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에 대한 변명 - 이야기꾼 김희재가 전하는 세월을 대비하는 몸.마음 준비서
김희재 지음 / 리더스북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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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에 대한 책을 주욱 살펴 보고 있다. 이 책은,,, 리뷰 남기기가 좀 애매하다. 독자의 독서 목적에 따라 다르게 느낄만한 책인 것 같다.

 

책의 내용은 이렇다. 나이들어 외모가 추레해지거나 실수를 많이 하거나 아프다고 하소연하는 분들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 이해해 주라는 것. 주로 모녀간의 일상 대화를 이용하여 이야기를 풀어간다거나 한의학 지식을 사용하여 몸과 마음의 증상을 설명하는 것 등등 내용 자체는 괜찮다. '도대체 우리 엄마/아빠는 점점 왜 저렇게 이상하게 변해갈까?'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젊은 독자라면 매우 도움이 될 듯 하다. 그외에도 장점이 많은 책이다.

 

하지만 나는 나이를 무기로 삼아 행패를 부리는 이기적인 어르신들에게 너무나도 질려 있는 상태여서, 이 책의 장점에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한마디로 '너도 늙으면 이렇게 되니까 뭐라고 하지마!'라고 말하는 느낌을 받았다. 젊은 세대들이 단순히 나이들어 아픈 데 많다고 하소연한다거나, 냄새 난다거나,,, 하는 이유만으로 어르신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잖은가.

 

튼튼하고 건강했던 부모의, 선배의, 상사의 젊음을 발판삼아 지금의 삶을 누리고 있는 세대라면 어르신들의 구취를 연민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누구나 그렇게 연민받을 시기를 맞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116 ~ 117쪽에서 인용

 

나는 몸의 낡음보다 정신의, 염치의 낡음이 더 문제라고 생각하기에 위에 인용한 것과 같은 문장들이 별로 와 닿지 않았다. 걍 구취가 문제가 아니라,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여 충고를 가장한 지적질을 해댈 때의 구취가 문제다. 구취는 노인 혐오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거리와 예의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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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제일 어렵다 - 남에겐 친절하고 나에겐 불친절한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
우르술라 누버 지음, 손희주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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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심리상담으로 유명한 저자라고 한다. 내면아이 심리를 다룬<심리학이 어린 시절을 말하다>에 이어 읽었다.

 

이래저래 힘든 세상이다. 그런데 여자들이 더 우울증에 잘 걸린다. 똑같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한민국에 살면서 유독 여자가 더 우울한 이유는 뭘까? 사회조건은 같은데 여자들에게 특히 더 가중되는 스트레스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멀쩡하게 낮에 직장에서 웃으며 일 잘 하던 여성도 밤에 집에서는 우울에 시달린다. 끔찍한 자기 비하를 하며 울기도 한다. 왜 이럴까? 직장과 가정, 결혼, 사랑, 가족, 인간 관계 모든 것을 잘 해내라는 주위의 기대, 잘 해내야만 한다는 자신의 기대가 압력이 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과거와 달리 여성의 사회 진출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과거 여성들의 의무였던 전통적 역할도 여전히 당연시한다. 모든 것을 잘 해내기 위해 여성이 어떤 대가를 치뤄야만 하고 어떤 부담을 혼자 져야만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기에 여자는 외적인 성공을 얻지 못하거나 개인적으로 힘들 때마다 자신의 책임을 과하게 떠앉고 노오력 부족을 자책하게 된다.  불합리한 상황에 반항적 비판적 태도를 표현하면 다른 사람의 호의와 인정, 사랑을 잃을까봐 두려워 나 자신보다 타인과의 관계를 더 중시하게 되고,,,, 결국 우울해지며, 우울해질 때마다 더 노오오력하여 자기 자신을 더 혹사시키고 괴롭히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악순환이다.

 

전문가들은 말한다. 우울증에 걸린 여성이 남성보다 높은 이유는 전통적으로 여성은 정서적 안정과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라고. 물론 도움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불균형. 항상 주는 사람은 여자이고 받는 사람은 타인인 경우가 많다. 결국 여자는 자기 스트레스 위에 다른 사람의 고통까지 짊어지게 된다.

 

성호르몬 탓이라고? 산후 우울증이나 생리전 증후군 같이 호르몬에 영향받는 우울증도 있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산후우울증이나 생리전 증후군도 사회적 환경,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 따라 증상과 심각도 다르다고 한다. 여성이 갱년기를 보내면서 겪는 여러 증상들도 그 사회 조건에 따라 경중이 다르다. 즉, 그 사회가 나이든 여성을 어떻게 대우하는 문화를 가졌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밑줄 쫙! (예스의 언니들, 옆 문장 보셨어요?) 여성 호르몬 변화가 우울증 발병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여성이 살아온 환경과 인간 관계, 일상 생활의 스트레스가 더 큰 발병 요인이다. (아놔! 그동안 성호르몬을 내세워 여성차별하던 후진 인간들, 너희들 이제 어쩔? ) 

 

여성이 호르몬 변화 때문에 저절로 생물학적으로 약한 존재가 되는 일은 없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여성의 몸은 우울증에 걸린 원인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퍼즐로 치면 조각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 147쪽

 

저자는 실험 예도 인용한다. 여자는 스트레스 상황이 닥치면 자신에게 더 불리한 방향으로 해석, 행동한다고. 그리고 자책한다고. 이를 '학습된 무기력'이라 한다. 여자라서, 이미 결혼하고 나이 들어 무능한 것이 아니라 이런 기분나쁜 무기력한 느낌 역시 사회에서 학습되는 것, 그리고 남자에 비해 여자가 이런 강제 학습을 당하는 경험이 훨씬 많다는 것! 결국 여자에게는 성호르몬 보다 관계의 방식과 질이 정신건강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여자의 우울증에 관해 말할 때 바로 이 사회적 요소는 대부분 뒷전으로 밀려난다. 거듭 말하지만 우울증은 생물학적, 심리적 요소 외에 어떤 특별한 생활환경(스트레스 경험 혹은 관계를 통한 경험)에 개개인의 약점(유년기에 경험한 외상, 호르몬 기복)이 더해졌을 때에야 비로소 생겨난다. (중략)

여자가 우울해지는 이유는 호르몬이나 유전자, 혹은 여자 특유의 성향 탓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서 겪는 불화가 더 큰 원인이 된다.

- 174쪽

 

 저자는 말한다. 여자는 살면서 너무 많은 것을 자신에게 기대하고, 타인에게 기대당한다고. 직장에서의 능력 외에 친절, 상냥, 타인을 보살피고 희생하는 것 등등. 그러다 자신에 대한 높은 기대와 타인에게 보이는 관용적 태도가 부딪혀 우울증이 생긴다고. 그렇다면 여자는 왜 이렇게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 휘둘리는 것일까? 여자가 관계를 중시하는 이유는 여자에게 정신적 결함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발달 심리학에서는 남녀는 유년기부터 현격한 차이가 있어서 여아는 관계를 중시하고 타인의 마음을 읽고 배려하려 든다지만,,, 개뿔, 이건 태생이나 성염색체의 문제가 아니다. 발달과정에서 생기는 요구사항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사회화 과정의 차이이며 부모의 교육 태도의 차이다. 겨우 2살 아이도 말은 못하지만 벌써 성차에 따른 역할 기대를 체득하게 되니 말이다.

 

따라서 몇몇 학자들이 우울증의 원인으로 내세우는 여성 특유의 성향은 애당초 학습된 것이지 여성의 본능에서 유래된 것은 아니다

- 218 - 219쪽

 

여아가 성장하면 더 위험한 시기가 온다. 사춘기, 여자에게는 '입마개'가 씌워진다. (이는 내 말이 아니라 '소녀들의 사춘기가 위험하다'라는 본문 꼭지 제목임) 게다가 연애하고 결혼하면 첩첩산중이다. 남친, 남편이라는 이름의 '벽' (이건 내 표현 ㅋㅋ)이 버티고 있다. 말이 안 통한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관계결핍을 느끼게 된다. 최악의 경우 부당대우와 폭언 폭행등 학대를 받아도 여전히 사회적으로 학습당한 대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혼자만 이해하고 혼자만 참고 노오오력하다가,,,, 우울의 늪에 빠진다.

 

상대방이 과시하는 권력에 저항하지 않고 상대방의 태도와 의견에 동조함으로써 그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도록 놔두면, 관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커다란 이점을 가져다 준다. 즉 이 사람은 변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놀랍게도 자주 양보하고 용서하는 경향이 있는 배우자와의 관계가 지속되면, 시간이 갈수록 그의 공격적인 성향이 더욱 증가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배당하는 사람은 상대를 끝없이 이해하고 용서하고도 점점 더 불행해지는 셈이다.

- 80쪽

 

결국, 여성인 내가 우울한 이유는 나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나 자신이 건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너무 오랫동안 건강하지 못한 조건에 산 것이다. 불청객 '껌정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찾아왔지만 (이 표현은 심리학에서 우울증을 말함. 융이 제일 먼저 말했다고 함. -_- ) 그녀의 방문이 갖는 의미도 있다. 우울은 내가 다른 사람과 맺고 있는 관계의 문제를 알려 준다. 그동안 불평등한 관계에서 끝없고 무의미한 노오오오력을 하며, 타인의 이기주의와 무관심, 무리한 요구에 순응하여 혹사시켰던 자신의 마음을 바로 보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유약한 여성 특유의 응석, 배부른 투정, 정도로 여성 우울증을 가볍게 말하는 인간들이 많다보니, 이 책을 읽는 내내 속이 시원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어가니 또 답답해진다. 그럼 어떻게 이 지독한 우울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까? 하루 아침에 주위 사람이나 남자를 바꿀 수도 없고 성차별적 사회 구조를 바꿀 수도 없지 않나? 저자는 말한다. 개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부터 바꾸라고. 일단 운동이 좋다. 자신의 몸을 통제함으로써 마음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될 수 있으니. (헉, 발레 2년째 하고 있는데 자신감은 안 생기는데요,,, ㅠㅠ ) 그리고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대화하라고. 물론 남자친구나 남편보다 여자 친구와. (이 지점에서 벨 훅스가 <사랑은 사치일까>에서 결국 여성 파트너에게 정착한 내용이 생각났다. 그 책의 원제는 < companion >, '동반자'임 )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중시하고 남들에게 끌려 다니지  말 것. 절대 단념 말고 다른 사람이 우리를 존중하게 하고 올바른 대화방법을 찾도록 요구해야 한다는 것. 상냥한 소녀 역을 그만두고 자신의 요구를 들여다 보고 말하고 행동하라고 저자는 처방한다. (요구하고 요구해서 남자는 안 바꾸고 수선해서 쓰더라도 당근 대통령은 바꿔야겠지.)

 

좋은 독서 경험이었다. 정희진 선생님께서 강연하실 때, 여성혐오 성차별 발언하는 남자들에게 어떻게 대항해야 하냐는 질문에 "모든 분야의 개론을 다 읽고, 객관적 사실과 전문 용어를 사용해서 말로 죽여 놓으세요."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알겠다. ( 아아, 나는 우울하다고 징징거릴 시간에 더 공부해야 한다! )

 

아참, 독일 그림동화인 <룸펠슈틸츠헨>을 실마리 삼아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그 부분은 그리 와 닿지 않았다. 아버지의 실언 때문에 부당한 의무를 지고 개고생하는 딸의 이야기라면 우리에겐 그 막강한 <심청전>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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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스 2015-10-30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지나가다 심청전 이야기에 감동해서 댓글 남깁니다^^ 근데 심청은 자기 삶이 지겨웠던 건 아닐까요? 거친 뱃사람과의 사랑? 결국은 죽음이겠지만 잠깐동안의 다른 세상 구경, 집을 떠날 때 심청은 울었을까요? 갑자기 생각이 많아지고 재밌어지네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자유도비 2015-11-04 22:25   좋아요 0 | URL
저는 스스로 인신매매당한 심청이는 효녀의 의무감에 질려서 지겨워서 자살했다고 생각해요. 동화용 축약본 아닌 심청가 읽어보면 심청이가 인당수로 떠나기 직전 잠든 아버지를 바라보며 `내가 죽고 나면 우리 아버지는 이런 저런 고생을 하겠구나,,,`하고 독백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 뉘앙스가, 이제 나 없이 한번 고생 좀 해 봐라,,, 이런 느낌을 주거든요.

자유도비 2015-11-18 17:47   좋아요 0 | URL
그런데 경판본 소설 심청전으로 읽으면 불교적 내용이 강하고 구원 문제를 깊이 다루고 있어서 또 느낌이 좀 다르더라고요. (시간이 지났지만 또 생각나서 댓글답니다. ^^ )
여튼, 원전으로 읽으면 판본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효, 구원, 연화화생,,, 등등 좋은 주제를 담고 있지만, 제 입장에서는 성인 남성이 어린 소녀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 싫었어요. 심청이고 춘향이고 유관순이고 다들 너무들 이용하고 강요하니까 반발심이 들더라고요.
 
요나와 피노키오
이나미 지음 / 생활성서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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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친가는 기독교 집안, 외가는 불교 집안이다. 덕분에 나는 종교에 대한 편견이 없다. 어느 종교의 경전이든 풍부한 설화를 집대성한 인류 문화의 보고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성경과 삼국유사, 자타카를 읽으며 성장한 것을 뽐내고 싶다.

 

그중 성경, 특히 구약에 등장하는 방대한 인물들의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재미있다. 영웅과 아버지와 왕과 예언자들, 용감한 여성들,,,, 다들 나름 인간적 약점과 매력을 가진 생생한 인물들이다. 게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인물은 드물다. 자신의 잘못된 신념 체계를 되물림한다거나 늙어서 그릇된 욕망을 좇다가 자신은 물론 후손, 국가까지 그릇되게 이끄는 아버지와 왕들!

 

어려서는 목사님이나 주일학교 선생님, 주변 남자 어른들의 해석이 싫었지만 이제 좀 읽고 나니 내 시각으로 성경의 인물들을 보고 그들과 대화할 수 있어 좋다. 성경에 나오는 남성우월적 후진 견해들은 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당시 유대 가부장 사회를 반영한 것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더 자유로워진 기분이다.

 

이 책의 저자분도 그랬나보다. 나처럼 성서 속 인물들의 삶에 매력을 느꼈나보다. 아니다. 저자는 설화로 읽는 나와는 달리 신앙인의 입장에서 성경을 읽고 인물 분석글을 쓰고 있다. 모세, 요셉, 유다, 다윗, 솔로몬, 유디트, 요한, 마르타와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유다,,,,, 하지만 우리나라 민담과 비교한다던가, 전공의로서 인물의 정신, 심리 분석도 하는 등 다각도로 재미있게 글을 쓰고 있다. 솔직히 어떤 글은 밋밋하지만 전체적으로 비 신자가 읽기에 지루하고 뻔한 신자용 책은 아니다. 분명 모세 이야기를 읽으면 신자든 아니든 누구나 각자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 한 방울 흘리게 될 것이다.

 

게다가 언뜻 언뜻 마흔 근처 여성으로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저자의 고됨과 고뇌가 느껴져서 읽으면서 뭉클했다. 어차피 글을 쓰려면 저자는 성경 속 인물들의 삶과 입장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아아, 나보다 조금 앞서 살아가는 인생 선배격 언니들이 지금 내 나이 즈음에 쓴 글을 읽으면 막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중에 어떤 보상이 기다리든, 어떤 의미를 부여받게 되든, 나는 절대 욥 같은 경우에 처하기 싫다. 그러나 우리 여성들을 비롯한 약자들은 현실의 부당함을 영혼 단련을 위한 시련으로 여기고 순종, 정신 승리하는 방법으로 욥의 삶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하는 것 같다.

 

요나서는 신학적인 독법으로 읽어도 물론 보람이 있지만, 이렇게 하나의 성장 체험이 들어 있는 민담으로 이해하면, 배울 바가 참으로 많다. 나는 요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어릴 적 의미심장하게 읽었던 '피노키오 이야기'를 떠올린다. (중략)

큰 바다에서 위험하고도 엄청난 힘을 가진 물고기에게 잡아먹힌다는 비유는, 바로 우리가 어른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의 상징이리라.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에서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큰 힘(권력이나 돈일 수도 있고 또는 제도와 구조일 수도 있다)에 통째로 먹힌 후 죽음과 다름없는 임사 체험을 하지만, 끝내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고통을 견뎌 마침내 진정한 자기를 찾는 과정 말이다. 요나와 피노키오 이야기는 이렇게 누구나 거쳐야 하는 성인식(initiationrite)의 힘든 여정을 묘사하는 재미있는 우화이기도 하다.

- 163쪽에서 인용

 

요새 미로/연꽃/자궁/고래 이미지에 몰두해 있으면서 요나와 피노키오를 생각했다. 시련, 어른됨, 성장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러다 나 이전에 이런 생각을 하고 이미 책을 쓴 사람이 있을 것 같아 검색해보니 이 책이 있었다. 절판이어서 집에서 먼 도서관에 가서 읽었는데 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저자분이 위의 인용 부분처럼 먼저 써 놓으셨다. 헐헐헐! 이렇게 되면 내 글은 나중에 표절 소리 듣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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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현대사 - 1914-2010 고려대학교출판부 인문사회과학총서 72
허승철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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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그대로 우크라이나의 현대사를 서술한 책이다. 1차대전 이전의 역사는 50쪽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2011년도 책이라, 2010년 역사까지만 나와 있어서 크림의 경우 현재 상황과 다르다. 

 

우크라이나는 세계사 시간에 배운 흑토지대, 유럽의 빵바구니,,,이런 표현과 외신으로 접한 체르노빌 원전, 2004년 오렌지 혁명 정도밖에 알지 못했다. 그러기에 온갖 '~ 비치'와 '~ 코'들이 등장하며, 몽골과 폴란드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등 주변 강대국들이 순서 외워 내 기억을 정리할 틈 없이 우크라이나를 정복하고 분할하는 역사서 읽기가 처음에는 좀 벅찼다. 배경 지식 없는 나라의 통사 읽기는 늘 그렇다. 걍 완독 후 재독 삼독하는 수밖에 없다. 공부니까 지겨워도 참고 읽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읽어갈수록 점점 의무감으로 읽는듯한 기분이 사라졌다. 저자의 다각적 서술과 균형잡힌 시선 덕분이다. 예를 든다면,

 

하이다마키에 대한 평가는 폴란드, 러시아, 유대인에 다라 다르게 나타난다. 폴란드에서는 하이다마키를 약탈자들로 보고, 이들의 봉기가 폴란드의 몰락을 재촉한 것으로 보는 반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역사가들은 하이다마키의 잔혹성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민중은 하이다마키를 폴란드 지배에 대항하여 용감히 일어난 민족적 전사들로 받아들인다. 타라스 셰브첸코는 이러한 시각에서 장편 서사시 <하이다마키>를 썼다. 유대인들은 특히 하이다마키의 잔혹한 유대인 학살에 분노를 표하고, 특히 우만은 유대인 학살로 유대 하시디즘의 성지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흐멜니츠기 봉기 때의 유대인 학살을 '1차 우크라이나 비극'이라고 부르고 1768년의 학살을 '2차 우크라이나 비극'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이다마키 봉기는 코자크와 농민 자치, 정교회 신앙 보호라는 정치, 종교적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고 우크라이나인과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과 유대인 사이의 깊은 반목의 골을 파 놓았다.

- 46쪽에서 인용

 

폴란드령 우크라이나의 18세기 농민 봉기를 서술한 위와 같은 부분. '하이다마키'는 봉기에 참여한 코자크와 농민들을 말한다. (터키어로 하이다마크는 강도, 도적) 당시 우크라이나 서부를 지배한 폴란드에 항거하여 러시아와 손잡고 봉기를 일으킨 그들은 폴란드 지주와 가톨릭교도, 유대인을 학살했다. 그러나 믿었던 러시아는 1768년, 반란군을 진압해버린다. 예카테리나 2세 시절이었다. 저자는 이 하이다마키 봉기를 어느 한쪽의 일방적 입장만이 아닌 다각적 입장에서 균형있게 서술한다. 이렇듯 이 책에는 이 책 읽기전에 접했던 다른 우크라이나 역사책 몇 권에서 보였던 편파적이고 공부를 덜한듯한 서술이 없어 좋았다.

 

사실, 우크라이나 역사서 몇 권을 연달아 읽으면서 정신적으로 좀 벅찼다. 독립을 위해 무장 봉기했다가는 외세에 의존하여 실패하고, 게다가 의존한 외세보다 더 강한 외세가 개입하여 진압당함으로써 봉기 이전보다 더 열악한 피지배 상황으로 놓이는 일의 연속처럼 보이는 역사, 자력 독립이 아니라 구 소련 붕괴를 틈탄 독립, 그 힘들었던 오렌지혁명으로 쿠치마의 독재일당들을 몰아내고 유센코를 당선시킨 우크라이나 민중들이 기껏 몰아낸 쿠치마 일당인 야누코비치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것이며, 재벌이 정계에 들어와 온갖 비리와 부정을 저지르는 것이며,,, 자꾸 우리 근현대사와 겹쳐 보였다. 앞서 읽은 다른 저자 책에서는 이런 우크라이나 역사를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오렌지 혁명 이후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발전과 변화의 속도가 더디다고 해서 독립 후의 모든 과정이 부정적 평가를 받을 필요는 없다. 신생국과 슬라브 지역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평화적 정권 교체의 전통과 정치 세력 간의 균형적 공존 상태의 확립은 높이 평가받을 만한 정치 문화의 한 부분이다. 특히 오렌지 혁명 때 보여준, 집권층의 불의에 대한 항거 정신과 성숙한 시민 의식은 앞으로 우크라이나가 위기에 봉착할 때 언제든지 다시 발현될 수 있는 민족적, 사회적 자산이 되었다.

- 340 ~ 341쪽에서 인용

 

내가 역사에 좀 관심이 있고 좀 읽기는 읽었지만 세계 모든 나라 모든 시대의 역사를 다 알지는 못한다. 그래도 읽어가면서 좀 이상하다 싶은 책은 잘 알아본다. 내 촉으로는, 그 나라 옆의 강대국 입장에서 서술하거나 그 나라 민중을 비하하거나 그 나라 역사의 부정적 면만을 강조하거나 그 나라 약자들의 처지를 경박하게 희화화 왜곡하거나 그 나라 역사를 서술하면서 우리 역사를 보는 자신의 편협한 세계관에 기반한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책은 서술의 객관정도와 상관없이 이상한 역사책이다. 이 책에는 그런 점이 없고, 우크라이나 민중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어서 좋았다. 전에 읽은 이상한 역사책 때문에 우울했던 기분이 좀 나아졌다.

 

***

 

리뷰쓰려고 다시 검색해보니 같은 저자의 <우크라이나의 역사>가 9월에 새로 나왔다. 새 책의 목차를 살펴보니 1차대전 이전 50쪽에 불과했던 부분이 100쪽으로 늘어나있고, 2010년 대선 이후 야누코비치 대통령도 서술되어 있다. 이 리뷰를 보고 우크라이나 역사를 읽으실 분은 참고하시길. 이 책은 지도가 적어 아쉬웠는데 새로 나온 책은 어떨지 모르겠다. 여튼, 지도랑 상관없이 추천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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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스 불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1
니콜라이 고골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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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역사 읽다가, 타라스 쉐브첸코 시집 읽다가, 문득 생각났다. 앞서 책들에 나오는 카자크/코사크가 어릴 적 읽은 <대장 불리바>에 나오는 전사 집단이었다는 것을. 아놔, 그동안 속고 살았다. 난 코사크 집단이 폴란드와 터키에 맞서 러시아를 지키는 군대인줄 알았다. 사실 우크라이나 아닌가! 그래서 어릴적 축약본 동화로 읽었던 <대장 불리바>말고 <타라스 불바>를 다시 읽는다.

 

타라스 불바의 두 아들이 신학교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 온다. 불바는 카자크 집단이 있는 자포로체 세치로 두 아들을 데려가 용사 교육을 시키고, 자기 역시 카자크 일원이 된다. 16세기, 우크라이나 드네프르 강 유역에는 자유로운 무장 집단인 카자크 군진이 6곳에 있었다. 그중 가장 강력한 집단이 자포로체였다. 폴란드와 전쟁이 시작된다. 장남 오스타프는 막사 대장이 되지만 차남 안드리는 폴란드 귀족의 딸을 사랑해 적진에 합류한다. 불바는 안드리를 자기 손으로 죽인다. 기대했던 오스타프가 포로가 되어 처형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복수전에 나서다 최후를 맞이한다.

 

전쟁 장면과 인물 묘사가 생생하다. 16세기 우크라이나와 카자크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사흘치 음식을 다 먹고 마셔버리고 난동을 피우는 폭력적이고 잔학한 카자크 용사들은 미친 전쟁광같다. 학살과 약탈에 눈먼 자들, 온통 <삼국지>의 장비만 모인 군대같다. 내가 전에 읽은 동화 <대장 불리바>는 아이들 읽으라고 원작을 순하게 많이 고친 거 였나보다. 맘에 안든다. 읽는 내내 투덜거렸다. 도대체 이게 왜 명작이냐,,,왜 이들은 폴란드에게 당하고 이웃 유태인 마을에 가서 유태인을 화풀이 학살하는 거냐,,, 타라스 불바는 아내를 때리기까지 하는걸,,,하면서 읽었는데,,,

 

다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든다. 오직 조국과 종교만을 숭배하는 아버지 불바와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아들 안드리의 대립에서 작가는 전쟁보다 사랑, 평화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안드리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말한다. 당신이 나의 조국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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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5-10-03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들 처형 장면.. 아버지가 아들을 바라보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그래도 그 아버지 무지 꼰대 였죠...

자유도비 2015-10-22 00:51   좋아요 0 | URL
<마테오 팔코네>에서 아버지가 아들 죽이는 장면과 영조가 사도 세자 죽이는 장면과 더불어 꼰대 아버지의 아들 살해 3대 장면이 아닐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