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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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기로  이 세상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선한 사람,

다른 하나는 악한 사람,

나머지 하나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셋 중 어느 한 부류에 속할 테지만, 자기 자신만큼은 선하거나 아니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부류라고 여기지,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악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악한 사람은 언제나 타인이다. 설령 내가 때때로 악해지는 것도 언제나 악한 타인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모두가 선하거나 아니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굳게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굳이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이가 있다.

 


 

노예제가 폐지된지 수십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흑백차별이 존재하는 지역에서 태어나 살았고...

주민의 대다수가 열렬한 신교도인 곳에서 유일하다시피한 아일랜드계 가톨릭교도였으며...

촉망받는 젊은 작가의 길로 접어든지 얼마 안되 불치병에 걸려 서른 아홉 해라는 짧은 생을 마감했고... 

단 두 편의 장편과 서른 한편의 단편으로 사후 자신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남긴 여성.... 


바로, 플래너리 오코너다. 



그녀는 우리 마음속 어두운 골짜기를 비춘다.

그곳은 허위나 위선보다 더 깊고 까마득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그곳은 마치 보고도 보지 못하는 맹점(盲占)이나 사각지대(Blind spot)와 같다.



주인공들은 독실한 신앙인이거나 교양있는 교외의 중산층 아니면 운명을 따르는 순박한 (시골)사람들이다.

부모 대신 어린 손자를 돌보거나('검둥이 인형'), 오갈데없는 추방자를 일꾼으로 고용하는가 하면('추방자'), 불량 청소년을 친자식만큼 사랑한 상담사('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와 집단의 희생양 편에 서고자 한 젊은이들('파트리지 축제')이다. 이들은 모두 스스로를 선하다고 여겼으나 어느 순간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거나 오히려 악한 사람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계시와 통찰은 거칠게 찾아온다.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평온한 일상에 침입한 불청객처럼...


충격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영상은 반복적으로 떠올라 독자를 괴롭힌다. 이쯤되면 불쾌감을 넘어 불안해진다. 등장인물들에게서 언뜻언뜻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내 안의 맹점과 사각지대를 마주한다는 건 생각보다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장 뽈레가 말했던가.

예술이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끔 하는 거라고...


그렇다면 플래너리 오코너야말로 가장 효과적으로 문학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라 하겠다. 아니, 그녀는 단순히 보이지 않는 걸 보이게끔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계시와 통찰 그리고 용서(회개)와 사랑(구원)이라는 일반적인 노선을 따르길 거부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에드가 앨런 포와 도스토옙스키 역시 집요하게 '악'을 탐구했던 작가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지향점은 언제나 깨달음을 통한 회개와 구원이었고 용서와 사랑이었다. 반면, 플래너리 오코너는 추락과 파멸이다. 계시와 통찰 이후, 그녀는 용서와 구원이 아닌 추락과 파멸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독자로 하여금 정신적인 충격과 불쾌감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의 작품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자, 그녀를 존 치버와 레이먼드 카버 그리고 제임스 설터와 애니 프루까지 쟁쟁한 영미현대 단편소설 작가들 가운데서도 'Best of best'로 손꼽는 이유이리라.     




플래너리 오코너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들었으나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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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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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이 된다.

-루쉰, <고향> 中-

 

  

코맥 매카시의 『로드』를 읽는다는 건, 길의 끝까지 걸어가 희망의 끝을 보겠다는 것과 같다.

 

길이 끝나는 그 자리에 무엇이 있을까?

만약 미래나 선악 아니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 중 하나 이상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이 책을 읽기 전에 반드시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다면...? 그래도 괜찮은가?

 

희망 너머 그곳에 희망따윈 애초부터 없었다는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이 작품을 읽도록 하자. 그렇지 않으면 희망이 사라진 그 자리에 찬바람이 불어닥치고 눈보라가 휘몰아쳐 주저 앉고 말 것이므로...

 

 

남자와 소년은 비와 진눈깨비로 칙칙해진 벌판 위에 서 있다. 

과거 도시였던 흔적들은 머나먼 과거에서 날아온 별빛처럼 아련한 현기증만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남자가 알고 있는 거라곤, 남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소년을 지켜야 한다는 것. 설령, 자신이 죽을지언정...

  

남자는 회색 빛이 비치자마자 일어났다. 소년은 그냥 자게 놓아두고 길까지 걸어가 쭈그리고 앉아 남쪽 땅을 살폈다. 황폐하고, 고요하고, 신조차 없는 땅. 10월일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자신은 없었다. 날짜를 확인하지 않은 지 몇 년은 되었다. 그들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한 번 더 겨울을 난다는 것은 죽음을 뜻했다. -p8

 

 

자기실현적예언은 언제나 예외 없이 들어맞는 법인가 보다. 

작품 도입 부분에서 마주친 남자의 예언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만다.

 

나는, 걸어갈 힘보다 먼저 걸어갈 길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걸 떠올려 본 적이 없다. 존재하지 않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듯이 나에게 길이란 '영원'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코맥 매카시의 문장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는 회색 빛 속으로 걸어나가 우뚝 서서 순간적으로 세상의 절대적 진실을 보았다. 유언 없는 지구의 차갑고 무자비한 회전. 사정없는 어둠. 눈 먼 개들처럼 달려가는 태양. 모든 것을 빨아들여 소멸시키는 시커먼 우주. 그리고 쫓겨다니며 몸을 숨긴 여우들처럼 어딘가에서 떨고 있는 두 짐승. 빌려온 시간과 빌려온 세계 그리고 그것을 애달파하는 빌려온 눈(目). -p149

 

하루하루가 헤아림도 없이 달력도 없이 진창을 기어가듯 지나갔다. 멀리 주간 고속도로를 따라 길게 줄지어 있는 검게 타버리거나 녹이 슨 차들. 바퀴의 드러난 테가 시커메진 철사의 고리에 둘러싸인 채, 녹았다가 다시 잿빛으로 굳은 고무 진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타서 재가 된 주검들은 아이만 한 크기로 줄어들어 좌석의 용수철 위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쭈그러든 심장 속에 매장된 수많은 꿈도. 그들은 계속 걸었다. 바퀴를 돌리는 쥐처럼 죽은 세계를 밟고 나아갔다. 죽음처럼 고요하고 더 깊은 죽음처럼 검은 밤. -p308~309

 

 

이 작품은 지구 종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떤 이유인진 모르겠으나 지구는 종말을 맞았고  운 좋게도-아니 재수 없게도- 살아 남아 조금 늦게 죽게될 극소수 생존자들의 이야기다. 이들 중에는 원래 가족이었던 이들도 있을 것이요, 남남 있었으나 어찌하다가 가족처럼 된 이들도 있을 것이며, 엄마와 딸처럼 아빠와 아들도 있었는데, 남자와 소년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된다.

 

남자는 꿈에서 전에 한 번도 본적 없는 생물의 방문을 받았다. 그 생물들은 말이 없었다. 남자는 자신이 자는 동안 그 생물들이 침대 옆을 기어다니다가 자신이 깨자 슬그머니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소년을 보았다. 어쩌면 남자는 그 자신이 소년에게는 외계인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이해한 것인지도 몰랐다. 이제는 사라진 행성 출신의 존재. 그 행성에 관한 이야기는 수상쩍었다. 아이를 기쁘게 해주려고 자신이 잃어버린 세계를 구축할 때마다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사실도 함께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소년이 자신보다 이 점을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꿈을 기억하려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남은 것은 꿈의 느낌뿐이었다. 어쩌면 그 생물들이 그에게 경고를 하러 온 것인지도 몰랐다. 무엇을 경고하러? 그 자신의 마음속에서 이미 재가 된 것을 아이의 마음속에서 불로 피워올릴 수는 없다는 것. 지금도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들이 이 피난처를 찾아내지 못했기를 바라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늘 어서 이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p174~175

 

 

걸어갈 힘보다 먼저 걸어갈 길이 사라져버린 순간, 남자와 소년에게 남아 있는 거라곤 본능 밖에 없었다. 이 본능마저 '살아남아야 한다'에서 '죽지 못해 죽을 때까지 산다'로 천천히 바뀌어 가지만...

 

밤은 눈이 멀 정도로 추웠고 관 속처럼 어두웠다. 아침이 오기까지 그 긴 시간에는 무시무시한 정적이 깔렸다. 마치 전투 전의 새벽처럼. 소년의 양초색 피부는 거의 투명했다. 커다란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낯선 사람 같았다. -p148

 

남자는 이제 마침내 죽음이 다가왔다고,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숨을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소년이 자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걷잡을 수 없이 흐느끼곤 했다. 하지만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남자는 무엇 때문인지 잘 몰랐지만 아마 아름다운 선(善)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어떤 식으로든 도저히 생각할 방법이 없는 것들. 그들은 황량한 숲에 쭈그리고 앉아 천으로 걸러낸 도랑물을 마셨다. 남자는 꿈에서 소년이 관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공포에 사로잡혀 잠을 깼다. 깨어있는 세계에서는 견딜 수 있는 것도 밤에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남자는 다시 꿈이 찾아올까 두려워 잠을 자지 않고 앉아 있었다. -p149

 

몹시 추었다. 그들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계속 기침을 했고 소년은 남자가 침을 뱉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비틀비틀 걸어갔다. 넝마를 걸친 채 더럽게, 희망도 없이. -p309

 

 

어떻게 이렇게 차갑고...

이렇게 건조하며...

끝없이 내려갈 수 있는지...

 

작가가 만들어낸 문장들은 극지방의 얼음보다 더 차갑고... 사막의 모래보다 더 건조하며... 깊은 땅 속보다 더 어둡다.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엄두조차 내지 못할 문장들이다.

 

 

코맥 매카시는 우리가 상상하는 최악보다 늘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라는 역자의 말이 옳았다.

그나마 마지막 결말이 작가가 우리에게 베풀어준 마지막 '희망'의 헌사라면 헌사일 터. 

 

나는 그처럼 독자로 하여금 그 무엇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작가를 지금껏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저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 나에게 허락된 것이라곤, '독자가 언제나 옳지만 절대 작가를 이길 수는 없다'는 진리를 재확인하는 것 뿐이었다.

 

 

 

 

-책 속의 문장들....

 

 

화강암으로 빚은 짐승이 삼키는 바람에 내장 속에서 길을 잃은 동화 속 순례자들 같았다. -p7

 

남자가 아는 것이라고는 아이가 자신의 근거라는 것 뿐이었다. 남자가 말했다. 저 아이가 신의 말씀이 아니라면 신은 한번도 말을 한 적이 없는 거야. -p8

 

작은 약속을 어기면 큰 약속도 어기게 된다. -p42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에서는 신도 살 수 없다. -p196

 

있지도 않았던 세계나 오지도 않을 세계의 꿈을 꿔서 네가 다시 행복해진다면 그건 네가 포기했다는 뜻이야. -p215

 

다른 세상이었다면 아이는 이미 남자를 자신의 삶에서 비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다른 삶이 없었다. -p308

 

오래전부터 이렇게 될 거였어. 지금 이렇게 된 것 뿐이야.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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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셜리 잭슨 지음, 성문영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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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작가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그녀는 20세기 중반 미국의 장르소설 그중에도 특히 고딕 소설 분야에서 탁월한 작품들을 선보여 후대 추리소설과 SF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그동안 영미 문학계에서 저평가되어 온 작가라고 한다. 스티븐 킹이나 헨리 제임스(『 나사의 회전』 작가) 등 내노라하는 작가들이 깊은 영향을 받은 작가로 셜리 잭슨을 꼽고 있다. 그러고보니, 스티븐 킹의 초,중기 단편 작품들 중에는 어딘지 모르게 셜리 잭슨 풍이 묻어나는 것도 같다.

 

소위 '일상의 악'이라고나 할까?

이유도 원인도 없다. 그냥 '그것'이 무섭고 두렵다...

 

'그것'은 원초적인 두려움일수도 있고...

초자연적 현상일수도 있으며...

문명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관습'이나 '습관'일수도 있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감수성이 예민했던 셜리 잭슨은 우울증 등을 앓았을 정황이 커 보인다. 그녀는 지역사회나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항상 배제와 거부의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이 끊임없이 시달렸던 '공포'를 작품화했다. 어쩌면 그녀에게 소설쓰기란 공포의 실체에 접근함으로써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약물중독으로 비극적인 삶을 마무리한 것도 그렇고... 최근 출간된 그녀의 단편집에, '이 작가는 미쳤거나 아니면 천재'라는 표현도 그렇고...

암튼, 여러모로 요주의(?) 작가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작중 화자는 메리 캐서린 블랙우드(줄여서 '메리캣')라는 열여덟살 소녀다. 그녀는 열살 터울의 언니 콘스턴스와 함께 산다. 자매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전부 죽고 없다.

 

마을에서 처음으로 피아노를 들여놨고, 드넓은 사유지에 철조망을 쳤던 자매의 아버지와 역시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던 어머니 그리고 막내 남동생은 6년전 일어났던 독극물 사건으로 3미터 땅 속에 잠들어 있다. 이 사건은 집안에서 일어났으며, 당시 메리캣은 식당이 아닌 자기방에 있었고 유일하게 콘스턴스만 살아남았기 때문에 그녀는 용의자로 조사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홀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설탕 가루가 뿌려진 블루베리를 싫어했기 때문이었음이 밝혀지면서 그녀는 누명을 벗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참, 그리고 자매의 삼촌인 줄리언도 비록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지만 그 참사에서 살아남아 저택으로 돌아온다. 또한 잠시 고아원에 맡겨졌던 메리캣 역시 돌아오면서 가족이 재구성된다.  

 

콘스턴스는 독극물 사건 이후, 바깥 출입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집과 정원 안에서만 생활한다. 금고에 얼마든지 들어있는 돈을 들고 일주일에 두번씩 마을로 나가 식재료를 사오는 일은 막내 메리캣의 몫이다. 그러나 메리캣 역시 외출을 달가워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마을 사람들의 냉대와 무시 그리고 조롱 때문이다.

 

나는 저들이 쓰는 말을 못 알아듣는 척했다. 달에서는 속삭이는 듯한 액체 언어를 쓰고, 메마른 죽음의 땅을 내려다보며 별빛 속에서 노래하니까, 울타리를 반쯤 지났다.

"메리캣, 메리캣!"

"코니 언니는 어딨어, 집에서 저녁 식사 만드는 코니는?"

"차 한잔 하실래요?"

나만의 생각에 잠긴 내겐 이상한 일이었다. 생각에 잠겨 착착 걸음을 옮기면서 엄숙하게 울타리를 통과한 다음 두 발을 땅에 강하게, 그러나 사람들이 눈치챌 정도로 빠르지는 않게 디디는 동안에도 저 아이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안다는 것은. 마음속 깊이깊이 숨어도 저들의 목소리가 들렸고 시야 한쪽 구석에는 저들의 정지 장면이 보였다. 나는 저들이 모두 죽어 땅에 누워 있었으면 싶었다.

"묘지 깊숙이, 삼 미터 아래에서."  -p40

 

마을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메리캣의 반응이다. 물론,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이유가 있을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메리캣이 스스로를 항변하지도 억울해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마을 사람들에게 저주를 보낸다. 메리캣과 콘스턴스가 느끼는 마을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은 일견 타당해보이면서도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서 '피해망상'처럼 비춰진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경우 독자는 화자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그래서 손쉽게 화자의 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작품은 어느 순간부터 화자에게 투영됐던 감정이 자꾸만 거부반응을 일으키면서 튀어나오려고 한다.

 

주인공이 은화며 시계 등등을 정원 곳곳에 묻고 주문을 거는가 하면... 조너던이라는 고양이와 함께 자기만의 은신처를 만든다. 그리고 외부 세계에 대한 언니 콘스턴스의 호기심에 극단적으로 불안해하는 등등... 어딘지 모르게 비정상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독자를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건, 그런 메리캣을 언니인 콘스턴스가 다 받아주고 있다는 점이다. 열여덟살을 마치 열살배기 어린아이로 취급하면서 말이다.

 

그러던 어느날...

사촌인 찰스가 찾아온다.

언니 콘스턴스는 찰스를 환대하고, 죽은 자매의 아버지가 쓰던 방에서 생활하던 찰스는 서서히 군림하려 들면서 평화롭던 저택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메리캣 입장에서 찰스는 외부의 침입자로, 악마이자 유령이다.

사실 찰스는 유폐된 생활을 하다시피하는 사촌 여동생 콘스턴스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꼈다기보다는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그녀가 물려받은 재산을 차지할 속셈이 더 커보인다. 그리고 메리캣의 저항와 반발에 제대로 걸려들고 만다.

 

독극물 사건이 일어났던 저택에 다시 비극이 찾아왔으니, 그건 바로 대화재다. 

발화점은 찰스가 피우던 파이프 담배였다.  그리나 범인은 그가 아니다. 누가 범인인지는 사실 독자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 모두 잘 알고 있다. 놀라운 건, 독극물 사건의 범인과 같은 동일인물이라는 점이다. 범행동기 따윈 없다.

 

"저 사람들 음식에 못 먹을 걸 집어넣고 전부 죽어 가는 꼴을 보고 말 거야."

콘스턴스 언니가 몸을 뒤척이자 나뭇잎이 바스락거렸다.

"전에 네가 그랬던 것처럼?"

언니가 물었다.

우리 사이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입 밖에 꺼낸 적 없는 말이었다. 육 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래."

잠깐 뜸을 들인 후 내가 대답했다.

"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p213~230 中 발췌 -

 

메리캣은 소시오패스일까?

그녀는 어째서? 왜?

 

이와 같은 질문들은 무의미하다. 이 작품의 관전 포인트는 이유 없는 악 즉, 인간 내면에 깊숙이 가라앉아 있는 원초적인 공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보니, 얼마전 읽었던 에밀 아자르의 『자기앞의 생』에서 로자 아줌마가 한 말이 떠오른다.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앞의 생』中 p69-

 

사람이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것에 반드시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다.  

오히려 이유를 안다면 두려움은 발생하지 않는다. 두려움이란 '미지(未知)' 즉,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이므로...

 

귀신과 악령을 무서워하는 것도 바로 그 실체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안다면 대처하고 방어하고 심지어 무찌를 수도 있다. 고딕 장르의 매력은 바로 이 알지 못하는 미지로부터 오는 공포에 있다.

 

원시 인류가 일상적으로 느꼈을 그런 공포감은 문명사회에서는 더 이상 공포를 불러올 이유가 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진화 중인 인류는 종종 원시 인류로부터 이어받은 뜻모를 공포감에 휩싸인다.  원시 인류는 공포감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제의를 치뤘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제의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희생양을 바치는 것이었다. 

 

반면, 현대 인류는 공포 영화나 소설 혹은 익스트림 스포츠 등을 통해서 공포감을 인위적으로 찾아 느끼고 또 그것을 해소시킴으로서 정신적 긴장감을 누그러뜨린다.

그런데 종종 이성을 신봉하는 현대 인류 역시 원시성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여 원초적인 공포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박적인 행동이나 비이성적인 행동도 불사한다. 크게는 광기에 휩싸인 전쟁이나 범죄가 있으며, 작게는 각 집단에서 최약자에게 가해지는 유무형의 폭력이라 하겠다.

 

영문학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실린다는 셜리 잭슨의 단편『제비뽑기』가 바로 이와 같은 집단의 광기 어린 희생적 제의를 다루고 있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소수에 대한 집단의 폭력성에 소름이 돋는다.

 

그러므로 셜리 잭슨을 만난다는 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라 하겠다.

세상은 그리고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름답지도 선하지도 않다는 바로 그 진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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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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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제서야 이 책을 읽었을까...?

나는 왜 이제서야 이 작가를 만났을까...?

 

에밀 아자르의 『자기앞의 생』은 나에게 아쉬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안겨줬다. 

 

사실, 내가 에밀 아자르의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건 대학 재학 때였으니 그닥 늦었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다만, 내가 제대로 못 알아봤을 뿐...

<제3세계문학> 이라는 교양수업이었고, 그 당시 막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담당 강사는 매우 열정적이었다. 그의 열정(?) 덕분에 나는 카뮈와 카프카 그리고 안톤 체홉 등을 읽을 수 있었다. 

 

졸음이 몰려 오던 어느 오후, 교수님은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제목부터 이상야릇한 작품에 대해서 혼자 감동하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아마 그 당시 난 이 작품을 찾아 읽었을 것이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는 걸로 보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만큼은 지금까지 가슴 깊이 박혀 있으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이상야릇한 제목의 작가는 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는 바로 그의 필명이다.

로맹 가리는 30여년 동안 본명인 로맹 가리로 작품 활동을 하다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4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리고 그 중  한편이 바로  <자기앞의 생>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동일 작가에게는 두번 수여하지 않는다는 공쿠르 상을 두번 수상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이 뿐만 아니라 무려 스물다섯살 연하인 헐리우드 여배우 진 세버그와의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자, 66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삶 자체가 한편의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마치 자신의 삶 자체를 예술 작품화하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는 동일인이었지만 각기 다른 작품 색채로 그 당시 프랑스 문단을 감쪽같이 속였다고 하는데, 사실 꼼꼼하게 살펴보면 오히려 상당히 비슷한 문장과 문체를 구사하여 당시 한 젊은 인터뷰 기자로부터 의심(?)을 받기도 했단다. 그런데 재밌는 건 당시 프랑스 문단에선 로맹 가리를 이미 노쇠한 논평할 가치조차 없는  작가로 치부한 반면, 에밀 아자르는 로맹 가리를 능가하는 작가로 높게 평가했다는 점이다.

 

만약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예명이 아닌 본명으로 이 작품을 발표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공쿠르상 수상은 커녕, 평단의 혹독한 평과 함께 사장되지 않았을까? 로맹 가리가 본명을 버리고 에밀 아자르라는 예명을 선택한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소위 '평'이라는 것에 얼마나 많이 좌우되는가.

개인의 취향과 안목이라는 것도 어쩌면 평판(시장)에 의해 만들어진 감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자, 그럼 이제부터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나...

 

『자기앞의 생』은 '지나치게 현실적인 배경에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인물들'로 이루어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한 소년의 성장소설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슴 아프고 슬프지만, 말도 안되게 웃기고 또한 빼어나다. 이 작품의 추천사를 쓴 작가 조경란은 '슬픈 결말로도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모모(모하메드)는 아랍인으로 창녀에게서 태어났지만 유태인인 로자 아줌마의 손에서 키워진다. 로자 아줌마는 아우슈비치에서 살아 남았으며 50살이 될때까지 모모의 엄마처럼 거리의 여자로 생계를 유지했지만 은퇴(?)한 후에는 모모처럼 창녀의 아이들을 몰래 맡아 키우는 것으로 남은 생을 살아가는 65세 노인이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 건물의 꼭대기층에 살면서도 자기 앞의 생을 직시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생이 제멋대로 흘러가도록 좌시하지 않았다. 

 

유태인으로서의 로자 아줌마에 대해 말하자면, 그녀는 성녀였다. 물론 아줌마는 우리에게 가장 싼 것만 먹이고, 라마단이라는 끔찍한 것으로 나를 지겹게 했지만 말이다. (...)

로자 아줌마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을 떨고 나서 나한테 괜히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녀를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제 목숨은 그녀에게 남아 있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목숨을 소중히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해 볼때 그건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p59~63

 

어느 일요일. 로자 아줌마는 아침나절 내내 울고 있었다. 그녀는 때때로 아무 이유도 없이 하루종일 울기도 했다. 그럴 때는 실컷 울도록 내버려둬야 했다. 아줌마에게는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p59~60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p69

 

 

세상에는 관심을 끌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바캉스 장소를 산과 바다 중에서 선택하듯이 사람들도 그렇게 선택당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관심을 끌지 못하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한다. 사람들이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듯이,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낸 나치나 베트남 전쟁 같은 가장 비싼 대가를 치른 것을 선택하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엘리베이터도 없는 칠층에 사는, 과거에 너무 고통스럽게 살았기 때문에 지금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유태인 노파 같은 건 누구의 관심사도 될 수 없다. 돈이 적게 드는 일일수록 그만큼 중요하지 않은 일이니까......-p246

 

 

로자 아줌마가 개였다면, 진작에 사람들이 안락사 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사람에게보다 개에게 더 친절한 탓에 사람이 고통없이 죽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 한 가지 말해둘 게 있다.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내 생각일 뿐이지만,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는 가능한 안락사가 왜 노인에게는 금지되어 있는지 말이다.  -p126~295 中 발췌-

 

삶의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통제한다는 건 무엇보다 중요하다.

즉, 어떤 방식과 형태로 자기 앞의 생을 마감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떻게 생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 못지 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움켜잡고 있던 생의 고삐를 마지막 순간 병원이나 의사 혹은 자기 아닌 타인에게 내맡겨 버리곤 한다. 자기 앞의 생을 타인 앞의 생으로 돌려버리는 '우'를 범하고 만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p13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나요?"

"난 쿠스쿠스를 무척 좋아한단다. 빅토르야. 하지만 매일 먹는 건 싫구나."

"하밀 할아버지, 제 말을 못 들으셨나봐요. 제가 어릴 때 할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그의 얼굴이 속에서부터 환하게 밝아졌다.

"그래, 그래, 정말이란다. 나도 젊었을 때는 누군가를 사랑했었지. 그래, 네 말이 맞다. 우리......"

 

인간은 원래 가진 거라곤 사랑밖에 없어서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잊어버린다.

하밀 할아버지처럼 오래 살아서 기억력이 흐려진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아직도 그녀가 보고 싶다. 나딘 아줌마는 내게 세상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라몽 아저씨는 내 우산 아르뛰르를 찾으러 내가 있던 곳까지 다녀와기도 했다. 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르뛰르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그래서 내가 몹시 걱정했기 때문이다. 사랑해야 한다. -p307

 

이 작품을 단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랑'이라고 하겠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포기하지 말 것...

인간의 생은 결국 끝이 나지만, 사랑없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로자 아줌마는 모모를 사랑했고,

하밀 할아버지도 모모를 사랑했으며,

모모 역시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또한 하밀 할아버지를 사랑했다.

그것도, 아주 깊이 깊이...

 

 

 

 

앞으로 생의 길목에서 상처 받을 때마다 나는 이곳으로 도망쳐 오리라...   

책 속의 문장들 속으로 숨어들어가 소리내어 읽다가는 어느덧 소리내어 울으리라...

그리곤, 다시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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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믿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만큼 아름다운 이야기다.

 

역대 부커상 수상작 중, 가장 많이 팔렸다는『파이 이야기』를 나는 어느 서평가의 빼어난 문장 속에서 만났다. 물론, 이안 감독에 의해 2013년  『Life of Pi』로 영화화되었다는 사실도 금시초문이었다. 영화는 어떻게 해서든 꼭 찾아보기로 마음 먹었다.

 

화자는 총 세명이다.

하나는 작가 즉 얀 마텔이고, 또 다른 화자는 피신 몰리토 파텔 즉 파이이고, 다른 하나는 침춤호 침몰 사건을 조사했던 오카모토씨다.

 

작가인 화자(얀 마텔)은 두 편의 전작을 실패한 후, 훌쩍 인도로 떠난다. 그리고 폰디체리라는 곳의 한 카페에서 '내 이야기를 믿는다면 당신은 신을 믿게 될거요'라고 말하는 노신사(프란시스 아디루바사미)를 통해 무려 227일간 벵골 호랑이와 함께 구명정에 있다가 살아 돌아온 소년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다. 그리고 캐나다에서 살고 있다는 그 소년을 찾아간다. 소년의 이름은 파신 몰리토 파텔, 어릴 적엔 주로 '파이'로 불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작가는 작품을 쓰기 위해 당시 침춤호 침몰 사건을 조사했던 오카모토씨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그런데 마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형식처럼 보이는 이 부분 역시 작품의 일부분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작가 역시 처음부터 자신이 들려준 '파이 이야기'를 독자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를 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신빙성을 높이고 작품의 사실성을 살리기 위해서 이와 같은 구조를 선택했다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소설이란 꾸며진 이야기라는 걸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파이 이야기만큼은 실제로 일어났었던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환상에 자주 빠지곤 한다.

 

이 작품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랍고 환상적이면서, 동시에 믿을 수 밖에 없는 아니 믿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는 것....

 

파신 몰리토 파텔은 인도 폰디체리에서 아버지(산토스 파텔)와 어머니 그리고 세살 위인 형 라비와 살고 있었다. 그가 열 다섯살 되던 해에 동물원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캐나다로의 이민을 결심하고 가족과 함께 파나마 선적의 일본 화물선 '침춤호'에 오른다. 그날은 달력으로 1977년 6월21일이었다.

 

그로부터 열 이틀 후, 태평양을 건너가던 침춤호는 침몰하고 만다. 날씨가 나빴던 것도 아니고 충돌 등 불의의 사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건조된지 29년이나 됐고 구조변경을 한 침춤호가 갖고 있던 구조적인 문제와 몇몇 불운의 결합이 불러온 사고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선원들을 포함하여 침춤호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 가장 어렸을 파이에게는 신이 함께 했다는 점이다. 하나도 아닌 여럿의 신들이...

  

구명정에 올라탄 파이는 가까운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세살배기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를 발견하고는 구명튜브를 던져 파커가 구명정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밖에도 구명정에는 배에서 뛰어내릴 때 다리를 심하게 다친 얼룩말과 하이에나 그리고 1톤 바나나 더미에 앉아 있던 암컷 오랑우탄이 마지막으로 승선한다.

 

세로 폭이 기껏해야 2~3미터 가로 길이는 7~8미터에 불과한 구명정 안에서도 약육강식의 법칙은 예외없이 적용되었다. 초식동물이자 다리까지 다친 얼룩말이 제일 먼저 하이에나에게 잡아 먹히고... 잡식성인 오랑우탄이 하이에나에게 저항해보지만 결국 날카로운 이빨을 당해내지 못한다... 그리고 하이에나는 벵골 호랑이의 한끼 식사로 얌전히 제공되고...

 

이제 구명정에는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소년 파이만 남는다.

 

파이에게는 몇 십일을 버틸 수 있는 음식과 물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낚시도구와 태양열 증류기까지 있었지만 문제는 파커였다. 파커를 피해 구명조끼로 뗏목을 만들어 피신하고 파커의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물고기와 바다거북을 건져 올린다.

 

파이는 두려움이 밀려들 때마다 신을 찾았다.

 

나는 환경에 맞게 조절한 종교의식을 거행했다-사제나 성찬식 집례자가 없는 혼자만의 미사를 올렸고, 신상도 없고 공양도 없는 힌두교식 제사를 올렸다. 메카가 어느 쪽에 있는지도 모른 채 엉터리 아랍어로 알라신께 예배했다. 그런 의식이 위로를 주었다. 그건 확실하다. 하지만 힘들었다. 정말이지 힘들었다. 신을 믿는 것은 마음을 여는 것이고, 마음을 풀어놓는 것이고, 깊은 신뢰를 갖는 것이고, 자유로운 사랑의 행위다. 하지만 때로는 사랑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때로는 내 마음이 분노와 절망과 약함으로 급속히 가라앉아서, 태평양 바닥에 처박힐 것 같았다. 거기서 다시 올라오지 못할까 두려웠다. -p287

 

절망은 빛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어둠이었다. 그것은 이루 표현 못 할 지옥이었다. 그것이 늘 지나가게 해주시니 신께 감사하다. 다시 매달라고 아우성치는 매듭이나 그물 주변에 물고기 떼가 나타났다. 내 가족 생각을 했다. 그들이 이런 무시무시한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해서도 어둠이 휘휘 젓다가 결국 물러갔고, 그때마다 신은 내 마음에 환한 빛으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계속 사랑하면 됐고. -p288

 

파이에게는 신들뿐만 아니라 선한 햇살과 매혹적인 달빛...

 

그리고 리처드 파커도 함께 했다. 

 

"정말로 사랑해. 사랑한다. 리처드 파커. 지금 네가 없다면 난 어째야 좋을지 모를 거야. 난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 그래, 못 견뎠을 거야. 희망이 없어서 죽을 거야. 포기하지 마. 리처드 파커. 포기하면 안 돼. 내가 육지에 데려다 줄게. 약속할게. 약속한다구!" -p324

 

리처드 파커는 몇 차례 넘어졌다. 밀림이 시작되는 곳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그가 내 쪽으로 방향을 틀 거라고 확신했다. 날 쳐다보겠지. 귀를 납작하게 젖히겠지. 으르렁대겠지. 그렇게 우리의 관계를 매듭지을 거야. 그는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다. 밀림만 똑바로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더니 고통스럽고, 끔찍하고, 무서운 일을 함께 겪으면서 날 살게 했던 리처드 파커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내 삶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

나는 아이처럼 울었다. 고난을 딛고 살아나서가 아니었다. 사람을 본 것이 감동적이긴 했지만, 내가 흐느낀 것은 리처드 파커가 아무 인사도 없이 날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다. 서투른 작별을 하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나는 일의 순서에 맞추어 형식을 차려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가능하다면, 일에 의미 깊은 모양새를 입혀야 한다. 예컨대 당신이 내 뒤죽박죽 이야기를 100장으로 구성할 수 있을까? 한 장이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게 딱 100장으로? 하긴 내 별명이 싫은 것도 그 때문이다. 숫자가 영원토록 따라다니는 게 거북하다. 하지만 인생에서 일을 알맞게 마무리 짓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만 놓아버릴 수 있으니까. 그러지 못하면 우리는 꼭 해야 했지만 하지 못한 말을 남기게 되고, 후회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작별인사를 망친 일이 오늘날까지도 마음에 상처로 남아 있다. -p391~392

  

생과 사를 함께 했던 파커의 뒷모습을 보면서 울부짓는 파이의 모습이 선하다.

소년은 왜 울어야만 했을까?

이별 없는 이별을 해본 사람이라면 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준비되지 않은 이별이 슬픈 까닭은 이별 자체가 아니라, 작별인사조차 없는 이별로, 이별과 이별조차할 수 없기때문이다.

  

햇살에 일렁이는 푸른 바다처럼 작품 속에는 곳곳에서 깊은 철학적 사유와 은유들이 반짝거린다.

 

나는 며칠인지, 몇 주일인지, 몇 달인지 헤아리지 않았다. 시간은 우리를 갈망하게 할 뿐인 환영인 것을. 내가 살아 남은 것은 시간개념 자체를 잊은 덕분이었다. -p264

 

내 가장 큰 바람은-구조보다도 큰 바람은-책을 한 권 갖는 것이었다. 절대 끝이 나지 않는 이야기가 담긴 긴 책. 읽고 또 읽어도 매번 새로운 시각으로 모르던 것을 얻을 수 있는 책. 아쉽게도 구명보트에는 성서가 없었다.-p286

 

상반되는 것 중 최악은 권태와 공포다. 우리 삶은 권태와 공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추다. -p298

 

잔잔한 바다와도 같은 작품은 식충섬에서의 일주일이 지난 후, 격하게 흔들리더니만 기어이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 속으로 독자를 집어던져버린다. 

이 정도면  반전이 아닌 사기(?)에 가깝다.

 

그리고...

자칫 볼거리 풍부한 해양모험소설로 치부될 수도 있었던 작품은 이렇게 해서 명작의 반열에 오른다.

 

"나는 두 분께, 그사이 227일 동안 일어난 일을 두 가지로 이야기해드렸어요."

"그랬지요."

"두 이야기 다 침춤 호의 침몰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어요."

"그렇죠."

"두 분은 어떤 이야기가 사실이고, 어떤 이야기가 사실이 아닌지 증명할 수 없어요. 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지요."

"그렇죠."

"두 이야기 다 배가 가라앉고, 내 가족 전부가 죽고, 나는 고생하지요."

"맞아요."

"그럼, 말해보세요. 어느 이야기가 사실이든 여러분으로선 상관없고, 또 어느 이야기가 사실인지 증명할 수도 없지요. 그래서 묻는데요,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 어느 쪽이 더 나은가요?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요, 동물이 안 나오는 이야기요?"

오카모토: "그거 흥미로운 질문이군요....."

치바: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요."

오카모토:" 그래. 동물이 나오는 쪽이 더 나은 이야기 같아요."

파이 파텔: "고맙습니다. 신에게도 그러길."

(침묵)

  

영화만 본 많은 사람들은 파이가 들려준 두 가지 이야기 중, 동물들이 나오는 이야기가 아닌 사람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진짜로 믿는다고 한다. 태평양에 표류하던 파이가 227일만에 멕시코에 도착한 후, 조사차 나온 일본인 오카모토와 그의 조수 치바씨에게 자신이 겪은 일들을 들려주는 과정에서 너무 끔찍해서 차마 하지 못하고 동물들이 나오는 것으로 바꾸어 이야기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정말 구명정에는 처음부터 동물들이 아니라 사람들이 탔을까?

다리를 다친 중국인 선원(얼룩말)과 그의 다리를 자른 프랑스 요리사(하이에나), 그리고 요리사에게 용감히 맞서다가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파이 엄마(오랑오탄)와 그 요리사를 죽이는 파이(호랑이)....

 

 

무엇이 진실일까?

아니, 애당초 진실이 무엇이라는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

소설의 진위 여부를 찾아헤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으니 말이다.

 

 

그저,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이야기라고만 하겠다.

그렇지만, 믿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말도 꼭 덧붙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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