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키스패너
프리모 레비 지음, 김운찬 옮김 / 돌베개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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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프리모 레비를 알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 쯤이다.

그는 이탈리아 출신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돌아온 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몇 권의 책들을 썼다. 특히『이것이 인간인가』는 출판 당시에는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뒤늦게 주목받아 증언문학으로는 드물게 각종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그를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프리모 레비는 꾸준히 글을 쓰고 발표하면서도 페인트 공장에서 신제품을 개발하고 품질을 관리하는 화공학자인 자신의 본업을 끝까지 고수한 것으로 유명하다. 『멍키스패너』는 그가 회사을 퇴직하고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로 들어서서 쓴 첫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 역시 그의 전작들처럼 보고 듣고 겪은 '경험의 기록'이라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멍키스패너』의 주인공은 두명이다. 한명은 작중 화자인 '나'이고, 다른 한명은 '파우소네'다. '나'의 직업은 화학자로 이탈리아의 한 리스공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한편 파우소네는 조립공으로 러시아, 알래스카, 인도 등지를 떠돌면서 산 위에 송전탑을 세우는 작업에 투입되는가 하면 악어가 득실거리는 강 위에 현수교를 연결하기도 하고 빙하가 떠다니는 북극해에 원유시추시설 설치작업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두 사람은 우연히 볼가강 근처 작업장의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숙소에서 만난다. 사실, 파우소네는 과묵하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화자 앞에서만큼은 수다쟁이로 돌변해서 단 한번도 꺼낸 적 없는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물론, 작품 속 화자는 작가인  프리모 레비라는 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나는 고용주와 많이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는 언제나 바빴고 나도 바빴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곧바로 마음이 맞았어요. 그도 허풍 부리지 않고, 자기 일을 알고, 다른 사람보다 크게 말하지 않으면서도 지휘할 줄 알고, 자신이 주는 돈을 일일이 세어보게 만들지 않고, 누가 실수해도 크게 화내지 않지만 자신이 실수하면 곰곰이 생각해보고 용서를 구하는 그런 타입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도 이곳 출신으로 당신처럼 자그마하고, 다만 약간 더 젊어요. - 22쪽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는 자신의 영혼을 모든 작업에, 아주 이상한 작업에도 쏟아붓지요. 아니, 이상한 작업일수록 더 많은 영혼을 쏟아부어요, 나에게는 내가 하는 모든 작업이 첫사랑 같아요." -62쪽


"그런데 당신은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만든 멋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요? 당신 외에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 67쪽


"만약 당신이 나름대로 신중함을 갖고 있지 않으면 조만간 좋지 않게 끝나요. 신중함은 직업보다 더 배우기 어려운 것이에요. 대부분 나중에 배우게 되는데, 곤경을 통과하지 않고 배우기는 힘들어요. 조그마한 곤경을 곧바로 통과하는 사람은 행운아예요." -194쪽


" 전혀 어려운 것 없고 모든 것이 언제나 똑바로 이루어지는 일을 하는 건 분명히 정말 지겨울 것이고, 결국에는 사람들을 멍청이로 만들 거예요. (...) 만족스럽게 살기 위해서는 당연히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있어야 하지만 너무 쉽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있어야 하지만 그렇게 무분별한 욕망이 아니라 도달할 희망이 있는 것이어야 해요. " - 215~216쪽



 

아무 생각없이 내뱉는 것 같은 파우소네의 말들은 마치 진흙 속의 진주처럼 의미심장하게 반짝거린다. 


자신의 일에 대해 여러 말 하지 않으면서도 명확히 알고 있고, 타인의 실수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도 자신의 실수는 쉽게 잊지 않으며, 목청 높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정확히 표현하고, 신경쓰지 않아도 될만큼 돈계산이 깔끔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게다가 심지어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을  첫사랑처럼 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만약 운명이 우리에게 선물할 수 있는 개별적이고 경이로운 순간들을 제외하면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은(불행히도 그건 소수의 특권이다) 지상의 행복에 구체적으로 가장 훌륭하게 다가가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소수만이 알고 있는 진리이다. 그 무한한 영역, 직업의 영역, 간단히 말해 일상적인 일의 영역은 남극 대륙보다 덜 알려져 있다. -121쪽


분명 행복할 것이다. 

그런데 위 인용문에서처럼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고 그 일에 전적으로 몰입하며 이를 통해 완전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다수 사람들은 어쩔 수없이 일을 하는 '노동하는 인간'일 뿐이다. 영혼없는 노동은 형벌에 가까워서 아무리 오래 종사해도 숙련(熟練)되지 않고 정통(精通) 할 수 없다. 정통이란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는 경지를 말한다. 마치 몸에 밴 습관처럼 정통하면 실수도 예외도 있을 수 없다. 만약 이와같은 일들이 발생한다면 그건 더 나은 향상과 성장을 위한 밑거름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완전으로 향하는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유능하다는 건 자신의 작업(직업)에 완전히 숙달되었다는 뜻이고, 숙달이란 곧 습관을 통해 완전함에 이르는 것이므로 완전함이란 습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직업적으로 이런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마주하면 놀라움과 함께 경외심을 느끼곤 한다. 비록 그 직업은 흔하고 미천할지언정 그 작업은 특별하고 숭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파우소네가 엄청난 일을 했다거나 특별난 경험을 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무미건조하고 다소 지겹기까지 하다. 왜 아니겠는가. 설계 도면대로 볼트를 너트에 끼우고 적당한 힘으로 멍키스패너를 돌려 뭔가를 조립하는 일은 솔직히 단순단복에 가까운 일이라서 뭔가 새롭고 창의적인 기술이나 재능의 발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수십 수백 미터에 달하는 철교와 철탑을 떠올리면 얘기는 달라진다. 간단한 볼트와 너트의 연결로 이루어진 그 거대한 조립물들은 더이상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절대성과 웅장함을 갖춘 완전체로써 기능하고 존립하기 때문이다. 단어와 단어가 결합하여 한 문장이 되고 문장들이 모여 문단을 이루어 마침내 한 권으로 만들어진 책이 '작품'으로써 영원히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에 동의했다. 스스로를 측정할 수 있고, 측정에 있어 다른 사람들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 안에서 자기 모습을 비춰볼 수 있다는 장점에 대해서 말이다. 당신의 창조물이, 빔 위에 빔이 올라가고, 볼트가 하나하나 조여지면서 확고하고, 필연적이고, 대칭적이고, 목적에 합당하게 자라나는 것을 바라보는 즐거움, 그리고 작업이 끝난 뒤에 바라보면서 아마 당신보다 더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마 당신이 모르고 또 당신을 모르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즐거움에 대해서 말이다. 아마 당신은 나이를 먹은 뒤에 다시 당신의 창조물을 찾아갈 수도 있고, 아마 그것은 아름다워 보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오직 당신에게만 아름답게 보이더라도 상관없을 것이며, 당신 자신에게 '아마 다른 사람은 해낼 수 없을 거야"하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 79쪽



 

내 기준에 비춰 볼때, 프리모 레비는 균형잡힌 인물에 가깝다.

일과 가정 그리고 취미 등 모든 방면에서 최선을 다했고 또 최고의 결과를 얻었다. 그는 적당한 운과 재능을 타고났고 또 남못지 않은 불행을 겪기도 했지만, 그의 정신과 몸은 그로인해 망가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굳건해졌다. 안정된 삶을 지키고 누릴 수 있는 겸손과 여유를 가지고 있었으며, 타인의 평가와 인정보다는 자기만의 삶의 기조를 유지하고 지키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그 어떤 업적이나 명성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소박하고 조용히 삶을 마무리하고 싶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프리모 레비야말로 진정한 '공작인(Homo Faber)'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공작인, 즉 호모 파베르는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하빌리스 그리고 호모 루덴스를 하나로 결합한 인간 유형으로, 단순히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창의적으로 작업하며 일 자체를 즐길 줄 아는 인간이다.


 

『멍키스패너』는 프리모 레비가 파우소네라는 또 한명의 호모 파베르를 내세워서 '진정한 호모 파베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정직하게 써내려간 모범답안같은 작품이다.  요즘처럼 '워라벨'이 중시되는 시대에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적인 인간)도 호모 폴리티쿠스(정치적인 인간)도 아닌, 호모 파베르로 사는 것이 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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