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느낌 그게 뭔데, 문장 - 우리 시대 작가 44인의 아름다운 산문과 '가족 문단사' - 앤솔로지
이태준 외 지음, 윤작가 엮음 / 우시모북스 / 2021년 1월
평점 :
나이 들면서 산문이 좋아진다. 산문은 보통 사춘기 시절부터 읽게 되는 것 같은데 아무리 책 읽는 것을 좋아해도 산문을 좋아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그 시절 산문을 읽는다는 건 밍밍한 평양냉면을 처음 먹는 맛이라고나 할까. 알지 않는가 처음 먹는 평양냉면이 어떤 맛인지. 기대에 차서 먹다가 뭔가 속은 느낌이다. 하지만 자꾸 먹으면 어느새 중독된다. 나는 그렇게 알게 모르게 산문을 읽고 나이를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산문은 시나 소설에 가려 홀대받아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내가 산문을 밍밍하게 느꼈으니 나도 그 홀대에 공범자 인지도 모르겠다. 산문을 읽을 그 시간에 다른 책을 읽지 했다. 독서 모임이나 아는 누구와 얘기를 해도 시나 소설 또는 인문서 가지고 얘기해도 누구의 산문집 가지고 얘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지 않나. 사람은 생각만큼 남의 생각에 관심이 없어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의 것들을 산문으로 써도 잘 안 읽게 되는 것 같다. 그런 내가 산문을 좋아하게 된 것은 간결하고도 정감 넘치는 문장 때문이기도 하지만 진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단편 소설은 몰라도 장편 소설은 워낙에 길어 앞뒤 맥락을 잘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오독하기가 쉽다. 그래서 읽다 보면 내가 지금 제대로 읽고 있는 거 맞나 자신이 없어지고 자꾸 확인하고 싶어 진다. 그 번거로움이 싫어 자꾸 산문에 눈길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요즘엔 주제도 다양하고 확실히 전과 같지 않다.
편견 같지만 요즘 작가와 옛날 작가가 좀 다른 것 같다. 요즘 작가는 스마트하고 재치가 넘치기도 하지만 옛날 작가들은 깊이가 있고 정감이 넘친다. 하지만 아쉽게도 옛날 작가들의 산문은 소설만큼 쉽게 접할 수 없는 것 같다. 정말 작심하고 작가의 선집 중 산문집을 따로 분류해 놓은 책이 아니면 대중서로는 안 나와 있는 것 같다. 그 점은 좀 아쉽다. 우리 옛 시나 소설은 그리도 잘 다루고 분류해 놓으면서 왜 산문은 그렇게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있다면 중고등학교 교과서나 참고서 정도.)
물론 그런 작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에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우리 문장>이란 책을 읽었는데 특별히 기대하지 않고 읽었는데 의외로 정말 좋았다. 그건 옛 작가의 산문 모음집으로 잘된 문장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예문집 같은 거였다. 산문이 단순히 문장 훈련을 위해 존재하는 건지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는 남는다(산문은 산문 그대로 봐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긴 해도 난 한동안 옛 작가들의 문장의 정취에 젖어 있었다.
이 책은 위의 책과 비슷하다. 한 작가의 산문이 아니라 여러 작가의 산문을 읽을 수 있으니 산문의 진수성찬이다.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선 취향이 달라 잡탕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난 이런 시도는 나쁘지 않다고 본다. 우린 보통 좋은 문장을 위해 산문을 읽기도 하고 써 보기도 하지만 이렇게 모아 놓고 보면 작가들의 표현이 참 다양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6개의 큰 주제로 분류하고 각 주제에 맞는 여러 작가의 글을 정리해 놓으니 이걸 다 어떻게 했을까 엮은이의 수고가 느껴진다.
그런데 지금은 책을 읽은 지가 꽤 됐는데도 뭔가의 아쉬움이랄까 불만이 쉬 떨쳐지지 않고 있다. 그렇게 분류만 해 놨다 뿐이지 좀 불친절해 보여서다. 본명은 차치하고라도(요즘은 본명을 안 쓰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렇게 남의 글은 열렬하게 수록해 놓고 해제는 고사하고 본인의 느낌도 없다. 본인의 글 하나쯤 실을 만도 할 텐데 그 흔한 여는 글조차 쓰질 않았다. 그런 것에서 산문은 산문으로만 얘기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뭔가 독자를 배려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는데, 집에서 가까운 약국에 새로운 약사가 왔는데 분명 약사일 텐데도 가운을 입지 않고 손님을 받고 있다. 나는 처음에 그가 점원인 줄 알았다. 그렇다고 물어보기도 뭐하고.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점원은 아닌 것 같다. 단골은 아니지만 오래전부터 그 약국은 점원 같은 건 두지 않았다. 그런 것으로 보아 그 약사는 가운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편하게 손님을 대하고 싶은 마음에 그러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고객인 나로선 별로 좋아 보이진 않았다. 마치 고객을 쉽게 생각하거나 약사로서의 권위와 책임을 다하려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작가가 책을 낸다는 것도 똑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자신의 글은 싣지 않는다고 해도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은 있다고 작가가 왜 이런 작업을 했는지 밝혀야 독자도 산문에 대한 애정이 얼마만 한 건지 알지 않겠는가. 그건 독자와 각각의 글을 실은 작가들에게 예의를 다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각 글에 대한 해제나 본인의 느낌을 간략하게 실으면 더 좋고. 그런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지도 않고 책을 내겠다는 건 별로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팻캐스트 방송은 얼마나 잘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정성으로 책을 만들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