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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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살, 깨알 활자로 찍힌 [분노의 포도] 마지막 장을 덮으니 새벽이었다.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629쪽까지 읽으니, 3시 30분이었다. 불편해서 자세를 바꾸긴 했지만 고개 한 번 안 (못) 들었다. 새벽에는 리뷰에 옮기고 싶은 문장이 넘쳤지만, 낮의 이성은 대신 저자 버나딘 에바리스토(Bernardine Evaristo)의 인터뷰를 탐색시킨다. 



https://youtu.be/NLgGsKJeXsQ


https://youtu.be/8TZpzw0puZk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을 읽으며 상상했던 모습보다 실제, 버나딘 에바리스토는 훨씬 길쭉하고 젊어 보였다. 61세(1959년 생)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게, 곧추세운 척추, 둥글게 말리지 않은 어깨, 목 부위의 매끈한 피부, 위엄과 지성미가 넘치는 음색, 또렷한 눈동자를 가졌다. 2019 부커상 시상식, 인터뷰와 강연에서도 버나딘 에바리스토는 특유의 컬러 코디네이션과 카리스마로 시선을 사로잡는다(시선 흡인 마력).  작가 자신의 분신인 양 공통점 많은 캐릭터, '엠마'가 왜 소설 속에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지 알겠다. 실제 그녀를 보니. 


버나딘 에바리스토는 영국 최초로 흑인여성극단을 경영하였고, '"장르, 인종, 젠더, 문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글쓰기 (☜ 출판사 홍보 문구)"로 시작해 희곡, 비평, 소설을 쓸 뿐 아니라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친다. 산문인가, 시인가? 산문시?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를 먼저 읽은 알라디너들이 "마침표가 없다" 전했는데 그랬다. 열두 명 인물 이야기가 끝나는 마지막 문장, 그리고 피날레로서의 '뒤풀이 파티' 챕터까지 문장 부호가 한 번씩 총 열세 번 등장한다. 


열 두 명의 캐릭터를 교차 등장시키면서 정작, 버나딘 에바리스토는 '캐럴'이라는 커리어 우먼 캐릭터를 먼저 떠올리고 다른 인물들을 입체화시켰다 한다. 하지만, 나는 첫 등장 인물 엠마 위주로 관계도를 그리고 기억했다.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에는 엠마의 절친 도미니크와 셜리, 엠마의 딸 야즈, 학교장 셜리와 그 개천 학교에서 유일한 용(옥스퍼드 대학 졸업)이 된 캐럴, 셜리의 직장 동료 페널리페, 그녀의 어머니 등등 총 열두 명 여성들의 삶이 교차한다. (솔직히 8번째~9번째쯤 가서는 계보 잇느라 기억력 회선이 타기도 했다). 그녀들의 어린시절, 가족관계, 또 백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 타기 과정에서 독자는 고난, 차별, 구조의 불평등, 기울어진 판에서도 사다리 타고 올라가기, 대의, 정의, 위선과 부조리, 다시 돌아와 결국 "사람은 사람이지," 평등한 연결성을 보게 된다. 스. 케. 일. 이 크다. 


'소수자'란 용어를 좋아하진 않지만, 굳이 말하자면 이 열두 명은 타인의 시선에서 '소수자'로 갇힐 뻔한 이들인데, 저자는 고통의 서사에 집중해 이들을 동정의 대상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소설 중간중간 친구 간 논쟁 혹은 작은 강의의 형식으로 페미니즘의 다양성, 분열점, 가능성에 대한 소신을 보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치우치지 않는다. 스. 케. 일. 이 크다. 감히 말하자면.





2019 부커상 수상 소식을 전하며 버나딘 에바리스토를 모욕한 데 대해 BBC가 사과했다.공동 수상 소식을 전하며, "Margaret Atwood and another author"라 칭했기 때문이다. 버나딘 에버리스트는 즉각, 최초의 흑인 여성 수상자 이름을 잽싸게 자연스럽게 지워버렸다며 반격했다. 심지어 부커상을 받은 후에도 그런 경험을 하게 된 작가가, 60년을 살면서 어떤 인물들을 상상 속에서 키웠을는지 이 또한 감히 상상한다. 



열두 명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캐릭터는 옥스퍼드 대학 수학과를 졸업한 딸, 캐럴의 엄마 부미. 나이지리아에서는 교육받은 사람대우를 받았지만 영국에서는 아니었다. 일자리 뺏는 이민자 취급. 남편을 잃고 고전분투하여 청소사업을 시작한다. 



" 버미는 사람들이 그녀의 직업(청소부)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 그녀라는 사람(교육받은 여자)으로 보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이바단 대학교 수학과 졸업생임을 알리는 양피지 학위 증명서가 돌돌 말려 그녀 품에 들어 있는 걸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

 그녀 이름과 국적이 적힌 학위는 전혀 의미가 없었다

채용 거절 통지서가 하도 자주 날아오는 바람에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듯 주방 싱크대에서 태운 통지서가

재가 되어 배수구 구멍으로 씻겨 내려가는 걸 지켜보았다 (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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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12-18 1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밤 새워 읽은 *_* 북사랑님이 고개 한 번 못 드시고 읽으셨을 정도라니, 궁금해지네요!

비연 2020-12-18 1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어야겠군요 ..!

행복한책읽기 2020-12-18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개 한 번 안 들고 밤을 새다. 아직 북사랑님은 젊으시구나.^^

얄라알라 2020-12-18 22:19   좋아요 0 | URL
사정이 있어 전날 24시간 이상 수면 비축^^해둔 것으로^^;;
소설도 그만큼 재밌었고요.
작가가 경계긋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왔기 때문에 저런 풍성한 색감으로 인물들과 그 여백을 채우겠거니,

scott 2020-12-18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의 사전 두께네요 밤새서 읽으셨다니 솔깃@@

얄라알라 2020-12-18 23:07   좋아요 1 | URL
록산 게이의 소설 캐릭터들이 독자를 더 힘든 수준까지 몰아가며 힘들어지는 데 반해, 이 소설 캐릭터들은 그 층까지 내려가기 전에 먼저 다시 치고 올라오는 맛이 있는 것 같아요. 정서적으로 덜 힘들었어요. 페미니즘의 역사와 갈래(?)를 더 잘 아는 독자 눈에는 캐릭터들의 포지션이 더 잘 보이겠는데, 저는 일단은 서사를 따라가는 수준으로^^

레삭매냐 2020-12-24 21: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부커상 위업에 사두긴 했는데...
못 읽고 먼지가 쌓여 가고 있네요.

내년에 만나 보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