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 그대로 우크라이나의 현대사를 서술한 책이다. 1차대전 이전의 역사는 50쪽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2011년도 책이라, 2010년
역사까지만 나와 있어서 크림의 경우 현재 상황과 다르다.
우크라이나는 세계사 시간에 배운 흑토지대, 유럽의 빵바구니,,,이런 표현과 외신으로 접한 체르노빌 원전, 2004년 오렌지 혁명 정도밖에
알지 못했다. 그러기에 온갖 '~ 비치'와 '~ 코'들이 등장하며, 몽골과 폴란드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등 주변 강대국들이 순서
외워 내 기억을 정리할 틈 없이 우크라이나를 정복하고 분할하는 역사서 읽기가 처음에는 좀 벅찼다. 배경 지식 없는 나라의 통사 읽기는 늘
그렇다. 걍 완독 후 재독 삼독하는 수밖에 없다. 공부니까 지겨워도 참고 읽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읽어갈수록 점점 의무감으로 읽는듯한
기분이 사라졌다. 저자의 다각적 서술과 균형잡힌 시선 덕분이다. 예를 든다면,
하이다마키에 대한 평가는 폴란드, 러시아, 유대인에 다라 다르게 나타난다. 폴란드에서는 하이다마키를 약탈자들로 보고, 이들의 봉기가
폴란드의 몰락을 재촉한 것으로 보는 반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역사가들은 하이다마키의 잔혹성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민중은
하이다마키를 폴란드 지배에 대항하여 용감히 일어난 민족적 전사들로 받아들인다. 타라스 셰브첸코는 이러한 시각에서 장편 서사시
<하이다마키>를 썼다. 유대인들은 특히 하이다마키의 잔혹한 유대인 학살에 분노를 표하고, 특히 우만은 유대인 학살로 유대 하시디즘의
성지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흐멜니츠기 봉기 때의 유대인 학살을 '1차 우크라이나 비극'이라고 부르고 1768년의 학살을 '2차 우크라이나
비극'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이다마키 봉기는 코자크와 농민 자치, 정교회 신앙 보호라는 정치, 종교적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고 우크라이나인과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과 유대인 사이의 깊은 반목의 골을 파 놓았다.
- 46쪽에서 인용
폴란드령 우크라이나의 18세기 농민 봉기를 서술한 위와 같은 부분. '하이다마키'는 봉기에 참여한 코자크와 농민들을 말한다. (터키어로
하이다마크는 강도, 도적) 당시 우크라이나 서부를 지배한 폴란드에 항거하여 러시아와 손잡고 봉기를 일으킨 그들은 폴란드 지주와 가톨릭교도,
유대인을 학살했다. 그러나 믿었던 러시아는 1768년, 반란군을 진압해버린다. 예카테리나 2세 시절이었다. 저자는 이 하이다마키 봉기를 어느
한쪽의 일방적 입장만이 아닌 다각적 입장에서 균형있게 서술한다. 이렇듯 이 책에는 이 책 읽기전에 접했던 다른 우크라이나 역사책 몇 권에서
보였던 편파적이고 공부를 덜한듯한 서술이 없어 좋았다.
사실, 우크라이나 역사서 몇 권을 연달아 읽으면서 정신적으로 좀 벅찼다. 독립을 위해 무장 봉기했다가는 외세에 의존하여 실패하고, 게다가
의존한 외세보다 더 강한 외세가 개입하여 진압당함으로써 봉기 이전보다 더 열악한 피지배 상황으로 놓이는 일의 연속처럼 보이는 역사, 자력 독립이
아니라 구 소련 붕괴를 틈탄 독립, 그 힘들었던 오렌지혁명으로 쿠치마의 독재일당들을 몰아내고 유센코를 당선시킨 우크라이나 민중들이 기껏 몰아낸
쿠치마 일당인 야누코비치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것이며, 재벌이 정계에 들어와 온갖 비리와 부정을 저지르는 것이며,,, 자꾸 우리 근현대사와 겹쳐
보였다. 앞서 읽은 다른 저자 책에서는 이런 우크라이나 역사를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오렌지 혁명 이후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발전과 변화의 속도가 더디다고 해서 독립 후의 모든 과정이 부정적 평가를 받을 필요는 없다. 신생국과 슬라브 지역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평화적 정권 교체의 전통과 정치 세력 간의 균형적 공존 상태의 확립은 높이 평가받을 만한 정치 문화의 한 부분이다. 특히 오렌지
혁명 때 보여준, 집권층의 불의에 대한 항거 정신과 성숙한 시민 의식은 앞으로 우크라이나가 위기에 봉착할 때 언제든지 다시 발현될 수 있는
민족적, 사회적 자산이 되었다.
- 340 ~ 341쪽에서 인용
내가 역사에 좀 관심이 있고 좀 읽기는 읽었지만 세계 모든 나라 모든 시대의 역사를 다 알지는 못한다. 그래도 읽어가면서 좀 이상하다 싶은
책은 잘 알아본다. 내 촉으로는, 그 나라 옆의 강대국 입장에서 서술하거나 그 나라 민중을 비하하거나 그 나라 역사의 부정적 면만을 강조하거나
그 나라 약자들의 처지를 경박하게 희화화 왜곡하거나 그 나라 역사를 서술하면서 우리 역사를 보는 자신의 편협한 세계관에 기반한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책은 서술의 객관정도와 상관없이 이상한 역사책이다. 이 책에는 그런 점이 없고, 우크라이나 민중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어서 좋았다.
전에 읽은 이상한 역사책 때문에 우울했던 기분이 좀 나아졌다.
***
리뷰쓰려고 다시 검색해보니 같은 저자의 <우크라이나의 역사>가 9월에 새로 나왔다. 새 책의 목차를 살펴보니 1차대전 이전
50쪽에 불과했던 부분이 100쪽으로 늘어나있고, 2010년 대선 이후 야누코비치 대통령도 서술되어 있다. 이 리뷰를 보고 우크라이나 역사를
읽으실 분은 참고하시길. 이 책은 지도가 적어 아쉬웠는데 새로 나온 책은 어떨지 모르겠다. 여튼, 지도랑 상관없이 추천할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