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일요일.'오늘은 그냥 쉬는 날'이라고 정하고 하루 종일 '마스크 걸'을 봤다. 7화까지인데 막판에는 뇌가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근데 이거 쉰 거 맞아?) 그래도 그걸 감수할 만큼 좋았다. 책은 몇 시간을 읽어도 뇌가 멀쩡한데 영상을 오래 보면 왜 이렇게 되는 걸까 궁금하다. 중학교 방학 때 절친과 함께 밤을 새우며 영화를 몇 편 연속해서 본 적이 있는데 (몇 년 전 그런 대회가 있어 참가하고 싶었으나 타인이 선택한 영화를 연달아 봐야 하는 점이 별로였다. 결국 잠들었겠지만...) 그때는 머리가 띵하고 속이 메스꺼웠다. 아무튼 이 시리즈를 다 본 뒤 나는 과음을 하고 나서 국밥으로 해장하는 기분으로 저녁에 잠들기 전 책을 몇 페이지 읽었다. 그러자 거짓말 안 보태고 녹았던 뇌가 형태를 다시 갖추는 것 같았다.
마스크 걸 줄거리 :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평범한 직장인 김모미가 밤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인터넷 방송 BJ로 활동하면서 의도치 않은 사건에 휘말리며 벌어지는 이야기.
마스크 걸은 형식 면에서 조금 독특했다. 각 회차 제목이 등장인물들의 이름인데 2회는 1회에 주목받지 못했던 또 다른 인물이 그의 시각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3회 역시 2회 즈음에 목소리로만 등장했던 인물이 주인공이 되어 그만의 세계를 보여주는 식이다. 이렇게 특정 장면이 새롭게 그려지면서 전체적인 상황이 아주아주 풍성해지는 동시에 스펙터클해진다. 같은 사건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의 입장이 다 다른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독해하는데 있어서 개인의 목소리가 얼마만큼 중요한지 다시금 느끼게 해주었다. 만일 일반적인 스토리처럼 특정 인물의 시각에서만 상황을 봤다면 이런 확장적인 세계는 경험할 수 없을 테고 제한적인 이해만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나를 가장 충격에 빠뜨린 건 '김경자'란 인물이었다. 그녀의 이야기인 3화는 그야말로 한 편의 영화, 하나의 장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 시리즈의 큰 줄기를 담당하고 있는 '마스크 걸'에게 살해당한 주오남의 엄마로 등장하는데 주오남이 담당했던 2화의 통화 장면에서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내 귀를 사로잡았던 인물이다. 바람난 남편이 떠나버리고 홀로 키운 금지옥엽 같은 아들. 살갑게 키울 마음의 여유 따위 없었기에 제대로 된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지만 그 아이 하나 보고 힘을 내 수십 년을 아득바득 일했다. 그랬던 아들이 커서 독립해서 살다가 갑자기 연락이 끊겨 버리자 경찰을 동행하고 집에 들어가 보는데 냉장고에 토막 난 시신이 있다. 김경자는 기절해 병원에서 깨어난다. 유전자 검사 끝에 시신이 아들의 것이 아니라는 형사들의 말에 (그건 곧 아들이 살인자일 수 있다는 뜻임에도 불구하고)크게 기뻐하고 형사들은 그런 그녀 앞에서 어찌할바를 모른다. 김경자는 그 와중에 형사에게 물 좀 떠오라고 시킨다. ㅋㅋㅋㅋㅋ 아...이런 디테일이 곳곳에 배치되어 재미를 더한다.
결국 다른 곳에서 아들의 시신이 발견되고 김경자는 마스크 걸이 아들을 죽였음을 확신한다. 무능한 공권력에 의지하는 대신 잘되던 가게를 접고 모아둔 돈을 전부 찾아 스스로 추적하기 시작한다. 아들의 죽음에 왜? 인지는 단 한번도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의 집요함은 경찰들의 무능함을 매섭게 호통치는 모습에서,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도 울고 갈만한 교회에서의 간증 장면에서, 쉴 새 없이 빛난다. 이런 여성이 국방부장관이 된다면 철통같은 안보로 이웃 나라들을 두렵게 하겠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특히 드라마 속에서'그것이 알고 싶다'를 참고한 듯한 '현장추적 사건일지'라는 프로에 그의 아들과 마스크 걸에 대한 내용이 방송되고 컴퓨터에 2천여 개의 불법 성인 동영상을, 방에는 리얼돌을 가지고 있었던 아들의 변태적 행태가 만천하에 알려진다. 이에 분노한 그녀가 TV 앞에서 형사들에게 바로 전화해 욕사발을 들이붓는데....또 하나의 명장면ㅋㅋㅋㅋ 전반적으로 스릴러적 요소가 다분하면서도 코믹했다. 그녀의 집착과 분노가 다른 곳을 향했다면 어땠을까? '마스크 걸'의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타인을 위해 에너지를 쓴다. 김경자의 폭발하는 에너지 역시 어리석은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의 연속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안타깝고 그 자체로 사회적 모순을 잘 담아냈다는 생각도 들었다.
'김경자'라는 캐릭터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하비에르 바르뎀을 참고한 것도 같다. 물론 뒤지지 않는 개성을 잘 살려냈다. 염혜란 배우는 여기저기 드라마에서 조연으로 등장하면서도 결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배우라는 인상을 줄곧 남겼다. '동백 꽃 필 무렵'에서 변호사로 나왔었는데 바람 피우다 들킨 남편이 '끝까지 안 갔다'고 말하자 "안 잔 게 유세니? 똥을 싸다 말았으면 안 싼 거야?" 라는 명대사를 남겼다.
후기를 쓰고 검색해보니 하비에르 바르뎀. 나만 그렇게 생각한게 아니었어ㅋㅋㅋㅋ 한겨레 남지은 기자님~♡
"소도 때려잡게 생긴 나에게도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마스크걸'이 묻는다, 모성이란 무엇인가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04524.html
내가 산 책들...
행복을 다소 서글픈 방식으로 정의하지 않고서는, 말하자면 행복이 남들과 같아지는 것이며 나만의 자율적 자아는 녹아 사라지는 것이라고 정의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행복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자크 라캉.유토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