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 동안 나는 철저하게 이방인이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아무도 나를 반겨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새로운 존재방식에 매료되었습니다. 나를 원초적으로 끌어당기는 어떤 생명력을 느꼈습니다. 현실의 땅을 딛고 있지만 완벽하게 현실을 떠나 있는 것 같은 느낌. - P6



북유럽 유학 에세이를 재밌게 읽었다. 10년전 남편이랑 유럽배낭여행을 할때 한번씩 혼자 여행하는 한국 여성들을 만나곤했다. 어쩌다 그렇게 여행중에 마주친 용감한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부러움과 걱정스러움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와...용감하다. 혼자 여행할 생각을 다 하다니, 저 사람은 마지막까지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을까?'  혹 그녀앞에 인종주의자라던지 해코지 하려는 나쁜 남자들이 접근하지는 않을까?' 남자들이 혼자 여행하는건 상대적으로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땐 유독 그렇게 생각했다. 타지에서 낯선 외국인들과 공부한다는건 또 어떨까? 여행도 그렇고 혼자서 뭔가를 해 내는 것은 보기보다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길 위의 인생'의 저자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삶은 그 자체로 여성들에게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녀 아버지가 그녀에게 해 준 것처럼.





여행하면서, 말하자면 길이 나를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서,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현실의 삶이복잡하게 얽혀 있듯 길도 그렇게 얽혀 있다. 길은 우리를 부정에서 현실로, 이론에서 실천으로, 주의에서 행동으로, 통계에서 이야기로 인도한다. 요컨대 머리에서 가슴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P.24 글로리아 스타이넘 '길 위의 인생'



"한 사람이 한 학기에 빌릴 수 있는 책은 최대 50권이야."
데스피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다시 사물함을 들여다본다. 방금 넣은 책들을 그저 한 번 매만져본 뒤 사물함 문을 닫고 열쇠를 돌린다. 쌓아놓은 책을 바라보는 데스피나의 눈빛은 탐욕에 가까웠다."그리고 책을 한 권 빌리면 기본적인 대출 기간은 한 달이야." 데스피나가 계속해서 말한다. "하지만 한 달 뒤 다른 대출 신청자가 있으면 일주일내로 그 책을 반납해야 해. 신청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도서관에 반납할 필요 없이 최대 석 달까지 갖고 있을 수 있어. 석 달 뒤에도 계속해서 그 책이필요하면 도서관에 가져와서 바코드를 한 번 더 찍어주면 돼. 그러면 또다시 석달 동안 갖고 있을 수 있는 거야."
 - P30



이 책의 저자는 스웨덴의 웁살라대학교 역사학과에서 3년간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이 학교는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인데 이런 학생들을 끌어모은 스웨덴 대학의 여러 풍경과 학습여건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위 발췌문에서 등장하는 데스피나의 경우는 자국의 전쟁상황 때문에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하고  늘 불안한 정체성을 가진 북 호더(Book hoarder)라고 해야할지, 그런 경우지만 그래도 이 문단 읽으면서 2주 밖에 안되는 우리동네 도서관의 대출기간이 참 인색해보였다. 석 달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2주 지나면 클릭 한번으로 일주일 더 연장할 수 있으니 3주인 셈이지만 기본 한 달 대출기한으로 여유롭게 바꿔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도서관도 최소한 지하철 역 숫자만큼 늘어났으면 좋겠다. 스웨덴은 세금을 많이 걷는다고는 하는데 교육에 대한 지원 규모가 얼마나 크면 해외 유학생들도 용돈까지 줘가며 무료로 교육했던걸까. 이 책의 저자는 3년간 무료로 이곳 대학에서 공부했다. 찾아보니 아쉽게도 지금은 정책이 바뀌어 (2012년 이후부터) EU국가 외의 나라에서 오는 학생들에게는 학비를 받는다고한다. 대신 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많이 지원해주는 듯하다. 노르웨이와 독일(일부 주립대학 제외)은 여전히 EU국가 외의 학생들도 무료로 교육받을 수 있다고 한다. 여하튼 무료로 이곳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싶어도 어느정도까진 돈이 있고 영어가 기본장착되어야 한다. 



이곳이 자전거 천국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안테의 법칙 알아?" 하고 오스카가 묻는다. "안테는 덴마크 소설에 나오는 어느 마을 이름인데, 그 마을은 아무리 우수하고 뛰어난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어. 그 소설을 읽으면 안테가 말하는 법칙이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비슷하다는걸 느낄 수 있을 거야." 나는 계속해서 얘기해달라고 재촉한다. "네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우리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마라. 우리보다 잘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우리보다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마라.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단 말이야?"
"뭐 꼭 다들 그런 건 아니지만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라면 이런 생각에 아주 익숙해."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타인과 경쟁하는 데 익숙하고 어떤 일에서든 등수가 매겨지는 사회에서 살아온 내게 안테의 법칙은 별 개성 없이 살거나 우둔한 양 떼처럼 살라는 말처럼 들린다. 한국 사회에서 그렇게 살았다가는 생존을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내가 학교에 다닐 때 반에서 너무 잘난 체를 하는 학생이 있으면, 선생님은 그 아이의 부모한테 당신 아이가 학교에선 그러지 말도록 교육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어."
"정말?" 나는 좀 놀랐다. "그건 뭐랄까…………. 한 학생의 자유의지를 너무 억압하는게 아닐까?"
"한 사람의 튀는 자유의지를 내버려두기보다는 평범한 다수의 학생들에게 관심을 갖고 기회를 주자는 거지."


"잘나가는 소수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면 사회는 그들 위주로 굴러가게 되잖아." 
 - P68




이 부분은 우리 나라와 정 반대인듯 하다. 우리나라는 학급에서 너무 뒤쳐지는 학생들이 요주의 인물이 된다. 그마저도 고등학교 2~3학년만 되면 아예 포기를 하는 것 같고. 반면에 뛰어난 학생들은 나머지 학생들의 모범으로 추앙받는다. '잘난 체를 하는 학생'이라고 하니 조금 애매하긴 하다. 잘나서 잘난체까지 하는 학생인지 못났는데 잘난 체만 하는 학생인지...전반적인 느낌상 전자같긴한데 일단 스웨덴은 평범한 다수를 더 중요시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린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잘난 소수만이 중심이 되어 평범한 다수가 주눅이 들지 않나? 이 부분 읽다가 인상깊어서 친구랑 통화했는데 친구는 워낙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이러니 혼자만 다른 방식을 추구하기는 결코 쉽지 않을거라고 했다. 내 생각에도 이런 가치 추구에 관한 문제는 지역사회에서부터 많은 토론이 이루어지고 합의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여건이 일단 형성되어 있지 않아 현실적으로 이렇게 중요한 문제들이 아예 다루어지지도 않는것도 같다. 그러니 결국엔 정치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안들, 문제가 붉어져 사회적 이슈가 집중된 것들만이 법안으로 겨우겨우 처리되고 있는것 같다. 선제적인 대안 형성보다는 뒷수습에 가까워 정책이 현실을 못 따라주는 일이 많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개개인이 먼저 문제의식을 느낄때 조금씩 이런 것들이 변화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사회문제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만의 주관을 확립해 나간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와 결코 똑같을 수는 없을것 같다. 어렵다. 

 





페넬로페님의 글을 읽고 어제 '12인의 성난 사람들'(1957년작) 이란 영화를 봤다. 페넬로페님 리뷰 바로가기

(https://blog.aladin.co.kr/714542162)

친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17세 소년에 대한 재판이 아주 잠깐 등장하고 12인의 배심원들이 유,무죄를 따지기 위해 따로 모여 의견을 나눈다. 영화 내내 특별한 이동없이 덥고 좁은 공간 안에서 이들의 논쟁이 주를 이루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다. 살인죄인 만큼 열띤 찬반론이 긴장감 속에서 오고간다. 본격적으로 이들이 대화를 나누기전 첫 투표에서는 11대 1로 소년이 유죄이며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아무리 소년이 유죄일지라도 사형은 과하다는 한명의 배심원이 조금씩 사람들의 내면의 양심을 일깨운다. 검사측의 증거또한 부실한 것이었음이 차츰 드러나면서 이들의 대화는 놀라운 결과로 이어진다. 여성 배심원이 한 명도 없다는게 남성에게 치우친 당시 사법제도의 편향성을 보여줬지만 편견의 위험성과 이견들의 경합일지라도 토론을 통해 보다 이성적인 합의에 이를 수 있음을 잘 보여준 영화였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2022년 6월 22일 경기도 안양소년원을 찾아가 "흉포화하는 소년범죄로부터 국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 장관은 이 말을 하면서 어떤 소년의 얼굴을 떠올렸을까. 그의 머릿속에 있는 소년은 어떤 존재일까. 한 장관이 취임하자마자 속도를 내는 일 중 하나가 '촉법소년 연령기준 하향'이다. (중략)소년범죄 사건이 터져나올 때마다 엄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중략)범죄를 저질러도 형사처벌 대신 보호처분 하도록 돼 있는 촉법소년 연령을 만 10~13살에서 10~12살로 낮춘다고 과연 국민이 더 안전해질까.한겨레21 1419호. P.6  어른의 죄, 아이의 벌 .황예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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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09-11 21:2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낯선 외국에서 이방인이 되어 혼자 길을 걸어보고, 어딘가로 들어가 맥주도 한 잔하고 싶은데 사실 저한테는 엄두가 나지 않는 여행이예요. 현실적으로 좀 어렵고 용기도 없어요. 그래서 저도 여행기를 통해 간접경험 하는 걸 좋아해요.
에릭 와이너의 ‘행복의 지도‘를 읽으면 스위스인들도 안테의 법칙같이 생활하더라고요.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상대를 너무 배려해서 삶이 넘 재미 없을 듯 보였는데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안테의 법칙이 절실히 필요하죠^^

미미님
12인의 성난 사람들, 영화 보셨군요.
거의 한 세트에서 찍었는데도 별로 지루하지 않죠?
H.D.H, 정말 싫어요 ㅠㅠ

미미 2022-09-11 22:15   좋아요 3 | URL
저도 그런 로망이 있어요 페넬로페님! 혼자 외국에서 기차도 타보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경험하고 싶은데 이런 책을 읽으면 어느정도 대리만족이 되더라구요. 타국의 풍경이 가득한 다큐나 영화도 마찬가지구요^^*
<행복의 지도>저도 읽어보고 싶던 책이예요. 북유럽의 몇몇 나라들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듯 해요. 너무 경쟁에만 치우친 우리에게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했어요ㅎㅎ

아! 페넬로페님. 오래전 영화임에도 몰입도가 뛰어나서 느낌상 30분정도 시청한것 같았어요.
마지막 결과도 감동적이었어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해요.^^*
(H.D.H,이장님,준서기 다 안보고 싶어요ㅠ.ㅠ)

레삭매냐 2022-09-11 23: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독일과 노르웨이는
외국인들에게 학비를 지원
해 주는가 보네요.

후자는 석유로 워낙 돈이
많으니 이해가 되네요.

미미님의 글을 읽으면서
다수의 생각들이 가볍게
무시되는 이상한 나라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미미 2022-09-12 08:47   좋아요 3 | URL
간간히 소문만 들어서 그닥 믿기지 않았는데
이렇게 다녀온 사람의 글을 읽으니 재밌더군요.*^^*

소수의 생각과 이익대로
돌아가도 성과주의와 자본의 논리에 의해
진실이 가려지는 경우가 허다한것 같습니다.


2022-09-12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12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2-09-12 02: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잊어버렸지만, 안테의 법칙을 생각하고 사는 나라 다른 곳도 있더군요 여러 나라에서 그걸 생각하는가 봅니다 북유럽... 자신을 평범하다고 생각하라는 말도 있지만,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라는 말도 있군요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습니다 경쟁하는 사회여서 청소년 범죄도 늘어나고 그걸 저지르는 나이도 자꾸 내려가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희선

미미 2022-09-12 09:04   좋아요 2 | URL
우리와는 정반대라 저 대목 읽으며 신기했어요. 물론 모두가 그런건 아니겠죠.
저도 평범하다고 생각하는게 좀 더 편하고 여유로울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촉법 소년에 관한 문제는 갈수록 심각한것 같아요.
뭐든 근본적인 해결을 찾는게 중요한데 단순한 분노표출로
공포심만 조장하는 것도 아닌듯하고.

이 영화 보면서 느끼는게 많아 좋았습니다. *^^*

새파랑 2022-09-12 12: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북유럽이 좋은거 같아요. 게다가 북(North) 유럽은 북(Book) 유럽이 맞는거 같아요 ^^

3년간 스웨덴 같은 곳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네요~!!

미미 2022-09-12 13:35   좋아요 2 | URL
오!! 그래서 대출 기간이ㅋㅋㅋㅋ새파랑님 재치ㅋㅋㅋ

저도 1년이라도 살아보고 싶어요 *^^*

잉크냄새 2022-09-12 16: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아무도 나를 반겨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여행의 본질이고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아닐까 싶네요.

미미 2022-09-12 16:51   좋아요 1 | URL
그렇죠!! 저도 그래서 이 문장에 끌렸어요. 같은 이유로 혼자 하는 여행이야말로 진정한 자기발견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웨덴의 경우 국회에서 여성 의원이 차지하는 비율이 47퍼센트이고, 입법부 · 고위 임직원 · 행정관리직에서 일하는 여성은 30퍼센트, 전문기술직은51퍼센트다. 한국은 여성 국회의원이 13.4퍼센트, 입법부 · 고위 임직원 · 행정관리직은 8퍼센트, 전문기술직은 39퍼센트다. 한국 여성은 남성이 1의 임금을 받는다면 0.4의 임금을 받는다(스웨덴 여성들은 0.81로, 이 비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지만 남성들과 동일한 노동을 해도 동일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 네 항목을 종합한 것이 ‘여성 권한 척도‘ 인데, 93개국 중에서 스웨덴은 2위이고 한국은 64위다. - P172

에드워드 사이드가 자신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에 성 빅토르휴고 Hugo von St. Victor의 학습론 Didascalicon」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부분을 인용했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이다. 모든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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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9-12 0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이다. 모든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오! 내마음 (๑ᵔ⤙ᵔ๑)

미미 2022-09-12 09:09   좋아요 1 | URL
스콧님은 뒤에 두가지 다 해당하실것 같습니다.
(*•̀ᴗ•́*)و ̑̑˂ᵒ͜͡ᵏᵎ
 

유럽 여행 동안 나는 철저하게 이방인이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아무도 나를 반겨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새로운 존재방식에 매료되었습니다. 나를 원초적으로 끌어당기는 어떤 생명력을 느꼈습니다. 현실의 땅을 딛고 있지만 완벽하게 현실을 떠나 있는 것 같은 느낌. - P6

사람마다 자신만의 ‘선택‘의 미학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재능을 가장 잘발휘할 수 있는 분야를(그다지 흥미로운 분야가 아니더라도) 직감적으로 선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재능은 없지만 이 분야가 아니면 도저히 인생을 사는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뜬구름 잡는
‘몽상가‘들은 주로 후자 쪽에 모여 있는 것 같다. 특히 철학, 문학, 역사학쪽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재능이 있건 없건 분명히 몽상가적 기질이 다분하다. 역사학은 ‘현실‘과 ‘문학‘ 사이 어딘가에 위치할 것이다. 지나간 현실을다루지만 ‘해석‘ 을 해야 하고, 그 해석은 자신의 패러다임으로 과거를 픽션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 P28

"한 사람이 한 학기에 빌릴 수 있는 책은 최대 50권이야."
데스피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다시 사물함을 들여다본다. 방금 넣은 책들을 그저 한 번 매만져본 뒤 사물함 문을 닫고 열쇠를 돌린다. 쌓아놓은 책을 바라보는 데스피나의 눈빛은 탐욕에 가까웠다.
"그리고 책을 한 권 빌리면 기본적인 대출 기간은 한 달이야." 데스피나가 계속해서 말한다. "하지만 한 달 뒤 다른 대출 신청자가 있으면 일주일내로 그 책을 반납해야 해. 신청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도서관에 반납할 필요 없이 최대 석 달까지 갖고 있을 수 있어. 석 달 뒤에도 계속해서 그 책이필요하면 도서관에 가져와서 바코드를 한 번 더 찍어주면 돼. 그러면 또다시석달 동안 갖고 있을 수 있는 거야." - P30

"넌 가진 것도 없는 애가 무척 행복하게 산다" 스웨덴으로 공부하러 가겠다고 하자 엄마가 내게 하신 말씀이다. "행복한 게 뭔데?" 하고 내가 묻자 엄마는 "넌 네가 하고 싶은 건 다 하잖아. 돈이 많아도 할 수 없는 일을 여행이니 공부니 ・・・・・・ . 넌 가난하지만 정말 행복한 거야" 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행복감이 밀려왔다. 엄마의 말이라 더 행복했던 것 같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 정말 이상적이지 않은가. - P38

스웨덴 학생들은 대화하는 무리에 외국인이 한 명이라도 끼면자연스럽게 대화를 영어로 바꾼다. 외국인이 있을 때 스웨덴어로 대화하는것은 에티켓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스웨덴 학생들의 영어 실력은 거의 원어민 수준이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유럽 국가 중에 스웨덴 사람들이 영어를 가장 잘한다고 정평이 나 있다. - P39

처음 한 달 동안 아직 서로를 탐사하고 있을 때, 우리 모두는 호앙이 미국인이므로 그의 작문 실력은 우리 중에서 월등할 거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첫과제를 내는 10월 4일, 우리는 원자폭탄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A4두 장 정도로 답변을 써야 하는 어떤 질문에 호앙은 달랑 두 문장만 적어서제출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아연실색했다. 스웨덴에서 유력한 인물을 많이배출한 유서 깊은 웁살라대학교의 역사학과에 이렇게 몰염치하고 불성실하며 배짱 좋은 작자의 입학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퇴짜 맞은 이래로 가장 큰 불상사가 아닐 수 없다고 오스카는 한탄했다(1950년대에 웁살라대학교를 다닌 미셸 푸코는 박사학위논문으로 ‘광기의 역사‘를 제출했는데 역사학과는 이 논문 심사를 거부했다. 당시에는 아무도 푸코의 논문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푸코는 파리대학교에 논문을 제출했고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 P59

"안테의 법칙 알아?" 하고 오스카가 묻는다. "안테는 덴마크 소설에 나오는 어느 마을 이름인데, 그 마을은 아무리 우수하고 뛰어난 사람이 있어도그 사람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어. 그 소설을 읽으면안테가 말하는 법칙이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비슷하다는걸 느낄 수 있을 거야."

나는 계속해서 얘기해달라고 재촉한다.
"네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우리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마라. 우리보다 잘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우리보다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마라.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단 말이야?"
"뭐 꼭 다들 그런 건 아니지만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라면 이런 생각에아주 익숙해."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타인과 경쟁하는 데 익숙하고 어떤 일에서든 등수가 매겨지는 사회에서 살아온 내게 안테의 법칙은 별 개성 없이 살거나 우둔한 양 떼처럼 살라는 말처럼 들린다. 한국 사회에서 그렇게 살았다가는생존을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내가 학교에 다닐 때 반에서 너무 잘난 체를 하는 학생이 있으면, 선생님은 그 아이의 부모한테 당신 아이가 학교에선 그러지 말도록 교육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어."
"정말?" 나는 좀 놀랐다. "그건 뭐랄까…………. 한 학생의 자유의지를 너무억압하는 게 아닐까?"
"한 사람의 튀는 자유의지를 내버려두기보다는 평범한 다수의 학생들에게 관심을 갖고 기회를 주자는 거지."


"잘나가는 소수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면 사회는 그들 위주로 굴러가게 되잖아."  - P68

북유럽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수천 년이 흐른 지금도 별로변하지 않은 것 같다. 사랑의 여신으로 등장하는 프레이야Freyja는 아름답고당당했으며 남성을 유혹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성적으로 매혹적이었던프레이야는 여러 명의 파트너를 소유했고, 남성들을 계속 울리고 다녀도 여전히 남성들의 우상이었다(마늘과 쑥만 먹으면서 20여 일을 버틴 웅녀의 후예인 나에 비하면, 스웨덴 여성들은 ‘유혹‘ 하는 것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
내가 만난 스웨덴 여성들은 분명 프레이야의 딸들이었다. 그들은 용감하게성과 사랑을 선택한다. 그들은 성적으로 자유로우면서도 결코 헤프지 않다.
흔히 스웨덴 여성들이 세계에서 가장 성에 개방적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그녀들이 아무에게나 정조를 준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조에 대해 당당하고 독립적이라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 P79

두툼한 자주색 스웨터를 입은 남자가 실내 구석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다. 1950년대에 프랑스를 떠나 스웨덴에 온 미셸 푸코도 저 사람처럼 이곳에 틀어박혀박사 논문을 썼을까? 당시 푸코는 이곳 카롤리나 도서관에서 『광기의 역사』를 썼다고 한다. 17세기에 유럽에서 광인들을 감금한 사례를 치밀한 자료고증을 통해 묘사한 광기의 역사』는 중세 시대의 희귀한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는 카롤리나 레디비바가 없었다면 아마 쓰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스웨덴의 긴 겨울밤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푸코는 매일같이 여섯 시간이상씩 집필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 습관은 웁살라의 길고 고독한 겨울을보내는 동안 생긴 것이라고 한다. 대영박물관의 도서관이 카를 마르크스KarlMarx, 1818~1883의 『자본론』의 산실이라면 웁살라의 카롤리나 레디비바는 근대 권력의 사회통제 메커니즘을 밝힌 『광기의 역사의 산실인 셈이다. - P83

서너 시간 자는 날이 허다했고, 잠이 부족해서 언제나 눈동자가 아리고 뻑뻑했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절대적인 시간이었다. 식사는 간단하게 마치고, 이메일은 한꺼번에 몰아서 답장하고, 칫솔질의 지그재그 횟수도 줄이는 등 가능하면 시간을 많이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열흘마다 과제가 떨어지면 우리는 도서관이나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매번 과제를 위해서는 보통 책 대여섯권과 논문 예닐곱 편 정도를 읽어야 했다. 논문은 J-STOR 같은 웹사이트에서 다운받을 수 있었지만 책은 도서관에서 빌리거나 사거나 복사를 해야 한다. 그런데 스웨덴은 책이 한 권에 3~4만 원대여서 매번 과제를 위해서 그비싼 책을 다 살 수는 없었다. 책을 복사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한국처럼책 값이나 복사 비용이 싼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과제가 떨어지면 우리는 책을 확보하기 위해 쏜살같이 도서관으로 뛰어가야 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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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성들은 본질적으로 자기들끼리 여성들을 무시하는 말을 한다. 그들은 여성에 대한 상징적 공격성으로 자신들의 이성애 성향을 확인하려 한다. (중략) 1933년에 '뉴욕타임스'에서 말한대로 '사람들'이 나쁜 섹스를 배워가게 마련이라면 , 여성과 남성이 배우는 내용은 동일할까?(중략) 자신의 역할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쾌락을 얻는 것 뿐이라고 배우는 사람은 누구이며, 섹스의 결과는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고 배우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쁜 섹스는, 여성은 성적 활동에서 동등한 행위자가 될 수 없으며 남성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을 만족시킬 권리가 있다는 젠더 규범에서 나온다. 이는 성적 지식, 성교육, 성적 보건 서비스에 대한 접근권이 부적절하고 불평등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는 집단 간에 불평등하게 적용되는 권력의 역학과 유무죄를 판단할 때 작용하는 인종차별적 개념을 서슴없이 이용한다. 나쁜 섹스는 정치적 문제로, 쾌락과 자기결정권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불평등 중 하나다. 이것은 동원 가능한 수단을 사용해서 성생활의 고통에 대응해보려 하는 젊은 여성들의 문제를 개인화하거나 유난스럽다는 태도로 비평하는 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신중히 검토해야 할 정치적 문제다.


내가 이렇게 해도 될까? 응, 해도 돼. 이 구조는 최악의 이성애 규범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P.56



최근에 남편이 넷플릭스에서하는 인도영화 RRR를 보다가 황당한 장면이 있다며 한 번 보라고 했다. 두 남성이 등장하는 전형적인 마초영화로 보였는데 그 중 한 남성이 차를 타고 지나가던 백인여성에게 한 눈에 반한다. 그 남성의 친구는 이를 눈치채고 친구와 백인여성을 이어주기 위해 압정인지 못인지를 길에 뿌려놓는다. 그 사실을 모르고 계속해서 달리던 백인여성의 차는 타이어가 펑크나 길 한복판에 멈춰선다. 이 두 남성은 마치 구원자라도 되는듯 나서서 어쩌고 저쩌고...이런 류의 스토리가 2022년 전세계가 시청하는 OTT에서 소비되는 것이 과연 무얼 의미하겠는가? 감독은 아마 이 장면에서 모두 웃을거라 기대하겠지만 그가 생각하는 관객은 남성관객이겠지. 남성 사이의 우정이 이런 것이라면 술에 취한 백인여성을 친구에게 업어다 주는것도 맥락상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인식의 연장선상에 나쁜 섹스는 자연스럽게 똬리를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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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9-08 14: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보지 않아서 그것이 조롱하기 위해 만든 영상인지에 대해 알 수는 없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구원 서사가 잘 먹혔잖아요. 위기에 처한 여자를 구해주는 남자, 그 남자와 그 여자는 연인이 된다!!
아 너무 찌질하고 못나지 않았어요? 너에게 위기의 상황이 닥쳐야만 내가 돋보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너무 멍청하고 바보같고 열등감에 찌들어있고 아 너무 싫어요 진짜 ㅠㅠ

아 오늘 쟝쟝님 방에서도 그렇고 여기에서도 그렇고 저 너무 분노가 장착되어 있네요. 우먼스 타이레놀 하나 먹고 진정해야겠어요. ㅠㅠ

미미 2022-09-08 14:33   좋아요 2 | URL
이 영화 너무 황당하더라구요. 그렇죠! 과거에는 워낙 많이 그랬겠지만 이런 스토리를 아직까지도 돈들여 정성스럽게 만들어낸다니...ㅋㅋㅋㅋㅋㅋㅋ아.....그리고 시장이었나 길을 저쪽에서 여기까지 카메라가 비춰주는데 온통 다 남자들 뿐인거예요? 여성도 있긴한데 월리찾기만큼 찾기힘든? ㅋㅋㅋㅋㅋㅋ 최신 영화라 화질도 뛰어나고 광고처럼 화려하게 만들었는데 알맹이가 그런것이니 분하기도하고 더 혼란스럽더군요.ㅠㅠ

책읽는나무 2022-09-08 15: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 압정 그 남자들 발바닥에 차례차례 찔러줘야 정신 차리지!!!!
예전엔 우정으로 사랑을 엮어 준다고 지네들끼리 으쌰으쌰~ 하는 장면들 별생각 없이 봤었는데 요즘은 상대편 여자의 생각은 고려치 않고, 그냥 찍으면 무조건 넘어온다는 식으로 들이대는 거, 이젠 못보겠더라구요.
도끼병으로 보여요ㅜㅜ
그리고 우정의 계략들이 어쩌면 그 사람들을 전혀 모르는 여성입장에선 모종의 공포 범행 계획처럼 느껴진다는 걸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미미 2022-09-08 14:58   좋아요 3 | URL
네!! 나무님 거기다 발가락 하나하나에두요ㅋㅋㅋㅋㅋ 여성들 뿐 아니라 남성들도 여성학을 공부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문제들 때문이지 싶어요.
그렇지 않으면 이런 말도 안되는 관념들만이 진실인양 또 계승되고 이어질테니 말이죠. 비단 인도 뿐만아니라 우리나라 드라마작가들도 좀더 시대를 앞서갔으면 합니다. 대부분 여성작가들인데 인식면에서 넘 고리타분해 드라마 볼때마다 고구마가 목에 걸립니다.ㅜㅜ

2022-09-08 1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08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ni74 2022-09-09 13: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완전 양아치 아닌가요 넘 유치도 하지만 ㅠㅠ남자의 구야행동은 너무 쉽게 낭만으로 포장되죠. 여성의 구애는 그들이 여성스럽디 하는 범주에 맞춰야 하고 ㅠㅠ 미미님 쾌락과 결과에 대한 문장들 참 좋네요 *^^* 미미님 즐겁고 행복한 추석 보내세요 ~~ 츄츄도 밥 잘 먹고 잘 자자 *^^*

2022-09-09 1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09 1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어린 시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나쁜 냄새처럼 몸에 달라붙는다. 당신은 다른 아이들에게서 그것을 감지한다. 각각의 유년기는 특유의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냄새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우리는 때때로 자신에게서 남들보다 나쁜냄새가 날까 봐 두려워한다. 당신이 어딘가에 서서 석탄과 재냄새가 나는 시절을 보내고 있는 소녀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소녀가 당신의 삶이 풍기는 끔찍한 악취를 알아차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다. - P47



코펜하겐 삼부작은 덴마크의 시인이자 작가인 토베 디틀레우센의 자전소설이다. 모든 소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정도 자전적요소를 포함한다는 말도 있는데 '자전소설'은 자서전과 소설의 중간지대쯤에 위치한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등대로',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마르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로맹 가리의 흰 개, 새벽의 약속, 밤은 고요하리라가 있고 최근작 중에서 내가 아는 건 뒤라스의 '죽음의 병',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데버라 리비의 '살림비용', 우리나라  작가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등이 있다. 



사진: The Guardian, 재너 팔레/리차우



삼부작 중에서 이 1권은 코펜하겐의 하층민이었던 부모가 토베의 학업을 지원해준14살까지의 순간들을 담았다. 어린 시절부터 시인의 심장을 지녔던 그녀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가면을 쓴 채 이방인처럼 외롭게 지낸다. 전반적으로 천진함 가득한 문장들 속에서 어른들의 위선과 어리석음을 꽤 뚫는 날카로운 시선을 엿볼 수 있다. 꾸밈없고 간결한 문장이 많아 원서로 꼭 이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쉽게도 펭귄북스의 2019년 버건디핑크 판본은 1권이 가장 인기있어서 그런지 품절상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성격은 다르지만 역시 글쓰기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엘레나 페렌테의 나폴리4부작 속 '나의 눈부신 친구'의 릴라가 떠오르기도했다. 



나는 진실을 드러나게 하려면 이따금씩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걸 안다. P.101






엄마의 이중적 태도 속 살얼음판 같은 관계, 그녀에게 '그림형제'의 멋진 판본을 선물해주었지만 여자들은 결코 시인이 될 수 없다고 하던 가난한 사회주의자인 아버지,토베와 달리 완벽한 외모와 재능으로 모두에게 사랑받던 오빠 에드빈과의 에피소드, 유일한 친구였던 귀엽지만 당돌한 소녀 빨간머리 루트. 토베를 둘러싼 이웃들과 친척들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따라가다보면 당시 코펜하겐 노동자계급의 가난하고 결코 평온하기만 하지 않은 삶의 희로애락을 옅보게 된다. 토베는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담담하게 기록하면서 때로 육감적인 시로 새로운 자아를 획득한다. 언젠가 시인이 되어 자기 안에서 피어오르는 언어로 세상을 가득 채우고 싶어했던 소녀. 그녀의 어린시절은 외롭고 고통스러웠지만 돌아갈 수 없는 기억으로 아득히 멀어진다. 




아버지는 내가 도서관의 시집들을 집까지잔뜩 지고 오지 못하게 하고, 결국 나는 산문이 담긴 책속에서 시들을 찾아내야 한다. "죄다 뜬구름 잡는 소리들이야." 아버지는 경멸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시들은 현실하고 아무 관련이 없어." 나는 현실을 좋아해 본 적도 없고, 현실에 관해 쓰지도 않는다. 내가 헤르만 방‘의 「길가에서」를 읽고 있으면 아버지는 두 손가락 사이에 그 책을 끼워 들어 올리고는 온갖 싫은 티를 다 내며 말한다. "이 사람이 쓴 건 아무것도 읽어선안 돼. 이 사람은 정상이 아니었다고!" 정상이 아니라는게 끔찍하다는 건 나도 안다. 정상인 척하려고 애를 쓰느라 나도 나름의 고생을 하고 있다. 그래서 헤르만 방역시 정상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자 나는 되레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ㅡP100



한때 나는 젊었고 환히 달아올랐지
웃음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서
나는 얼굴을 붉히는 장미 같았네
이제는 늙고 잊힌 사람이지만

그때 나는 열두 살이었다. 내 다른 시들은 모두 에드빈(오빠)이 말한 것처럼 여전히 ‘거짓말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대부분 사랑을 다루고 있었고, 쓰인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면 나는 애정을 쟁취하는 흥미로운 일들로채워진 방탕한 삶을 살고 있었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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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10-07 17:02   좋아요 4 | URL
감사해요*^^* 모나리자님도 연휴 즐겁고 유쾌하게 보내세요~♡

mini74 2022-10-07 21: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 콧끝 찡해하며 읽었던 리뷰네요~ 받으실만 합니다 ㅎㅎ 축하드려요 미미님 ❤️❤️❤️

미미 2022-10-07 21:44   좋아요 2 | URL
감사해요 미니님🧡🧡🧡
이 작품 정말 코끝 찡한 지점들이 여기저기 있어요~조금이라도 전달되었다면 다행입니다(>.<*)

서니데이 2022-10-07 22: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미미 2022-10-07 23:10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축하드려요!! 연휴 잘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2-10-08 09: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pc로 미미님 서재로 들어오니 더욱 더 입체적으로 보이네요. 원서까지 구비해 놓으시고, 역쉬!
미미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미미 2022-10-08 10:22   좋아요 3 | URL
문장이 쉬운편이라 원서도 어렵지 않을것 같아서요(읽기보다 욕심만 커지는ㅋ)
감사해요 페넬로페님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거리의화가 2022-10-08 21: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니님^^ 당연히 타실 줄 알았습니다!ㅎㅎㅎ 이달의당선 정말 축하드려요^^
저도 오늘 도서관에 가서 3부작 받아왔답니다^^

2022-10-08 2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2-10-09 03: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미 님 축하합니다 토베가 나쁜 남자를 만나는 게 생각나기도 하네요 제가 책을 읽은 건 아니고 scott 님이 쓰신 글에서 봤군요


희선

미미 2022-10-09 07:42   좋아요 2 | URL
감사해요 희선님 리뷰로도 책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 좋지요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그 중에서도 최악이 있었어요 그 사람 안만났다면 어땠을까 궁금해요 *^^*

책읽는나무 2022-10-11 11: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코펜하겐 삼부작도 있었는데 말이죠.
아....북플만 들어오면 읽어야 하고, 사야 할 책들 가득한 세상입니다.
암튼 그건 그거고, 또 글 읽고, 쓰고, 상 받는 일은 또 기쁜 일이죠^^
축하드려요^^

미미 2022-10-11 12:45   좋아요 1 | URL
나무님 감사해요!
나무님 마음 늘 제 마음입니다ㅎㅎ
읽고 싶은 책이 쌓여 한 책에 집중이 잘 안되네요. 욕심만 계속 차오르고요. 그래도 또 이웃분들 책과 사는이야기 읽는 재미를 놓을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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