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 누구도 자신의 이름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내가 맨 처음 이 작가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순전히 그 이름때문이었다.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 

난 아직도 그녀의 이름을 한번에 정확히 발음하거나 입력하지 못한다. 특별히 길거나 어려운 자음이 섞여 있는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혀가 꼬이고 오타를 내고 만다. 


내 이름도 그렇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름을 알려주면 단번에 제대로 알아듣거나 표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발음하기 어렵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임에도불구하고, 성과 이름을 구분하기 좋은 다른 단어들에 빗대어 알려주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면, 금은동할때 '금'이라든지 희소식할 때 '희'자라고 또박또박 다시 말해주는 식이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나 역시 상당히 오랫동안 튀는 이름 대신 무난한 이름을 갈망했더랬다. 누구나 다 아는 흔한 이름이라면, 왠지 이름 속에서도 익명성이 보장될 것만 같았다.



 

인도계 미국인인 줌파 라히리도 어쩌면 이국적인 이름 탓에 어렸을 때부터 자신보다는 자신의 이름이 먼저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녀의 작품들은 현대 미국사회에서 인도계 이민 2세라는 독특한 신분과 그로 인한 남다른 체험을 바탕으로 씌어졌다. 그래서 여타의 작가들과 다르면서도 또한 그런 차별성이 작품의 색깔을 규정짓고 작가로서의 한계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수성이 보편성을 압도한다고나 할까.

내가 3년 전 처음으로 줌파 라히리의 작품(<저지대>)을 읽은 후, 그녀의 또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지 않은 이유였다.  


(인도계) 이민자가 아니라면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상들과 겪지 않아도 되는 상처들...

작가의 개인적 체험이 깊게 배어있는 작품은 공감이나 통찰이 아닌 이해와 연민만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다가 최근 우연히 그녀의 단편집 <그저 좋은 사람>을 읽게 되었다.

다섯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중편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집의 등장인물들 역시 대부분 인도계 이민자들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나와는 너무 다른 이질적인 일상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조금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혼자 남은 친정아버지의 거취를 고민하던 딸과 오히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이기를 거부하는 아버지...('길들지 않은 땅')

실연으로 힘들어하는 딸에게 짝사랑했던 남자때문에 자살할 뻔했었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는 엄마...('지옥-천국')

어린 남동생을 정도 이상으로 잘 보살폈으나 성인이 되어 알콜중독자가 되어버린 동생을 견디지 못하는 누나...('그저 좋은 사람')


이들의 이야기는 더이상 이민자와 같은 특수한 사람들만이 겪는 남다른 '사건'들이 아니라, 누군가 현재 직면하고 있고 누구나 앞으로 직면해야하는 삶의 '과제'들이었다.


 


#-진정한 예술은 평범함을 특별하게 표현하거나 특별함 속에서 평범함을 찾아낸다



훌륭한 작가일수록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표현할 줄 알고, 개인의 특수한 체험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이끌어낸다. 


줌파 라히리의 첫번째 작품집인 <축복받은 집>과 퓰리처상 수상작인 <그저 좋은 사람>은 '인도계 미국작가'라는 첫인상을 '절제된 문장을 구사할 줄 아는 지적인 작가'로 바꾸어놓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수준에 이른 작가들은 국내에도 적지않다는 생각을 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녀가 갖춘 작가로서의 재능은 인정하면서도 나는 고집스럽게(결론적으론 어리석게도) 그녀를 대중소설과 순수소설 사이에서, 타고난 재능과 적당히 따라주는 운으로 명성을 얻은 신진작가 중 한명이라고, 문화적 다양성을 추구함으로써 여전히 존재하는 인종차별주의를 교묘하게 감추려는 미국 주류 문학계가 찾아낸 또 한 명의 유색인 작가 중 한명이라고만 생각했더랬다.


줌파 라히리의 작품을 세 편이나 읽고도 그녀를 이런 식으로만 기억할 뻔했던 나를 어리석음 속에서 꺼내준 건 그녀의 장편소설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언젠가 뭐라고 했는지 아니?"

고골리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모두 고골리의 「외투」속에서 나왔다."라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언젠가 이해할 날이 있을 거다. 생일 축하한다." (105쪽)



아쇼크 강굴리는 아들 고골리 강굴리의 열네번째 생일날『니콜라이 고골리의 단편 모음집』을 선물로 주면서 이처럼 말했다. 아들이 끔찍히 싫어했던 이름('고골리')을 아들에게 부쳐준 아버지의 사연이 담겨 있는 책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끝내 이 책을 읽지 않았고, 그 이유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열네 살이란 너무 어린 나이니까...


성인이 된 고골리는 아버지가 지어준 '고골리'라는 이름을 버리고 '니킬'로 개명한다.

설령, 그가 아버지가 선물로 준 고골리 단편집을 읽고 자신의 이름에 얽힌 사연을 알고 있었다하더라고, 그 속에 담겨있는 진실만큼은 결코 깨닫지 못했으리라. 그러기에 스무 살이란 너무 눈부신 나이니까...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읽고 또 읽었다. 그냥 한 두번 더 읽은 게 아니라,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난 것처럼, 눈으로 입으로 가슴으로 그렇게 읽고, 또 읽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이렇게 존재하기까지 얼마나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었는지를 떠올리면서...

내 마음속을 통과했던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어떻게 서로 이어져있는지를 떠올리면서...

그리고, 이제는 더이상 이곳에 없지만 여전히 내곁에 남아 나를 살아가게 만드는 이들을 떠올리면서...




 

#-한계를 안다는 건 중요하다. 그러나 실패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도전한다는 건 더 중요하다

 


나는 한 사람의 직업과 그의 인품은 별개라고 믿어의심치 않아왔다.

학창시절에는 성격은 좋지만 실력은 떨어지는 선생님과 교수님을 공공연히 싫어했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부터는 너그럽고 공평하지만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는 선배와 직장 상사들을 은연 중에 무시했었다.


그래서 대통령과 국회의원도 착한 사람보다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줌파 라히리를 알고 나서, 특히 그녀의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를 읽고 나서, 이와 같은 내 사고방식에 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책 속에 긋는 밑줄들이 늘어날수록 마음 속에 생기는 금도 더 늘어났고 더 깊어졌다.



 

나는 노력을 좋아한다. 한계가 있는 조건을 더 좋아한다. 무지가 어떤 식으로든 내게 필요하다는 걸 안다.

한계가 있음에도 지평선은 끝없이 펼쳐진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다른 언어로 읽는다는 건 성장과 가능성의 끝없는 상태를 내포한다. 배우는 초심자로서의 내 일은 절대 끝나지 않으리라. (42쪽)


이탈리아어로 글을 쓸 때는 구속받고 제한받는데도 왜 더 자유롭다고 느끼는 걸까?

아마 이탈리아어에서는 불완전할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리라.

왜 불완전하고 빈약한 이 새로운 목소리에서 매력을 느끼는 걸까? 이렇게 부서지기 쉬운 피난처에서 노숙자나 다름없이 살기 위해 훌륭한 저택을 포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안정감만큼 위험한 것은 없기 때문이리라.

자유와 제한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나 자신에게 묻는다. 왜 감옥이 천국과 다름없을 수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묻는다. (72쪽)


글을 쓰는 언어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는 걸 안다. 내가 이탈리아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내 이탈리아어 글쓰기는 덜 영글고 성급하고 늘 근사치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 난 용서를 구하고 싶다. 내 이 충동이 어디서 생겼는지 설명하고 싶다. (75쪽)


 

이 책은 줌파 라히리가 젊었을때부터 배워왔던 이탈리아어를 좀더 잘 하기 위해서 이탈리아로의 이주를 감행한 후, 2년 만에 이탈리아어로 쓴 수필집이다.

그녀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그리고 이 책의 역자가 밝힌 것처럼 그녀의 이탈리아어는 외국인의 회화로는 훌륭할지 몰라도 작가의 문장으로는 부족한 수준이라고 한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녀가 영어를 포기하고 이탈리아어로의 글쓰기를 고집한 이유는 무엇일까? 

불완전할 자유였다. 바로 실패할 자유였다. 너무 익숙하고 완벽한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로 글쓰기에 도전하고 실패하기 위해서였다. 도전하고... 실패하고... 또 도전하고 실패하고...


줌파 라히리는 타고난 재능과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작가가 되었고, 작가가 되자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또다시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고 도전한다.



영어권 작가로서 줌파 라히리는 뛰어나다. 그녀는 이미 직업적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어 작가로서 그녀는 아직 견습작가에 불과하다. 그녀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기적인 독자의 한명으로서 나는 그녀가 이탈리아어를 빨리 포기하고 부디 다시 영어로 돌아와주길 희망한다. 그렇지만 그녀의 이탈리아어 작품집만큼은 꼭 원서를 구해서 갖고 싶다. 그 한 권의 책은 그녀가 뛰어난 작가이기 이전에 훌륭한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그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클 것이며, 실패할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도전한다는 것의 의미를 두고두고 일깨워주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뭇잎을 햇빛에 비췄을 때 보이는 잎맥을 그리고 싶다'


 

나는 일찌기 제임스 설터의 단편집 <어젯밤>을 읽은 후, 그가 남긴 이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몇 편 안 되는 그의 작품들을 다 읽고 난 지금, 내가 과연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나 했었는지 아니 앞으로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수나 있을지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만큼 설터의 작품은 밀도가 높다.


어떻게 단 두 명의 인물만으로 특별한(?) 사건 전개도 없이 삶을 그려낼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는 '삶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관념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유리창을 흔드는 바람 한 점, 손끝에 맺히는 이슬 한 방울, 코끝에 맴도는 한 줄기의 향기로 삶을 표현하고, 그 삶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시간을 포착해낸다.  


 

삶은 미스터리였다. 숲과 비슷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덩어리로 이해되고 묘사될 수 있었지만, 가까이 갈수록 흩어져 빛과 그림자로 조각났고, 그 빽빽함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는 형태가 없었고, 경이로울 정도의 디테일만이 어디나 가득했다. 이국적인 소리와 쏟아지는 햇빛, 무성한 잎사귀, 쓰러진 나무,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에 달아나는 작은 짐승들, 곤충, 고요함, 그리고 꽃. 이 모든 것은 제각각이면서도 밀접하게 엮여 있고, 보이는 것과 달랐다.


실제로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삶이 있다. 비리의 말처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있는 건 이 다른 삶이고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이 삶이다. (66쪽)



 

삶은 미스터리다.


해변에 누워 푸른 하늘을 보고, 햇살처럼 부서지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달콤한 포도주와 연인의 따뜻한 향기에 취하고, 나른하게 움직이는 계절의 변화를 느낀다. 

그렇지만, 그 무엇도 삶은 아니다.



 

삶은 마치 숲과 같다.


숲은 멀리서 보면 엇비슷해 보일 뿐 숲을 이루는 개별 나무들의 차이는 드러나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 보아도 빛이 허락한 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 나무의 본질을 볼 수는 없다. 눈(眼)은 빛이 비춰주는 사물을 볼 뿐, 빛 자체는 제대로 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어쩌다 한줄기 빛 속으로 흩날리는 먼지의 무리를 보고나서야 빛이 존재한다는 걸, 그 덕분에 사물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다.   


삶은 빛 그 자체다.


빛 자체는 볼 수 없다. 우리는 그저 빛이 비추는 사물을 볼 수 있을 따름이듯, 내 삶은 타인의 삶에 비추어질때만 볼 수 있다.


 

책은 그녀의 무릎 위에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읽지 않았다.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건 결국 하나의 문단, 하나의 진술이다.

우리의 내부로 파고 들어오는 문장들은 가느다랗다. 수영할 때 민물 가자미가 몸 속으로 들어오듯. 그녀는 흥분했다.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다른 것이 그렇듯, 윤이 나게 닦인 문장들이 딱 적당한 때 도착한 기분이었다. 타인의 삶이 비추지 않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238쪽)


 

 

타인의 삶이 비추지 않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 문장 앞에서 휘청했다. 

마치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온몸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결국 삶은, 존재하지만 볼 수는 없는 빛과 같은 어떤 것이다. 내 삶은 타인의 삶 속에 비춰질 때만 볼 수 있다...



 


 

역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의 원제인 <Light Years>는 '광년(光年)'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광년은 빛이 일년동안 이동한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이지만, 기나긴 억겁의 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설터는 사람 역시 숲을 이루는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고 생각했고, 나무를 이루는 잎맥처럼 삶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그려내고 싶어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삶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빛(Light)'과 '시간(Year)'이지 않았을까?


 

삶은 볼 수 없는 빛과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건 결국 선택의 문제다.


무감각한 권태와 무의미한 실존에 질식당하지 않으려면 최소한 한가지는 있어야 한다. 그게 일이건 사랑이건 가족이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문제는 이것들을 동시에 가질 순 없다는 점이다.


내가 이 작품을 읽고 깨달은 건 바로 이 점이다. 결국 인생이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 혹은 두가지를 반복적으로 취사(取捨) 선택하는 과정의 연속이라는 거...




 

'작가들의 작가'라는 수식어는 그냥 붙여진 게 아니었다.


한 권의 책은 몇 단락으로 요약되고, 다시 몇 개의 문장으로 압축되다가 마침내 단 한개의 문장으로 뇌리에 새겨지는 법이다. 그런데 설터의 작품은 도무지 단 한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평생에 걸쳐 재독(再讀)할 가치가 충분한 작가다.


 

 

나무에 새겨진 나이테처럼, 삶은 흉터로 나뉜다. 인생 초기에 생긴 흉터들은 더 촘촘하다. 시간에 압축된 듯, 이십 년 세월의 상처들은 잘 구별이 되지 않는다. (250쪽)


계절은 그녀의 은신처였고 그녀의 의복이었다. 그녀는 그 안에서 굴복했다. 땅처럼, 과일처럼 익고 시들었다. 겨울이면 긴 양털 코트로 몸을 감쌌다. 그녀에겐 낭비할 시간이 있었고, 요리를 하고 꽃꽂이를 했다. (256쪽)

이 평온한 시간, 이 안락한 공간, 이 죽음. 실제로 여기에 있는 모든 것들, 접시와 물건들, 조리 기구와 그릇들은 모두 부재하는 것의 삽화였다. 과거로부터 밀려온 조각들이고 사라져버린 몸체의 파편들이었다. (273쪽)

 

이제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이 확실했다. 사랑 대신 존경을 받을 나이였다. 허영을 키우고 잡지책을 넘기던 시절을 지나, 부러움을 받던 세상에서 더 넓고 더 고요한 세상으로 순례를 해온 것이다. 여행자처럼 할 얘기가 많았지만 말로 할 수 없는 것들도 많이 있었다. (38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는 동안, 도무지 책장이 넘어가질 않았다.

너무 어렵고 지루해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숨을 토해내느라 고개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전에 본 영화 <사일런스>의 장면들과 교차되면서 깊은 '침묵'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사일런스> 역시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위대한 작가일수록 평생에 걸쳐 단 한가지 주제에 매달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의 본성과 선악'을 헤밍웨이가 '전쟁과 사랑'에 천착했다면, 엔도 슈사쿠는 '신은 존재하는가? '종교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매진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서양종교가 뿌리내리지 못한 일본에서는 드물게 가톨릭 신자였던 엔도는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후, 가톨릭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가지만 건강 악화로 2년 만에 귀국하고 만다. 이런 남다른 경험들과 중국 다롄에서 보낸 어린 시절 및 폐결핵으로 생사(生死)를 오갔던 힘겨운 투병 생활의 체험등이 작품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깊은 강>은 네 명의 일본인 관광객이 인도 갠지스강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기본축으로 삼아, 이들이 제각각 품고 있는 사연들을 엮어낸 작품이다.


아내의 환생을 믿고싶은 이소베, 전쟁의 악몽과 친구의 죽음을 치유하려는 기구치, 자기 대신 죽었다고 생각하는 구관조를 기리고싶은 누마다, 그리고 젊은 시절 자신이 갖고 놀았던 남자('오쓰')를 찾아가는 미쓰코...


특히, 미쓰코와 오쓰의 이야기가 매우 인상적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오쓰는 미쓰코의 사랑을 얻기 위해 그녀의 요구대로 신앙을 포기하지만, 그녀에게 보기좋게 버림받는다. 처음부터 미쓰코의 목적은 오쓰를 타락시키려는 것이었다. '한 남자로부터 그가 믿고 있는 걸 빼앗는 기쁨. 한 남자의 인생을 뒤틀리게 만드는 쾌감(64쪽)'만이 그당시 그녀가 권태로운 자신의 삶에서 찾은 유일한 목표이자 목적이었다.


그뒤, 미쓰코는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해서 신혼여행지를 프랑스로 정하는 한편, 오쓰는 프랑스로 건너가 신부가 되려고하지만 그의 범신앙적 사유방식은 기독교라는 일신교만을 신봉하라고 요구하는 가톨릭 사제단에 의해 거센 지적을 받는다. 


 

"신은 다양한 얼굴을 갖고 계십니다. 유럽의 교회나 채플뿐만 아니라, 유대교도에게도 불교도에게도 힌두교에게도 신은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발언했을 때였습니다. 이것은 유럽에 온 후로 조금씩 제 신념이 된 솔직한 고백이었습니다만 선생님께는 기독교회 전체의 부정인 것처럼 들렸나 봅니다. (183쪽 中)


파문당하다시피한 오쓰는 인도 바라나시로 온다.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이곳에서 그는 미처 강에 이르지도 못하고 길에 쓰러져있거나 이미 숨을 거둔 이들을 등에 업어 갠지스강가로 데려다 준다.

 

모든 걸 다 알고 있지도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시다...

아름답지도 않고 위엄도 없으며 비참하고 초라하시다...

멸시와 조롱을 받으면서도 죄와 고통을 떠안으신다...

하물며, 내가 아무리 버리려해도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

 

 

오쓰가 믿는 신은 바로 이런 신이었다.

심지어 신이라 불리워지길 바라지도 않는다. 양파라 불리우면 또 어떤가.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으며, 그 무엇도 구분짓지 않는다. 모든 죄를 씻어 주고, 모든 생명을 다 받아주는 강과 같은 존재다. 


가톨릭 수사인 오쓰가 힌두교의 성지라 일컬어지는 갠지스강을 찾아간건 배교(背敎)도 이단(異端)행위도 아닌,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진정한 종교인이라면 기꺼이 걸어가야 할, 바로 그 길이었다.  


 

"갠지스 강을 볼 때마다 저는 양파를 생각합니다. 갠지스 강은 썩은 손가락을 내밀어 구걸하는 여자도, 암살당한 간디 수상도 똑같이 거절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재를 삼키고 흘러갑니다. 양파라는 사랑의 강은 아무리 추한 인간도 아무리 지저분한 인간도 모두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흘러갑니다."


미쓰코는 더이상 어깃장을 놓진 않았으나 자신과 오쓰 사이에 벌어진 거리를 느끼고 있었다. 오쓰의 삶도 그 이야기도 문자 그대로 그녀와는 딴 세계의 것이었다. 그녀는 양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지만, 양파가 그녀한테서 오쓰를 완전히 빼앗은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강은 그의 외침을 받아 내고 그대로 묵묵히 흘러간다. 그런데 그 은빛 침묵에는, 어떤 힘이 있었다. 강은 오늘까지 수많은 인간의 죽음을 보듬으면서 그것을 다음 세상으로 실어 갔듯이, 강변의 바위에 걸터앉은 남자의 인생의 목소리도 실어갔다. (280~285쪽 중)

 

 

최소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종교는 '사랑과 자비'를 근본으로 하지, '폭력과 파괴'를 신봉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인류는 신의 이름으로 수많은 전쟁을 해왔고, 현대문명사회가 도래했음에도 여전히 종교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내가 믿는 신만이 유일하다는 믿음과 내가 믿는 종교만이 진리라는 확신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그 이면에는 신을 내세워 신처럼 군림하려는 세력과 집단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들이야말로 겉으로는 신을 찬양하면서도 속으로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들의 주장대로 정말 전지전능하고 위대한 신이 존재한다면 어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엔도의 또다른 작품 <침묵>은 17세기 기독교를 무지막지하게 탄압했던 일본을 배경으로 한 일종의 역사소설이자 종교소설이다.

당시 일본 지배층은 기독교 전파를 막기 위해 외국인 신부들에게 신도들과 함께 순교할 것인지 아니면 성화(聖化)를 밟고 신도들을 살릴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다고 한다. 대다수 신부들이 순교를 택했고 수많은 신도들과 함께 수장(水葬)되거나 화장(火葬)되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진흙발로 성화를 짓밟고 신도들을 살리는 쪽을 택했다. 물론, 이들은 파문당했고 후세에도 배교자로 낙인 찍혀 있다.



 

엔도 슈사쿠는 자신이 외국인 신부의 입장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스스로에게 물었을 것이다. '순교못지 않게 배교 역시 고통스럽다. 아니 어쩌면 영광조차 없는 배교가 훨씬 더 고통스러운 선택'이라는 걸 깨달았으리라. 그리고 다시 물었으리라. 만약 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밟아도 좋다.네 발은 지금 아플 것이다. 오늘까지 내 얼굴을 밟았던 인간들과 똑같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 엔도 슈사쿠 <침묵> 293쪽-



 

<침묵>이라는 책을 구하려고 직접 중고서점을 찾아가고, 원래 보고자했던 영화 <재심> 대신 <사일런스>를 보고...


나는 늘 '신은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창조론 대신 진화론을 굳게 믿으면서도 왠지 자꾸만 누군가에게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고만 싶어진다.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 훨씬 많은데, 어째서 세상은 자주 악의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이 어째서 고통과 불행은 더 많이 감내해야 하는지...


무엇보다도 내가 정말 알고 싶은건, 내 마음은 지옥이건만 어째서 세상은 늘 변함이 없는가 하는 점이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해가 떠오르고, 새들은 노래하며, 꽃은 피어나고, 누군가는 어이없이 죽음을 맞이하며, 또다른 누군가는 새롭게 태어난다. 이런 기막힌 세상을 누군가가 만들었다면 이유를 아니 최소한 변명이라도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신은 말이 없다. 

신의 깊은 침묵 앞에서 '종교는 믿음이 아닌 사랑'이라는 엔도의 목소리만 길게 메아리쳤다.  



비록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종교는 믿음이 아닌 사랑'이라는 메시지 하나만으로도 유신론자뿐만 아니라 나같은 무신론자에게도 큰 울림이 되어주는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산 그 사람 그 개 - 아련하고 기묘하며 때때로 쓸쓸함을 곱씹어야 하는 청록빛 이야기
펑젠밍 지음, 박지민 옮김 / 펄북스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중국현대소설을 읽었다.

수월하게 책장이 넘어갔고 이야기 자체가 전해주는  재미와 감동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소설이라고하기에는 지나치게 밋밋했고, 권선징악과 평면적인 등장인물 및 일대기적 서사 등등 고대소설의 특징이 너무 많이 들어나 있었다. 


 

아홉 편의 단편들은 하나같이 가난하지만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늙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복 3박4일이 꼬박 걸리는 산골마을의 우편배달부로 나선 젊은 아들('그산 그사람 그개')의 이야기는 그 명성 그대로 빼어난 서정성이 돋보였다.  하지만 가난의 대물림이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자연스럽게 수용되는건 아닌지... 

 


 

아아....! 수십 년간 산과 길, 강과 밭 사이의 길을 홀로 걸었다. 개와 우편물 포대, 적막감, 외로움, 고통과 더불어 반평생을 보냈다. 그동안의 쓰라림과 아픔이 지금 느끼는 달콤한 감정에 순식간에 다 녹아버렸다. 아버지의 이 진한 눈물은 과거 힘들었던 나날들이 끝났다는 마침표이고, 이 익숙하던 모든 것과 이별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슬픔이기도 했다. (29쪽)


한편, 농촌과 도시의 빈부격차가 확연해지기 시작하던 시절, 생계를 위해 약간의 술수를 부려 강이나 낚시터에서 물고기를 낚는 쉬허셩이나('낚시를 끊다')  할아버지의 명성(?)을 이용하여 재주좋게 돈벌이에 나선 손녀딸의 이야기('재주')는 '도덕성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돈을 좇을 것인가'하는 문제를 해학적으로 다루었다. 나는 욕심부리지 않고 먹고 살 수 있을만큼만 물고기를 잡는 쉬허셩보다 비록 할아버지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식음을 전폐하고 하루종일 울었다는 손녀딸('마오쉔메이')의 모습이 훨씬 더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이 밖에도, 잠이 유난히 많은 집안 내력 때문에 출세길이 막혀버린 것도 모자라 심지어 단명하고마는 이야기('잠')와 뱀이 유난히 많은 고장에서 뱀과 공생하던 마을 사람들이 도시에 내다팔기위해 무분별하게 뱀을 포획했다가 다시 뱀양식을 하게 된 사연('뱀과 이웃으로 살기')등은 어이없는 웃음을 자아내지만, 그것이 바로 도시화와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한 80~90년대 중국인이 처한 현실이자 60~70년대 우리의 모습이었음을 떠올리면 이내 서글퍼진다.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충돌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전통과 현실의 충돌이야말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굴리는 원동력이다. 과거를 그대로 답습하는 현재란, 미래없는 과거의 연장일 뿐이다.


하지만 개개인의 삶은 이런 충돌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진화와 역사는 유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해될 수 있을 뿐, 인간도 동물도 개체로서는 환경의 작은 변화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고 힘겨워한다. 이처럼 개체는 한없이 취약하지만 집단 전체의 생명력은 끈질기게 이어진다. '백성' '민중' '민초'등등으로 불리우며, 단 한번도 주인공이었던 적은 없지만 역사라는 무대에서 영원히 퇴장하지 않는 배역이기도 하다. 



 

지은이 펑젠밍은 신중국 수립 이후인 1953년에 태어났다.

무산계급혁명도 항일투쟁도 겪지 않았지만, 60년대 대기근 속에서 살아남았고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십대와 이십대를 보냈으며, 그뒤 개혁개방으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구가하는 중국 대륙의 한복판을 지나왔다. 마치 그의 작품「민초」의 주인공처럼...



 

증조부는 여든을 넘겨 살다가 1970년대 말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사는 청텐(長田)같은 작은 마을에는 증조부와 비슷한 연령대 사람들 중에서 죽을 때까지 현(縣)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현을 벗어나 더 큰 도시에 가본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증조부는 삼십 세 즈음 한커우(漢口), 난징, 상하이 등지에서 일을 벌였다. 같은 후난 성에 있는 웨양, 창사는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했다.

그런데 이렇게 역동적인 삶을 살았던 증조부는 문맹이었다.

글도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폐쇄적이고 원시적이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어려웠던 시대에 세상을 누볐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봐도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의 일생은 분명 놀라운 경험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증조부의 입은 꽉 닫은 병뚜껑처럼 열리지 않았다. (200쪽)


화자의 증조부는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청나라의 멸망과 혼란스러웠던 민국시대를 살아온 인물이다. 황제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전히 신분제도의 틀 안에 갇혀 살던 시대에 소위 대처로 나가 장사로 엄청난 부를 일궜지만, 전쟁의 와중에 그 많던 은전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빈털털이로 고향에 안착한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악질 지주/자본가로 내몰려 처형당하는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힘도 빽도 없는 촌부(村夫)가 중국의 50~60년대를 살아간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면포를 다 팔고 나면 증조부는 지팡이를 짚고 한집 한집 찾아가 친구들을 만났다. 그럴 때면 집집이 밥을 먹고 가라고 청했고, 증조부는 당신보다 나이가 많은 노인이나 어린 아이들에게 빼놓지 않고 약간의 돈을 쥐여주었다. 이번에 면포를 팔아 번 돈으로 당신이 마실 술값 정도라도 남길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것이리라. 증조부는 장사할 때 사람들에게 언제나 웃는 얼굴로 대했는데, 집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집에 있을 때면 증조부는 자주 긴 한숨을 내쉬거나 미간을 찌푸리곤 했다. (232쪽)


사회주의 계획경제시대에 개인의 상(商)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의 증조부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기꺼이 위험을 무릅쓴다. 그 옛날 젊은 시절, 이곳저곳을 떠돌며 보따리 장사를 하던 것처럼... 약간의 이익을 보면 그뿐 더이상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던 것처럼...


제목 그대로 '민초'의 삶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증조부가 떠난 지 삼십 년이 넘었다. 나는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매년 무덤에 가서 그분을 만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증조부는 내게 가장 먼저는 친구였고, 그다음으로 가족이었다. 친구와 가족으로 증조부는 한 번도 내게 과도한 바람이나 요구를 말한 적도, 사람의 도리가 어때야 한다는 둥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 적도 없었다. 증조부도 나를 친구로 여겼다. 증조부는 돌아가실 때 내게 은전 하나를 남겼다. 앞에 위안스카이의 얼굴이 새겨진 것으로 그분이 내게 남긴 유일한 유산이다.

증조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가족 중 누군가 돈 빌려 간 사람이 없는지 몇 번이나 물어보았다고 한다. 증조부가 한창 잘나갔을 때 창톈 일대에서 그의 돈을 빌린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증조부가 건재할 때는 당신이 아직 살아있는데 그런 일은 물어 무엇하느냐며 집안사람들 누구도 거기에 관해 언급하지 못하게 했다. 집안  사람들은 그래서 돌아가시기 전에는 증조부가 마음속의 장부를 말하고 가리라 여겼다. 증조부 성격상 글로 적어둘 리는 없고 마음속에 적어 두었을 것이다. (...)


증조부는 결국 가족 누구에게도 마음속에 수십 년간 담아 둔 장부를 말하지 않았다. 아마 당신 자손들이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묵은 빚을 받게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증조부는 갚을 능력이 되면 분명 갚았을 것이고, 갚지 못했다면 분명 갚지 못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또 못 갚은 이유에 대해 따져 물어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증조부도 물론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능력이 돼도 모른 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일대에서 자신의 돈을 빌려 간 사람 중에서 해방 후에 자신보다 훨씬 더 잘살고 있는 사람도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증조부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234~235쪽)


 

나는 이 작품을 두번 읽었다.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입으로 나즈막히 낭독을 하고 있었다.


성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의 일대기였다.

그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없고, 나빴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주인공이 아니었지만 무대의 한가운데를 지나가야만 했고, 또한 자신의 운명을 바꿀 의지도 대단한 인생 철학도 없었지만, 끝까지 살아냈고 끝까지 침묵했으며, 무엇보다도 마음의 빚을 스스로 안고 떠났다.

  


 

나는 이 작품을 읽기 전, 힘겨웠던 과거를 소환하여 고단한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솜사탕같은 작품이라고 생각했고, 비슷한 주제와 이야기 구성으로 끊임없이 자가복제된 작품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다 읽고나선, 꼭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졌다.



더 나아가, 나는 중국 소설은 따분하거나 억지스럽거나 아니면 정치적인 색깔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거칠고 세련되지 못하며 과장되고 허풍스러울 뿐만 아니라, 가장 역동적으로 변화/발전하면서도 이상하게 과거지향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을 읽고나선, 꼭 그런 식으로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졌다.




 

나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꼭 받아내야할 빚이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고나선, 꼭 그런 식으로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졌다.


정말, 꼭 그런 식으로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 속에 길이 있다.'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책 속에서 길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때론 또다른 책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는 이 책을, 정확하게는 이 책의 저자를 프리모 레비의 책(「이것이 인간인가」) 을 읽다가 알게 되었다.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계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디아스포라'다. 


 

디아스포라(Diaspora): 

'흩뿌리거나 퍼트리는 것' 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특정 인종이나 집단이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

②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타인을 떠나 온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이르던 말.



 

그렇다면, 서경식도 디아스포라다. 

그는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동포다.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지만 "일본사람입니까?"라고 물으면, "아니요, 저는 한국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의 국적은 한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재일조선인'이라고 생각한다.  


국적(nationality)과 정체성(identity)의 불일치...

디아스포라의 가장 큰 특징이자 숙명일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디아스포라들이 마치 성지순례를 하듯 자신의 뿌리를 찾아나서곤 한다. 가능하다면, 그러니까 찾아갈 '그곳'이 존재한다면 말이다.


한국을 찾아왔던 서승, 서준식 형제의 마음도 아마 이러했으리라. 그러나 조국은 그들을 환영하는 대신, 가장 사악한 방식으로 대했다. 형제는 무려 20여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정치범'의 신분으로 조국의 감옥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서경식은 서승, 서준식 형제의 친동생이다.

 

.

.

.

.
.

 

이 책은 지은이가 80년대 초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유럽의 여러 미술관을 방문한 후 남긴 일종의 미술 감상문이다. 1992년 초판이 나온 이후 십년 뒤에 개정판이 나올 정도로 한때 널리 읽혔고, 최근에 다시한번 조명받고 있는데, 미술 감상 분야의 책으로써는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만약 '명성'만 전해듣고서 사전지식 없이 이 책을 펼쳐든다면, 당황하게 된다. 나처럼...

 

 

이 책에는 성스러운 종교화도 아름다운 풍경화도 화려한 인상파 작품들도 나오지 않는다. 

너무나 유명하고 누구나 한번쯤은 원작을 보고싶어하는 샤갈이나 클림트 뭉크 등등 거장의 작품들 역시 단 한점도 등장하지 않는다.


저자의 발길을 붙잡았던 그림들은 하나같이 심상찮다. 그리고 왠지 불편하다.

 

 


 

 

스위스에서 4,5일 어정거린 다음 기차편으로 독일로 들어가 하이델베르크에서 1박, 암스테르담에서 2박한 뒤, 나와 누이는 벨기에의 브뤼주로 갔다. 1983년 10월15일 토요일이었다. (...)

운하를 유람하고 탑에 오르는 따위의 정해진 관광코스를 거친 다음 그곳에 가서, 그 그림과 맞닥뜨렸다.

그 그림의 제목은「캄비세스왕의 재판」이다. (...)


여기서 솔직한 고백을 하자면 나는 이 그림에서 곧바로 아버지의 죽음을 연상하고 있었다.

시뻘건 왼쪽 발목을 꽉 잡고 마치 양말이라도 벗기고 있는 듯한 형리(刑吏)의 손놀림을 보고 있으면, 나 자신이 직접 듣지는 않았지만 "여기가 나른하다니까"하고 중얼거렸다는 아버지의 목쉰 음성이 귓속에서 낮게 울리는 듯하다.


이 여행을 떠나기 5개월 전인 1983년5월9일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가신 지 꼭 3년. 어머니와 같은 끔찍한 병이었다.  

아버지는 어려서 고향을 떠나 식민지 종주국인 일본으로 흘러왔었다. 피지배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많은 굴욕과 신고를 겪었다. 만년이 가까워서야 작은 공장의 주인이 되었으나 도산의 위기를 여러차례 겪으며 마음고생이 끊이지 않았다. 4남 1녀를 두었으나 그 가운데 아들 둘은 조국의 감옥에 갇힌 채 죽는 날까지 석방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한많은 죽음이었다. -8~14쪽 中-

 

 

이어서, 그와 누이동생은 이탈리아행 야간 열차를 타고 피렌체에 이른다.

산 마르코 수도원에서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수태고지>등을 감상하고, 수도원의 원장이자 도미니크 수도회를 이끌었던 사보나롤라가 머물던 방을 보고는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곳에서 그가 자신의 두 형을 떠올렸다는 건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승방이 있다는 그 자체가 수도사들에게는 대단한 혜택이었던 것으로, 그것을 오늘날의 기준에 비추어서 좁다든가 어둡다든가 하며 놀라거나 의아해할 일은 아니다. 당연할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비좁고 어둠침침한 승방에 잠시 머물러 서서 벽에 그려진 책형도를 바라보고 있자니. 어떤 연상이 집요하게 떠오르는 것을 피할 길이 없었다. (...)

나의 두 형들은 그때까지 12년간, 바닥 면적이 0.72평이라니까 이 승방보다도 더 작은 곳에서 갇혀 있었다. 거기에는 때때로 고문은 있었지만, 수인(囚人)들이 손톱이나 나무토막으로 긁은 자국밖에는 벽화 같은 것도 없다.

그들은 수도사가 아니다. 정치범이다.

누이는 열다섯살 적부터, 지금은 안 계시는 어머니와 함께 면회와 차입을 위해서 줄곧 형들이 갇혀 있는 감옥엘 다닌 것이다. -33~36쪽 中-



 

'인권은 곧 국권이다.'라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인간적으로 누릴 수 있는 권리란 따지고보면 국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라는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민으로서의 권리가 없거나 박탈당했다면 인권 또한 보호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난민을 제외하고 인권을 보장받을 수 없는 국민이 있다면 바로 정치범일 것이다. 국민이지만 또한 국민이 아닌 자들... 국가에 의해 거부당한 자들...

 


 

서승, 서준식 형제는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수형자의 인권보호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다행이도 형제는 자유의 몸이 되었고, 이들을 간첩으로 몰았던 가해자들 중 일부 또한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 역시 조사 과정에서 인권을 침해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그 인권법이 누군가의 생사를 건 단식 투쟁으로 제정되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리라.

 

 

 

 

 

 

금년(1990년) 2월의 어느날, 한국 서울 공항에서 약간 귀찮은 일을 당했다.

 

그때 나는 서울에 있는 형에게 선물하려고 어떤 그림의 복제품을 갖고 갔었는데, 뜻밖에도 그것이 세관에서 문제가 된 것이다. 여러 명의 세관원들이 둘러서서는 검사대 위에 펼쳐진 그 그림을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이마에 총을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그림 속의 인물을 가리키며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하고, "누구 그림이야?" "어디서 샀소?" "얼마에 샀소?" 하는 질문을 해대는 것까진 좋은데, "이건 소련 그림 아니야?"하는 따위 가당치도 않는 소리까지 하면서 좀처럼 통과시키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기야 이런 경우는 그림이 문제가 아니라 단지 정나미가 떨어지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이 나와 같은 자를 상대할 때의 저들의 예법이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그림이란 고야의「1808년5월3일, 쁘린시뻬 삐오 언덕의 총살」이다.  -96~98쪽 中-

 

 

낭만주의 화가였던 고야는 스페인이 프랑스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스페인의 민간인을 보복 살해하는 나폴레옹 군대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로부터 백여 년이 흐른 뒤, 피카소는 독재자 프랑코를 지원하기 위해 히틀러가 스페인의 작은 마을을 초토화시킨 사건을 그림(「게르니카」)으로 남겼다. 그리고 또 몇십 년 뒤 피카소는「한국에서의 학살」로 알려진 그림 한 점을 그렸는데, 그가 일짝이 전쟁의 참상을 고발했던 고야의 이 그림 구도를 빌려왔음은 잘 알려져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특히, 슬픈 역사일수록 끈질기게 되풀이되곤 한다. 의도적으로 묻히고, 무의식적으로 망각되면서...


그러므로, 과거는 끊임없이 기록되고 되새겨지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고통스러운 과거일수록 더더욱...




 

이제서야 이 책의 의미를 알 것 같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저자에게는 고통스러운 가족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순례였다면,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는 잘못된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이라는 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