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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당신의 어린 시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나쁜 냄새처럼 몸에 달라붙는다. 당신은 다른 아이들에게서 그것을 감지한다. 각각의 유년기는 특유의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냄새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우리는 때때로 자신에게서 남들보다 나쁜냄새가 날까 봐 두려워한다. 당신이 어딘가에 서서 석탄과 재냄새가 나는 시절을 보내고 있는 소녀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소녀가 당신의 삶이 풍기는 끔찍한 악취를 알아차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다. - P47
코펜하겐 삼부작은 덴마크의 시인이자 작가인 토베 디틀레우센의 자전소설이다. 모든 소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정도 자전적요소를 포함한다는 말도 있는데 '자전소설'은 자서전과 소설의 중간지대쯤에 위치한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등대로',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마르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로맹 가리의 흰 개, 새벽의 약속, 밤은 고요하리라가 있고 최근작 중에서 내가 아는 건 뒤라스의 '죽음의 병',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데버라 리비의 '살림비용', 우리나라 작가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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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The Guardian, 재너 팔레/리차우
삼부작 중에서 이 1권은 코펜하겐의 하층민이었던 부모가 토베의 학업을 지원해준14살까지의 순간들을 담았다. 어린 시절부터 시인의 심장을 지녔던 그녀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가면을 쓴 채 이방인처럼 외롭게 지낸다. 전반적으로 천진함 가득한 문장들 속에서 어른들의 위선과 어리석음을 꽤 뚫는 날카로운 시선을 엿볼 수 있다. 꾸밈없고 간결한 문장이 많아 원서로 꼭 이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쉽게도 펭귄북스의 2019년 버건디핑크 판본은 1권이 가장 인기있어서 그런지 품절상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성격은 다르지만 역시 글쓰기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엘레나 페렌테의 나폴리4부작 속 '나의 눈부신 친구'의 릴라가 떠오르기도했다.
나는 진실을 드러나게 하려면 이따금씩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걸 안다.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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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이중적 태도 속 살얼음판 같은 관계, 그녀에게 '그림형제'의 멋진 판본을 선물해주었지만 여자들은 결코 시인이 될 수 없다고 하던 가난한 사회주의자인 아버지,토베와 달리 완벽한 외모와 재능으로 모두에게 사랑받던 오빠 에드빈과의 에피소드, 유일한 친구였던 귀엽지만 당돌한 소녀 빨간머리 루트. 토베를 둘러싼 이웃들과 친척들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따라가다보면 당시 코펜하겐 노동자계급의 가난하고 결코 평온하기만 하지 않은 삶의 희로애락을 옅보게 된다. 토베는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담담하게 기록하면서 때로 육감적인 시로 새로운 자아를 획득한다. 언젠가 시인이 되어 자기 안에서 피어오르는 언어로 세상을 가득 채우고 싶어했던 소녀. 그녀의 어린시절은 외롭고 고통스러웠지만 돌아갈 수 없는 기억으로 아득히 멀어진다.
아버지는 내가 도서관의 시집들을 집까지잔뜩 지고 오지 못하게 하고, 결국 나는 산문이 담긴 책속에서 시들을 찾아내야 한다. "죄다 뜬구름 잡는 소리들이야." 아버지는 경멸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시들은 현실하고 아무 관련이 없어." 나는 현실을 좋아해 본 적도 없고, 현실에 관해 쓰지도 않는다. 내가 헤르만 방‘의 「길가에서」를 읽고 있으면 아버지는 두 손가락 사이에 그 책을 끼워 들어 올리고는 온갖 싫은 티를 다 내며 말한다. "이 사람이 쓴 건 아무것도 읽어선안 돼. 이 사람은 정상이 아니었다고!" 정상이 아니라는게 끔찍하다는 건 나도 안다. 정상인 척하려고 애를 쓰느라 나도 나름의 고생을 하고 있다. 그래서 헤르만 방역시 정상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자 나는 되레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ㅡP100
한때 나는 젊었고 환히 달아올랐지
웃음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서
나는 얼굴을 붉히는 장미 같았네
이제는 늙고 잊힌 사람이지만
그때 나는 열두 살이었다. 내 다른 시들은 모두 에드빈(오빠)이 말한 것처럼 여전히 ‘거짓말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대부분 사랑을 다루고 있었고, 쓰인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면 나는 애정을 쟁취하는 흥미로운 일들로채워진 방탕한 삶을 살고 있었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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