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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 다르거나, 튀거나, 어쨌거나
김홍민 지음 / 어크로스 / 2015년 6월
평점 :
부제; 너무 모범적인 독서를 하는 당신에게
나는 장르소설을 (거의)읽지 않는다.
그래도 내 길지만 가는 독서 역사에서 아주 잠깐 장르소설 그것도 추리소설을 읽은 적이 있긴 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내 앞에 앉은 남자 아이를 조금 좋아했는데 그 아이 눈에 띌려고 읽었다. 그 때 루팡과 셜록이 나오는 얇은 어린이용 추리소설이 있었다. 두 인물 아니면 변변한 추리 소설도 없었던 때였다. 하지만 훗날 생각해 보면 보통 이 두 인물을 접하면서 추리소설에 입문하게 되지 않나.
녀석의 눈에 띌려고 책을 가슴 높이도 아닌 거의 코높이까지 들고 읽었다. 그러자 역시 걸려 들었다. 검지 손가락으로 나의 이마 정중앙을 살짝 밀더니 "이 책 나 빌려 줄 수 있어?" 한다. 나는 웃으며, "그럼.빌려 줄게." 이렇게 말하면 얼마나 싸 보이겠는가. 나는 최대한 시크하게, "그래? 알았어. 다 읽고." 이렇게 대답했지만 속으론 쾌재를 불렀다. 그 아이는 여자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나중에 좋아하는 아이가 따로 있다는 걸 알았다. 가질 수 없다면 버리랬다고 난 당연히 녀석을 버렸다. 하지만 너무 많이 버렸다. 추리소설은 버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난 그것까지 버리고 만 것이다. 그게 무슨 죄라고.
그래도 살아오는 동안 추리를 읽어 보려고 한 적이 아주 없지는 않다. 그래도 마음 같지가 않아 알만한 유명한 작품들을 안 읽고 방치하다 결국 중고샵에 팔아버린 적도 있다. 추리 소설도 안 읽는데 판타지나 SF를 읽었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난 장르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장르물을 척척 잘 읽을 수 있을까. 철학책 좋아하는 사람에겐 열등감이 없는데 말이다.
이 책에 <터무니없는 책들을 좀 더 부지런히 읽어왔더라면>(196p~)이란 글이 나온다. 이 '터무없는 책'의 범위는 고전과 순수 문학을 제외한 SF나 판타지, 특히 만화 따위를 이르는 말이다. 또 이것을 저자는 '사회적으로 핍박 받아온 책'이라고 까지했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그런 책은 이른바 80년대 빨간 책들 즉 사회과학 도서들인줄 알고 있는데, 또 다른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저자의 말이 맞기도 하다.) 저자는 간혹 듣기 힘든 독창적인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곤 하는데 그럼 감탄하게 되곤 한다. 물어보면 그들은 바로 그런 '터무니 없는 책'을 어려서부터 탐독해 왔다는 대답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책은 뼈대없는 책, 킬링타임용으로 폄훼해 온 것도 사실이다. 특히 만화나 하이틴 로맨스는 더더욱. 이런 책을 학교에 가져가 담임 선생님 눈에 띄면 압수를 당하거나 그 자리에서 사지가 찢겨졌다. 것도 나름 트라우마다. 책 읽으라고 하곤 책을 찢는 건 어느 나라 법이란 말인가. 사회적으로 핍박 받아 온 거 맞다. 하지만 지나놓고 보면 그런 추억 하나쯤 있어야 어디 가서 왕년 소리 하면서 가오를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저자가 이렇게 말하니 이 부분에서 어지간히 힘든 시절을 견뎌 왔나 보다. 왜 장르물의 훌륭함을 몰라주냐고 툴툴거리는 것을 넘어, "우리 이대로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외치는 것도 같다. 가히 장르물 전문 출판사 사장님답다.(저자는 출판사 북스피어의 사장님이시다.) 그러면서 저자는 '라이트 노벨'에 주목해 달라고 한다. 라이트 노벨이란 무엇인가. 몇마디로 설명할 수 있나? 뭔가 알 것 같긴한데 설명하기는 애매하다. 그것은 문고본 판형으로 표지가 만화적 일러스트가 더해진, 중고생을 주요 독자층으로 하는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다. 미스테리, 판타지, 로맨스, SF가 혼재되어 있지만 '장르소설'로 분류할 수 없다. 더 나아가, 라이트 노벨의 범위는 매우 넓어서 때로는 장르나 순수문학까지 커버한다(202p~).
그러니까 어른들이 사춘기 아이들에게 죽어라 고전을 읽으라고 할 때, 죽어라고 안 읽고 다른 책을 읽고 있다면 그게 라이트노벨일 가능성은 거의 백퍼다. 예전에 이런 건 문학의 범주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걸 저자는 무려 7페이지 반에 걸쳐서 설명해 놨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 문학사대주의가 엄청났겠구나 싶기도 하다. 저자의 '터무니없는, 사회적으로 핍박 받은 책'이 그냥 볼멘 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면서 그 글 말미에 이런 말을 한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문학 베스트 10위 안에 절반 이상이 라이트노벨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라이트노벨이 한국의 독자(아마도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이고 장차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등에 대한 논의가 조금은 필요한 것이 아닐지.(그래서 그동안 한 번이라도 했나?) 지금부터 꼭 10년 전(이 책은 2015년 생이다) 장르소설도 라이트노벨 같은 흐름으로 '수입'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아무런 논의도 없다가 뒤늦게 '한국의 스티븐 킹을 키워야 한다느니', '한국의 서점 매대가 외국 추리소설로 뒤발해 있다느니' 하는 호들갑과 개탄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던 기억이 난다. 언제까지 '한국 소설의 경쟁력' 타령만 할 것인지,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206p)
좀 뼈때리는 얘기 아닌가. 사람에게 족보와 민증이 중요하듯, 책도 계통과 체계를 만들면 누구도 감히 뭐라고 하지 못한다. 라이트노벨의 역사가 얼만데 언제까지 족보없고, 체계없다는 소릴 들어야 하는가. 마치 문학의 서자 혹은 이유없이 미움 받는 며느리 같다. 책 가지고 자기검열이 심하면 한국의 스티븐 킹, 한국 소설의 경쟁력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언제 스티븐 킹이 프로젝트가 낳은 적자라고 하던가. 좋은 책, 나쁜 책 구분하지 말고 무슨 책이든 맘껏 읽을 수 환경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근데, 우리가 잘 아는 철학자들은 철학책만 읽을 것 같지? 천만에.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잘 생긴 평전에서, 제자 맬컴이 보내주는 미국의 대중 잡지에 실린 추리소설을 읽었다 한다. 그러면서 그는 수 백권의 소설 중 좋은 책이라 부를 만한 책이 두 권있는데 그 중 하나가 노버트 데이비스의 추리소설 ('두려운 접촉')이라고 했단다. (이 책은 현재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란 이름으로 나와있다.)
어디 그뿐인가, 헤밍웨이나 카뮈도 추리소설에서 영감을 얻었음을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저자는 모든 사람이 추리소설을 읽을 필요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추리소설이 무익하거나 해악이라고 여기진 말라고 호소한다. 그러고 보면 저자가 맺힌 게 정말 많구나 싶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하면 음지에서 읽을 걸 양지에서 읽자는 말인 것 같다.
이 책은 라이트노벨뿐만 아니라 장르물에 대해 정말 맛깔스럽게 잘 써 놨다. 읽고 있으면 나 같은 문외한도 한번쯤 읽고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고, 저자가 '터무니 없는 책(장르물) 어딨까지 읽어 봤니?' 하며 잘난 척하는 것도 같은데 그게 밉지가 않다.
인터넷 서점에 하루면 몇 편씩 올라오는 리뷰(또는 페이퍼)를 보면 고전 아니면 신간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 걸 보면 뭔가의 스토리가 읽혀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사춘기 때 읽지 않은 고전을 성인이 되어 속죄하는 마음으로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게 아니더라도 책이 좀 예쁜가. 그런데 오늘 지구에서 고전을 읽었다면 또 다른 행성을 개척한다는 마음으로 장르물도 읽어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런 책 중엔 희대의 걸작도 있는 것으로 안다. (알고 있으면 공유해 주시라.)
이제 서평집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왔다. 이 책은 그런 책 가운데 단연 블루오션이다. 나 같이 장르소설 안 읽는 사람이 읽기 딱 좋다. 그리고 어디가서 꿀리지 않고 아는 체하기 딱 좋다. 장르물에 대해 아는 체 하고 싶으면 이 책을 읽어라. 이 책에 소개된 책을 읽으면 더 좋고.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표지가 좀 구리다. 신경 좀 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