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 동안 나는 철저하게 이방인이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아무도 나를 반겨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새로운 존재방식에 매료되었습니다. 나를 원초적으로 끌어당기는 어떤 생명력을 느꼈습니다. 현실의 땅을 딛고 있지만 완벽하게 현실을 떠나 있는 것 같은 느낌. - P6



북유럽 유학 에세이를 재밌게 읽었다. 10년전 남편이랑 유럽배낭여행을 할때 한번씩 혼자 여행하는 한국 여성들을 만나곤했다. 어쩌다 그렇게 여행중에 마주친 용감한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부러움과 걱정스러움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와...용감하다. 혼자 여행할 생각을 다 하다니, 저 사람은 마지막까지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을까?'  혹 그녀앞에 인종주의자라던지 해코지 하려는 나쁜 남자들이 접근하지는 않을까?' 남자들이 혼자 여행하는건 상대적으로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땐 유독 그렇게 생각했다. 타지에서 낯선 외국인들과 공부한다는건 또 어떨까? 여행도 그렇고 혼자서 뭔가를 해 내는 것은 보기보다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길 위의 인생'의 저자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삶은 그 자체로 여성들에게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녀 아버지가 그녀에게 해 준 것처럼.





여행하면서, 말하자면 길이 나를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서,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현실의 삶이복잡하게 얽혀 있듯 길도 그렇게 얽혀 있다. 길은 우리를 부정에서 현실로, 이론에서 실천으로, 주의에서 행동으로, 통계에서 이야기로 인도한다. 요컨대 머리에서 가슴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P.24 글로리아 스타이넘 '길 위의 인생'



"한 사람이 한 학기에 빌릴 수 있는 책은 최대 50권이야."
데스피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다시 사물함을 들여다본다. 방금 넣은 책들을 그저 한 번 매만져본 뒤 사물함 문을 닫고 열쇠를 돌린다. 쌓아놓은 책을 바라보는 데스피나의 눈빛은 탐욕에 가까웠다."그리고 책을 한 권 빌리면 기본적인 대출 기간은 한 달이야." 데스피나가 계속해서 말한다. "하지만 한 달 뒤 다른 대출 신청자가 있으면 일주일내로 그 책을 반납해야 해. 신청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도서관에 반납할 필요 없이 최대 석 달까지 갖고 있을 수 있어. 석 달 뒤에도 계속해서 그 책이필요하면 도서관에 가져와서 바코드를 한 번 더 찍어주면 돼. 그러면 또다시 석달 동안 갖고 있을 수 있는 거야."
 - P30



이 책의 저자는 스웨덴의 웁살라대학교 역사학과에서 3년간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이 학교는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인데 이런 학생들을 끌어모은 스웨덴 대학의 여러 풍경과 학습여건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위 발췌문에서 등장하는 데스피나의 경우는 자국의 전쟁상황 때문에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하고  늘 불안한 정체성을 가진 북 호더(Book hoarder)라고 해야할지, 그런 경우지만 그래도 이 문단 읽으면서 2주 밖에 안되는 우리동네 도서관의 대출기간이 참 인색해보였다. 석 달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2주 지나면 클릭 한번으로 일주일 더 연장할 수 있으니 3주인 셈이지만 기본 한 달 대출기한으로 여유롭게 바꿔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도서관도 최소한 지하철 역 숫자만큼 늘어났으면 좋겠다. 스웨덴은 세금을 많이 걷는다고는 하는데 교육에 대한 지원 규모가 얼마나 크면 해외 유학생들도 용돈까지 줘가며 무료로 교육했던걸까. 이 책의 저자는 3년간 무료로 이곳 대학에서 공부했다. 찾아보니 아쉽게도 지금은 정책이 바뀌어 (2012년 이후부터) EU국가 외의 나라에서 오는 학생들에게는 학비를 받는다고한다. 대신 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많이 지원해주는 듯하다. 노르웨이와 독일(일부 주립대학 제외)은 여전히 EU국가 외의 학생들도 무료로 교육받을 수 있다고 한다. 여하튼 무료로 이곳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싶어도 어느정도까진 돈이 있고 영어가 기본장착되어야 한다. 



이곳이 자전거 천국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안테의 법칙 알아?" 하고 오스카가 묻는다. "안테는 덴마크 소설에 나오는 어느 마을 이름인데, 그 마을은 아무리 우수하고 뛰어난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어. 그 소설을 읽으면 안테가 말하는 법칙이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비슷하다는걸 느낄 수 있을 거야." 나는 계속해서 얘기해달라고 재촉한다. "네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우리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마라. 우리보다 잘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우리보다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마라.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단 말이야?"
"뭐 꼭 다들 그런 건 아니지만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라면 이런 생각에 아주 익숙해."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타인과 경쟁하는 데 익숙하고 어떤 일에서든 등수가 매겨지는 사회에서 살아온 내게 안테의 법칙은 별 개성 없이 살거나 우둔한 양 떼처럼 살라는 말처럼 들린다. 한국 사회에서 그렇게 살았다가는 생존을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내가 학교에 다닐 때 반에서 너무 잘난 체를 하는 학생이 있으면, 선생님은 그 아이의 부모한테 당신 아이가 학교에선 그러지 말도록 교육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어."
"정말?" 나는 좀 놀랐다. "그건 뭐랄까…………. 한 학생의 자유의지를 너무 억압하는게 아닐까?"
"한 사람의 튀는 자유의지를 내버려두기보다는 평범한 다수의 학생들에게 관심을 갖고 기회를 주자는 거지."


"잘나가는 소수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면 사회는 그들 위주로 굴러가게 되잖아." 
 - P68




이 부분은 우리 나라와 정 반대인듯 하다. 우리나라는 학급에서 너무 뒤쳐지는 학생들이 요주의 인물이 된다. 그마저도 고등학교 2~3학년만 되면 아예 포기를 하는 것 같고. 반면에 뛰어난 학생들은 나머지 학생들의 모범으로 추앙받는다. '잘난 체를 하는 학생'이라고 하니 조금 애매하긴 하다. 잘나서 잘난체까지 하는 학생인지 못났는데 잘난 체만 하는 학생인지...전반적인 느낌상 전자같긴한데 일단 스웨덴은 평범한 다수를 더 중요시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린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잘난 소수만이 중심이 되어 평범한 다수가 주눅이 들지 않나? 이 부분 읽다가 인상깊어서 친구랑 통화했는데 친구는 워낙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이러니 혼자만 다른 방식을 추구하기는 결코 쉽지 않을거라고 했다. 내 생각에도 이런 가치 추구에 관한 문제는 지역사회에서부터 많은 토론이 이루어지고 합의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여건이 일단 형성되어 있지 않아 현실적으로 이렇게 중요한 문제들이 아예 다루어지지도 않는것도 같다. 그러니 결국엔 정치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안들, 문제가 붉어져 사회적 이슈가 집중된 것들만이 법안으로 겨우겨우 처리되고 있는것 같다. 선제적인 대안 형성보다는 뒷수습에 가까워 정책이 현실을 못 따라주는 일이 많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개개인이 먼저 문제의식을 느낄때 조금씩 이런 것들이 변화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사회문제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만의 주관을 확립해 나간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와 결코 똑같을 수는 없을것 같다. 어렵다. 

 





페넬로페님의 글을 읽고 어제 '12인의 성난 사람들'(1957년작) 이란 영화를 봤다. 페넬로페님 리뷰 바로가기

(https://blog.aladin.co.kr/714542162)

친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17세 소년에 대한 재판이 아주 잠깐 등장하고 12인의 배심원들이 유,무죄를 따지기 위해 따로 모여 의견을 나눈다. 영화 내내 특별한 이동없이 덥고 좁은 공간 안에서 이들의 논쟁이 주를 이루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다. 살인죄인 만큼 열띤 찬반론이 긴장감 속에서 오고간다. 본격적으로 이들이 대화를 나누기전 첫 투표에서는 11대 1로 소년이 유죄이며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아무리 소년이 유죄일지라도 사형은 과하다는 한명의 배심원이 조금씩 사람들의 내면의 양심을 일깨운다. 검사측의 증거또한 부실한 것이었음이 차츰 드러나면서 이들의 대화는 놀라운 결과로 이어진다. 여성 배심원이 한 명도 없다는게 남성에게 치우친 당시 사법제도의 편향성을 보여줬지만 편견의 위험성과 이견들의 경합일지라도 토론을 통해 보다 이성적인 합의에 이를 수 있음을 잘 보여준 영화였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2022년 6월 22일 경기도 안양소년원을 찾아가 "흉포화하는 소년범죄로부터 국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 장관은 이 말을 하면서 어떤 소년의 얼굴을 떠올렸을까. 그의 머릿속에 있는 소년은 어떤 존재일까. 한 장관이 취임하자마자 속도를 내는 일 중 하나가 '촉법소년 연령기준 하향'이다. (중략)소년범죄 사건이 터져나올 때마다 엄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중략)범죄를 저질러도 형사처벌 대신 보호처분 하도록 돼 있는 촉법소년 연령을 만 10~13살에서 10~12살로 낮춘다고 과연 국민이 더 안전해질까.한겨레21 1419호. P.6  어른의 죄, 아이의 벌 .황예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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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09-11 21:2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낯선 외국에서 이방인이 되어 혼자 길을 걸어보고, 어딘가로 들어가 맥주도 한 잔하고 싶은데 사실 저한테는 엄두가 나지 않는 여행이예요. 현실적으로 좀 어렵고 용기도 없어요. 그래서 저도 여행기를 통해 간접경험 하는 걸 좋아해요.
에릭 와이너의 ‘행복의 지도‘를 읽으면 스위스인들도 안테의 법칙같이 생활하더라고요.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상대를 너무 배려해서 삶이 넘 재미 없을 듯 보였는데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안테의 법칙이 절실히 필요하죠^^

미미님
12인의 성난 사람들, 영화 보셨군요.
거의 한 세트에서 찍었는데도 별로 지루하지 않죠?
H.D.H, 정말 싫어요 ㅠㅠ

청아 2022-09-11 22:15   좋아요 3 | URL
저도 그런 로망이 있어요 페넬로페님! 혼자 외국에서 기차도 타보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경험하고 싶은데 이런 책을 읽으면 어느정도 대리만족이 되더라구요. 타국의 풍경이 가득한 다큐나 영화도 마찬가지구요^^*
<행복의 지도>저도 읽어보고 싶던 책이예요. 북유럽의 몇몇 나라들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듯 해요. 너무 경쟁에만 치우친 우리에게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했어요ㅎㅎ

아! 페넬로페님. 오래전 영화임에도 몰입도가 뛰어나서 느낌상 30분정도 시청한것 같았어요.
마지막 결과도 감동적이었어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해요.^^*
(H.D.H,이장님,준서기 다 안보고 싶어요ㅠ.ㅠ)

레삭매냐 2022-09-11 23: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독일과 노르웨이는
외국인들에게 학비를 지원
해 주는가 보네요.

후자는 석유로 워낙 돈이
많으니 이해가 되네요.

미미님의 글을 읽으면서
다수의 생각들이 가볍게
무시되는 이상한 나라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청아 2022-09-12 08:47   좋아요 3 | URL
간간히 소문만 들어서 그닥 믿기지 않았는데
이렇게 다녀온 사람의 글을 읽으니 재밌더군요.*^^*

소수의 생각과 이익대로
돌아가도 성과주의와 자본의 논리에 의해
진실이 가려지는 경우가 허다한것 같습니다.


2022-09-12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12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2-09-12 02: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잊어버렸지만, 안테의 법칙을 생각하고 사는 나라 다른 곳도 있더군요 여러 나라에서 그걸 생각하는가 봅니다 북유럽... 자신을 평범하다고 생각하라는 말도 있지만,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라는 말도 있군요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습니다 경쟁하는 사회여서 청소년 범죄도 늘어나고 그걸 저지르는 나이도 자꾸 내려가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희선

청아 2022-09-12 09:04   좋아요 2 | URL
우리와는 정반대라 저 대목 읽으며 신기했어요. 물론 모두가 그런건 아니겠죠.
저도 평범하다고 생각하는게 좀 더 편하고 여유로울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촉법 소년에 관한 문제는 갈수록 심각한것 같아요.
뭐든 근본적인 해결을 찾는게 중요한데 단순한 분노표출로
공포심만 조장하는 것도 아닌듯하고.

이 영화 보면서 느끼는게 많아 좋았습니다. *^^*

새파랑 2022-09-12 12: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북유럽이 좋은거 같아요. 게다가 북(North) 유럽은 북(Book) 유럽이 맞는거 같아요 ^^

3년간 스웨덴 같은 곳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네요~!!

청아 2022-09-12 13:35   좋아요 2 | URL
오!! 그래서 대출 기간이ㅋㅋㅋㅋ새파랑님 재치ㅋㅋㅋ

저도 1년이라도 살아보고 싶어요 *^^*

잉크냄새 2022-09-12 16: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아무도 나를 반겨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여행의 본질이고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아닐까 싶네요.

청아 2022-09-12 16:51   좋아요 1 | URL
그렇죠!! 저도 그래서 이 문장에 끌렸어요. 같은 이유로 혼자 하는 여행이야말로 진정한 자기발견이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