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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평점 :
#-그 누구도 자신의 이름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내가 맨 처음 이 작가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순전히 그 이름때문이었다.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
난 아직도 그녀의 이름을 한번에 정확히 발음하거나 입력하지 못한다. 특별히 길거나 어려운 자음이 섞여 있는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혀가 꼬이고 오타를 내고 만다.
내 이름도 그렇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름을 알려주면 단번에 제대로 알아듣거나 표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발음하기 어렵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임에도불구하고, 성과 이름을 구분하기 좋은 다른 단어들에 빗대어 알려주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면, 금은동할때 '금'이라든지 희소식할 때 '희'자라고 또박또박 다시 말해주는 식이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나 역시 상당히 오랫동안 튀는 이름 대신 무난한 이름을 갈망했더랬다. 누구나 다 아는 흔한 이름이라면, 왠지 이름 속에서도 익명성이 보장될 것만 같았다.
인도계 미국인인 줌파 라히리도 어쩌면 이국적인 이름 탓에 어렸을 때부터 자신보다는 자신의 이름이 먼저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녀의 작품들은 현대 미국사회에서 인도계 이민 2세라는 독특한 신분과 그로 인한 남다른 체험을 바탕으로 씌어졌다. 그래서 여타의 작가들과 다르면서도 또한 그런 차별성이 작품의 색깔을 규정짓고 작가로서의 한계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수성이 보편성을 압도한다고나 할까.
내가 3년 전 처음으로 줌파 라히리의 작품(<저지대>)을 읽은 후, 그녀의 또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지 않은 이유였다.
(인도계) 이민자가 아니라면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상들과 겪지 않아도 되는 상처들...
작가의 개인적 체험이 깊게 배어있는 작품은 공감이나 통찰이 아닌 이해와 연민만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다가 최근 우연히 그녀의 단편집 <그저 좋은 사람>을 읽게 되었다.
다섯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중편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집의 등장인물들 역시 대부분 인도계 이민자들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나와는 너무 다른 이질적인 일상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조금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혼자 남은 친정아버지의 거취를 고민하던 딸과 오히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이기를 거부하는 아버지...('길들지 않은 땅')
실연으로 힘들어하는 딸에게 짝사랑했던 남자때문에 자살할 뻔했었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는 엄마...('지옥-천국')
어린 남동생을 정도 이상으로 잘 보살폈으나 성인이 되어 알콜중독자가 되어버린 동생을 견디지 못하는 누나...('그저 좋은 사람')
이들의 이야기는 더이상 이민자와 같은 특수한 사람들만이 겪는 남다른 '사건'들이 아니라, 누군가 현재 직면하고 있고 누구나 앞으로 직면해야하는 삶의 '과제'들이었다.
#-진정한 예술은 평범함을 특별하게 표현하거나 특별함 속에서 평범함을 찾아낸다
훌륭한 작가일수록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표현할 줄 알고, 개인의 특수한 체험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이끌어낸다.
줌파 라히리의 첫번째 작품집인 <축복받은 집>과 퓰리처상 수상작인 <그저 좋은 사람>은 '인도계 미국작가'라는 첫인상을 '절제된 문장을 구사할 줄 아는 지적인 작가'로 바꾸어놓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수준에 이른 작가들은 국내에도 적지않다는 생각을 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녀가 갖춘 작가로서의 재능은 인정하면서도 나는 고집스럽게(결론적으론 어리석게도) 그녀를 대중소설과 순수소설 사이에서, 타고난 재능과 적당히 따라주는 운으로 명성을 얻은 신진작가 중 한명이라고, 문화적 다양성을 추구함으로써 여전히 존재하는 인종차별주의를 교묘하게 감추려는 미국 주류 문학계가 찾아낸 또 한 명의 유색인 작가 중 한명이라고만 생각했더랬다.
줌파 라히리의 작품을 세 편이나 읽고도 그녀를 이런 식으로만 기억할 뻔했던 나를 어리석음 속에서 꺼내준 건 그녀의 장편소설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언젠가 뭐라고 했는지 아니?"
고골리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모두 고골리의 「외투」속에서 나왔다."라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언젠가 이해할 날이 있을 거다. 생일 축하한다." (105쪽)
아쇼크 강굴리는 아들 고골리 강굴리의 열네번째 생일날『니콜라이 고골리의 단편 모음집』을 선물로 주면서 이처럼 말했다. 아들이 끔찍히 싫어했던 이름('고골리')을 아들에게 부쳐준 아버지의 사연이 담겨 있는 책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끝내 이 책을 읽지 않았고, 그 이유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열네 살이란 너무 어린 나이니까...
성인이 된 고골리는 아버지가 지어준 '고골리'라는 이름을 버리고 '니킬'로 개명한다.
설령, 그가 아버지가 선물로 준 고골리 단편집을 읽고 자신의 이름에 얽힌 사연을 알고 있었다하더라고, 그 속에 담겨있는 진실만큼은 결코 깨닫지 못했으리라. 그러기에 스무 살이란 너무 눈부신 나이니까...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읽고 또 읽었다. 그냥 한 두번 더 읽은 게 아니라,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난 것처럼, 눈으로 입으로 가슴으로 그렇게 읽고, 또 읽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이렇게 존재하기까지 얼마나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었는지를 떠올리면서...
내 마음속을 통과했던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어떻게 서로 이어져있는지를 떠올리면서...
그리고, 이제는 더이상 이곳에 없지만 여전히 내곁에 남아 나를 살아가게 만드는 이들을 떠올리면서...
#-한계를 안다는 건 중요하다. 그러나 실패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도전한다는 건 더 중요하다
나는 한 사람의 직업과 그의 인품은 별개라고 믿어의심치 않아왔다.
학창시절에는 성격은 좋지만 실력은 떨어지는 선생님과 교수님을 공공연히 싫어했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부터는 너그럽고 공평하지만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는 선배와 직장 상사들을 은연 중에 무시했었다.
그래서 대통령과 국회의원도 착한 사람보다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줌파 라히리를 알고 나서, 특히 그녀의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를 읽고 나서, 이와 같은 내 사고방식에 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책 속에 긋는 밑줄들이 늘어날수록 마음 속에 생기는 금도 더 늘어났고 더 깊어졌다.
나는 노력을 좋아한다. 한계가 있는 조건을 더 좋아한다. 무지가 어떤 식으로든 내게 필요하다는 걸 안다.
한계가 있음에도 지평선은 끝없이 펼쳐진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다른 언어로 읽는다는 건 성장과 가능성의 끝없는 상태를 내포한다. 배우는 초심자로서의 내 일은 절대 끝나지 않으리라. (42쪽)
이탈리아어로 글을 쓸 때는 구속받고 제한받는데도 왜 더 자유롭다고 느끼는 걸까?
아마 이탈리아어에서는 불완전할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리라.
왜 불완전하고 빈약한 이 새로운 목소리에서 매력을 느끼는 걸까? 이렇게 부서지기 쉬운 피난처에서 노숙자나 다름없이 살기 위해 훌륭한 저택을 포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안정감만큼 위험한 것은 없기 때문이리라.
자유와 제한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나 자신에게 묻는다. 왜 감옥이 천국과 다름없을 수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묻는다. (72쪽)
글을 쓰는 언어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는 걸 안다. 내가 이탈리아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내 이탈리아어 글쓰기는 덜 영글고 성급하고 늘 근사치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 난 용서를 구하고 싶다. 내 이 충동이 어디서 생겼는지 설명하고 싶다. (75쪽)
이 책은 줌파 라히리가 젊었을때부터 배워왔던 이탈리아어를 좀더 잘 하기 위해서 이탈리아로의 이주를 감행한 후, 2년 만에 이탈리아어로 쓴 수필집이다.
그녀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그리고 이 책의 역자가 밝힌 것처럼 그녀의 이탈리아어는 외국인의 회화로는 훌륭할지 몰라도 작가의 문장으로는 부족한 수준이라고 한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녀가 영어를 포기하고 이탈리아어로의 글쓰기를 고집한 이유는 무엇일까?
불완전할 자유였다. 바로 실패할 자유였다. 너무 익숙하고 완벽한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로 글쓰기에 도전하고 실패하기 위해서였다. 도전하고... 실패하고... 또 도전하고 실패하고...
줌파 라히리는 타고난 재능과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작가가 되었고, 작가가 되자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또다시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고 도전한다.
영어권 작가로서 줌파 라히리는 뛰어나다. 그녀는 이미 직업적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어 작가로서 그녀는 아직 견습작가에 불과하다. 그녀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기적인 독자의 한명으로서 나는 그녀가 이탈리아어를 빨리 포기하고 부디 다시 영어로 돌아와주길 희망한다. 그렇지만 그녀의 이탈리아어 작품집만큼은 꼭 원서를 구해서 갖고 싶다. 그 한 권의 책은 그녀가 뛰어난 작가이기 이전에 훌륭한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그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클 것이며, 실패할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도전한다는 것의 의미를 두고두고 일깨워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