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하는 삶 - 개정판
이창래 지음, 정영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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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래, 그는 분명 한국인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미국적이다.

부디 이 말을 오해하지 말도록 하자. 그의 작품이 전적으로 한국산(産)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전적으로 미국산(産)이라는 뜻도 아니라는 의미니까...


작가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에겐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그리고 그의 작품 역시 이와같은 꼬리표를 떼어내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점부터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작품은 시종일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된다.  보통 1인칭 주인공 시점은 독자와 화자와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감정적 동화가 부드럽게 일어나는 법인데, 이 작품은 어찌된 영문인지 과속방지턱을 만난 것처럼 천천히 흘러가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 덜컹거린다. 이게 독자에게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읽혀져 사실성을 높이고자 한, 작가의 글쓰기 전략이었다는 건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감지되었다. 

 

직접 겪은 일이 아닌 이상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언제나 제3자의 입장일 수 밖에 없고, 이점은 작가 또한 예외가 아니다. 자전적 기록일지라도 얼마든지 실제보다 더 강하게 혹은 더 약하게 감정의 기조를 조절할 수 있다. 마치 사실보다 더 진짜같고 실물보다 더 근사해 보이는 사진처럼...


 

아마도 작가는 이점을 강하게 의식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1인칭 주인공시점을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감정적인 어조를 지양하고 건조체로 일관한 건 아닌지... 마치 사실만을 기록한 일지(日誌)나 역사책처럼...

 

독자의 입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작가의 이와 같은 전략은 나에겐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고 하겠다.

강력한 감정의 쓰나미를 겪지 않아서 다소 재미없는 독서였고, 별 다른 감상(느낌)이 없어 독후감 쓰기마저 미적거리게 만들었지만, 훌륭한 작품이라는 점에는 이견을 달 수 없었으니까...


 

이 작품의 뛰어남은 무엇보다도 남다른 경험으로 치부되는 것들이 사실은 전혀 남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전쟁 중 윤간이나 강간 등은 수시로 일어나는 일일테고 사람을 동물처럼 아니 동물보다 더 잔인하게 다루고 죽이는 일쯤이야 다반사로 일어났음은 설령 참전 경험이 없다하더라도 누구나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작품 속 주인공인 프랭클린 하타와 같은 경험(혹은 정신적 트라우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말이다.

 

전쟁 이후 그들의 후일담은 다양한 스토리로 표면화되었지만, 그들의 내면이 투명하게 비추어진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과거'를 감추려했다기보다는 '외면'했기 때문이다. 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살아내야 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척 '하는 삶을 우리는 이창래의 장편소설 <척 하는 삶>을 통해 마주하게 된다.


 

삶이란 결국은  '~척'하는 것이고, 인생이라는 것 역시 '척'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슬프지 않은 척, 아프지 않은 척,

친절한 척, 별일 없는 척,

사랑하지 않은 척, 혹은 사랑하는 척,


 

이런 것들이 지식층과 전문가가 갖추어야 할 예절이자 중산층 삶의 표상이요, 무엇보다도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삶에 대한 숙달이라고 우리 대부분은 믿고 있지 않은가.



 

주인공인 프랭클린 하타 역시 그런 사람이다.

그는 일반적으로 좋은 사람이요, 성공한 사람으로 모범적인 삶을 영유한 인물의 전형이다.

 

2차 대전에 참전하여 위안부로 끌려온 다섯번째 여자 끝애(조선여자 K)에게 정신적 사랑인지 육체적 욕망인지 애매모호한 감정을 느꼈고, 결국 끝애의 죽음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봤을 뿐이다.


 

전쟁터에서 일본 장교(오노 대위)를 은장도로 찔러 죽인 위안부를 위해 그 누가 나설 수 있겠는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믿었으며 그녀를 탈출시켜 함께 살기로 굳게 맹세한 군인(구로하타 소위=플랭클린 하타)이라 한들, 그녀의 죽음을 막을 수 있겠는가?

하타가 자신이 사랑한 여자의 죽음을 막기는 커녕, 막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탓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엔도 상병을 제외하곤... 엔도 상병은 자신이 좋아하는 위안부를 죽이고 사형을 언도받고 부대원 전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형에 처해진 인물이다. 


비록 왜곡된 방식이긴 하지만 전쟁터라는 극단적인 상황임을 감안한다면, 엔도 상병은 자신이 사랑한 여자를 능욕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길은 죽음뿐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 자기도 함께 죽어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고 완성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주인공 하타는? 조선인 위안부 끝애를 향한 하타의 사랑은 어떻게 증명되고 완성될 수 있을까?



 

그나저나 내가 나이를 먹은 탓일까...?

 

단언컨대, 내가 이 작품을 2~3년만 더 일찍 읽었더라도 난 이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좋아하기는 커녕, 끝까지 읽지도 않고 도중에 포기했을 가능성 아주 크다.


 

그런데 요즘 나는,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작품들을 주로 읽고 있으며 공감 또 공감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않고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삶을 관조하는 문장들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들을 행복하게 기억하기는 하지만, 그 기억은 나에게만 가능한 것이고 나 혼자 간직하고 끌어안아야 할 것인데,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이나 생각처럼 어떤 뚜렷한 형태가 없다. 그 기억의 따뜻함은 구름 사이를 지나가는 겨울 해처럼 덧없고, 나에게 남은 것은 내 반박하는 증류기의 신경질적인 열기뿐. -p62

 


어떤 면에서 내가 한 행동은 일종의 무시였다. 나는 이 애를 서니로서, 까다롭고, 성급하고, 화 잘 내는 서니로서 마주하지 않았다. 그렇게 무시하면서 나는 그것이 합의를 구축하고 은근히 압력을 가하는 전형적인 일 처리 방법이라고, 한 사람의 인생과 그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인생을 조화시키는 그 어려운 일에서 불가피한 측면이라고 합리화했다. 사실 그런 합리화는 체계적인 공작이며, 언제나 무지막지하게 성공을 거둔다. 삶의 불확실함과 복잡함에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대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이 구체화되고 진실해지는 바로 그 순간에 삶의 정확한 양식과 내용을 깨닫는다는 것 또한 대단히 매혹적인 일이다. 밀어내고, 밀어내고, 또다시 밀어냈는데 옛 수로표지들이 다시 한 번 까닥 하며 떠올라, 눈앞의 물에 점점이 박혀 빛나는 불의 고리를 이루는 것. -p392~393

 

 

나는 내 운명이나 숙명을 찾아 나서지 않을 것이다. 나는 창조주의 얼굴에서 위로를 구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죽은 자들에게서 용서를 구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p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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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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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무 슬프고... 너무 아름답고... 너무 장엄하며... 또한 고결하고 숭고하다...

이 작품에 대한 한결같은 평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언 매큐언이라는 작가는 내 관심권 밖으로 멀찌감치 밀려나 있던 작가였다. 내 눈에 비친 그는,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유별스런' 소재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작가였으니까...  한마디로, 그의 이전 작품들은 심기불편함을 주특기로 했다.

 

그런 그에게 이 작품은 명실공히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나이 오십에 쓴 <속죄>라는 작품은 19세기 고딕소설의 진중함과 도덕성을 갖추었으면서도 동시에 20세기 현대소설의 사실성과 재미(반전)까지 두루 갖춘 명작이라는 평가가 꼬리표처럼 따라 붙는다.

 

작가는 이 소설을 발표하기 2년 전인 1999년 <암스테르담>이라는 작품으로 부커상을 수상했다. 만약, 두 작품간의 시차가 조금만 더 벌어졌더라면 존 맥스웰 쿠체(존 쿳시)의 뒤를 이어, 부커상을 두 번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만큼 이 작품은 수십년 동안 추구해오던 작가의 작품 스타일을 하루아침에 바꾼 작품으로, 이언 매큐언이라는 작가가 '대가'임을 입증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영국 남부 서리에 위치한 탈리스가(家)의 잭 탈리스와 에밀리 탈리스는 슬하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1935년 찌는듯한 여름의 어느날.

13살 짜리 막내딸 브리오니는 허마이니 이모가 이혼하게 되면서 탈리스 가에 의탁하게 된 이종사촌 3남매와 함께 때마침 내려온 오빠 레온과 그의 친구 폴 마샬을 위해서 자신이 직접 지은 <아라벨라의 시련>이라는 희곡작품으로 연극 공연을 준비중이었다. 그러나 사촌들의 비협조로 연극 공연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방을 나섰던 브리오니는 우연히 저택 앞마당 분수대에서 언니 세실리아와 하녀(파출부)의 아들 로비 터너 사이에서 벌어진 뜻밖의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브리오니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게 된다. 평생에 걸쳐 속죄하게 될 바로 그 죄를...

 

언니 방으로 뛰어가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하라고 추궁해야겠다는 충동도 일었다. 그러나 아까 본 일을 혼자 되살려보려면 적어도 감정적으로나마 그 일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흥분을 맛보고 싶어서 참았다. 그 일에 대한 정의는 앞으로 많은 세월을 두고 차츰 다듬어질 것이다. 그때 가서는 그 일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고 추측했던 것은 자신이 열세 살의 어린아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너무 어려서 그 일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고, 다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마음만 다급해졌던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p66

 

브리오니는 돌아오기 전에 벌써 하느님과 같은 창조주로서의 힘을 잃고 말았지만, 그 상실이 가장 분명해지는 것은 되돌아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공상의 논리 앞에서는 누구나 무력하다는 착각이 그것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p114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고 캠브리지에서 같이 대학을 다녔던 세실리아와 로비는 꽃병에 물을 받는 걸 놓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만 꽃병을 깨뜨리고 만다. 분수대 물속으로 빠져버린 꽃병 조각을 건지지 위해 로비 앞에서 겉옷을 벗은 세실리아가 물속에 들어갔다가 밖으로 다시 나오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브리오니...

 

어찌보면 아무것도 아니고... 어찌보면 에로틱할 수 있도 있는 이 장면은 열세살 브리오니에게 각인되어 버린다. 실제로는 세상을 제대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힘이 아직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이미 세상(어른의 세계)을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쉬운 바로 그런 나이에...

 

어쩌면 평소 예민한 감수성을 자랑하며 소설 쓰기를 즐기는 브리오니가 죄를 향해서 첫발을 내딛게 된건 순전히 지나친 상상력과 과도한 정의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죄를 향해 두어발 더 내딛었던 걸음을 거두어드리지 못하게 만든 건, 주변 환경 즉 어른들의 몰이해와 편견 때문이었다.

 

브리오니는 그들로부터 그날 밤의 정황에 대해 진술해달라는 요구를 수도 없이 받았고, 그래서 설명을 반복할 때마다 이전에 한 진술과 일치해야 한다는 부담이 점점 더 무겁게 그녀를 짓눌렀다. 이전에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해야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이전의 진술과 달라지면 경찰은 이마를 찌푸리거나 금세 태도가 냉랭해졌으며, 그녀에 대한 동정심도 거둬들여 버렸다. 그러자 브리오니는 그들을 기쁘게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다르게 표현하거나 덧붙인다면 그녀가 자초한 사후 처리 과정이 방해를 받으리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 차렸다.  -p243~244 中 발췌-

 

그러나 그 다음 한주가 채 지나가기도 전에 그렇게도 굳건했던 확신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브리오니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문자 그대로 자기가 본 것에만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준 것은 눈이 아니었다. 눈으로 확인하기에는 너무 어두웠다. -p242

 

그래서 그녀가 보는 것들은 이미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이나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바에 따라 그 형태가 일부 수정되어야 했다. -p177

 

 

여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내용이 뒤바뀐 로비의 편지와 이를 언니 세실리아에게 전해주는 심부름을 하는 과정에서 읽어 버린 브리오니...

그리고 예기치 못한 그러나 브리오니의 의심을 부채질할만한 상황이 또 다시 그녀 앞에 펼쳐진다. 마치 희곡의 이미 정해진 각본처럼...

 

그애는 언니를 보호하거나 언니에게 충고를 해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불타 언니를 찾아 나섰고, 닫힌 서재 문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어린애의 무지와 어리석은 상상과 정의감에 사로잡혀 로비에게 그만 하라고 요구하기 위해 서재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그애가 뭐라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서로에게서 떨어져 조용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p200

 

언니 세실리아와 로비 사이에 막 싹트기 시작한 사랑이 어린 브리오니에게는 어째서 전혀 다른 상황으로 비추어졌던 걸까? 도대체 그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을까?

정말, 단순히 브리오니가 상상력이 너무 풍부한 아이였기 때문일까? 단지 그 이유 하나때문이었을까? 인간이 비록 빈틈이 많은 존재라곤 하지만 그렇게 손쉽게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존재였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조물주도 실수를 했으므로 이 사건에 일말의 책임이 있는 거 아닌가?  

 

사실 어린이를 지나 이제 막 사춘기로 접어든 그것도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소녀를 떠올려 본다면, 브리오니를 유난히 특별난 아이로 단정지을 수도 없다. 선과 악, 현실과 상상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주변 어른들은 자신들이 평소 갖고 있던 무지와 편견이라는 폭력을 무의식적으로 휘둘렀던 건 아니었을까?

이와 같은 주변사람들과 남들보다 좀 더 많은 허영심과 어리석음을 타고난 대신 죄책감과 책임감은 터무니없이 부족한 또 다른 두 사람에 의해 '죄'가 저질러지고 감춰진 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내가 묻고 싶은 건, 사랑하는 연인을 떼어놓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간, 이 어처구니 없는 엄청난 범죄 앞에서 속죄를 해야 할 사람이 정말 브리오니 단 한 사람뿐일까? 하는 점이다. 

 

흥비로운 점은 세실리아와 로비는 브리오니와 만나기 전까진, 물론 전적으로 브리오니(또한 작가)의 상상이긴 하지만 범인을 대니 허드만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이 브리오니와 마찬가지로 오해를 하고 자신의 착각을 확신했다고 해서 그들과 브리오니의 행위가 똑같은 무게를 갖는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어찌됐든 세실리아와 로비의 '오해'와 '확신'은 대니 허드만을 감옥으로 보내지도 않았고 전쟁터로 내몬 것도 아니며 더더구나 그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눈먼 운명의 '지팡이'이 역할을 하진 않았으므로...

 

자신이 본 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순진한 브리오니가 롤라가 해야 할 일까지 다 떠맡아줄 것이다. 롤라는 그저 진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 그 진실을 빨리, 그리고 완전히 잊어버리고, 자신이 브리오니와는 다른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확신이 없는 거라고만 믿으면 되었다. 그의 손이 눈을 가리고 있어서 그를 보지 못했고, 공포에 떨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고 자신을 설득하기만 하면 되었다. 브리오니는 단계마다 곁에서 그녀를 도와줄 터였다. 브리오니는 일어난 일들이 모두 퍼즐 조각처럼 잘 맞아들어간다고 생각했다. -p241

 

롤라의 어깨와 마셜의 얼굴에 난 할퀸 자국들. 머릿속 공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새침한 사촌여동생이, 지나치게 고지식해서 한심해 보이는 그 사촌여동생이 다른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면서 정작 범인에게는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침묵하던 그날 밤 연못가에 앉아 있던 롤라. 짧은 진주 목걸이에 장미 향수를 뿌린 허영심 많고 나약한 롤라. 어린 소녀의 제약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기를 바랐던 롤라. 사랑람에 빠짐으로써, 아니 사랑하게 되었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어 수치의 늪에서 자신을 건져낸 롤라. 브리오니가 끝까지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것을 보며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을 믿을 수 없어 했을 롤라. 그 롤라가, 이제 겨우 어린애티를 벗은 롤라가 자신을 강간한 남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제단 앞에 서 있는 것이다. (......)

 

저 폴 마셜과 롤라 퀸시, 그리고 이 브리오니 탈리스가 작당을 하여 침묵과 거짓말로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감옥으로 보냈던가? 그러나 그를 유죄로 만든 증언은 바로 브리오니 자신이 했다. 지방 법원에서 큰 소리로 선서를 한 뒤 행한 그녀 자신의 증언이었다. 게다가 형 집행도 이미 끝났다. 대가를 치른 것이다. 배심원의 평결은 여전히 유효했다. -p454~455 中

 

 

과연...

롤라는 14살 어린 나이에 성폭행을 당한 불쌍한 여자 아이이기만 한 걸까?

폴 마샬은 그 사건이 있은 후, 5년 뒤 자신이 성폭행한 여성이 스물살이 되던 해에 그녀와 결혼식을 올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만약, 자신을 대신하여 죄를 뒤집어 쓴 사람이 친구인 레온이었더라도 그는 침묵했을까? 혹시, 로비가 레온가를 드나들면서 허드렛일을 도맡아해주던 하녀의 아들이라는 비천한 신분이었기때문에 죄책감따위는 갖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던 걸까?

 

한편, 저택의 여주인인 에밀리 탈리스는 어른으로서의 분별력을 왜 발휘하지 못했을까?

자신의 어린 딸인 브리오니를 보호하기 위해서...? 아니면, 자신의 큰딸 세실리아가 파출부의 아들과 사랑에 빠지는 걸 처음부터 탐탁찮게 여겼기 때문에...?

 

 

결국, 모두 자신은 그저 조금 이기적이고 타산적으로 행동했을 뿐 죄는 없다고 항변하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단 한사람이 속죄에 나선다. 평생에 걸친, 그러나 영원히 용서받지 못 할...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p521 

 

 

마지막 반전과 에필로그는 너무 애절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진다.   

 

자신의 친언니와 무고한 한 남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13살 소녀는 어느덧 77세 할머니가 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남긴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작품을 남김으로써 그녀가 얻으려 했던 건 뭘까? 용서였을까...? 

아니, 아니다.

그녀는 이미 당사자인 세실리아와 로비가 죽어버림으로써 더 이상 용서를 빌 대상조차 사라져버렸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냥 침묵하고 깨끗이 잊어버리면 되지 않을까?

아니,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속죄하고자 노력했다.

 

세실리아와 로비와 같은 슬픈 사랑은 찾아보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브리오니와 같은 실수 역시 비록 흔하다 할 순 없을지언정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1940년 첫원고가 나왔고 1999년 여섯번째 수정본이 나온, 브리오니의 소설과 같은 이야기... 그러니까 13살 어린 나이에 저지른 자신의 과오를 평생에 걸쳐 속죄하며 살다가는 그런 삶은 극히 드물것 같다. 아니 어쩌면 전무할지도 모른다.

 

 

이 작품의 주제를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죄책감'이 아닐까 싶다. 평생을 속죄해도 갚지 못하는 죄와 그로 인한 지울 수 없는 죄책감말이다.

 

이언 매큐언은 여전히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지는 롤라와 마셜을 마지막까지 살려놓음으로써 심지어 브리오니보다 더 오래 살 것임을 암시함으로써 인간을 인간으로 완성시키는 기준이란 죄의 유무라기보다는 죄책감과 속죄에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끝으로,

이 작품은 소설 작법에 있어서 출중하기 때문에 작가지망생들에게는 일종의 '바이블'과 같은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특히, 나는 두 가지를 꼽고 싶다.

 

하나는,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사건을 전개하면서 미래 시점으로 넘어가선 과거로써의 현재를 설명하는 문장들이다. 뛰어난 소설 작법으로써 작품의 가치를 한 차원 높게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작가에 대한 작가로서의 사유가 응축되어 있어 마치 한편의 철학 에세이를 읽는 것 같다. 

 

 

육십년이 지난 후 브리오니는 유럽의 민속설화를 모방한 동화에서 시작하여 단순한 도덕적 교훈을 담은 희곡을 거쳐, 1935년의 찌는 듯이 무더운 어느 여름날 아침에 직접 목격한 일을 소재로 한 편견 없는 심리적 사실주의를 표방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자기 작품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묘사하게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을 얼마나 신격화했는지 깨달은 그녀는 자조적인 혹은 냉소적인 어투로 글을 쓰게 될 것이다. 그녀의 소설은 도덕의 굴레를 벗어난 작품으로 명성을 얻게 될 것이고, 반복되는 한가지 질문에 계속 시달리는 작가들이 그러듯 그녀 역시 자기 정체성을 확연히 깨달은 순간을 담은 자전적 내용의 소설을 발표해야 한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어차피 희곡은 한편에 그쳤기 때문에 '희곡 작품들'이라고 복수로 지칭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고, 냉소적인 태도로 인해 진지하고 사색하기를 좋아하는 마음속의 어린 아이와는 단절되었으며, 자신이 바로 얼마전의 일처럼 생생한 그날 아침의 일보다는 그 일에 대해 쓴 자신의 글을 훨씬 더 자주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구부린 손가락에 대한사색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과 똑같이 살아 있는 마음이 있는가하는 생각, 소설이 희곡보다 우월하다는 생각 등은 그 이전의 어느날 생각했던 것이라고 여기게 될 수도 있다. 또한 실제로 일어난 일은 그녀가 출판한 소설 덕분에 의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따라서 소설이 없었다면 그 일은 이미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p67~68

 

 

두번째는, 마지막 마무리다. 

보통 문학작품들은 맨 앞의 도입 부분이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 반면 마무리 즉 맨 뒷부분은 결말 속에 파묻혀 버리곤 하는데, 이 작품은 마지막 문장이 오래도록 나를 지배할 것 같다.

 

연인들을 살려두고 마지막에 다시 만나게 한 것은 나약함이나 도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베푼 친절이었고, 망각과 절망에 맞서는 투쟁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그들에게 행복을 주었지만, 그들이 나를 용서하게 할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그럴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아직 그만큼은 아니다. 내 생일 축하 파티에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려낼 힘이 있다면......아직까지 살아 있는 로비와 세실리아가 서재에 나란히 앉아 <아라벨라의 시련>을 보며 미소짓는 것으로 결말을 바꿀 수 있다면......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우선 잠부터 자야겠다. -p521

 

 

마지막 순간까지 속죄를 위해서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는 주인공(브리오니)의 의지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속죄'라는 작품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면서도 미완성으로 작품을 남겨둠으로써 또 다른 상상과 여백을 남겨둔다. 바로 이 순간, 독자는 문학작품이 전해주는 감동의 골짜기를 지나 숭고미와 고결함의 언덕으로 나아간다.

 

 

만약, 제인오스틴 작품들을 좋아한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길...

당신 인생의 베스트 오브 베스트 소설이 바뀔지도...

 

반면, 제인오스틴풍의 작품을 그닥 선호하지 않더라도, 이 작품만은 꼭 읽어보길...

당신의 독서 취향이 바뀔지도...

 

 

누군가 자꾸만 나에게 고전 명작으로 돌아가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다. 

 

어떤 식으로 해석해도 고갈되지 않는 무궁무진한 작품이다.

 

 

 

 

[그리고...내가 밑줄 그은 문장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그리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교훈이었다.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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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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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맨 부커상 수상작으로, 2012년 국내에 출간된 이후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비롯해서 각종 미디어의 집중 조명을 받았던 작품...

한결같은 극찬과 함께 쏟아지던 예언들(?)....

이중 가장 압권이었던 건, '마지막 반전으로 책을 다 읽은 다음, 처음부터 다시 읽게 된다'는 예언이었다.

 

그만큼 난 이 작품에 대해서 읽기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에 압도 당하고 말았다. 마지막 책장을 덮자마자 충격에 휩싸인 채, 내가 이해한 결말이 맞는지 확인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터넷 검색창에 작가의 이름과 작품명을 미처 다 입력하기도 전에 자동 검색 기능으로 완성된 문장 역시,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결말'이었다.

 

책 한권을 읽은 후 이처럼 누군가와 미치도록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던 적도 처음이다.

 

일단 밖으로 나가서 걸었다. 걷고 또 걷고...

생각이 멈추면 걸음도 멈추고... 생각이 이어지면 걸음도 다시 이어지고...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말을 걸고 싶은 욕망을 꾹꾹 누르면서 사무실로 돌아왔다. 작품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작가를 비롯해서 이 작품을 나보다 먼저 읽었던 사람들이 예언(?)한 그대로...

 

 

 

맨 부커상 수상작으로 결정되었을 때 150여 페이지밖에 안되는 짧은(?) 작품 길이가 문제가 되자, 줄리언 반스는 '수많은 독자들이 나에게 책을 다 읽자마자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고 말했다. 고로 나는 이 작품이 삼백 페이지짜리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단다. 

 

작가의 예언대로 하기에 앞서 나는 우선 이동진의 빨간책방부터 뒤졌다. 그리고 진작부터 그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단 한편도 들어보지 않았던 '빨책'을 처음으로 들었다. 

 

 

우선 이동진 기자는 원문 제목을 언급하면서 제목의 한국어 번역을 걸고 넘어갔고, 김중혁 작가는 '반어'라고 되받아쳤다.

 

그렇지만 영어 원제목을 눈여겨 보지 않았던 나로선, 이 작품의 한국어 제목이 상당히 좋다고 생각했더랬다. 그래서 독후감 제목도 '예감은 종종 틀리지 않고, 기억은 언제나 왜곡된다'로 정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눈치챘을 수도 있지만, 나는 예감을 '예언'으로 해석했다.

 

이 작품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경솔한 예언이 현실이 되면서 불러온 비극으로 인한, 돌이킬 수없는 회한'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이 작품을 읽으면서 단순히 사건만을 쫒는다면 그러니까 사건의 발생 원인과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 여부에만 집중한다면 작품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므로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작품의 줄거리를 두고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라는 따위의 질문일랑은 더 이상 하지 말기로 하자.

 

 

'빨책'의 두 남자들은 사춘기 남자애들의 우정을 다룬 앞부분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듯 싶었다. 이동진기자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비유했고, 김중혁 작가는 남자애들이 주고 받는 농담에 포복절도했음을 고백했다. 

 

반면 나는, 40여년의 시차를 두고 펼쳐지는 1부와 2부는 소위 '평행이론'이 완벽하게 작용한 사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부에서 했던 등장인물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는 2부를 불러오는 '기폭제'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역사 수업 시간의 문답들은 작품의 핵심 주제와 이어지며, 롭슨의 자살은 에이드리언의 자살과 놀랍도록 닮아있고, 역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시간을 보내는 방식은 수천년 동안 천편일률적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거...


 

1부가 2부를 존재하게 하는 소위 '복선'이라고 한다면, 2부는 시야가 훨씬 확대되어 삶과 인생을 아우른다.  나는 '시간과 세월' 그리고 '나이 듦'에 대한 토니의 독백 부분에서 여러차례 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나는 이 작품의 주제를 두개로 나누어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모든 기억은 왜곡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이듦의 의미' 즉 '시간의 의미'와 '시간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하는 문제라 하겠다. 

 

 

더 정확히 말해 철학자를 고를 수 있는 가짓수가 하나 더 늘었다. 앨릭스가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을 읽었다면, 에이드리언은 카뮈와 니체를 읽었다. 나는 조지 오웰과 오더스 헉슬리를 읽었다. 콜린은 보들레르와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다. 어디까지나 도식화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p22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에서 그는 검시관에게 자신의 자살 이유를 설명해놓았다. 그는 삶이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된 선물이며, 사유하는 자는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만약 바란 적이 없는 그 선물을 포기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결정대로 행동을 취할 윤리적, 인간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p88

 

 

이야기는 세명의 친구 집단에 새로운 전학생이 끼어들면서 시작된다. 문제는 이 전학생이 범상치 않다는 것. 그가 카뮈와 니체를 읽었다는 건, 단순히 똑똑한 걸 너머 '실존'의 의미를 깨닫고 있음을 의미한다. '삶이란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되는 선물'이라는 것이야말로 카뮈 문학의 핵심이자 니체 철학의 시작이지 않은가.

 

'탄생 은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소멸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소멸' 즉 '자살' 이야말로 인간의 절대적 자유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하겠다. 독자인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에이드리언의 죽음(혹은 자살)을 일찌감치 예감했더랬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그런가, 과연? 어디에서 읽었나?"

"라그랑주입니다. 타르리크 라그랑주. 프랑스인입니다."

"그런 추측을 할 수도 있겠지. 예를 들어 설명해줄 수 있겠나?"

"롭슨의 자살이 그 예입니다." -p34

 

 

나는 살아남았다. '그는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가깝다는 것을. -p101

 

 

역사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는 역사 선생님(조 헌트)의 질문에 토니가 '역사란 승자의 거짓말일 뿐'이라고 답하자, 선생님은 그건 '패자의 자기변명이기도 하다'고 답한다. 이에, 에이드리언은 위 인용문에서 보듯, '역사란 부정확한 기억과 불충분한 문서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자기 확신'이라고 답한다. 이 문장이 왜 그렇게 중요하며 여러 사람들에 의해 회자되는지는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난 다음 깨닫게 된다.  

 

한가지 재미있는 건, 빨책에서 라그랑주라는 프랑스인은 가공의 인물로,  줄리언 반스의  'Barnes'가 불어로 '마구간'이라는 뜻이 있는데, 마구간을 불어로 '라그랑주'라고 한단다. 그러므로 작품 속의 그 문장은 '줄리언 반스 가라사대~'라고 하겠다. 작가의 '위트'에 미소짓게 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40년이 물처럼 흘러간 후,

토니는 역사란 승자의 기록도 패자의 변명도 아닌 살아남은 자의 기억 즉 회고에 가깝다.고 자신이 40년 전에 했던 대답을 수정한다.

 

이 문장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머물렀다.

내가 왜곡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올라서...

 

당시에는 끔찍하고 고통스러웠던 일조차도 세월이 흐를수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연유를 이제서야 알 것 같다. 그건 바로 그 기억을 떠올릴때마다 조금씩 기억을 왜곡시켰기 때문이다. '말 전달하기'라는 게임만 보더라도 두 세 사람을 거친 말(이야기)이 어떻게 변형 왜곡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섣불리 '지나간 모든 것들은 아름답다'고 주장하며, 과거에 대한 화해와 용서를 권장하는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p162

 

젊을 때는 서른 살 넘은 사람들이 모두 중년으로 보이고, 쉰살을 넘은 이들은 골동품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시간은, 유유히 흘러가면서 우리의 생각이 그리 크게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해준다. -p107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과 천양지차인 삶을 허황되게 꿈꾸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런 게 자기만족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상상력이나 야심의 부족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아마도 사실은, 그렇다, 내가 인생을 살면서 결국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들을 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별종은 못 돼서 그런 것 같다. -p114

 

살아갈 날이 줄어들수록 헛되이 살고 싶지 않게 된다. 그게 당연한 거 아닌가. 자투리 시간을 아무리 잘 활용한다 해도......여튼, 그건 젊었을 때는 미처 예견하지 못하는 문제 중 하나다. -p120

 

 

나도 그랬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내가 십대였을 때, 30살 넘은 선생님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렇게 재밌어하고 흥분하는 일들에 대해서 그들은 어쩌면 그렇게 무심하고 무덤덤할 수 있는지...? 시간은 너무도 느려터졌고 매순간이 참을 수 없이 따분하고 심심하건만, 그들은 어째서 입만 열면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고 말하는 것인지...? 당시의 나로선 이해불가였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삶은 물처럼 흘러간다는 걸....

느리기만 하던 세월은 마치 구름처럼 흩어져 사라진다는 걸....

처음엔 한없이 친절하기만 하던 시간이 결국은 뒤통수를 친다는 걸...

 

 

이십대에는 자신의 목표와 목적이 혼란스럽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해도, 인생 자체와, 또 인생에서의 자신의 실존과 장차 가능한 바를 강하게 의식한다. 그후로......그후로 기억은 더 불확실해지고, 더 중복되고, 더 되감기하게 되고, 왜곡이 더 심해진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억을 지운다. -p182

 

 

십대와 이십대 초반의 나는, 스스로 마흔쯤 되면 세상의 스승이 되어 있을 줄 알았더랬다.

 

이렇게 기껏(?) 소설이나 읽고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마음 한켠이 조여들며...

윗니와 아랫니를 앙당물고...

나도 모르게 자꾸만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할 줄은... 미처 몰랐더랬다.

 

 

토니도 그랬을 것이다.

아마 미처 몰랐을 것이다.

십대를 막 지난 이십대 초반, 타인을 죽음으로 내몰 만큼, 타인의 삶을 절망 속으로 던져 넣을만큼, 자신이 얼마나 경솔하고 치사하며 유치했었는지를...

 

 

에이드리언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을 포기했고, 삶을 시험해보는 것도 포기했고, 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난생 처음, 나는 내 온 인생에 대해 한결 총체적인-자기연민과 자기혐오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후회의 감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살아온 어느 하루도 후회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젊은 시절 알게 된 친구들을 잃었다. 아내의 사랑을 잃었다. 즐겼던 야망을 저버렸다. 인생이 너무 성가시지 않기를 바랐고 성공을 거두었다. 이 얼마나 옹색한 일인가. -p173

 

 

40년이 지난 어느날.

그는 회한에 젖는다. 자신이 지나온 물같은 삶속에 젖는다.

죄책감도 미안감도 아닌,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의 중간 어디쯤에 젖어든다.  

 

 

 

이 책은 내용만 놓고 본다면 통속연애소설이고, 플롯과 전개방식만 놓고 보면 반전이 돋보이는 영락없는 추리소설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명작이다. 기억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인간의 마음 속 저 깊은 곳까지 훤히 비추는 절대거울이요, 시간과 세월과 삶과 나이 듦의 의미을 알려주는 절대사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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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박종대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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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링크의 작품으로는 세번째다.

<더 리더:책 읽어 주는 남자>와 <귀향>에 이어 세번째로 읽은 <주말>은 분량도 많다고 할 수 없는데 진도가 잘 안 나갔다. 물론, 개인적으로 오른쪽 각막을 다치는 등 책읽기에 집중할 수 없었던 이유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독일이 우리나라처럼 동서독으로 분리되어 있을때, 서독에서 일어난 반정부 좌파운동을 주요 모티브로 하고 있다. 주인공인 외르크가 '적군파'소속으로 정부의 주요 인사를 납치/살해한 혐의로 23년동안 감옥에서 복역 후 대통령 사면으로 출소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의 보호자인 누나 크리스티아네는 동생의 출소를 축하하기 위해서 한때 동생과 친했던 친구(동지)들을 주말에 시골집으로 초대한다.

 

초대된 인물들은 덴탈랩을 운영하는 울리히, 기자인 헤너, 성직자가 된 카린, 교사이자 작가인 일제, 그리고 외르크를 다시 좌파운동의 마스코트로 삼으려고 하는 마르코 한 등이다.

 

이들은 시골집에 도착한 첫날인 금요일 각자의 방식으로 과거를 회상하면서 외르크의 행위에 대한 감회를 드러낸다. 아내를 자살로 내몰고 아들에게 편지 한통 전달하지 않은 외르크의 삶은 과연 영웅적인 것일까? 그의 희생적(?) 행동이 과연 인류 사회에 도움이 되었을까?

아마도 저자는 이런 문제 제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은 마르카레테과 외르크의 아들 게르트 슈바르츠(페르디난트)의 관점으로 표출된다. 

 

그녀가 보기엔 외르크도 병든 인간이었다. 병들지 않았다면 격정과 절망이 아니라 어떻게 멀쩡한 정신과 냉혹한 가슴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겠는가? 건강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다른 행동을 찾았어야 하지 않을까?  마르가레테는 적군파와 독일의 가을, 그리고 크리스티아네와 그 친구들이 추진한 테러리스트 사면에 대한 대화도 화제 자체가 병들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의 테러리스트들뿐 아니라 지금 그들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걸려 있는 병이다. 어떻게 건강한 정신으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살인으로 더 나은 사회가 만들어진다고? 이 모든 것이 추악하고 역겨운 병에 너무 많은 명예를 안겨주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주말> p115~116 中-

 

부모 세대의 나치즘 동조에 강한 거부감을 보인 전후세대는 테러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사회를 바꾸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 나치 친위대로 젊은 날을 보냈던 노인들이 과거를 회상하는 술자리 대화는 외르크의 출소를 계기로 다시 모인 친구들의 회합과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다. 

 

 

오펜부르크 회합에서는 인도 요리를 해 먹었다가 모두 설사를 했던 거 기억나? 도리스가 미스 유니버시티 선발 대회에서 상을 탄 뒤 수상소감자리에서 <공산당 선언문>을 낭독했던 거 기억나? 정치에는 아무 관심도 없으면서 단지 에바가 좋아서 베트남 전쟁 반대 데모에 참가한 게르노트가 갑자기 '양키를 미국에서 내쫓자!'하고 소리쳤던 거 기억나? (......) 다른 사건들도 그들의 머릿속에 잇따라 떠올랐다. 우리가 라텐베르크 교수의 강의 시간에 쥐새끼들을 풀어놓았던 거 기억나? 대통령 연설 때 스피커 시설을 방해해서 엉망으로 만들었던 거는? 전철 요금 인상안이 발표되었을 때는 쇠지레로 전철기를 차단시켰던 거는? 또 우리가 고가도로 벽에 격리 감금에 항의하는 플랜카드를 내걸었던 거는 기억나? 경찰이 플래카드를 내리자 고가도로 콘크리트에다 스프레이로 다시 썼던 거는? 우리가 시위를 벌이기 위해 도로공사 건물 안뜰에서 교통  표지판들을 슬쩍해서 간선도로를 폐쇄했던 거는? (......)

 

슈바르츠는 저녁 내내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그런 그가 이제 또박또박하고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내가 자란 작은 도시에서 몇 주에 한 번 친구들과 술집에서 도펠코프를 쳤습니다. 그날 저녁도 카드를 치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다섯 노인이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죠. 모두 나치친위대 출신이더군요. 순간 나는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양반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세요? 그거 기억나, 그거 기억나? 밤새 그러면서 놀더군요. 이상했어요. 빌뉴스에서 유대 놈들을 어떻게 쳐죽였고,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놈들을 어떻게 쏘아 죽였는지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데,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어요. 바르샤바에서 샴페인에 취해 떡이 된 얘기며, 폴란드 여자들과 오입질한 얘기며, 또 이발사가 그 양반들의 긴 수염을 자른 이야기를 자기들끼리 좋다고 낄낄거리면서 늘어놓았어요. 당신들도 다르지 않네요. 정작 중요한 건 왜 얘기를 하지 않죠? 은행을 습격할 때 여자를 쏘아 죽인 얘기도 있을 테고, 국경에서 경찰을 죽인 얘기도 있지 않습니까? 그뿐인가요? 은행장도 죽였고, 상공회의소 회장도 죽였죠. 아, 상공회의소 회장은 누가 죽였는지 우린 정확히 모르죠. 어때요, 아버지? 아버지가 죽였는지, 다른 사람이 그랬는지 아들한테 얘기해주고 싶은 마음 없어요?" 외르크는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주말> p204~208 中-

 

 

결국, 그들을 영웅심에 불타오르게 만들었던 혁명, 진리, 진보, 정의 등등은 그들이 꿈꿨던 세상 대신 폭력과 복종으로 점철된 굴종된 삶은 아니었을까?

원래 혁명이란 이런 것이다. 권력을 얻고자 하는 세력이 기존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그런 거...

그러니까 혁명 이후나 혁명 이전이나 커다란 차이는 없다는 거...

인류가 역사적으로 수많은 혁명을 거쳤음에도 여전히 지배와 피지배, 폭력과 복종은 똑같이 인류 사회를 지배하는 규칙이라는 거...

 

 

한편, 주인공 중 한명인 일제의 소설 속 등장인물인 얀이 실존인물인지 아닌지 모호하다.

자살을 가장하여 사라진 후, 테러리스트로 활동하다가 9.11 테러가 일어나던 당시. 어느 아랍인의 지시로 무역센터 꼭대기층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방을 하나 갖다 놓고 나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나오지 못했고.... 결국 추락사하는 것으로 그녀의 소설은 마무리 된다. 그 가방 안에는 비행기 유도장치가 들어있는 것으로 암시되어 있고...

 

 

얼마전, 우리나라의 극좌정치세력 중 하나인 통진당이 대법원에 의해 해산 명령을 받았다.

이를 두고, 혹자는 그들도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국민의 지지로 국회에 들어왔으니 법의 잣대가 아닌 국민의 심판에 맡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 대한민국 헌법질서에 위배되는 이적단체에 대한 해산은 정당하다는 주장 등도 있다.

 

어찌됐든,

의도와 취지가 아무리 좋다한들 폭력적인 방법은 더이상 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는 없다.

 

그리고 젊은 혈기는 권력추종자들에 의해 즐겨 이용되어 왔다는 사실 역시 잊지 말아야하리라.

 

혁명...?

이젠 지겹다.

 

왠지 반공 독후감이 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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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박종대 옮김 / 시공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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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작품들이 있다.

대표작(?)이 전해주는 감동으로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게 되는 거 말이다.

 

얼마전, 박경리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한국을 찾은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야말로 여기에 딱 맞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영화로도 유명한 그의 작품 <더 리더: 책 읽어 주는 남자>를 올 겨울에 다시 읽었고... 또 다시 감동을 받았더랬다.

그래서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우선 <귀향>과 <주말>부터 읽기 시작했다.

 

<귀향>은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를 변주한 작품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귀향하는 병사들...

그들은 환대받기도 하고 냉대받기도 한다.

남편의 부고 소식이 전달되지도 않았건만 고향에 남아 있던 아내는 이미 새로운 가정을 꾸민 경우도 있고...

엉뚱한 남자가 남편 행세를 하며 귀향한 병사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기도 하고...

 

말도 안 된다고...?

원래 전쟁이라는 게 그런 것이지 않은가? 

말도 안되는 이유들로 시작되고 끝나서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는 것도 모자라, 여러 사람의 인생을 비틀어 버린다. 

마치 전지전능한 신처럼...

 

<귀향>의 주인공 페터 데바우어 역시 이런 신의 장난과 변덕에서 자유롭지 못한 영혼 중 하나였을 뿐이다. 

 

스위스에 자리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집을 오가며 성장하지만 엄마와도 조부모와도 '아버지'이야기를 꺼내는 건 일종의 금기였다.

내가 누구인지 혹은 내가 누구의 자식인지 모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털어도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티끌'처럼 마음에 '딱' 달라붙어 수시로 상실감과 좌절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런 게 아닐까...

마치 순서가 어긋난 단추 채우기마냥 한번 비틀린 인생은 작은 바람에도 쉽사리 흔들리고 만다.

 

 

 

페터 데바우어는 소설 원고 교정을 하는 조부모의 집에서 이면지로 얻은 종이에 적힌 <기쁨과 재미를 주는 소설>을 읽게 된다. 소설의 결말이 너무 궁금했던 그는 성인이 되어 출판사 법률 분야 담당 편집자로 일하면서 이 소설을 쓴 작가를 수소문하게 된다.

 

이제야 나는 나를 사로잡은 귀향 이야기의 저자를 찾아냈다. 그는 1940~41년에 내가 살았던 도시에서 대학을 다녔고, 클라인 마이어 가 38번지의 람페 가족 집에 세 들어 살았으며, 베아테 람페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퇴짜를 맞았다. 그러다가 1941~42년 겨울 한케의 휘하로 들어갔고, 한케의 지시에 의해 종군 기자로 육성되었거나 바로 투입되었다. 1942년 여름에는 베아테를 다시 만났고, 이번에는 일시적으로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그 밖에 다른 정황들을 통털어 보건대 그는 한케가 죽기 전 몇 주 혹은 몇 달 동안 한케와 함께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존쟁이 끝난 뒤에는 클라인마이어가를 다시 찾았을 확률도 무척 크다. 그리고 이 방문과 1950년대 중반 사이의 어느 시기에 그 소설을 썼다. 1950년대 중반은 조부모가 내게 그 소설의 원고를 이면지로 쓰라고 주신 시점이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귀향> p189 中-

 

이 와중에 드러나는 어머니와의 불화(혹은 어머니의 비협조)는 또 다른 실마리를 제공한다. 자식을 사랑하지만 그 자식을 존재하게 해준 또 다른 존재(남편)에 대한 증오는 알게 모르게 자식에게 투영된다.  

 

부모가 이혼한, 한부모 자녀들이 앓게 되는 보이지 않는 질병 중에 하나는 헤어진 또 다른 부모(아빠/엄마)에 대한 이중적 감정이라고 한다. 부모니까 당연히 보고싶고 그립지만.... 함께 사는 부모를 위해 그 감정을 숨기거나 좌절시켜야만 한다. 심지어 부부 사이의 미움과 원망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투영되어 필요이상으로 부모 중 어느 한쪽을 증오하기도 한다.

 

작품 속 주인공 역시 이런 이중적 감정에 시달린다. 

아빠가 누구인지 알고 싶고 궁금해하면서 그의 아들이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의 이와같은 욕구는 번번히 좌절되고 만다. 물론 처음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극단적으로 피하는 모친 탓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을 죽은 사람 취급하고 새출발을 한 부친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주인공은 바로 이런 부친의 진심을 꿰뚫어 보고는 아버지를 원망한다. 

 

이런 와중에 페터는 존 드 바우어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출간된 <법의 오디세이>라는 책의 번역과 출판을 의뢰받게 되면서 이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걸 직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를 만나보기 위해 그 몰래 그의 강의를 듣고 그가 주관하는 세미나까지 참석한다. 

 

페터는 아버지를 찾아서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

'왜 자식을 버리고 떠났느냐고 묻고 싶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자식을 사랑하지 않았느냐'고도 묻고 싶었겠지...

 

그러니까 이작품은...

인간이 짊어져야 하는 의무와 책임 그리고 의무와 책임을 다 하지 않았을 때 당연히 가질 수 밖에 없는 죄책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만약 당연히 가져야 할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건 또한 선인가? 아니면, 악인가?

 

역시 슐링크의 작품은 쉽지 않다.

법과 정의를 다루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선과 악의 세계로까지 확장된다.

 

제목이 '귀향'인 점 그리고 귀향을 다룬 <오디세이아>를 모티브로 했다는 점이야말로 이 작품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그건 다름 아닌, '인과관계'와 '근원'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유(원인)를 알게 되면 결과(행위)를 이해할 수 있다.

이해가 이처럼 중요한 까닭은 아마도 살기 위해서일 게다.

인간이란 단 한순간도 사랑없인 살 수 없는 존재이며, 사랑은 이해와 용서가 선행되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페터는 이해해야만 했다.

왜 자신에게는 아버지가 없는지를....

죽었다면 어떻게 죽었으며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을 테니까...

 

마지막 결말이 나로서는 유감스럽고 이해가 잘 되지는 않지만, 결국엔 아버지인 존 드 바우어교수의 의도를 아들인 페터 데 바우어가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결국 아버지가 어째서 죽은 사람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아들인 자신과 아내 곁을 떠났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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