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 - 제135회 나오키 상 수상작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들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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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작가, 글을 참 쉽게 쓴다.

초연함이랄까...?

절박하게 애태우며 매달리는 게 아니라, 무심한 듯 '툭'하고 내뱉어 버리는 '쿨'함이 있다.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라도 그녀의 손끝만 거치면 자연스럽고 편안해진다. 예전엔 이런 글들 별로라 생각했더랬다. 무릇, 문학이란 무게감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언젠가부턴 진짜 이야기꾼은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할 줄 아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마호로역 다다 심부름집』



 

이 작품 역시 소녀스러운 발상과 문장들로 가득하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작가의 속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오히려 누구나 골치 아프고 피하고 싶은 일들 한두 가지 쯤은 가지고 살아가는 이 시대에, 심부름집을 창업(?)하여 사람들을 위무하고자 하는 작가의 그 배려가 참 따뜻하다.


연로한 부모를 외면하는 친자식을 대신하여 문안 인사를 가고... 바쁜 부모 대신 초등학생을 귀가시켜주는가 하면... 버스 시간을 기록하고 집주인 대신 창고와 마당을 청소해준다.



 

 

만약에 마음의 무게만을 따로 잴 수 있는 저울이 있어서 비밀을 간직한 사람이 그 저울 위에 올라간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우리 체중의 상당 부분을 마음이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비밀이 끝까지 지켜지기 어려운 건 비밀 자체가 가지고 있는 중요성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무게감에 마음이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밀은 날카로운 흉기가 되어 우리 마음을 수시로 겁주고 위협하여 주저앉혀 버리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동창생인 다다와 교텐 역시 단 둘만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 특히, 다다의 입장에서 교텐은 영원히 피하고 싶은 비밀이었다. 그 비밀은 주머니 속에 감춰둔 송곳처럼 다다의 마음을 수시로 쿡쿡 찔러댄다. 



 

무슨 말을 해도 이제 와서는 돌이킬 수 없다.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 교텐의 손가락은 잘렸다. 그 사실만이 영원히 괴롭게 남을 것이다.


"장난치던 녀석들은 교텐한테 울면서 사과했지만, 나는 사과할 수 없었어. 내가 한 짓을 고백할 용기가 없었거든. 잠자코 있으면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교텐은 눈치 챘을 거야. 바닥에 떨어진 손가락을 주울 때 그 녀석은 뒹굴고 있던 의자를 봤어. 그것만으로 녀석은 누가 앉았던 의자인지, 어떻게 해서 일이 벌어졌는지 다 알아차렸을 거야. 녀석은 내가 자기를 싫어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거든." -p251~252

 

 


'사과조차 할 수 없고, 용서조차 구할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다다의 마음 속 깊숙히 잠겨 있던 비밀이었다.


 

다다가 아무리 털어내려해도 떨어지지 않는 먼지와 같던 그 '비밀'을 어느날 불쑥 나타난 교텐이 툭툭 털어준다. 그 순간 다다의 마음은 얼마나 홀가분했을까...


알고 보니, 교텐은 '물(水)'과 같은 사람이었다. 상처와 오물을 깨끗하게 씻어 주고, 자신을 드러내거나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꼭 필요한 존재...



 

"하루짱은 물을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시의 한 구절을 낭송하듯 나기코의 목소리는 고요하게 잦아들었다. "그 사람을 폭포수처럼 거칠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거고, 차갑고 맑은 정취를 가졌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물이 어떤 영향을 끼치든 생물이 사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인 것처럼, 하루짱은 우리한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친구랍니다. 설령 두 번 다시 만나는 일이 없다 해도. 그래서 딸아이 이름도 '하루'라고 지었습니다. 소중한 이름이죠."


희망의 빛. 다다는 감동했다. 교텐의 이름을 희망과 함께 부르는 이가 있다. -p188~189

 



거리가 좁혀지면 질수록 서로 부딪친다. 부딪치면 아프고 상처가 난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가까워질수록 물집이 생기고 생채기가 난다. 그리고 진짜 관계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아픔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관계를 지속시켜 나간다면 상처는 어느덧 아물고 새살이 돋아나며 굳은살이 잡히면서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된다.

 


일본인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로 유명하다.


가족마저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거리를 둔다. 짐이란 곧 상처다.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일본인 특유의 성향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는다. 사람 사이의 거리란, 좁혀지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는 것이라고 한다.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아픔을 극복하는 것처럼...



 

미우라 시온은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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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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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눈으로 읽을 때보다 입으로 낭독할 때가 훨씬 좋은 거 같아요.


장편보단 단편, 특히 이야기도 등장인물도 명확하지 않아서 뭐가 뭔지 모호하기만 한 작품일수록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마치 흡수되지 않고 반사되기만 하는 빛처럼 눈으로 들어오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기만 하던 문장들을 나직히 소리내어 읽다보면, 어느순간 소리소문없이 스며드는 빗물처럼 마음이 촉촉해지곤 합니다.



며칠 전이었어요.


주위는 소음으로 가득찼고... 제 마음은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이런 순간이 오면 저는 책 속으로 도망을 치곤 하는데, 그때 저에게 문을 열어준 책이 다름아닌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이었지요.

이 작품은 1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짧은 서간체 단편이지만, 상실의 아픔을 절절히 표현한 작품으로도 유명하지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 의해 동명 영화로도 만들어져 호평을 받은 바 있지요.


 


저는 이 작품을 읽을 때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는 남편의 죽음에 허물어진 주인공처럼, 저 역시 작가의 의도도 작품의 주제도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으니까요.



저도 처음에는 화자인 아내와 함께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간 이유를 열심히 찾아나섰더랬지요. 

그녀는 어린시절 살았던 동네부터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치매를 앓으셨던 친할머니도 만나고... 힘겹게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던 부모님의 모습도 봅니다. 물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초라한 자신의 어린 모습까지 마주하지요.



​그러고 보면, 기억이라는 거...

참 야속하고 잔인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싶은 것일수록 깊게 깊게 새겨놓아, '이젠 잊기로 했고, 정말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시도때도 없이 불쑥불쑥 되살려 놓아 사람을 난감하게 만드니 말이지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기억이라는 녀석은 참 지독한 면이 있는 거 같아요.

어린 시절 남편과 함께 보냈던 아마가사키의 '마쓰다 아파트'에도 가보고 오쿠노토의 소소기 해변 마을의 앞바다까지 훑었지만, 남편은 말이 없습니다.


단 한마디면 되련만...

더도 덜도 아닌 그저 딱 한마디만 해주면 되련만...

남편은 고집스럽게 뒷모습만 보일 뿐이지요.



우리가 이별이나 상실 혹은 실패를 힘겨워하는 건, 그 자체가 가져다주는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이 아니라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유를 알았다면, 그리고 그 이유가 타당하다면...? 우리는 고통이 아무리 크고 끝이 없다한들 견뎌낼 수 있어요. 


우리가 모든 행동과 결과에 대해 이유를 알고자 하는 건, 그것 자체가 우리 삶의 본질을 이루는 일부분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삶의 의미 즉 삶의 이유를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삶 자체가 정말 다르듯이 말입니다.

 



눈으로 읽던 문장들을 입으로 소리내어 읽기 시작하자 불연듯 깨닫게 되었지요.

아, 화자인 아내를 절망케 한 건 남편의 부재 자체가 아니라 그 부재를 불러온 이유였다는 걸...  

상실에 대한 이유를 알아야만 받아들일 수 있고 잊을 수 있는 거죠.


왜, 떠났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화자인 아내가 원한 것도 단 한가지였습니다.

왜 남편이 자살이라는 형식으로 가족 곁을 떠나야만 했었는지 바로 그 이유였더랬죠.


그러나...

남편은 말이 없습니다.



 

정말, 사람은 혼이 빠져나가면 누구나 죽고싶어지는 법일까요?




마지막으로...

낭독에는 놀라운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읽는 것도 듣는 것도 믿을 수 없을만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다만,

둘 중 어느것이 더 좋으냐고 저에게 물으신다면...?

저는 외롭고 슬플땐 주로 입으로 낭독하고...

그 반대일 땐 주로 귀로 듣지만, 사실 거의 대부분은 눈으로 읽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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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6
잭 케루악 지음, 이만식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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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읽었다.

읽고 싶지 않았지만...



여름엔 주로 추리소설을 읽어오던 습관을 바꿔 올핸 소위 '고전명작'이라고 하는 것들을 읽어 보기로 결심한 후, 요즘 대세(?)인 헤르만 헤세 작품들과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기로 결정했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호밀밭의 파수꾼』은 무척 재밌게 읽혔다. 은둔의 작가로 타계할 때까지 수많은 풍문을 만들어냈던 샐린저의 기이함과 괴팍함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고자 했고, 할 줄 아는 거라곤 비속어와 징징거리기 뿐인 주인공에게도 은근히 친절해졌달까.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발단은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한 나의 관심이 적정선을 넘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올랐다는 데에 있었다. 그리하여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검색들을 하다가 하필이면 최근 나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작가가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를 두고는, 『호밀밭의 파수꾼』보다 백배는 더 재밌는 작품이라고 발언(?)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배, 세배, 열배도 아니고 무려 백배라고...???'


읽고 싶은 않았던 작품을 읽게 된 사연이다. 





2차대전 이후 50년대 '비트 세대'의 상징이자 60년대 히피문화의 탄생을 불러온 이 작품은 자전적 소설로, 작가 지망생이었던 잭 케루악(샐 파라다이스)이 콜럼비아대학 기숙사에서 출소(소년원)한지 얼마 안 된 네살 연하의 닐 캐시디(딘 모리아티)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프랑스계 캐나다인이었던 잭 케루악에게 뒷골목에서 자라난 닐 캐시디는 처음부터 태양처럼 빛나는 존재로 다가왔다.

 


그렇다. 내가 단순히 작가로서 새로운 경험이 필요했거나 교정 주변을 맴돌기만 하는 내 삶의 무기력함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딘을 더 알고 싶어진 것은 아니다. (...)  당시 내가 사귀고 있던 다른 친구들은 모두 '지식인'들이었다. 채드는 니체적 인류학자였고, 카를로 막스는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응시하며 이야기하는 미친 초현실주의자였고, 올드 불 리는 느린 말투로 무조건 모든 것에 반대하는 비평가였다. 하지만 딘의 빛나는 지성은 모든 면에서 격식을 갖추고 있었고 완전하면서도 지식인스럽지가 않았다. 


딘은 서쪽에서 온 태양의 자손이었다. 이모는 그와 어울리면 말썽에 휘말릴 거라고 경고했지만, 나는 새로운 부름을 받았고 새로운 지평선을 봤으며 젊은 나이에도 그것을 믿을 수 있었다. (...) 나는 젊은 작가였고 날아오르고 싶었다.

따라가다 보면 어딘가에 여자, 미래, 그 모든 것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난 알고 있었다. 따라가다 보면 어딘가에서 내게 진주가 건네질 것이다.  -잭 케루악 『길 위에서』p20~22 中-


작가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내적인 욕망과 백인이면서도 미국사회에서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은 잭 케루악으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견딜 수 없는 불안을 안겨줬을 것이다. 한편, 알콜중독자인 아버지와 이곳저곳 떠돌면서 일찌감치 '거리의 아이'로 자라난 닐 캐시디의 즉흥적이고 쾌락적인 성향은 잭의 분노와 불안을 씻어낼 만큼 강하고 거침이 없었다.


전후 눈부신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성공지향적 소비중심적 사회로 빠르게 접어들고 있는 당시의 미국 사회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잭(샐 파라다이스)과 원래부터 제자리가 없었던 닐(딘 모리아티)이 길 위로 나서게 된 건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일지도 모른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다시 서부에서 동부로 그리고 멕시코까지 그들은 마약과 즉흥 파티, 차량절도와 소소한 범죄행각 등을 일삼으면서 시속 177km로 미친듯이 질주한다.

 

그들은 그 길 위에서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무엇을 보았으며 또한 무엇을 얻었을까?



난 탐욕스럽게 창밖을 내다봤다. 창밖엔 치장 벽토를 바른 집과 야자수와 드라이브인 식당, 온갖 미친 짓거리, 초라한 약속의 땅, 미국의 환상적인 종말이 있었다. 중심가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붉은 벽돌, 더러움, 부유하는 사람들, 희망 없는 새벽에 삐걱거리며 나아가는 전차, 매춘부 같은 대도시의 냄새 등 캔자스시티나 시카고나 보스턴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p135


문득 내가 타임스스퀘어에 돌아와 있음을 깨달았다. 1만3000킬로미터에 걸쳐 미 대륙 전체를 돌고 돈 끝에 다시 타임스스퀘어에 돌아온 것이다. 나는 러시아워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시간에, 길에 익숙해진 순진한 눈으로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끝없이 서로 으르렁대는 뉴욕의 절대적인 광기와 환상적인 혼잡함을, 그 미친 꿈을 보았다. -p174


우리는 허섭스레기 한 보따리를 든 채 좁다랗고 낭만적인 길거리를 떠돌았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절망에 빠진 단역배우 아니면 한물간 반짝 스타 같아 보였다. 꿈에서 깬 스턴트맨들, 난쟁이 카 레이서들, 막다른 곳에 다다른 듯한 슬픔에 잠긴 캘리포니아의 독설가들, 퇴폐적 매력을 풍기는 잘생긴 난봉꾼들, 수면 부족으로 눈이 부은 모텔의 금발 여자들, 도박사들, 포주들, 창녀들, 안마사들, 벨 보이들. 하나같이 한심한 인생들뿐이었다. 대체 이런 인간들 사이에서 어떻게 어울려 생활하면 된단 말인가? -p279


서부의 LA, 샌프란시스코도 캔자스시티나 시카고 보스턴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실망한 그들은 또 다시 길 위에 선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곳엔 진주 대신 환멸만 가득할 뿐이다.


대도시(뉴욕)의 절대적인 광기와 혼잡으로 어우러진 미친 꿈을 피해 그들은 또 다시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어쩌면...

애초 목적지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다시, 길 위에 선다는 것.

그들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이것 단 한가지 뿐이었는지도...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는 J.D 샐린저의『호밀밭의 파수꾼』과 함께 대표적인 '컬트서적'으로 손꼽힌다. 

'컬트서적'이란 기존의 사회질서와 가치관을 부정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쓰여진 책을 말한다. 그래서 기성세대에게는 철저하게 외면당하는 대신 젊은층에게는 광적으로 추앙받는 기현상을 종종 불러온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한때의 유행으로 잊혀지거나 정반대로 새시대의 중심 가치관으로 자리잡으면서 '컬트적'이라는 수식어 대신 '대중적'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고, 여기서 다시 더 많은 시간이 흐르면 '고전 명작'의 반열에 오르는 경우도 흔하다.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와 괴테의『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비롯하여 오늘날 우리가 고전 명작이라 입이 닳도록 칭송하는 작품들 역시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왔다. 어디 문학뿐이랴. 음악, 미술 등등... 모든 예술 분야에서 '아방가르드(전위)'야말로 예술을 존재케 하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지 않은가. 


하지만 모든 전위 예술이 그렇듯, 어렵다.

이 책 역시 읽기 어렵다. 내용이 어렵고 쉽고를 떠나 일단 '스토리'자체가 없다. 문장 구조도 이상하고 도중에 뚝뚝 끊기기 일수에다가 나오는 이야기라고 해봤자, 마약 아니면 섹스에 간간히 폭력과 절도 뭐 이런 것들이다. 하긴 뭐, 잭 케루악이 타자용 종이를 36미터로 길게 이어 붙인 후 그 위에 단락 구분도 없이 심지어 마침표나 쉼표도 거의 사용하지 않은 채 단 3주만에 써내려갔다고 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지만...



그렇다면, 이런 작품을 고전 명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명작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일독(一讀)의 의미는 있는 걸까?

있다면 무엇이고,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이 책을 읽는 동안 '이런 쓰레기같은...(책)'이라는 말이 수시로 목언저리를 타고 올라왔고, 그때마다 '백배나 더 좋다'라고 말한 작가의 얼굴을 떠올려야만 했다.  


사실 나와 같은 사람이 믿는 철칙 같은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독자가 언제나 옳지만 절대로 작가를 이길 수는 없다'라는 말일 것이다. 독자가 좋다고 하면 좋은 (작품인) 거고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지만, 작가보다 작품을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건 아니므로...


작가란, 비록 수시로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이지만 또한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바로 이 한가지 이유 때문에라도 우리는 책을 읽는 것이고, 작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여, 나는 찾아야만 하리라.

백배보다 더 좋다고 말한 그 이유를...

끝까지 읽고 싶지 않았던 이 책을 끝내 읽게 된 그 이유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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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윈터 리미티드 에디션) 세계문학의 천재들 1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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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서점 안이었다. 

서가와 서가 사이의 좁은 통로에 반백의 젊은(?)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편안한 복장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서가에 등을 기대고 두 무릎을 가지런히 모은 채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흰머리가 그대로 들어난 긴 커트머리와 군살없는 날씬한 몸 그리고 코끝에 걸려 있는 작은 돋보기...


아직 할머니라고 하기엔 이르고 아줌마라고 하기엔 더이상 어울리지 않는, 이와 같은 연령대에 속하는 여성들은 주로 자녀의 결혼이나 결혼생활에 당당히(?) 개입하고 자신과 가족의 건강에 관심이 많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TV시청이나 종교생활 혹은 친목도모로 채운다. 그래서 병원이 아니라면 주로 평일 한낮의 지하철안이나 음식점 혹은 종교적인 장소나 스포츠센터 등에서 마주친다. 그리고 대개는 무리지어 있고 소란스러우며 거침없이 행동한다.(고 줄곧 생각해왔더랬다.)



이런 선입관을 깨는, 다소 낯선 풍경에 묘한 감동이 일었다.


가볍게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향하는 낯선 시선을 확인하는, 무심한 듯 여유있는 태도까지...


그녀에게 다가가 잠시만 그옆에 머물고 싶어졌다. 왠지 그녀라면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해줄 것만 같았다.


그 짧은 순간, 어쩌면 나는 '이탈'을 감행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가 어느날 갑자기 모든 일상을 뒤로 하고 홀연히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올라탔듯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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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익숙한 삶에서 '이탈'하(고자 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스위스 베른의 한 대학에서 라틴어을 가르치는 교수가 수업 도중 그냥 나가버린다. 그리고 우연히 손에 들어온 책('언어의 연금술사')의 저자를 찾아 나선다. 저자는 이미 30년전 리스본에서 죽은, 아마데우 프라두라고 불리웠던 사람이다.




자기 삶과는 완전히 달랐고 자기와는 다른 논리를 지녔던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까. 이게 가능할까. 자기 시간이 새어나가고 있다는 자각과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호기심은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 -p154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가면서 선택되어질 뻔했으나 그렇지 못한 저 길에 대한 꿈을 언제나 품고 살아간다. 그러나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수도 있다는 상상은 쉽게 하지 못한다. 영화나 소설을 대할 때에도 '내가 극중 주인공이 된다면...?' 과 같은 가정을 할 뿐, 나를 버리고 철저히 극중 주인공이 되어보는 경험은 섣불리 하지 못한다. 우리의 사고는 스스로 인식하는 테두리안에서만 작동하고 수렴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식되지 않는 부분들, 소위 무의식의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냥 사라져 버리는 걸까? 의식의 세계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을 뿐만 아니라 의식의 세계를 규정하고 심지어 조정한다고까지 알려진, 바로 그 세계말이다.   



 

_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p32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바로 이 '나머지' 부분들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라 하겠다. 내가 삶속에서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고 그래서 제대로 표현되어지지 못한 것들이 어쩌면 내가 경험하고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메세지는 강렬하다 못해 현기증마저 일으킨다.  



물론 작가가 인터뷰에서 밝혔듯 모든 사람들이 일탈을 꿈꾸고 감행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자기 내면과 현실 사이에서 '주춤'거리는 사람일수록 자신에 대해 많이 알고 있거나 더 많이 알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익숙한 일상에서 탈출하려고 한다. 탈출한 그곳 역시 익숙해지면 또 다시 탈출을 시도한다. 익숙함에서 낯섦으로의 탈출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삶은 그렇지 않은 삶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다채로울 수밖에 없다.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이 흑과 백의 세계만 경험한다면 이들은 총천연 컬러의 세계를 경험한다.



_영혼의 그림자.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다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말처럼 확실한가? 스스로의 말이라는 것이 맞기는 할까?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람들은 신빙성이 있을까? 그러나 내가 고민하는 진짜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정말 고민스러운 문제는 이런 이야기에 도대체 진실과 거짓의 차이가 있기나 할까라는 것. 외모에 관한 이야기에는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이 여행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p222~223


현실이 딱히 불만족스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불연듯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이제 때가 온 것일지도 모른다.


익숙했던 모든 것들과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야 하는 바로 그 때...

나 아닌 또 다른 나를 찾아 나서야 할 바로 그 때...





3주전에 읽었고 그 이후 몇 권의 책들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잔상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죽기전에 꼭 한번 다시 읽고 싶은 책 중에 한권이 될 것만 같다.



끝으로,

얼마전 대형서점에서 내 시야에 포착(?)되었던 그 젊은 할머니가 읽고 있던 책이 어쩌면 파스칼 메르시어의『리스본행 야간열차』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쳤던 그 순간, 할머니의 눈빛은 분명 이 곳이 아닌 저 곳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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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빛이 물질과 부딪치면 반사/굴절되거나 흡수된다. 그런데 어떤 빛이 어떤 방향으로 반사/굴절되고, 어떻게 흡수되는지 그 구체적인 매커니즘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누구도 삶이 어떤 방식,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만약 우리를 감싸고 있는 세계가 이처럼 비전형적이고 무작위적인 빛의 파편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우리 삶은 무수한 기억의 조각들로 모자이크되어 있는 건 아닐까.



앤드루 포터의「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우리 삶 속을 떠다니는 수많은 기억의 조각들 중, 어느 특별한 한 조각에 관한 열편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 함께 놀던 친구가 멘홀에 빠져 죽던 순간이거나, 서서히 사이가 벌어져가는 부모님의 모습이거나, 형이 저질렀을지도 모를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던 한여름 밤의 열기거나, 혹은 사랑했지만 아니 사랑했기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었던 상실감이다.



그 구멍은 탈 워커네 집 차고로 이어지는 진입로 끄트머리에 있었다. 지금은 포장이 되어있지만, 12년 전 여름, 탈은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올라오지 못했다.구멍



나는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그해 여름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두 알게 되었다. 그때는 아버지의 정신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우리와 '떨어져'있던 내내 사실은 아버지가 시내의 한 모텔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어머니가 여전히 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는 것이나 일이 끝나고 저녁마다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는 것을 몰랐다. 내가 아는 것은, 우리 삶의 뭔가가 돌이킬 수 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코요테



내 형에게 일어났던 그 모든 일은 이제 지나갔고, 나는 지금은 형을 미워하지 않았다고 편히 말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형을 둘러싼 소문들이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떠돌았을 때 내가 얼마나 굴욕적이었는지, 그 기억만은 여전히 그대로다. 「강가의 개

1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때 왜 내가 강의실을 나가지 않았는지, 그러기는커녕 왜 강의실 앞쪽으로 곧장 걸어가 로버트에게 시험지를 내밀었고, 그가 내 풀이를 살펴보는 동안 그 자리에 멍청하게 서 있었는지 설명하기가 힘들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그 저녁이 자꾸만 떠오른다. 나는 어머니가 이윽고 자신을 추스르던 모습, 부엌으로 들어가 설거지를 하던 모습, 방에서 내려온 누나에게 미소를 짓던 모습, 그리고 그 후 개수대 앞에 서서 마치 누군가가 자기에게 와주리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마치 저 멀리 있는 그림자가 뜰 가장자리에서 걸어 나와 자기를 되찾아갈 것이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그렇게 간절하게 서 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코네티컷」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절대 지워지지 않을 기억들...

지워버릴수도 간직할수도 없는 기억들...


미워할수도 용서할수도 없고, 떠날수도 머물수도 없는 사람들...

 

이들은 좀체 마음을 떠날 줄 모르는 한 마디를 듣고, 상대방을 안심시키지 못할 게 분명한 한 마디를 하며, 나보다 나를 더 잘 이해했던 사람의 부고 소식에 통곡하는가 하면, 슬픔을 온몸으로 견디며 설거지 하는 엄마의 간절한 뒷모습을 떠올린다.



십여년 넘게 꼭꼭 잠겨있던 누군가의 마음속을 걸어들어갔다가 나온 것만 같다. 

잠겨있던 그 세월만큼,

컴컴하고... 축축하고... 따뜻하며... 아릿하다...




앤드루 포터, 난 당신이 마음에 든다.

과거가 아니 과거에 대한 기억이 현재와 현재의 삶 속에 미치는 영향과 그 과정을 포착한 당신의 '관점'이 마음에 든다.

누구에게나 존재하지만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자기 인식 너머의 세계에 대해 말하는 당신의 '화법' 또한 마음에 든다.  

뒷통수를 치는 반전도 극적인 전환도 그 어떤 인위적 장치도 하지 않는 당신의 '작법' 역시 마음에 든다. 

하여,

나의 우연한 이번 방문이 다음번 당신의 초대로 이어진다면 나는 기꺼이 그 초대에 응하리라...

.

.

.

.

.

.

 

나는, 지금 '비정상'이라는 걸 안다.

10여년이 흐른 뒤, 나는 지금을 어떻게 기억할까?

다른 모든 기억들과 뒤엉켜 특별한 인상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그런 평범한 생의 어느 한 조각으로 홀연히 망각되어질까...


아니면, 아니면,

지극히 '정상'이었던 내 삶이 기억과 부딪혀 반사/굴절되거나 흡수되어 스스로도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인식 너머의 어떤 세계로 접어든 순간으로 영원히 기억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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