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 동안 나는 철저하게 이방인이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아무도 나를 반겨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새로운 존재방식에 매료되었습니다. 나를 원초적으로 끌어당기는 어떤 생명력을 느꼈습니다. 현실의 땅을 딛고 있지만 완벽하게 현실을 떠나 있는 것 같은 느낌. - P6
사람마다 자신만의 ‘선택‘의 미학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재능을 가장 잘발휘할 수 있는 분야를(그다지 흥미로운 분야가 아니더라도) 직감적으로 선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재능은 없지만 이 분야가 아니면 도저히 인생을 사는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뜬구름 잡는 ‘몽상가‘들은 주로 후자 쪽에 모여 있는 것 같다. 특히 철학, 문학, 역사학쪽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재능이 있건 없건 분명히 몽상가적 기질이 다분하다. 역사학은 ‘현실‘과 ‘문학‘ 사이 어딘가에 위치할 것이다. 지나간 현실을다루지만 ‘해석‘ 을 해야 하고, 그 해석은 자신의 패러다임으로 과거를 픽션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 P28
"한 사람이 한 학기에 빌릴 수 있는 책은 최대 50권이야." 데스피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다시 사물함을 들여다본다. 방금 넣은 책들을 그저 한 번 매만져본 뒤 사물함 문을 닫고 열쇠를 돌린다. 쌓아놓은 책을 바라보는 데스피나의 눈빛은 탐욕에 가까웠다. "그리고 책을 한 권 빌리면 기본적인 대출 기간은 한 달이야." 데스피나가 계속해서 말한다. "하지만 한 달 뒤 다른 대출 신청자가 있으면 일주일내로 그 책을 반납해야 해. 신청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도서관에 반납할 필요 없이 최대 석 달까지 갖고 있을 수 있어. 석 달 뒤에도 계속해서 그 책이필요하면 도서관에 가져와서 바코드를 한 번 더 찍어주면 돼. 그러면 또다시석달 동안 갖고 있을 수 있는 거야." - P30
"넌 가진 것도 없는 애가 무척 행복하게 산다" 스웨덴으로 공부하러 가겠다고 하자 엄마가 내게 하신 말씀이다. "행복한 게 뭔데?" 하고 내가 묻자 엄마는 "넌 네가 하고 싶은 건 다 하잖아. 돈이 많아도 할 수 없는 일을 여행이니 공부니 ・・・・・・ . 넌 가난하지만 정말 행복한 거야" 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행복감이 밀려왔다. 엄마의 말이라 더 행복했던 것 같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 정말 이상적이지 않은가. - P38
스웨덴 학생들은 대화하는 무리에 외국인이 한 명이라도 끼면자연스럽게 대화를 영어로 바꾼다. 외국인이 있을 때 스웨덴어로 대화하는것은 에티켓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스웨덴 학생들의 영어 실력은 거의 원어민 수준이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유럽 국가 중에 스웨덴 사람들이 영어를 가장 잘한다고 정평이 나 있다. - P39
처음 한 달 동안 아직 서로를 탐사하고 있을 때, 우리 모두는 호앙이 미국인이므로 그의 작문 실력은 우리 중에서 월등할 거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첫과제를 내는 10월 4일, 우리는 원자폭탄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A4두 장 정도로 답변을 써야 하는 어떤 질문에 호앙은 달랑 두 문장만 적어서제출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아연실색했다. 스웨덴에서 유력한 인물을 많이배출한 유서 깊은 웁살라대학교의 역사학과에 이렇게 몰염치하고 불성실하며 배짱 좋은 작자의 입학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퇴짜 맞은 이래로 가장 큰 불상사가 아닐 수 없다고 오스카는 한탄했다(1950년대에 웁살라대학교를 다닌 미셸 푸코는 박사학위논문으로 ‘광기의 역사‘를 제출했는데 역사학과는 이 논문 심사를 거부했다. 당시에는 아무도 푸코의 논문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푸코는 파리대학교에 논문을 제출했고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 P59
"안테의 법칙 알아?" 하고 오스카가 묻는다. "안테는 덴마크 소설에 나오는 어느 마을 이름인데, 그 마을은 아무리 우수하고 뛰어난 사람이 있어도그 사람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어. 그 소설을 읽으면안테가 말하는 법칙이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비슷하다는걸 느낄 수 있을 거야."
나는 계속해서 얘기해달라고 재촉한다. "네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우리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마라. 우리보다 잘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우리보다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마라.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단 말이야?" "뭐 꼭 다들 그런 건 아니지만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라면 이런 생각에아주 익숙해."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타인과 경쟁하는 데 익숙하고 어떤 일에서든 등수가 매겨지는 사회에서 살아온 내게 안테의 법칙은 별 개성 없이 살거나 우둔한 양 떼처럼 살라는 말처럼 들린다. 한국 사회에서 그렇게 살았다가는생존을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내가 학교에 다닐 때 반에서 너무 잘난 체를 하는 학생이 있으면, 선생님은 그 아이의 부모한테 당신 아이가 학교에선 그러지 말도록 교육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어." "정말?" 나는 좀 놀랐다. "그건 뭐랄까…………. 한 학생의 자유의지를 너무억압하는 게 아닐까?" "한 사람의 튀는 자유의지를 내버려두기보다는 평범한 다수의 학생들에게 관심을 갖고 기회를 주자는 거지."
"잘나가는 소수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면 사회는 그들 위주로 굴러가게 되잖아." - P68
북유럽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수천 년이 흐른 지금도 별로변하지 않은 것 같다. 사랑의 여신으로 등장하는 프레이야Freyja는 아름답고당당했으며 남성을 유혹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성적으로 매혹적이었던프레이야는 여러 명의 파트너를 소유했고, 남성들을 계속 울리고 다녀도 여전히 남성들의 우상이었다(마늘과 쑥만 먹으면서 20여 일을 버틴 웅녀의 후예인 나에 비하면, 스웨덴 여성들은 ‘유혹‘ 하는 것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 내가 만난 스웨덴 여성들은 분명 프레이야의 딸들이었다. 그들은 용감하게성과 사랑을 선택한다. 그들은 성적으로 자유로우면서도 결코 헤프지 않다. 흔히 스웨덴 여성들이 세계에서 가장 성에 개방적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그녀들이 아무에게나 정조를 준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조에 대해 당당하고 독립적이라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 P79
두툼한 자주색 스웨터를 입은 남자가 실내 구석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다. 1950년대에 프랑스를 떠나 스웨덴에 온 미셸 푸코도 저 사람처럼 이곳에 틀어박혀박사 논문을 썼을까? 당시 푸코는 이곳 카롤리나 도서관에서 『광기의 역사』를 썼다고 한다. 17세기에 유럽에서 광인들을 감금한 사례를 치밀한 자료고증을 통해 묘사한 광기의 역사』는 중세 시대의 희귀한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는 카롤리나 레디비바가 없었다면 아마 쓰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스웨덴의 긴 겨울밤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푸코는 매일같이 여섯 시간이상씩 집필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 습관은 웁살라의 길고 고독한 겨울을보내는 동안 생긴 것이라고 한다. 대영박물관의 도서관이 카를 마르크스KarlMarx, 1818~1883의 『자본론』의 산실이라면 웁살라의 카롤리나 레디비바는 근대 권력의 사회통제 메커니즘을 밝힌 『광기의 역사의 산실인 셈이다. - P83
서너 시간 자는 날이 허다했고, 잠이 부족해서 언제나 눈동자가 아리고 뻑뻑했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절대적인 시간이었다. 식사는 간단하게 마치고, 이메일은 한꺼번에 몰아서 답장하고, 칫솔질의 지그재그 횟수도 줄이는 등 가능하면 시간을 많이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열흘마다 과제가 떨어지면 우리는 도서관이나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매번 과제를 위해서는 보통 책 대여섯권과 논문 예닐곱 편 정도를 읽어야 했다. 논문은 J-STOR 같은 웹사이트에서 다운받을 수 있었지만 책은 도서관에서 빌리거나 사거나 복사를 해야 한다. 그런데 스웨덴은 책이 한 권에 3~4만 원대여서 매번 과제를 위해서 그비싼 책을 다 살 수는 없었다. 책을 복사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한국처럼책 값이나 복사 비용이 싼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과제가 떨어지면 우리는 책을 확보하기 위해 쏜살같이 도서관으로 뛰어가야 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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