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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아......!
너무 슬프고... 너무 아름답고... 너무 장엄하며... 또한 고결하고 숭고하다...
이 작품에 대한 한결같은 평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언 매큐언이라는 작가는 내 관심권 밖으로 멀찌감치 밀려나 있던 작가였다. 내 눈에 비친 그는,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유별스런' 소재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작가였으니까... 한마디로, 그의 이전 작품들은 심기불편함을 주특기로 했다.
그런 그에게 이 작품은 명실공히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나이 오십에 쓴 <속죄>라는 작품은 19세기 고딕소설의 진중함과 도덕성을
갖추었으면서도 동시에 20세기 현대소설의 사실성과 재미(반전)까지 두루 갖춘 명작이라는 평가가 꼬리표처럼 따라 붙는다.
작가는 이 소설을 발표하기 2년 전인 1999년 <암스테르담>이라는 작품으로 부커상을 수상했다. 만약, 두 작품간의
시차가 조금만 더 벌어졌더라면 존 맥스웰 쿠체(존 쿳시)의 뒤를 이어, 부커상을 두 번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만큼 이 작품은 수십년 동안 추구해오던 작가의 작품 스타일을 하루아침에 바꾼 작품으로, 이언 매큐언이라는 작가가 '대가'임을
입증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영국 남부 서리에 위치한 탈리스가(家)의 잭 탈리스와 에밀리 탈리스는 슬하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1935년 찌는듯한 여름의 어느날.
13살 짜리 막내딸 브리오니는 허마이니 이모가 이혼하게 되면서 탈리스 가에 의탁하게 된 이종사촌 3남매와 함께 때마침 내려온 오빠 레온과
그의 친구 폴 마샬을 위해서 자신이 직접 지은 <아라벨라의 시련>이라는 희곡작품으로 연극 공연을 준비중이었다. 그러나 사촌들의
비협조로 연극 공연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방을 나섰던 브리오니는 우연히 저택 앞마당 분수대에서 언니 세실리아와 하녀(파출부)의 아들 로비 터너
사이에서 벌어진 뜻밖의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브리오니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게 된다. 평생에 걸쳐 속죄하게 될 바로 그 죄를...
언니 방으로 뛰어가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하라고 추궁해야겠다는 충동도 일었다. 그러나 아까 본 일을 혼자 되살려보려면 적어도 감정적으로나마
그 일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흥분을 맛보고 싶어서 참았다. 그 일에 대한 정의는 앞으로 많은 세월을 두고 차츰 다듬어질 것이다. 그때 가서는 그
일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고 추측했던 것은 자신이 열세 살의 어린아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너무 어려서 그 일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고, 다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마음만 다급해졌던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p66
브리오니는 돌아오기 전에 벌써 하느님과 같은 창조주로서의 힘을 잃고 말았지만, 그 상실이 가장 분명해지는 것은 되돌아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공상의 논리 앞에서는 누구나 무력하다는 착각이 그것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p114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고 캠브리지에서 같이 대학을 다녔던 세실리아와 로비는 꽃병에 물을 받는 걸 놓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만 꽃병을 깨뜨리고
만다. 분수대 물속으로 빠져버린 꽃병 조각을 건지지 위해 로비 앞에서 겉옷을 벗은 세실리아가 물속에 들어갔다가 밖으로 다시
나오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브리오니...
어찌보면 아무것도 아니고... 어찌보면 에로틱할 수 있도 있는 이 장면은 열세살 브리오니에게 각인되어 버린다. 실제로는 세상을 제대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힘이 아직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이미 세상(어른의 세계)을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쉬운 바로 그런 나이에...
어쩌면 평소 예민한 감수성을 자랑하며 소설 쓰기를 즐기는 브리오니가 죄를 향해서 첫발을 내딛게 된건 순전히 지나친 상상력과 과도한 정의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죄를 향해 두어발 더 내딛었던 걸음을 거두어드리지 못하게 만든 건, 주변 환경 즉 어른들의 몰이해와 편견
때문이었다.
브리오니는 그들로부터 그날 밤의 정황에 대해 진술해달라는 요구를 수도 없이 받았고, 그래서 설명을 반복할 때마다 이전에 한 진술과 일치해야
한다는 부담이 점점 더 무겁게 그녀를 짓눌렀다. 이전에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해야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이전의 진술과
달라지면 경찰은 이마를 찌푸리거나 금세 태도가 냉랭해졌으며, 그녀에 대한 동정심도 거둬들여 버렸다. 그러자 브리오니는 그들을 기쁘게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다르게 표현하거나 덧붙인다면 그녀가 자초한 사후 처리 과정이 방해를 받으리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
차렸다. -p243~244 中 발췌-
그러나 그 다음 한주가 채 지나가기도 전에 그렇게도 굳건했던 확신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브리오니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문자 그대로 자기가 본 것에만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준 것은 눈이 아니었다. 눈으로 확인하기에는 너무 어두웠다. -p242
그래서 그녀가 보는 것들은 이미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이나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바에 따라 그 형태가 일부 수정되어야 했다.
-p177
여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내용이 뒤바뀐 로비의 편지와 이를 언니 세실리아에게 전해주는 심부름을 하는 과정에서 읽어 버린
브리오니...
그리고 예기치 못한 그러나 브리오니의 의심을 부채질할만한 상황이 또 다시 그녀 앞에 펼쳐진다. 마치 희곡의 이미 정해진
각본처럼...
그애는 언니를 보호하거나 언니에게 충고를 해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불타 언니를 찾아 나섰고, 닫힌 서재 문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어린애의 무지와 어리석은 상상과 정의감에 사로잡혀 로비에게 그만 하라고 요구하기 위해 서재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그애가 뭐라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서로에게서 떨어져 조용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p200
언니 세실리아와 로비 사이에 막 싹트기 시작한 사랑이 어린 브리오니에게는 어째서 전혀 다른 상황으로 비추어졌던 걸까? 도대체 그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을까?
정말, 단순히 브리오니가 상상력이 너무 풍부한 아이였기 때문일까? 단지 그 이유 하나때문이었을까? 인간이 비록 빈틈이 많은 존재라곤
하지만 그렇게 손쉽게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존재였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조물주도 실수를 했으므로 이 사건에 일말의 책임이 있는 거 아닌가?
사실 어린이를 지나 이제 막 사춘기로 접어든 그것도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소녀를 떠올려 본다면, 브리오니를 유난히 특별난 아이로 단정지을
수도 없다. 선과 악, 현실과 상상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주변 어른들은 자신들이 평소 갖고 있던 무지와 편견이라는 폭력을
무의식적으로 휘둘렀던 건 아니었을까?
이와 같은 주변사람들과 남들보다 좀 더 많은 허영심과 어리석음을 타고난 대신 죄책감과 책임감은 터무니없이 부족한 또 다른 두 사람에 의해
'죄'가 저질러지고 감춰진 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내가 묻고 싶은 건, 사랑하는 연인을 떼어놓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간, 이 어처구니 없는 엄청난 범죄 앞에서
속죄를 해야 할 사람이 정말 브리오니 단 한 사람뿐일까? 하는 점이다.
흥비로운 점은 세실리아와 로비는 브리오니와 만나기 전까진, 물론 전적으로 브리오니(또한 작가)의 상상이긴 하지만 범인을 대니 허드만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이 브리오니와 마찬가지로 오해를 하고 자신의 착각을 확신했다고 해서 그들과 브리오니의 행위가 똑같은 무게를
갖는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어찌됐든 세실리아와 로비의 '오해'와 '확신'은 대니 허드만을 감옥으로 보내지도 않았고 전쟁터로 내몬 것도 아니며
더더구나 그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눈먼 운명의 '지팡이'이 역할을 하진 않았으므로...
자신이 본 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순진한 브리오니가 롤라가 해야 할 일까지 다 떠맡아줄 것이다. 롤라는 그저 진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 그 진실을 빨리, 그리고 완전히 잊어버리고, 자신이 브리오니와는 다른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확신이 없는 거라고만 믿으면
되었다. 그의 손이 눈을 가리고 있어서 그를 보지 못했고, 공포에 떨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고 자신을 설득하기만 하면
되었다. 브리오니는 단계마다 곁에서 그녀를 도와줄 터였다. 브리오니는 일어난 일들이 모두 퍼즐 조각처럼 잘 맞아들어간다고 생각했다.
-p241
롤라의 어깨와 마셜의 얼굴에 난 할퀸 자국들. 머릿속
공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새침한 사촌여동생이, 지나치게 고지식해서 한심해 보이는 그 사촌여동생이 다른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면서 정작 범인에게는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침묵하던 그날 밤 연못가에 앉아 있던 롤라. 짧은 진주 목걸이에 장미 향수를 뿌린 허영심 많고 나약한 롤라. 어린
소녀의 제약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기를 바랐던 롤라. 사랑람에 빠짐으로써, 아니 사랑하게 되었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어 수치의 늪에서 자신을 건져낸
롤라. 브리오니가 끝까지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것을 보며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을 믿을 수 없어 했을 롤라. 그 롤라가, 이제 겨우
어린애티를 벗은 롤라가 자신을 강간한 남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제단 앞에 서 있는 것이다. (......)
저 폴 마셜과 롤라 퀸시, 그리고 이 브리오니
탈리스가 작당을 하여 침묵과 거짓말로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감옥으로 보냈던가? 그러나 그를 유죄로 만든 증언은 바로 브리오니 자신이 했다.
지방 법원에서 큰 소리로 선서를 한 뒤 행한 그녀 자신의 증언이었다. 게다가 형 집행도 이미 끝났다. 대가를 치른 것이다. 배심원의 평결은
여전히 유효했다. -p454~455 中
과연...
롤라는 14살 어린 나이에 성폭행을 당한 불쌍한 여자 아이이기만 한 걸까?
폴 마샬은 그 사건이 있은 후, 5년 뒤 자신이 성폭행한 여성이 스물살이 되던 해에 그녀와 결혼식을 올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만약, 자신을 대신하여 죄를 뒤집어 쓴 사람이 친구인 레온이었더라도 그는 침묵했을까? 혹시, 로비가 레온가를 드나들면서 허드렛일을
도맡아해주던 하녀의 아들이라는 비천한 신분이었기때문에 죄책감따위는 갖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던 걸까?
한편, 저택의 여주인인 에밀리 탈리스는 어른으로서의 분별력을 왜 발휘하지 못했을까?
자신의 어린 딸인 브리오니를 보호하기 위해서...? 아니면, 자신의 큰딸 세실리아가 파출부의 아들과 사랑에 빠지는 걸 처음부터 탐탁찮게
여겼기 때문에...?
결국, 모두 자신은 그저 조금 이기적이고 타산적으로 행동했을 뿐 죄는 없다고 항변하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단 한사람이 속죄에 나선다. 평생에
걸친, 그러나 영원히 용서받지 못 할...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p521
마지막 반전과 에필로그는 너무 애절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진다.
자신의 친언니와 무고한 한 남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13살 소녀는 어느덧 77세 할머니가 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남긴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작품을 남김으로써 그녀가 얻으려 했던 건 뭘까? 용서였을까...?
아니, 아니다.
그녀는 이미 당사자인 세실리아와 로비가 죽어버림으로써 더 이상 용서를 빌 대상조차 사라져버렸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냥 침묵하고 깨끗이 잊어버리면 되지 않을까?
아니,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속죄하고자 노력했다.
세실리아와 로비와 같은 슬픈 사랑은 찾아보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브리오니와 같은 실수 역시 비록 흔하다 할 순 없을지언정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1940년 첫원고가 나왔고 1999년 여섯번째 수정본이 나온, 브리오니의 소설과 같은 이야기... 그러니까 13살 어린 나이에
저지른 자신의 과오를 평생에 걸쳐 속죄하며 살다가는 그런 삶은 극히 드물것 같다. 아니 어쩌면 전무할지도 모른다.
이 작품의 주제를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죄책감'이 아닐까 싶다. 평생을 속죄해도 갚지 못하는 죄와 그로 인한 지울 수 없는
죄책감말이다.
이언 매큐언은 여전히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지는 롤라와 마셜을 마지막까지 살려놓음으로써 심지어 브리오니보다 더 오래
살 것임을 암시함으로써 인간을 인간으로 완성시키는 기준이란 죄의 유무라기보다는 죄책감과 속죄에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끝으로,
이 작품은 소설 작법에 있어서 출중하기 때문에 작가지망생들에게는 일종의 '바이블'과 같은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특히, 나는 두 가지를 꼽고 싶다.
하나는,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사건을 전개하면서 미래 시점으로 넘어가선 과거로써의 현재를 설명하는 문장들이다. 뛰어난 소설
작법으로써 작품의 가치를 한 차원 높게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작가에 대한 작가로서의 사유가 응축되어 있어 마치 한편의 철학 에세이를 읽는 것
같다.
육십년이 지난 후 브리오니는 유럽의 민속설화를 모방한 동화에서 시작하여 단순한 도덕적 교훈을 담은 희곡을 거쳐, 1935년의 찌는 듯이
무더운 어느 여름날 아침에 직접 목격한 일을 소재로 한 편견 없는 심리적 사실주의를 표방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자기 작품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묘사하게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을 얼마나 신격화했는지 깨달은 그녀는 자조적인 혹은 냉소적인 어투로 글을 쓰게 될 것이다. 그녀의 소설은 도덕의
굴레를 벗어난 작품으로 명성을 얻게 될 것이고, 반복되는 한가지 질문에 계속 시달리는 작가들이 그러듯 그녀 역시 자기 정체성을 확연히 깨달은
순간을 담은 자전적 내용의 소설을 발표해야 한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어차피 희곡은 한편에 그쳤기 때문에 '희곡 작품들'이라고 복수로 지칭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고, 냉소적인 태도로 인해 진지하고 사색하기를 좋아하는 마음속의 어린 아이와는 단절되었으며, 자신이 바로 얼마전의
일처럼 생생한 그날 아침의 일보다는 그 일에 대해 쓴 자신의 글을 훨씬 더 자주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구부린 손가락에
대한사색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과 똑같이 살아 있는 마음이 있는가하는 생각, 소설이 희곡보다 우월하다는 생각 등은 그 이전의 어느날 생각했던
것이라고 여기게 될 수도 있다. 또한 실제로 일어난 일은 그녀가 출판한 소설 덕분에 의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따라서 소설이 없었다면 그 일은
이미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p67~68
두번째는, 마지막 마무리다.
보통 문학작품들은 맨 앞의 도입 부분이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 반면 마무리 즉 맨 뒷부분은 결말 속에 파묻혀 버리곤 하는데, 이
작품은 마지막 문장이 오래도록 나를 지배할 것 같다.
연인들을 살려두고 마지막에 다시 만나게 한 것은 나약함이나 도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베푼 친절이었고, 망각과 절망에
맞서는 투쟁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그들에게 행복을 주었지만, 그들이 나를 용서하게 할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그럴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아직 그만큼은 아니다. 내 생일 축하 파티에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려낼 힘이 있다면......아직까지 살아 있는 로비와
세실리아가 서재에 나란히 앉아 <아라벨라의 시련>을 보며 미소짓는 것으로 결말을 바꿀 수 있다면......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우선 잠부터 자야겠다. -p521
마지막 순간까지 속죄를 위해서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는 주인공(브리오니)의 의지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속죄'라는 작품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면서도 미완성으로 작품을 남겨둠으로써 또 다른 상상과 여백을 남겨둔다. 바로 이 순간, 독자는 문학작품이 전해주는
감동의 골짜기를 지나 숭고미와 고결함의 언덕으로 나아간다.
만약, 제인오스틴 작품들을 좋아한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길...
당신 인생의 베스트 오브 베스트 소설이 바뀔지도...
반면, 제인오스틴풍의 작품을 그닥 선호하지 않더라도, 이 작품만은 꼭 읽어보길...
당신의 독서 취향이 바뀔지도...
누군가 자꾸만 나에게 고전 명작으로 돌아가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다.
어떤 식으로 해석해도 고갈되지 않는 무궁무진한 작품이다.
[그리고...내가 밑줄 그은 문장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그리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교훈이었다. -p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