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마이클 커닝햄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늘 꿈꿔왔던 작품이다.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을 모티브로 삼아 전혀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깜짝 놀랄만큼의 기시감(旣視感)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집을 나서서 길을 재촉하고 있다. 날씨에 비해 지나치게 두터운 코트를 걸치고서, 때는 1941년,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레너드 앞으로 짤막한 편지 하나를 남겼다. 바네사 앞으로 쪽지를 남기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결단을 내고야 말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이 무슨 짓을 하게 될지 너무도 잘 안다는 표정으로, 강을 향해 가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언덕진 풀밭과 교회, 그리고 점점 어둑어둑해지는 하늘 아래 여기저기 흩어져 풀을 뜯고 있는, 황록색이 연하게 묻어날 듯한 흰색으로 더욱 눈에 두드러져 보이는 양 떼에 거의 넋을 놓고 있다. - 마이클 커닝햄 『세월』 9쪽-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잘 알려져있다시피 그녀의『댈러웨이 부인』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꽃은 자기가 사오겠다고 댈러웨이 부인은 말했다. 문을 열고 나서자 신선한 대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 같았다. 아침 공기가 몸을 감쌌다. 빅벤이 시종을 쳤다. 종소리가 묵직한 원을 그리며 퍼졌다. 거리는 생명력이 넘치고 모든 것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

사람들의 시선 속에, 활개치며 성큼성큼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울부짖는 아우성 속에, 마차, 자동차, 버스, 짐차, 그리고 허청허청 발을 질질 끌면서 춤추는 샌드위치맨(sandwich man) 속에, 악대와 손풍금 속에, 환성과 종소리와 그리고 머리 위를 나는 비행기의 기묘하게 찢어지는 듯한 폭음 속에, 이러한 것들 속에 그녀가 사랑하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인생이 있었다. 그리고 런던이 있었고, 6월의 이 순간이 있었다. -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7~12쪽-


 

저녁 파티에 쓸 꽃을 사러나가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댈러웨이 부인』은 마르셀 프루스트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유명하다.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의 극치'로 불리는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이제 나보고 도대체 무엇을 쓰란 말인가?' 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나 또한 탄식하고 말았다.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이 완벽한 이해와 존경심이라니...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궁극의 극치'가 아닐까 싶다.


마이클 커닝햄은 열 일곱 살 때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서 받았던 깊은 충격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다가 『세월』이라는 작품 속에 고스란히 쏟아놓았다. 작품의 구조와 문체뿐만 아니라 주제까지도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그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버지니아 울프의 남편 레너드 울프의 목소리를 빌어 그녀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는 지금도 가끔 그녀 때문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그는 그녀가 아마 영국에서 가장 지적인 여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책들은 몇 세기를 두고 읽힐 것이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더 열렬히 그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아내가 아닌가. 그녀는 20년 전 케임브리지에 있던 그녀의 남동생 방에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 램브란트나 벨라스케스의 작품만큼이나 그를 놀라게 만들었던, 키가 훤칠하고 창백한 버지니아 스티븐이었고, 지금 이 순간 그의 앞에 서 있는 그녀는 버지니아 울프이다. - 마이클 커닝햄『세월』54쪽 -


나 역시 동감하는 바이다.

그녀는 20세기 초 영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지적인 여성일지도 모른다. 지성과 감성을 갖춘 수많은 현대 여성들은 버지니아 울프에게 저마다 크고 작은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남여 차이에 따른 구분을 뛰어넘는 그녀의 페미니즘은 여성주의에 국한되지 않고 범인류애로 확대되었으며, 그녀가 생전에 보여준 행동과 결단력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으로 삶을 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퇴색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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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커닝햄의  『세월(The Hours)』 에는 세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1923년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댈러웨이 부인』을 읽기 위해 가출(?)을 감행하는 로라 브라운, 그리고 2001년 뉴욕에 살고 있는 클라리사 보건이다. 이들은 모두 각기 다른 시공간 속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지만 결국은 모두 똑같이 흐르는 시간 속에 놓여 있을 따름이다.  마치 회전목마처럼 눈에 비치는 배경이 바뀜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일정한 궤도와 속도로 움직이는 회전판 위에 서있는 것처럼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일찌감치 이 점을 간파했으리라. 

결국 삶이란 흐르는 시간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것이라는 걸...

자신에게 할당된 시간을 끝까지 잘 견뎌내면서 매순간 떠오르는 의식들 속에서 생의 기쁨과 고통을 오롯이 느끼는 것이라는 걸...

 


 

지금 이 순간에는, 앞에 펼쳐질 시간들로 인해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그녀의 마음은 흥얼흥얼 노래를 읊조린다. 오늘 아침, 그녀는 혼미를, 말하자면 막힌 파이프를 관통하여 황금에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내부에서 그것을, 형언하기 어려운 제2의 자아를, 아니면 약간 더 순수한 자아를 느낄 수 있다.

만약 그녀가 신앙심이 깊다면 그녀는 그것을 영혼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모든 지성과 감정 이상의 것이고,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눈부신 금속으로 만든 동맥처럼 세 가지 모두를 관통하고 있지만 말이다.  - 56쪽 -


고통은 그녀를 정복하고, 그때까지 버지니아의 것이었던 모든 것을 재빨리 고통 그 자체로 바꿔 버린다. 그 진척 과정이 너무도 위압적이고 들쭉날쭉한 윤곽선이 너무도 선명하여, 그녀는 고통을 그 자체 생명력을 지닌 실체로 상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래너드와 함께 광장을 거닐 때도 그녀는 그것을, 조약돌 위로 반짝이는 은빛 덩어리를,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대못을 박아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리면서도 완전한 하나의 덩어리로 남는 그 고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110~111쪽 -



죽는 순간까지 생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고통조차 외면하지 않았던 그녀는, 마이클 커닝햄의 안내로 다시 한번 로라 브라운의 마음 속으로 걸어들어온다.




창에서 몸을 돌린다. 신발을 벗는다. 『댈러웨이 부인』을 유리가 덮힌 침실용 탁자에 올려놓고 침대에 눕는다. 방 안은 호텔에서 흔히 느껴지는 기이한 고요로, 삐걱거리는 소리와 꼴꼴거리는 소리, 그리고 카펫 위를 구르는 바퀴 소리를 짓누르는 너무나 부자연스런 고요로 가득하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삶에서 너무나 멀리 벗어나 있다. 그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었다. 왠지 그녀는 자신의 세계를 벗어나서 책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 같다. 물론 하늘빛의 이 호텔 방만큼 댈러웨이 부인의 런던과 더 동떨어진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물에 빠져 죽은 그 천재 여인 버지니아 울프도 죽어서는 이 방과 다르지 않은 곳에 살지도 모른다고 상상해 본다.  - 229쪽-



다섯 살 아들을 두었고 뱃 속엔 둘째 아이를 임신한 평범한 가정주부 로라 브라운은 견딜 수 없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댈러웨이 부인』을 마저 읽기 위해 호텔을 찾는다. 그녀는 울프처럼 죽을 것인가? 아니면 울프의 분신과 같은 댈러웨이 부인처럼 살 것인가? 하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버지니아 울프를 만난다.




그녀는 버지니아 울프를, 순결하고 착란적이며 일상의 삶과 예술의 불가능한 요구 사이에서 좌절감을 느낀 울프를 상상해 본다. 버지니아 울프가 주머니에 돌을 넣고서 강물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걸음걸이를 상상해 본다. 로라는 계속해서 자신의 배를 문지르고 있다. 그것은 아마 호텔에 투숙하는 일 만큼이나 단순할 수도 있어, 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사실 그것은 호텔 투숙보다 더 간단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 233쪽 -


로라는 시간을 놓치지 않고 매순간을 읽는다. 여기 한순간이 있고, 저기 한순간이 흘러가네, 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한 페이지가 막 넘어가려 한다.

그녀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아들을 향해 침착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이도 웃음으로 화답한다. 녀석은 타버린 초 끄트머리를 핥고 있다. 그 아이는 또 다른 소망을 품는다.  - 321쪽 -



자살 충동을 느끼는 엄마를 보면서 어린 아들 리처드는 무얼 느꼈을까?

리처드의 미소가 한 생명을 구원했듯, 그의 마지막 순간에 클라리사가 미소를 지어보였더라면 그도 구원받았을까?




그렇게 로라 브라운은,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가 결국에는 실패했던 그 여인은, 가정을 뛰쳐 나갔던 그 여인은 그녀를 본따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쳤던 사람들이 모두 이 세상을 하직했는데도 여전히 살아 남아 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전 남편이 간암에 걸려 저 세상으로 훌쩍 떠난 후에도, 자기 딸이 음주 운전자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에도 이렇게 살아 있다. 그녀는 리처드가 창문을 미끄러져 산산조각 난 유리 위로 떨어져 내린 뒤에도 이렇게 살아 있다.

클라리사는 늙은 부인의 손을 꼭 잡는다. 그 외에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 339~340쪽-



그래,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손을 잡아주는 일 말고, 미소를 지어주는 일 말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때가 되어 사그라드는 저녁 햇살 앞에서...

철이 되어 떨어지는 나뭇잎 앞에서...

무심히 흘러가는 강물 앞에서...

흐릿해지는 옛사랑의 추억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버지니아 울프가 로라 브라운이 그리고 클라리사 로건이 그랬듯이, 삶이란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 위에 펼쳐진 기억의 조각일 뿐이라는 자각말고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The Years)』처럼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써내려간 이 작품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딴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의식의 흐름'을 직접 체험한다고 생각하고 긴 호흡으로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마이클 커닝햄도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의식의 흐름 속을 헤매다가 이런 작품을 구상하지 않았을까? 상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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