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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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엇은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정원과 포도밭을 거닌다.
신발은 흠뻑 젖었다. 시내에서 종소리가 들린다.

산타 파비올라에서는 6시에, 다른 어떤 곳에서는 6시에서 1분이 지난 뒤에.

물이 뚝뚝 듣는 포도나무 사이에 홀로 선 그녀는 뭔가가 분명히 연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잡아낼 수가 없다.
그녀의 생각 속에는 텅 빈 곳도 있고,
동시에 빽빽하게 엉켜 혼란처럼 느껴지는 곳도 있다.

러다 마침내 깨닫는다. 수태고지는 비 온 뒤에 그린 것이다.

아치들 사이로 흘끗 보이던 그 먼 풍경은 그녀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순간의 표정을 짓고 있다.
천사가 온 것은 비 온 뒤였다.

그 첫 서늘한 순간을 택한 것이다.

 

-윌리엄 트레버 <비 온 뒤> 139쪽 

 

 

 

 

 

 

연인과 막 헤어진 해리엇은 열 살 무렵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왔던 산타 파비올라를 다시 찾는다. 
그녀는 그 뜨겁던 사랑이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끝나버릴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 



연애가 끝나면 생각은 늘 혼란스럽고 진실은 안개에 싸여 있다. 진실은 아예 없다, 종종 그렇게 보인다. 사랑이 기대를 저버렸다. 관계가 또다시 부서져 사라졌을 때 그녀는 그렇게 느꼈다.(p124)


 

여기까지 읽었을 때, 어디선가 빗속을 구르는 바퀴소리가 들려왔다. 
밤새 내리던 비는 어느덧 그쳤고, 이른 아침의 고요함을 뚫고 종소리가 멀어져 갔다. 

해리엇에게 '비 온 뒤' 깨달음이 찾아왔듯, 나에게도 깨달음이 찾아온 걸까?  
 

             
우연히 읽은 <여름의 끝>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외면하고 싶을 만큼 좋고 또 좋았다. 
'첫작품의 감동을 능가하는 후속작은 없다'거나 '한계효용의 법칙' 따위의 그럴 듯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소위 '개인적 취향'에 저격당했다고나 할까. 
한 단락... 한 단락... 한 문장... 한 문장...
모두 나만 간직하고 싶은 그런 느낌을 품게 만들었다.  

이미 고인이 된 윌리엄 트레버는 글로써 표현되어질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려는 무모한 시도 대신 표현되어질 수 없음 그 자체를 표현한다. 그래서 그의 문장들은 처음 읽으면 아무런 느낌이 없다가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빗소리처럼 서서히 마음을 적신다. 


그는 떠날 것이고, 매일 아침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그가 떠났다는 사실이 될 것이다. 지금 아침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그가 있다는 사실인 것처럼. 눈을 뜨면 분홍색으로 칠한 벽과 빈 벽난로 위의 성화, 그리고 창가에 놓아둔 자신의 옷이 지금처럼 보일 것이다. 그는 사라질 것이다. 죽은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가 떠났다는 사실은 부엌에서도, 마당에서도,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 테고, 레이번 스토브에 넣을 무연탄을 부엌으로 옮길 때도, 교유기를 끓일 때도, 암탉에게 모이를 줄 때나 토탄을 쌓을 때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들판에서도, 달걀을 들고 사제관 문이 열리길 기다릴 때도, 코널티 양이 동전을 세는 동안에도, 보청기를 낀 남자가 단열용 전기제품 보호구나 소젖 패드 등을 찾을 때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남편 옆에 누워 있을 때도, 그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빵을 자를 때도, 올드타임 춤곡이 흘러나올 때도.     -윌리엄 트레버 <여름의 끝> 185~186쪽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떠날 것임을 직감하고 약속과는 달리 결국 자신은 그를 따라나서지 않을 것임을 예감하는 슬픔이, 옮겨지는 시선을 따라 차곡차곡 차오른다. 처음엔 벽난로 위의 성화와 창가에 놓아둔 옷에, 그 다음엔 마당과 외양간과 부엌에, 그리고 집밖의 들판과 사제관에, 결국은 일상 전체로 이어지고 심지어는 행복해야 할 미래의 어느 순간조차도 슬픔으로 뒤덮힐 것임을 암시한다.  

 

 

 

그가 길을 잃지 않았다면 그들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루시는 그 사실을, 그들이 만나지도 않았고 레이프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려 했다. 그녀에게는 그가 난데 없이 나타난 것 같았기에 그가 라하단을 떠나면 난데없는 곳으로 돌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그녀는 절대 그를 잊지 못할 터였다. 평생 그간의 수요일 오후들, 그리고 지금 흐르고 있는 시간을 기억할 터였다. 자신이 나이가 들어, 레이프가 꾸며낸 존재였고 이 여름도 마찬가지였다고 믿게 되는 날이 온다 해도 상관없었다. 시간은 어차피 기억을 꾸며낸 일로 바꾸어놓기 때문이었다.   -윌리엄 트레버<루시 골트 이야기> 187쪽

"너는 네 만족스러운 삶으로 돌아가야 돼. 내 삶의 손님이 되는 게 아니라, 너는 내 삶에서는 손님밖에 될 수 없기 때문이야. 레이프, 내가 너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것, 우리 몫이 아닌 걸 훔치고 있는 거야. 달링 레이프, 우리는 기억으로 만족해야 돼." (...)
"우리가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기만 하면 기억이 모든 것이 될 수도 있어. 하지만 네 말이 맞아. 너는 그러면 안 돼. 그건 나에게 해당하는 말이고 나는 그렇게 할 거야. 나는 우리 사랑의 기억이 전부인 삶을 살 거야. 나는 눈을 감고 내 입술 위에 네 입술을 다시 느낄 거고 매일 파도를 보듯 또렷하게 네 웃는 얼굴을 볼 거야. 우리는 놀라운 친구였어. 레이프! 이 여름이 끝나지 않기를 우리가 얼마나 바랐는지! 앞으로 오는 여름은 다를 거야. 우리 둘 다 그걸 알아." -윌리엄 트레버 <루시 골트 이야기> 203~205쪽             

                                                                                             



만약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며 불만족스러운 현재를 견뎌낼 수 있다면 아직 젊거나  여전히 젊다고 생각하는 거다.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기꺼이 내놓을 수 있다는 건, 가진 거라곤 시간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남겨진 시간이 터무니 없이 짧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미래에 대한 기대 대신 과거로부터 소환된 추억을 현재의 거울로 삼는다. 미래의 어느날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오늘이 부끄럽지 않도록 애쓴다. 이것이 곧 영원히  돌고 도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다. 시간은 보내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이다. 반성과 속죄로, 추억과 연민으로, 그리고 한없는 그리움으로...


'모든 인연은 언젠가 끝이 나겠지만,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있다.' 

윌리엄  트레버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을 그려낸다. 
나는 작가에게 이보다 더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윌리엄 트레버의 문장들 덕분에 예정된 이별에 대한 직감들과 다가올 슬픔에 대한 예감들을 견뎌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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