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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6
잭 케루악 지음, 이만식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평점 :
결국 읽었다.
읽고 싶지 않았지만...
여름엔 주로 추리소설을 읽어오던 습관을 바꿔 올핸 소위 '고전명작'이라고 하는 것들을 읽어 보기로 결심한 후, 요즘 대세(?)인 헤르만 헤세 작품들과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기로 결정했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호밀밭의 파수꾼』은 무척 재밌게 읽혔다. 은둔의 작가로 타계할 때까지 수많은 풍문을 만들어냈던 샐린저의 기이함과 괴팍함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고자 했고, 할 줄 아는 거라곤 비속어와 징징거리기 뿐인 주인공에게도 은근히 친절해졌달까.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발단은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한 나의 관심이 적정선을 넘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올랐다는 데에 있었다. 그리하여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검색들을 하다가 하필이면 최근 나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작가가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를 두고는, 『호밀밭의 파수꾼』보다 백배는 더 재밌는 작품이라고 발언(?)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배, 세배, 열배도 아니고 무려 백배라고...???'
읽고 싶은 않았던 작품을 읽게 된 사연이다.
2차대전 이후 50년대 '비트 세대'의 상징이자 60년대 히피문화의 탄생을 불러온 이 작품은 자전적 소설로, 작가 지망생이었던 잭 케루악(샐 파라다이스)이 콜럼비아대학 기숙사에서 출소(소년원)한지 얼마 안 된 네살 연하의 닐 캐시디(딘 모리아티)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프랑스계 캐나다인이었던 잭 케루악에게 뒷골목에서 자라난 닐 캐시디는 처음부터 태양처럼 빛나는 존재로 다가왔다.
그렇다. 내가 단순히 작가로서 새로운 경험이 필요했거나 교정 주변을 맴돌기만 하는 내 삶의 무기력함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딘을 더 알고 싶어진 것은 아니다. (...) 당시 내가 사귀고 있던 다른 친구들은 모두 '지식인'들이었다. 채드는 니체적 인류학자였고, 카를로 막스는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응시하며 이야기하는 미친 초현실주의자였고, 올드 불 리는 느린 말투로 무조건 모든 것에 반대하는 비평가였다. 하지만 딘의 빛나는 지성은 모든 면에서 격식을 갖추고 있었고 완전하면서도 지식인스럽지가 않았다.
딘은 서쪽에서 온 태양의 자손이었다. 이모는 그와 어울리면 말썽에 휘말릴 거라고 경고했지만, 나는 새로운 부름을 받았고 새로운 지평선을 봤으며 젊은 나이에도 그것을 믿을 수 있었다. (...) 나는 젊은 작가였고 날아오르고 싶었다.
따라가다 보면 어딘가에 여자, 미래, 그 모든 것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난 알고 있었다. 따라가다 보면 어딘가에서 내게 진주가 건네질 것이다. -잭 케루악 『길 위에서』p20~22 中-
작가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내적인 욕망과 백인이면서도 미국사회에서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은 잭 케루악으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견딜 수 없는 불안을 안겨줬을 것이다. 한편, 알콜중독자인 아버지와 이곳저곳 떠돌면서 일찌감치 '거리의 아이'로 자라난 닐 캐시디의 즉흥적이고 쾌락적인 성향은 잭의 분노와 불안을 씻어낼 만큼 강하고 거침이 없었다.
전후 눈부신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성공지향적 소비중심적 사회로 빠르게 접어들고 있는 당시의 미국 사회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잭(샐 파라다이스)과 원래부터 제자리가 없었던 닐(딘 모리아티)이 길 위로 나서게 된 건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일지도 모른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다시 서부에서 동부로 그리고 멕시코까지 그들은 마약과 즉흥 파티, 차량절도와 소소한 범죄행각 등을 일삼으면서 시속 177km로 미친듯이 질주한다.
그들은 그 길 위에서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무엇을 보았으며 또한 무엇을 얻었을까?
난 탐욕스럽게 창밖을 내다봤다. 창밖엔 치장 벽토를 바른 집과 야자수와 드라이브인 식당, 온갖 미친 짓거리, 초라한 약속의 땅, 미국의 환상적인 종말이 있었다. 중심가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붉은 벽돌, 더러움, 부유하는 사람들, 희망 없는 새벽에 삐걱거리며 나아가는 전차, 매춘부 같은 대도시의 냄새 등 캔자스시티나 시카고나 보스턴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p135
문득 내가 타임스스퀘어에 돌아와 있음을 깨달았다. 1만3000킬로미터에 걸쳐 미 대륙 전체를 돌고 돈 끝에 다시 타임스스퀘어에 돌아온 것이다. 나는 러시아워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시간에, 길에 익숙해진 순진한 눈으로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끝없이 서로 으르렁대는 뉴욕의 절대적인 광기와 환상적인 혼잡함을, 그 미친 꿈을 보았다. -p174
우리는 허섭스레기 한 보따리를 든 채 좁다랗고 낭만적인 길거리를 떠돌았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절망에 빠진 단역배우 아니면 한물간 반짝 스타 같아 보였다. 꿈에서 깬 스턴트맨들, 난쟁이 카 레이서들, 막다른 곳에 다다른 듯한 슬픔에 잠긴 캘리포니아의 독설가들, 퇴폐적 매력을 풍기는 잘생긴 난봉꾼들, 수면 부족으로 눈이 부은 모텔의 금발 여자들, 도박사들, 포주들, 창녀들, 안마사들, 벨 보이들. 하나같이 한심한 인생들뿐이었다. 대체 이런 인간들 사이에서 어떻게 어울려 생활하면 된단 말인가? -p279
서부의 LA, 샌프란시스코도 캔자스시티나 시카고 보스턴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실망한 그들은 또 다시 길 위에 선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곳엔 진주 대신 환멸만 가득할 뿐이다.
대도시(뉴욕)의 절대적인 광기와 혼잡으로 어우러진 미친 꿈을 피해 그들은 또 다시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어쩌면...
애초 목적지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다시, 길 위에 선다는 것.
그들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이것 단 한가지 뿐이었는지도...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는 J.D 샐린저의『호밀밭의 파수꾼』과 함께 대표적인 '컬트서적'으로 손꼽힌다.
'컬트서적'이란 기존의 사회질서와 가치관을 부정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쓰여진 책을 말한다. 그래서 기성세대에게는 철저하게 외면당하는 대신 젊은층에게는 광적으로 추앙받는 기현상을 종종 불러온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한때의 유행으로 잊혀지거나 정반대로 새시대의 중심 가치관으로 자리잡으면서 '컬트적'이라는 수식어 대신 '대중적'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고, 여기서 다시 더 많은 시간이 흐르면 '고전 명작'의 반열에 오르는 경우도 흔하다.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와 괴테의『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비롯하여 오늘날 우리가 고전 명작이라 입이 닳도록 칭송하는 작품들 역시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왔다. 어디 문학뿐이랴. 음악, 미술 등등... 모든 예술 분야에서 '아방가르드(전위)'야말로 예술을 존재케 하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지 않은가.
하지만 모든 전위 예술이 그렇듯, 어렵다.
이 책 역시 읽기 어렵다. 내용이 어렵고 쉽고를 떠나 일단 '스토리'자체가 없다. 문장 구조도 이상하고 도중에 뚝뚝 끊기기 일수에다가 나오는 이야기라고 해봤자, 마약 아니면 섹스에 간간히 폭력과 절도 뭐 이런 것들이다. 하긴 뭐, 잭 케루악이 타자용 종이를 36미터로 길게 이어 붙인 후 그 위에 단락 구분도 없이 심지어 마침표나 쉼표도 거의 사용하지 않은 채 단 3주만에 써내려갔다고 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지만...
그렇다면, 이런 작품을 고전 명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명작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일독(一讀)의 의미는 있는 걸까?
있다면 무엇이고,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이 책을 읽는 동안 '이런 쓰레기같은...(책)'이라는 말이 수시로 목언저리를 타고 올라왔고, 그때마다 '백배나 더 좋다'라고 말한 작가의 얼굴을 떠올려야만 했다.
사실 나와 같은 사람이 믿는 철칙 같은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독자가 언제나 옳지만 절대로 작가를 이길 수는 없다'라는 말일 것이다. 독자가 좋다고 하면 좋은 (작품인) 거고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지만, 작가보다 작품을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건 아니므로...
작가란, 비록 수시로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이지만 또한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바로 이 한가지 이유 때문에라도 우리는 책을 읽는 것이고, 작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여, 나는 찾아야만 하리라.
백배보다 더 좋다고 말한 그 이유를...
끝까지 읽고 싶지 않았던 이 책을 끝내 읽게 된 그 이유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