민전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사실 그땐 선생님이 그렇게 유명한 분이실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내가 선생님을 뵈었을 때도 저 <친일인명사전>을 만들고 계셨을까.


이제 봤더니 월 듀런트의 <철학이야기>도 번역을 하셨네. 

새삼 내가 선생님에 대해 어느 한 가지도 재대로 알고 있는 게 없구나.ㅠ 

문득 저 위의 책과 함께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기억 못하시겠지? 몇명 되지도 않았지만 당시 수강생들 이름을 자연스럽게 불러주시곤 했다.

부디 건강하셔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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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11-08 20: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분의 제자셨군요!ㅎ 유튭에서 러시아 문학강의 재밌게 봤는데 엄청나신 분이셨음을 알았어요!

stella.K 2021-11-09 11:57   좋아요 1 | URL
막시님, 참말로 고맙소.
선생님 유튭이 있었구만요.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들어봤어야 하는 것인디...
지가 유튭을 잘 보지않는 관계로다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몰랐소.^^

책읽는나무 2021-11-08 2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대단하신 분이시군요!!
모습도 뭔지 모를 내공이 느껴집니다.
저런 분들은 건강하게 곁에 오래 계셨음 좋겠어요^^

stella.K 2021-11-09 12:02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첨 뵈었을 땐 눈썹이 진하고 길었는데
어느 새 선생님 눈썹 위에도 눈이 올라 앉아 있었더라구요.
그러니까 더 신선 같으시더라구요.
제가 첨 뵈었을 땐 40대 중후반은 되지 않으셨나 싶은데
이어령 교수도 참 많이 늙으셨더라구요.
이런 분들 뵈면 마음이 짠해요. 오래오래 사셔야 할 텐데...

희선 2021-11-09 0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을 뵈고 시간이 많이 지났군요 그래도 텔레비전 뉴스에서 선생님 모습을 봐서 반가웠겠습니다 <친일인명사전>을 만드셨군요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하십니다

이번주는 겨울이 온 것 같습니다 눈 온다는 곳도 있더군요 stella.K 님 감기 조심하세요


희선

stella.K 2021-11-09 12:05   좋아요 1 | URL
아직 살아 계셔서 반가웠죠. 그런데 저리 나이를 드셨으니 짠하죠.
<친일인명사전> 어떻게 생겼나 보고 싶은데 알라딘에선 못 보겠더라구요.

공기가 하룻밤 사이에 확연히 달라졌죠?
희선님도 건강 조심하세요. 고맙습니다.^^

니르바나 2021-11-09 0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임헌영선생님이 우리 곁에 살아 계신 것만 해도 고맙습니다.
같지 않은 인간 말종들이 그저 인간답게 살겠다는 문인들을 간첩으로 몰아
중앙정보부 지하조사실에서 고문 조사하고,
저잘난 사법부 족속들은 그 조서를 받아 재판이라고 해서
순전한 문인들,
임헌영, 이호철, 김우종, 장을병, 장백일 선생님을 간첩으로 만들어 주었지요
이름하여 문인간첩단 사건입니다.

그 시절 같이 민주화 운동을 하셨던 문인, 교수들이 유달리 일찍 세상을 떠나신 이유로
독재정권에 의해 저질러졌던 미행, 감시, 탄압, 구속, 고문등 유무형의 불법행위로 봅니다.
임헌영 선생님의 동지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벌써 저 세상으로 돌아가셨는데
비록 늙으셨지만 이렇게 생존해주셔서 독자로서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해직과 복직 또다시 해직과 복직 이후 짧은 교단 생활을 마치시고
<친일인명사전>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셨고,
범우사에서도 일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정씨!(임헌영님 버전으로)


stella.K 2021-11-09 14:10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고맙습니다.
나이 드니까 누가 이름 불러주는 사람도 없더군요,
이름은 부르라고 있는 건데 말입니다. ㅠㅠ
그때 선생님이 제 이름을 한 두어번 불러주셨던 것 같습니다.
전 워낙에 눈에 안 띄는 얌전한 수강생이라.ㅋㅋ

역시 니르바나님은 숨은 고수십니다.
선생님을 잘 몰랐던 건 선생님이 문학평론가라서 그랬던
이유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그 시절에 전 문학 평론은 별로 관심이 없었거든요.
아무리 유명한 분이라도.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우리나라 문학사를 알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제가 평생 죽기 전에 선생님의 책을 다
읽고 죽을까 싶고.
정말 선생님 시절엔 엄혹했어요.
어떻게 인두껍을 쓰고 저럴 수 있는지...ㅉ

프레이야 2021-11-10 2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전 티비에서 뵈었어요.
임헌영 선생님 강의를 들으셨다니요!!
완전 복된 스텔라님 ^^
다시 뵈니 진짜 눈썹이 신선 같으네요.
친일인명사전 울집에 있지요^^

stella.K 2021-11-10 20:32   좋아요 0 | URL
헉, 정말요? 그거 좀 올려주시면 안 될까요?
그땐 몰랐는데 정말 두고두고 귀하다 싶어요.^^

프레이야 2021-11-10 20:49   좋아요 1 | URL
남편이 두 권을 처음에 구입했어요.
지금 사무실에 있는데 사진 찍어 오라고 할게요 ㅎㅎ
시증조부가 독립운동 하셨던 분이라
관심이 많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