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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류진운 지음, 김태성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1958년 허난성 옌지현에서 태어나 1982년 베이징대 중문과를 졸업한 류전윈은 중국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가 중 한명이다. 그의 작품은 당대 중국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처음 접한 그의 단편모음집 <달털같은 나날> 역시 시대의 풍향에 따라 이리저리 나부끼는 중국 도시인들의 삶을 냉철하게 풍자하고 있다.
지나치게 가슴 아프지도 진지하지도 않거니와 과장되지도 거칠지도 않은, 그의 작품들은 독자들을 현대 중국 사회로 안내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감정의 고조없이 평상심으로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현대 중국 사회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소중한 '창(窓)'이 되어준다.
2003년 출간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동명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 장편소설 <핸드폰>은 '말'에 의한 인류의 소통 문제를 다루고 있다. 소설은 주인공 옌셔우이(嚴守一)을 중심으로 과거(1960년대)-현재(1990년대)-과거(1920년대) 순으로 시대에 따라 변화해 온 '소통의 방식'을 보여준다.
이제 막 변성기에 접어든 옌셔우이는 1969년 어느 겨울날 전화 한통을 걸기 위해 옌씨 마을로 시집온 뤼귀이화를 자전거에 태우고 40여리를 달려 읍내 우정국으로 간다.
마침 탄광에 큰 눈이 내려 마씨의 목소리는 산 속에서 끝없이 메아리쳤고, 메아리는 어지럽게 흩날리는 눈 속에서 수천수만의 마씨가 되었다. 모두들 눈을 맞으면서 방송을 듣고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뒤 십여일 동안 그 이야기는 제3탄광에서 한 곡의 노래가 되었다. 매일 식사 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식판을 두드리며 이 노래를 불렀다.
뉴싼진, 뉴싼진
당신의 아내 뤼구이화
뤼구이화가 묻습니다
일간 언제쯤 돌아오시나요?
옌셔우이는 울었다.
-제1장: 뤼구이화(呂桂花) 또 다른 사람이 말하길 中-
19세기 후반 발명된 이후 반세기가 다 지났어도 전화는 여전히 참 귀했더랬다. 비록 비용이 들고 전화가 설치되어 있는 읍내나 마을 이장네로 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급한 소식을 전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인편이나 편지를 띄우는 것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화가 동네방네 가가호호로 진출하게 되고, 다시 모든 사람들의 손에 전화기가 들리게 되기까지는 그로부터 겨우 사반세기의 세월밖에는 걸리지 않았다.
자동차 뒷좌석은 침대보다 훨씬 더 갈증 해소에 도움이 되었고 소독도 잘 되는 것 같았다. 그는 행위를 시작하기 전에 안전을 위해, 그리고 그 일에 몰두하기 위해 핸도폰을 꺼두었다. 그러나 핸드폰을 끄는 바람에 우유에와의 불륜사실이 들통나고 더 큰 일이 벌어지게 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
위웬쥐엔이 전화기 폴더를 열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전화기에서 페이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핸드폰을 키셨군. 아직도 밖에서 장난 치고 있나? 아까 두 시간 전에 원쥐엔이 전화로 자네를 찾았네" 페이모의 말소리는 한구절 한단어 그대로 옌셔우이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
그런데 바로 이때 '딩동'하고 핸드폰이 또 울리더니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발신자는 우유에였다. 무척 관심어린 어투였다.
'춥네요. 얼른 들어가요. 아까 차에서 자기를 물었던 게 생각나서...잘 때 속옷은 벗지 말아요'
(...)
옌셔우이는 위원쥐엔의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안에서 밖으로 천천히 솟구쳐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
한참이나 입을 벌리고 있던 그는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런 게 아니야."
숨겨둔 애인이 없다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여자와 함께 있을 때 자신에 대해 수군거리지 않았다는 말인지 애매모호하기만 했다. 이때 위원쥐엔은 이미 평소의 상태를 회복하고 옌셔우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여보! 이제 당신은 날 잃었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뜻밖에도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우연한 실수 때문에 옌셔우이는 이혼을 했다.
-제2장: 위원주엔(于文娟) 션슈에(沈雪), 우유에(伍月) 中-
편리한 소통을 갈망했던 현대인은 마침내 '핸드폰'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소통이 편리해지면 편리해질수록 '비밀'과 '거짓말'도 늘어났다. 핸드폰은 현대문명의 상징이자 동시에 '판도라상자'가 되었다. 핸드폰만큼 개인의 비밀과 정보를 낱낱히 담고 있는 것이 또 있을까. 핸드폰을 통해 관계를 맺고 소통하지만 또한 핸드폰 때문에 관계가 깨지고 소통의 부재를 불러온다.
할머니가 반지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옌셔우이는 할머니가 반지를 션슈에에게 주라고 하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베이징에 돌아가면 내 대신 원쥐엔에게 돌려주거라. 그리고 이렇게 말해. 이제는 내 손주며느리가 아니지만 대신 손녀가 되었다고 말이야."
그리고는 한 마디 덧붙였다.
"손주 녀석은 철이 없다 해도 죽을 때가 다 된 이 늙은이는 그나마 시비와 도리를 가릴 줄 안다는 것을 그 애가 알게 해야 하지 않겠니."
옌셔우이는 할머니의 다리에 엎드려 엉엉 울기 시작했다.
-제2장: 위원주엔(于文娟) 션슈에(沈雪), 우유에(伍月) 中-
그렇다. 옌셔우이의 할머니 주(朱)씨는 시비와 도리를 가릴 줄 알았다.
비록, 전화가 생기고 사람들마다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시대를 건너왔건만, 그녀의 말수는 적었지만 언제나 '진심'만을 담고 있었다. 소통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 사람들간의 의사소통은 어쩌면 '말'이 아니라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현대인들은 소통의 자유와 편리함을 얻었지만 진심을 담아 전달하는 방법은 서서히 잊어버리고 있다.
발인하던 날 밤, 옌셔우이는 손전등을 들고 마을 뒤에 있는 작은 산비탈로 올라갔다. 어렸을 때 그는 장샤오주와 함께 늘 광산용 램프를 들고 그곳에서 하늘에 대고 글을 쓰곤 했다. 장샤오주가 즐겨 쓰던 문장은 이랬다.
'엄마, 엄마는 바보가 아니에요.'
옌셔우이는 이런 문장을 즐겨 썼다.
'엄마, 어디 있어요.'
두줄의 문장은 칠흑같은 어두운 하늘 위에 5분 정도 머물러 있곤 했다. 그날 밤은 유난히 어두웠다. 손을 뻗어도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마흔 여섯살이 된 옌셔우이는 손전등을 들어 하늘에 글을 새겼다.
'할머니! 얘기 좀 하고 싶어요.'
-제2장: 위원주엔(于文娟) 션슈에(沈雪), 우유에(伍月) 中-
1960년 대기근 시절 기아에 허덕이던 옌셔우이의 엄마는 결국 굶어죽고 말았다. 그 이후 옌셔우이를 키운 건 순전히 할머니였다. 나무에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옌셔우이를 업고 깊은 숲길을 사나흘이나 걸어 의원에게 보인 것도 바로 할머니였다. 그런 할머니가 떠난 것이다. 조금만 연락이 일찍 닿았더라도 그는 할머니의 임종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와 단 몇 마디라도 나눌 수 있었을테고 생전에 그렇게 기다리시던 손주를 직접 보여드릴 수도 있었으련만...
이 모든 게 다 핸드폰때문이다.
핸드폰만 아니었어도 옌셔우이는 우유에가 묵고 있는 호텔방의 호수를 알 턱이 없었을 테고 아내와 이혼도 하지 않았을 것이며 션슈에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할머니와 얘기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류전윈의 <핸드폰>은 모두3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언뜻 보면 각 장이 모두 별개의 작품처럼 읽힌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야 이 세장이 모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