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 - 호스피스 의사가 전하는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
김여환 지음 / 포레스트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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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_ 死 _ ◆(검은색) 


F층.

21세기. 2023년인데, 아직도 4층을 "F"로 표기한 엘리베이터 버튼을 종종 본다. 영화관에서건, 음악회 객석에서건 "4열" 좌석을 강박적으로 피했던 친구도 생각난다. 그 친구, 여전히 숫자 "4"에서 도망가며 살고 있을까? 포천시 모현 호스피스의 수녀님들은 하늘색 베일을 쓰신다. 검은색 베일은 상복 혹은 "死"를 연상시키니까...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죽음"과 "죽어감"은 금기의 화두인가? 입 밖으로 내뱉지만 않는다면, 초대장 발권을 막을 수 있는 불청객인가? 아. 니. 그렇지 않다는걸, 우리는 안다. 호스피스 의사 김여환이 [천 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에서 전하는 핵심 메시지 역시 그것이다. 죽음은 피하거나 덮을 수 없으며, 독학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간은 타자의 경험을 통해 죽음을 배운다. '너/그것/그들' 주어로 전개되는 죽음의 현재성은 내가 필연적으로 도달할 미래라는 것. 발화하지 않거나, 초대하지 않는다 해서 나를 피해가지 않을 죽음. 그러한 죽음관이 있기에, 호스피스 의사 김여환은 환자와 환자의 보호자들에게 친절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에세이에서 저자 김여환은 자신의 과거를 많이 드러내진 않는다.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와 정신분열증을 앓는 어머니 밑에서 컸고, '공부를 잘해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노력 끝에 의대를 졸업했다는 정도? 저자는 그 귀한 졸업장을 묵혀둔 채 13년간 전업 주부로만 살다가, 40세에 수련의 과정을 시작했다.

저자가 소설가 박완서를 좋아하는 이유는, 박완서 역시 40세로 늦게 등단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비록 우여곡절 끝에 45세라는 늦은 나이에 직업세계에 본격 입문했으나, 김여환은 대구의료원 호스피스 완화의료 센터장까지 역임했다(현재는 가정의학과 전문의). 의사로서 천 번도 넘게 임종을 선언했던 경험을 토대로 [천 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을 썼다. 환자, 환자의 가족,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등등 다양한 인물들이 에피소드에 등장한다. 읽으며, 유난히 와 닿았던 문장들을 옮겨 본다.



  • 우리는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우리의 마지막과 접촉해야 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연예인의 일상은 꿰고 있으면서, 한 번도 입밖에 내지 않을 영어 단어를 외우는 데는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정작 미래에 반드시 닥칠 죽음의 길에.대해서는 아무 지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7

  • 죽음은 독학할 수 없다. 타자로부터 배워야 한다.8

  • 의학적으로 말기 암이란, 죽기.직전의 상태가 아니라 더는 항암제가 암세포를 죽이지 못ㅎ는 시기를 뜻한다 66

  • 죽음은 숨기고 싶었던 삶의 비밀을 서슴없이 내보인다. 이 가족에게도 말 못할 갈등이 있는 게 분명했다.67

  • 3명 중 1명이 암에 걸리는 현실에서 암 환자의 현재는 우리의 미래일 수 있다. 79

  • 병마로 눈빛이 흐려지고 나무껍질처럼 피부가.거칠어져도 한국 사람들은 후회나 미련보다 전성기의 추억이남겨준 자신감을 간직하고 있다.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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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1-27 15: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죽음은 독학이 불가하다.
타자로부터 배워야 한다.

전적으로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말이지 싶습니다.

얄라알라 2023-01-27 17:13   좋아요 2 | URL
안녕하세요? 레삭매냐님
저도 저자인 김여환 선생님이 정서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지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환자와 환자의 보호자에게 친절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이 경험하는 죽음이 곧 나의 것이라는 성찰 떄문이지 않은가 하며 이 책 읽었어요^^ 2023년 차차 죽음학에도 손을 대고 싶어집니다^^

혹시 생각나시는 소설이 있으실까요? 넓고 깊게 읽으시는 레삭매냐님께 제가 부담을 드려보아요 ㅎㅎ

바람돌이 2023-01-27 16: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죽음은 타자로부터 배워야한다는 말이 들어오네요.
언제 닥칠지 모르지만 반드시 닥치고야 마는 것이 죽음인데, 죽음에 대한 터부를 깨는것부터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얄라알라 2023-01-27 17:16   좋아요 0 | URL
당연한 말인데도, ˝죽음은 독학 불가˝ 이 표현 읽고 저 잠시 멍 때렸어요
다 아는 이야기인데, 막상 누가 입 밖으로 혹은 문장으로 확 고정 시켜 놓으면 현타 겪는 기분이랄까요.
1월도 이렇게 휘리릭 가버리네요...
죽어감의 순간에서는 이전 수십 년이 수초처럼 휘리릭 지나갈테지만요..


제가 좀....이상한 이야기를 했나봐요....자꾸시간이 가니 초조해서 하는 말이네요.

바람돌이님, 행복한 금욜 오후 보내시기를.....항상 제 서재 들려주셔 따뜻한 댓글 남겨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고양이라디오 2023-01-27 1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핵심 문장들을 보니 이 책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새해 죽음으로 시작하는 것도 아주 좋을 거 같습니다!

2023-01-27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27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양이라디오 2023-01-29 16:44   좋아요 1 | URL
벌써 읽으셨군요ㅎ 전 어제 도서관에서 빌렸습니다. 겨울이라 확실히 추워서 처지네요ㅠㅋ

독서괭 2023-01-27 1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40세에 수련의 과정을 시작하셨다니 대단하네요!
사람의 죽음을 천번 선언한다는 게 참 어떤 경험일지 상상이 안 갑니다. “한번도 입밖에 내지 않을 영어 단어를 외우는 데는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정작..” 이 부분에 뜨끔합니다^^;

얄라알라 2023-01-27 23:49   좋아요 1 | URL
네, 독서괭님.

정말 대단한 결단이 아니고서는 13년간 전업주부로 지내다가 전문직에 도전한다는 게...

의학 지식적으로나 숙련도나 여러 면에서 수련의 과정에서 수모와 힘든 일을 많이 겪으셨던 것 같아요.

다 이겨내고 우뚝 커리어를 세우니 멋진 분이신 듯..

저도 ˝영어 단어를....˝ 이 부분에 뜨끔해서 책 읽다가 적어둔 문장입니다요 ㅎㅎ

서니데이 2023-01-28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0대에 수련의 과정이면 이전에 배운 것들은 다시 배워야 할텐데, 시도하기 많이 어려웠을 것 같아요.
매일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얄라알라님, 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