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뒤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9
애니타 브루크너 지음, 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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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타 브루크너는 원하던 원치 않던 간에, 제인 오스틴과 버지니아 울프의 화신으로 불리우는 작가이다.

특히, 그녀의 대표작이자 맨부커상 수상작인 <호텔 뒤락>은 연애와 결혼 그리고 일이 여자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작품이다.

 

작가의 대리인격인 주인공 이디스 호프는 결혼 당일 식장에 나타나지 않는 방식으로 결혼을 거부함으로써 주변인들에 의해 한적한 호텔 '뒤락'으로 쫒기듯 떠나게 된다.

그리고 호텔 뒤락에서 쇼핑과 외모 가꾸기에 몰입하는 퓨지모녀와 신경질적인 거식증 환자 모니카, 아들내외에 의해 호텔만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귀가 먹은 보뇌이유부인 등 다양한 유형의 여성들과 만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에게서 '돈걱정' 따윈 찾아 볼 수 없다. 퓨지모녀는 남편이 남긴 어마어마한 유산이 있고, 모니카 역시 부유한 남편을 두고 있으며 보뇌이유 역시 상당한 재력가로 나온다. 이들에 비한다면 주인공 이디스 호프의 경제력은 초라하다할 수 있겠으나 그녀 역시 나름 성공한 로맨스 소설가로 필요한 만큼의 돈은 스스로 벌 수 있는 소위 '커리어 우먼'이다. 그녀에게 단하나 부족한 게 있다면 바로 '결혼'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연인 데이비드와 완벽한 가정생활을 꿈꾸지만 데이비드는 이미 결혼한 몸이다. 

 

여기에서 독자는 심한 혼란에 빠진다.

주인공 이디스가 진심으로 결혼과 원만한 가정생활을 원했다면, 즉 그녀가 이와 같은 것들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면, 그녀는 어째서 자신에게 청혼한 제프리와의 결혼을 철회하고, 불가능한 데이비드와의 사랑만을 추구하는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이 질문에,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이 아니기 때문에...라는 답변은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랑과 결혼을 중시하는 여성일수록 타인의 사랑과 결혼도 중시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만약, 데이비드가 기존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이디스와 새로운 가정을 꾸미겠다고 결심한다면, 이디스는 과연 그와의 결혼을 받아들였을까?  아쉽게도 이디스는 타인의 사랑과 결혼에 충격을 주면서까지 자신의 사랑과 결혼을 완성해야할만큼 사랑과 결혼에 가치를 부여하는 인물이 결코 되지 못한다. 오히려 작품의 결말과 역자의 작품론에 비추어 볼때, 이디스가 데이비드와의 사랑에 '집착'하는 건, 결혼으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한'(혹은 '선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애당초 결혼따윈 하고 싶지 않지만 이디스는 왠지 모르게 자신에게로 향하는 사회적 시선에 시달렸던 건 아니었을까? 

작가의 시선 역시 바로 이 '사회적 시선'으로 모아진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부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사회적 모범으로 추앙받을 수 없으며 뭔가 부족한 여성으로 규정되는 사회적 '모럴'말이다.

(여기에서 moral의 사전적 의미를 꼭 떠올리기 바란다.)

 

애니타 브루크너가 53세의 나이에 <호텔 뒤락>을 발표했을 때, 그녀는 이미 미술사학자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마흔의 젊은 나이에 영국 캐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여성 최초로 석좌교수가 된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뭐가 부족해서 이디스가 되었을까? 아니 이디스가 될 수밖에 없었을까?

1928년생인 작가가 결혼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역자의 해설을 살펴보면서 유추할 따름이다.

 

런던에 정착한 유대계 폴란드 이민자 가정의 외동딸로 태어난 브루크너는 소설을쓰기 전 이미 당대의 이름난 미술사가로 활동하며,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슬레이드 석좌교수 자리까지 올랐다. 53세라는 늦은 나이에 발표한 첫 소설이 영국에 이어 미국에서까지 호평을 받았고 네번째 작품인 <호텔 뒤락>을 통해 부커상을 수상하며 문학적 능력 또한 인정받았다. 그러나 어느 인터뷰에서 밝혔듯 브루크너에게 "그 두가지 활동(학문과 글쓰기)은 다 자연의 질서 밖에 있는 것" 으로, 오히려 자신은 "사람들이 성공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진 다 큰 고아가 되는 대신"에 "아들이 여섯쯤 있기를"소망한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정신적인 활동을 위해 꼭 결혼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하더라도 여성의 지적 활동을 담보하는 '자율성의 필요'가 정서적 안정을 주는 '관계의 필요'와 왜 갈등 관계일 수밖에 없는지, 그것이 왜 세월이 흘러도 해결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해 독자들과 함께 진지하게 생각해보고자 했다.

 

-김정, <결혼없는 결혼 이야기> 중-

 

<호텔 뒤락>이 쓰여진지 30년이 흘렀다.

 작품속에서 주인공 이디스의 나이는 38세니 현재 이디스는 68세다. 흔히, 한세대를 30년으로 치니, 그녀를 한세대 전 인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흔히, '세대차이'로 불릴만큼 이전 세대와 현재 세대를 가르는 기준은 명확하다. 그만큼 세상이 바뀌고 변했다는 방증이다. 

 

<호텔 뒤락> 이후 한세대가 지난 지금. 여성의 삶은 어떠한가?

과거보다 열배 백배 나아지고 좋아졌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 굴뚝 같다만 그러기엔 잊혀지지 않는 두건의 개인적 사건(?)들이 내 머리를 휘젓고 있는지라... 차마 비양심적 글쓰기는 못하겠다. 

 

그 두건의 사건이란?

첫번째는 2006년도인가 당시 여권내에서 이모(?)씨와 박모(?)씨 중 누구를 대통령 후보로 삼을 것인가를 놓고 설왕설래가 한창이었다. 그때 내 절친 중 하나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박모씨는 다 좋은데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그것도 애를 낳아 키워보지 않은 여자가 세상을 알까 싶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 당시 내 친구는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다국적회사에서 IT 관련 영업부장으로 소위 잘 나가는 직장여성이었다. 그때 나는 '박모씨는 남편과 아이가 없어 가정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국가와 국민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열심히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입밖으로 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당시 모인 친구들은 모두 아이 둘 셋씩을 키우는 소위 '강남좌파 아줌마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히(?) 몇 십만원이나 되는 와인바 계산서를 결재할 사람의 의견에 토를 달 용기도 돈도 당시의 내게는 없었더랬다. 

 

두번째 사건은 최근의 일이다.

코레일 파업이 막 시작되었을 때였다. 평소 간식으로 잘 사먹는 도너츠 노점에서 단팥도너츠 한개를 막 입에 집어 넣었을 때인데, 젊은 두 남학생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도너츠를 한개씩 사먹기 위해 좁은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올해 일흔다섯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도너츠 할아버지와 함께 훈훈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철도 파업의 정당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두 남학생들 사이로 할아버지가 끼어들었다.

"철도 파업 하면 안 되지. 서민의 발인데... 당장 나부터 지하철 끊기면 곤란해."

그러자 두 남학생이 이구동성으로 "할아버지! 그거 다 박근혜 때문에 그래요."

"그래? 대통령이 왜 그카는데?"

"철도 대기업에 팔아넘기고, 직원들 해고하려고 해요."

 

뭐 여기까지는 들어줄만 했다. 엄연히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 세력은 다를 수 있는 것이고, 또 자유롭게 정치적 발언을 해도 되는 세상이 도래하지 않았는가.

이어지는 할아버지의 말이다.

"그렇게 정치 하면 안되지..."

"맞아요! 여자 주제에 정치는 무슨 정치를 한다고..."

순간 나는 분위기 파악에 나섰다. 칠순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소리이길 바라면서... 그러나 이 말은 이십대 초반의 남학생 중 한명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

.

.

한세대 전, 애니타 브루크너가 느꼈던 좌절감이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호텔 뒤락>의 주인공 이디스처럼 성공한 작가면 뭐하고, 현실에서 석좌교수가 되고 대통령이 되면 무엇하랴.

그녀들은 모두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정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난 '비정상적'인 여성들인 것을....

 

 

일찍이 제인 오스틴이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억압되어있던 18세기 어쩔 수 없이 사랑과 결혼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의 '현실'을 그려냈다면, 20세기 초 버지니아 울프는 사회적 성공을 통한 여성의 자아 실현을 강조했다.

20세기 후반, 애니타 브루크너는 사랑과 결혼 대신 일을 선택한 여성들이 느끼는 좌절감과 불행감은 어디로부터 오며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느냐고 끈질지게 물어온다. 

 

<호텔 뒤락>은 비교적 짧은 소설이지만 쉽지도 재밌지도 않다.

그러나 다 읽은 후,

한세대 전, 나의 어머니 혹은 그보다 더 한세대 앞선 나의 할머니가 갖었던 의구심과 질문들을 던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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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프트 이야기
수잔 브리랜드 지음, 허진 옮김 / 강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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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프트 이야기

 

유명한 관광 명승지의 후미진 귀퉁이나 오래된 술집의 나무 테이블 한쪽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서툴게 새겨진 이름들과 날짜 등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수 년전의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 십년 전, 심지어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새겨진 '낙서들'을 보고 있노라면, 눈살이 찌푸려지다가도 나도 모르게 짧은 '탄성'이 터져나오곤 한다.

얼굴조차 마주한 적 없고, 앞으로도 마주할 가능성 '제로'에 가까운 낙서 주인과의 '만남'은 우연이 만들어낸 경이로운 인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의 오랜 손때가 묻은 물건을 대할 때에도 엇비슷한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누가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세월의 흔적이 아로새겨진 물건 속에는 나보다 먼저 지나간 사람들의 숨결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이런 느낌들 때문에 사람들은 오래된 '골동품'에 열광하는가 보다. 

 

수잔 브리랜드의 <델프트 이야기> 역시 이런 감정으로부터 시작된다. 

 

미술 정보 썸네일      미술 정보 썸네일          [베르메르] ‘음악과 와

 

막달레나는 그날 본 모든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사람들을생각했다. 아니, 아버지의 그림만이 아니다. 세상 모든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 말이다. 화가는 그 사람들의 시선과 고갯짓, 그들의 외로움과 고통과 슬픔을 빌려와서는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마주할 일 없는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막달레나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아주 가까이에서, 고작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막달레나를 보고 또 보겠지만, 그들은 결코 그녀를 알지 못할 것이다.

 

-수잔 브리랜드, <막달레나의 시선> 中-

 

초상화 앞에 서보라.

화가의 시선으로 초상화 속 주인공을 바라보게 된다.

처음엔,

색채와 명암과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는,

초상화 속 주인공은 누굴까? 하는 궁금증이 밀려온다.

.

.

.

델프트는 네델란드 남서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의 이름이다. 그렇다고해서 수잔 브리랜드의 <델프트 이야기>가 도시에 관한 이야기라고 지레짐작하진 마시길...

<델프트 이야기>는 도시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림'에 관한 이야기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작가에 의해 17세기 델프트에서 활동했던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으로 가정(假定)되는 '바느질 하는 소녀'라는 한폭의 초상화를 둘러싼 연작소설이다.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진주 귀고리 소녀>를 그린 바로 그 화가다.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진주 귀고리 소녀>의 작품 속 모델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펼쳤다면, 수잔 브리랜드는 한술 더 떠서 '바느질 하는 소녀'라는 존재하진 않지만 존재할 것만 같은 베르메르의 작품을 소장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의 말처럼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삶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작품 속으로 걸어들어가면, 너무도 시(視)적이고 시(詩)적인 세상과 마주하게 된다. 

 

 

슈발리에의 <진주 귀고리 소녀>가 마음에 들었다면, 분명 이 작품도 좋아하게 되리라. 

바로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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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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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사라마구의 <눈 뜬 자들의 도시(2006년)>은 흔히 <눈 먼 자들의 도시(1997년)> 후속작으로 알려져 있다.

 

모두 장님이 되었다가 시력을 회복한, 소위 '백색 질병'이 도시를 강타한지 4년이 흘렀다. 

사람들은 다시 볼 수 있게 되자, 눈이 멀었을 때의 참상들을 집단적 침묵 속에 가라앉혔다. 

 

침묵과 맞바꾼 평화가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던 어느날.

수도에서 실시된 지방 선거에서 믿을 수 없는 결과가 발생한다. 

 

'유효표 숫자는 25%에도 미치지 못했다. 우익정당 13%로 1위를 차지했으며, 중도정당 9%, 좌익정당이 2.5%였다. 무효표나 기권은 거의 없었다. 나머지 표, 그러니까 전체 표의 70%이상이 모두 백지였다!'

 

권력의 총체인 '정부'는 혼란에 빠졌고, 투표 당일의 폭풍우 등 선거 결과를 날씨 탓으로 재빠르게 돌린 후, 일주일 뒤 다시 투표를 실시했다.

두번째 투표 결과를 총리가 발표한다.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 오늘 우리나라 수도에서 실시된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익정당 8%, 중도정당 8%, 좌익정당 1%, 기권없음, 무효표 없음, 백지투표 83%. 총리는 말을 끊고 옆에 있던 잔으로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오늘의 투표가 지난 일요일에 드러난 경향의 확인인 동시에 악화임을 알기 때문에, 이 곤혹스러운 결과의 모든 원인을 진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데 만장일치로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대통령 각하와 논의한 끝에 현 정부의 정통성에 문제가 제기된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방금 실시된 선거는 지방선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오히려 자신의 절박하고 긴급한 의무가 지난 칠  일간의 비정상적 사태를 심도 있게 조사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이 사태에 경악한 증인인 동시에 대담한 참여자이기도 합니다, 이런 말을 하게 되어 몹시 안타깝지만, 우리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생활의 민주적이고 정상적인 상태에 잔혹한 타격을 준 이 백지투표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은 것도 아닙니다, 이 백지투표는 이 도시의 백 명의 선거인 당 여든세 명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그 비애국적인 손으로 백지를 투표함에 넣었습니다. 총리는 다시 물을 마셨다.


-주제 사라마구, <눈 뜬 자들의 도시> p43-

 

도시의 집단적(?)인 백지 투표에 두려움을 느낀 정부는 도시 전체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계엄령이 내려진지 얼마 안 되어, 도심 한곳에서 원인 모를(?) 폭탄테러가 발생하여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한다. 

정부는 도시를 지탱하던 치안, 보건 등등의 서비스가 사라져 시민들이 공황상태에 빠지면, 백지 투표 사태를 주도한 인물이나 실체가 들어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백지 투표를 불러온 원인이 밝혀지지 않자, 정부는 마치 적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공포에 질려 총알을 난사하는 군인들처럼 수도를 다른 도시로 옮기고 '탈출'을 시도한다.

새벽에 도시를 몰래 빠져나가려는 정부측 차량 행렬이 지나가는 대로변 건물과 빌딩 곳곳에서 하나둘씩 전등이 커진다. 마치 성탄 트리가 밝혀지듯 온 도시가 불빛으로 반짝거렸다.

정부의 탈출행렬을 만류하고 진상을 낱낱히 고백할 것으로 생각했던 정부 관계자들은 아연실색하고 만다. 그들은 자신들이 떠난 후, 한때는 정부의 수도였던 도시를 폐쇄시키고 수도 시민들의 탈출을 엄격하게 통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과 총리는 4년전에 일어났던 '백지 실명'사태와 이번 '백지 투표' 사태를 연관시키고 관련자 수색에 나선다.

 

 

우리는 참으로 별난 나라에 살고 있구료, 이 행성의 다른 곳에서는 일어난 적도 없는 일이 일어나는 곳이니 말이요. 하지만 그런 경우가 우리나라에 처음은 아닙니다, 굳이 상기시켜 들릴 필요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각하, 내 말이 바로 그거요, 총리. 하지만 두 사건 사이에 연결 고리가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물론, 그렇겠지, 전에는 백 색 실명 전염병이었고 이번에는 백지투표라는 전염병이니까. 우리는 첫 번째 전염병의 이유도 아직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이번 것도 마찬가지잖소. 밝혀낼 것입니다, 각하, 밝혀내겠습니다. 첫 번째 경우에도 벽에 부딪혔는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각하, 믿음이 근본입니다. 뭐에, 누구한테 믿음을 가지라는 거요. 민주적 제도에 믿음을 가져야지요.

(......)

정부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앉아 있지는 않을 겁니다, 아직 우리 탄약이 바닥난 게 아닙니다, 우리 화살통에는 아직 화살이 있습니다. 총리 과녁을 제대로 보고 있기를 바랄 뿐이오. 적만 눈에 보이면 됩니다. 하지만 바로 그게 문제가 아니오, 우리는 적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 않소, 누군지도 모르지 않소. 나타날 겁니다, 각하,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영원히 숨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주제 사라마구, <눈 뜬 자들의 도시> p112~113-

 

쉼표와 마침표로만 이어지는 주제 사라마구의 문체는 독자들로 하여금 일말의 숨돌리기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긴장하지 않으면 이야기의 끈을 놓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바짝 긴장한 채, 간신히 그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어찔한 현기증이 찾아온다.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어디선가 많이 일어난 듯한...

이런 걸, '데자뷰'라고 한다지...

 

 

주제 사라마구는 언뜻 말도 안되는 상황을 설정해 놓고는 오싹할 정도로 현실 정부를 재현해 낸다.

이는 아마도 평생동안 반정부적인 입장을 고수해왔던 그의 삶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불법 공산주의 정당에 몸담고 반정부투쟁을 실천에 옮긴 바 있으며, 열렬한 공산주의 지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주제 사라마구의 전작,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대중연대를 통한 희망을 보았던 사람들은 그 후속작인 <눈 뜬 자들의 도시>에서 절망을 마주하게 된다..

 

백색 질병이 난무하던 시절, 눈을 뜬 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정부는 경정, 겸감, 경사로 구성된 3인조 특별공작팀을 수도로 보낸다. 그들의 임무는 의사의 아내와 함께 살아남았던 6인을 특별 감시하고 심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작팀의 감시와 심문 속에서도 특별한 혐의점은 발견 되지 않는다. 그러나 혐의유무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정도의 상태에 이르면, 이젠 혐의점이 없어도 혐의가 있는 것이며, 죄란 만들어 내면 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언제나 희생양이므로...

 

의사가 끼어들려 하자 부인이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좋아요, 그럼 이 얘기를 해주세요, 이건 비밀이 아닐 테니까, 사년 전에 내가 눈 이 멀었거나 멀지 않았다는 것에 경찰이 왜 관심을 가지는 거죠. 만일 부인이 다른 모든 사람처럼 눈이 멀었다면, 나 자신처럼 눈이 멀었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와 있지 않을 거요, 눈이 멀지 않은 게 범죄인가요, 여자가 물었다. 아니, 눈이 멀지 않은 건 예전에도 범죄가 아니었고 지금도 절대 범죄일 수 없소, 물론, 부인이 그런 말을 했으니까 이야기하지만, 눈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를 수는 있는 거지요, 범죄요, 살인, 여자는 조언을 구하듯이 남편을 흘끗 보더니 다시 얼른 경정을 보며 말했다, 그래요, 맞아요, 나는 한 남자를 죽였어요, 여자는 더 말을 하지 않고, 경정을 똑바로 바라보며 기다렸다. 경정은 수첩에 뭘 쓰는 척했지만, 그저 시간을 벌려는 행동일 뿐이었다.

-주제 사라마구, <눈 뜬 자들의 도시> p302-

 

경정은 양심을 가책을 느끼기 시작한다.

자신의 임무가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의사의 아내는 비록 살인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 상대는 눈 먼 여자들을 강제 추행한, 죽어 마땅한 '짐승'이었다는 걸 잘 알기에 그녀의 살인행위는 무죄이며 오히려 칭송받아야 한다는 걸, 그의 양심이 속삭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달받은 작전의 의미와 불러올 결과 또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의사의 아내를 보호하고 지켜주려 한다. 그런 행동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수도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여기서 독자들은 언뜻 스쳐지나가는 '희망의 빛'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의사의 아내는 경정을 죽인 하얀 점이 박힌 파란 타이를 맨 남자의 총에 맞아 죽는다.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두 발은 그녀의 몸에 박혔고, 마지막 한발은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부터 그녀를 따라다니며 그녀의 하얀 눈물을 핥아주던 개가 맞았다.

 

한 눈 먼 남자가 물었다, 무슨 소리 들었나, 총소리가 세 발 들렸는데, 다른 눈먼 남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개 우는 소리도 들리던데, 지금은 그쳤어, 세 번째 총소리 때문일 거야. 잘 됐군, 나는 개 짖는 소리가 싫어.

-주제 사라마구, <눈 뜬 자들의 도시> p428-

 

'짖자, 개가 말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 작품은 '나는 개 짖는 소리가 싫어'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작가는 잔인하게도 희망의 빛을 꺼뜨린 것도 모자라, 마지막 불씨까지 없애버린다. 깨끗이...

그나마 '짖자'던, 개마저 죽여버린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 <눈 뜬 자들의 도시>의 사람들은 의사의 아내가 죽고 짖는 개가 죽어서 눈이 먼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은 이미 총성이 울리기 전에 멀어 있었다. 주제 사라마구는 그들이(인간이) '또 다시' 눈이 멀었기 때문에 의사의 안내와 짖는 개가 죽은 것임을 강조하려는 것 같다. 

만약, 사람들이 다시 눈이 멀지 않았더라면 의사의 아내와 짖는 개는 죽지 않았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일찍이 중국의 현대 문학가 중 하나인 라오셔(老舍)의 단편 중 <개(狗)>라는 작품이 있다.

개의 입장에서 사람들로부터 받는 야박한 대우를 기록한 작품으로, 이기적인 세상인심을 풍자한 작품이다.

'개'란 일찍부터 사람과 가장 가까이 있는 동물이지만, 또한 가장 험한 욕이 되기도 한다. 

사람에게 '개'같다란 표현은 다름 아닌 욕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개보다도 못한....'이란 말은 더욱 심한 언사라 하겠다. 

 

이제, 주제 사라마구가 두 편의 작품 속에 개를 등장시킨 이유가 분명해 보인다. 

그는 개의 죽음을 단순히 '개죽음'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개의 죽음을 알리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세상을 향해 '짖어 대는 개'가 더 이상 없는 세상에서, '개죽음'은 더욱 더 은밀하고 빈번하게 일어날 것임을 경고하고자 한 건 아니었을까.


 

끝으로, 작가는 자신이 그토록 경멸해마지 않던 정부에 의한 통제와 억압이 공산주의사회에서 일어난 것을 직접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마지막 순간까지 공산주의자로 남았을까? 

젊은 시절의 이상을 생의 마지막까지 지켜내고자했던 개인적 열정의 산물인지....

아니면, 바뀐 세상과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왕년(往年)의 열정'에만 매달려 노년을 보내는 늙은자의 고집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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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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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사라마구는 199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포르투갈 출신 작가다.

선과 악 사이에서 방황하는 보편적인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로 유명한 그는, 자신의 대표작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볼 수 없는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나타나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이 작품은 2008년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작가의 주제의식이 영화의 충격적인 장면들 속에 가려져 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오감을 자극하는 더럽고 추한 영화 장면들 속에서 유일하게 눈 뜬 자인 의사 아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분별력을 갖춘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생각만큼 많지 않으리라.

나 는 영화를 보지 않고 작품을 읽었을 따름이지만 읽는 내내 어쩔 수 없이 머리속으로 그려지는 영상만으로도 저절로 눈이 감기고 고개가 돌려졌다. 게다가 문장부호를 생략한채 끊임없이 이어지는 등장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사라마구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 러나 사려 깊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배반해 버리고, 또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거부해 온 도덕적 양심은 지금도 존재하고 또 전에도 늘 존재해 왔다. 그것은 영혼이란 것이 혼란스러운 명제로 전락해 버린 제사기(지질 시대의 최후기로, 현대를 포함하는 시대:옮긴이)의 철학자들이 발명한 것이 아니다. 세월이 흐르고, 더불어 사회도 진화하고 유전자도 바뀌면서, 우리의 양심은 결국 피의 색깔과 눈물의 소금기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우리의 눈은 내부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우리 눈은 우리가 입으로는 부정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적인 관찰에 덧붙여, 특수한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그 특수한 상황이란, 단순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어떤 악한 행동을 저질렀을때 생기는 가책이라는 것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온갖 종류의 공포와 뒤섞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의 잘못을 얼버무리려 하는 사람은 결국, 가혹하게도, 자신이 받아 마땅한 벌의 두배를 받게 된다. -p25-



어느날.

서 른 여덟의 신체 건강한  남자가 차를 운전하다가 갑자기 두 눈이 멀어 버린다. 그의 눈앞에는 순식간에 마치 우유 속에 빠진 것처럼 '백색' 세상만이 펼쳐졌다. 마치 전염병처럼 눈먼 사람과 접촉했던 사람들이 순차적으로 '백색의 세상'에 갇혀버리자, 당국은 '백색 질병'이라 칭하고 눈먼 자들과 눈멀 자들을 버려진 정신병원에 가둬 버린다.


처음에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에는 식욕과 성욕 그리고 탐욕만 남게 된 눈먼 자들은 양심의 눈까지 멀게 된다.

오물과 배설물로 뒤범벅이 된 공간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자인 의사의 아내는 곧 작가의 투영체라 하겠다. 사라마구는 그녀의 눈과 입 그리고 손(행동)을 통해 눈 먼 세상을 고발하고 대중을 일깨운다.


나 도 지치기 시작했어요, 때로는 나도 눈이 멀었으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았으면, 다른 사람들이 지고 있는 의무 이상을 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어요. 우리는 당신한테 의지하는 데 익숙해졌어, 당신이 없다면, 우리는 한 번 더 눈이 머는 꼴이 될 거야, 당신 눈 덕분에 우리는 그래도 눈이 좀 덜 먼 셈이지.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해볼게요, 그 이상은 약속 못해요. -p338



눈 먼 자들만 있는 세계에서 눈 뜬 자는 우월한 위치에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능력을 이용하여 눈 먼 자들을 착취하고 심지어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눈 먼 자들을 돕기로 마음 먹는다.

볼 수 있다는 능력을 볼 수 없는 사람을 위해 사용한다.

이기적인 인간의 또 다른 이면에는 바로 이와 같은 이타성이 자리하며, 바로 여기에서 '희망'이라 불리우는 가냘픈 싹이 자라난다. 


어쩌면 의사의 아내 역시 눈이 멀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본 것들은 육체적인 눈에 비친 '상(像)'이 아니라 마음, 즉 양심의 눈에 비친 '상(像)' 일 수도 있으므로...


갑작스럽게 아무 이유 없이 눈이 안 보였던 사람들은 어느날 갑자기 눈이 보이게 된다.

다시 눈 뜬 세상으로 나온 그들이 마주한 세상은 어떤 곳일까?

당연히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호수와 웃음과 서로에 대한 배려가 넘치는 세상이지 않을까?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의 사의 아내는 일어나 창으로 갔다. 그녀는 쓰레기로 가득 찬 거리, 그곳에서 소리를 지르며 노래부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이어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모든 것이 하얗게 보였다. 내 차례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눈길을 얼른 아래로 돌렸다. 도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p359




'눈 먼 자들의 세상'이 끝나자, '눈 뜬 자들의 도시'가 펼쳐진다.


거장은 9년간의 시차를 두고 <눈 뜬 자들의 도시>로 우리를 안내한다. 


고통스럽고 두렵지만 그의 안내를 차마 뿌리칠 수 없다.

그건, 볼 수 있지만 보지 않으려는 것과 다름 아닌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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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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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진주 귀고리 소녀>는 한장의 초상화로부터 시작된다.

'북구의 모나리자'라고도 불리는 '진주 귀고리 소녀'는 17세기 네델란드 델프트 출신 화가인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이다. 렘브란트, 루벤스, 고흐 등등 네델란드 출신 화가들의 명성에 철저히 가려져 있던 베르메르처럼 초상화 속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다.

 

갈망과 체념이 함께 담겨 있는 눈빛...

뭔가 말하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저 짧은 탄식을 내놓는 것 같기도 한,

살포시 벌어진 촉촉한 입술...

푸르고 노란 머리두건을 두르고 진주 귀고리를 한 채, 왼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 쳐다보는 소녀는 과연 누구일까?

그러고 보니,

정말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는 바로 이와 같은 베르메르 작품에 대한 작가의 호기심과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화가와 작품속 주인공에 대해 알려진 바가 적을수록 작가의 상상력은 빛을 발하게 된다.

스승과 제자일수도 있고, 부모와 자식 사이일수도 있으며, 나이를 뛰어넘은 연인일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단순히 초상화를 의뢰한 고객과 화가의 관계일수도 있다.

 

슈발리에는 현재까지 알려진 베르메르의 출생년도 및 일대기와 남아있는 그의 작품 서른 다섯 점을 기반으로 하되, 특히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 설정에 공을 드린 것 같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진주 귀고리 소녀'가 그려진 시기로 추정되는 1665년도이고, 공간적 배경은 도기로 유명한 네델란드의 소도시 델프트다. 

 

 

도자기 타일 장인의 딸인 그리트는 아버지가 사고로 두 눈이 멀게 되자,

생계를 위해 마리아 틴스의 저택으로 하녀살이를 하러 간다.

저택에는 타네커라는 그리트보다 열살 정도 많은 하녀가 있었으며,

마리아 틴스의 딸과 사위...

그리고 다섯명의 손주들이 있었다.

 

열 일곱살인 그리트는 타네커의 지시를 받아 운하에서 물을 길어 빨래를 하고,

 시장으로 생선과 고기 등을 사러 가는 심부름을 도맡는다. 

저택의 주된 수입은 큰마님의 사위가 그린 그림을 판매하는 것이고, 

2층에 있는 그의 화실은 집안의 그 누구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금지구역이다.

그런 화실의 청소를 맡게 되면서 그리트는 서서히 다가간다.

화실에 달린 다락방에서 염료를 갈면서...

한밤중 바라보는 미완성 그림들을 보면서...

 마침내 그의 작품 속으로 천천히...



 

하나의 예술 작품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들은 많았지만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진주 귀고리 소녀>처럼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키진 못했던 것 같다.

<진주 귀고리 소녀>는 문학작품 자체로만 보자면, 지극히 평이한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17세기 네델란드 델프트을 사실적으로 그려냈고, 염료가 만들어지고 그림이 완성되는 과정들을 세세하게 묘사하긴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로 충분치 않다.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진주 귀고리 소녀>를 깍아 내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나,  이 작품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어쩌면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 '진주 귀고리 소녀'에 바쳐진 건 아닐까 싶다.  

 

 

끝으로,

루벤스의 초상화 중, 조선 청년을 그린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작품이 떠오른다. 

흔히, 일본으로 끌려갔던 조선인 노예가 어찌어찌하여 그 당시 일본과 통상을 하고 있던 네델란드까지 흘러 들어갔고, 루벤스 작품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루벤스의 '안토니오 코레아' 속 주인공의 일대기가 '진주 귀고리 소녀'의 그것보다 훨씬 더 파란만장하지 않았을까.

 

[명화] 루벤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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