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 (반양장)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이미애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호빗>은 1937년에 출간된 톨킨의 첫작품으로 세계 3대 환상문학 중 하나인 <반지의 제왕>의 원조격인 작품이다. 나오자마자 호평을 받은 바 있으며 2000년대 초반 해리포터 시리즈의 후폭풍으로 다시 관심을 받기 시작했지만 <반지의 제왕>을 제대로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나 역시 2002년 봄 절친으로부터 <반지의 제왕>을 빌려 읽기 시작했으나 1권도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포기해야만 했다. 북유럽 신화와 이를 바탕으로 하여 톨킨이 새롭게 창조한 소위 '중간계'에 대한 낯섦과 몰이해가 주된 원인이었다. 최근 도서관에서 빌린 <반지의 제왕> 시리지도 1권은 손때도 많이 묻고 너덜거리는 반면, 2권 상태는 한결 낫고 3권부터는 아주 양호하다는 점만 봐도 읽기를 도중에 포기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 수 있었다.

 

이제 막 환상문학에 첫발을 내딪었을 뿐이지만, 내가 보기에 20세기 초중반에 쓰여진 환상문학이 21세기에 접어들어 대중적 인기를 끌기 시작한 건, 인터넷 롤플레잉 게임과 헐리우드 영화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인터넷 롤플레잉 게임의 스토리와 캐릭터 대부분이 서양의 오래된 신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영화 기술의 발달로 예전엔 감히(?) 영상화할 수 없었던 장면들을 시각화할 수 있게 되면서 헐리우드발 블록버스가 만들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호빗>과 <반지의 제왕>은 톨킨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만든 이야기라고 한다. 남아공에서 태어나 4살때 영국으로 이주한 톨킨은 고대 영문학(문헌정보학)을 전공했다. 그는 옥스포드대학의 비공식 문학 동아리라 할 수 있는 '잉클링스'의 멤버로 500년 역사를 자랑한다는 옥스포드의 "이글 엔 차일드(The Eagle and The Child)" 라는 술집 안의 쪽방인 일명 '토끼굴'에서 C.S 캐롤('나니아 연대기'의 저자) 등과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호빗>과 <반지의 제왕>을 비롯해서 <나니아 연대기>등 걸작들이 젊은 청춘들의 쓸데없는(?) 잡담에서 잉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호빗>은 호빗 종족인 골목쟁이네 빌보의 모험담을 그린 작품이다. '호빗'은  homo(인간)과 rabbit(토끼)를 결합하여 톨킨이 만들어낸 종족으로 인간보다 작으며 주로 굴속에서 산다. 먹는 걸 좋아하고 낙천적이며 변화를 싫어한다.

 

골목쟁이네 빌보가 5월의 어느날 자신의 둥근 초록대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마법사 간달프를 만나는 첫장면은 마치 어린시절 즐겨 봤던  TV만화영화 '숲속의 요정'에 나오는 스머프 마을을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을 격려하고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간달프 역시 스머프 마을의 최고 지도자 파파스머프와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었다.  역자의 표현처럼 <호빗>은 어른들을 아련한 동심의 세계로 안내하는 작품이다.

 

이처럼 <호빗>은 톨킨의 신화적 세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따뜻한 일상의 세계다. 여기에는 숲속요정들의 노래와 웃음 소리가 울려 퍼지고, 저녁밥을 짓는 장작불이 타오르며, 화롯불 위에서는 찻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 이처럼 생생하게 전달되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계는 어른들에게도 아련히 떠오르는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처럼 감동을 주고, 새로운 눈으로 일상을 되돌아보게 할 것이다.

 

-<호빗> 역자 후기 중-

 

산아래의 왕 스라인의 아들인 참나무방패 소린은 난쟁이족이다. 소린은 다른 12명의 난쟁이들과 함께 일찍이 용 스마우그에게 빼앗긴 종족의 보물(특히' 아르켄스톤')을 찾기 위한 모험을 감행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마법사 간달프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호빗인 골목쟁이네 빌보를 영입하게 된다. 사실, 빌보는 영웅심도 모험심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인물에 불과하다. 무릇, 인류의 모든 신화가 그러하듯 영웅의 출현과 등장은 이처럼 미비하고 보잘것 없는 법이다.

 

영웅론은 '평범한 인물이 모험을 통해 위대해진다'는 것을 기본 줄거리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영웅'이란 나쁜 종족이나 대상을 죽인 후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주는 인물을 말한다. 그리고 모험의 성공으로 얻게 된 결과(주로 '보물')에 대해선 일말의 사심을 갖어서도 안된다. 빌보 역시 얼떨결에 따라나선 모험을 통해 난쟁이들을 두번이나 구해주고 스마우그를 처치하는데 일조를 하지만 처음에 약속했던 1/14인 자신의 몫조차도 용을 직접 쏘아 죽인 호수마을 인간 바르드에게 양보한다. 한편, 마지막까지 보물에 대한 집착을 보였던 소린은 소원대로 용을 죽이고 과거 용에게 빼앗겼던 종족의 보물을 되찾지만 결국 죽고 만다. 맨 처음 모험을 계획하고 감행했을 뿐만 아니라 일명 '다섯군대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워 승리로 이끈 난쟁이 종족의 리더 소린에 대한 톨킨의 관점은 분명하다.  

 

난쟁이들에 대해 최대한 너그럽게 평가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빌보의 공헌에 대해 정말 후하게 대가를 지불할 의도가 있었고, 자기들 대신 위험한 일을 하게 하려고 그를 데려 온 것이며, 그 불쌍한 조그만 친구가 스스로 원해서 그 어려운 일을 한다면 그들이 굳이 막을 이유가 없었다. 만약 빌보가 곤란한 처지에 빠진다면 그들은 그를 구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었다. 모험을 시작할 무렵 그들이 빌보에게 고마워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었을 때, 트롤에게 잡힌 그를 구해주었듯이 말이다. 바로 이거다. 난쟁이들은 영웅이 아니었으며, 금전의 가치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셈에 밝은 족속이다. 어떤 난쟁이들은 교활하고 배신을 잘 하는 상당히 나쁜 녀석들이었지만, 어떤 난쟁이들은 소린과 그의 동료들처럼 점잖은 축에 속했다. 그들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J. R.R. 톨킨, <호빗> p 236~237 중-

 

바로, 여기에서 톨킨의 세계관 더 나아가 인류의 집단 상상력이라 할 수 있는 신화의 가치관을 읽을 수 있다.

옛날 옛적부터 인류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를 해결해줄 지도자를 필요로 했으며, 이런 지도자가 될 자격으로 용맹과 지혜로움 뿐만 아니라 물질적 욕망을 뿌리칠 수 있는 높은 도덕성을 요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지도자란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라기보다는 자신들과 똑같은 무리 속에서 탄생된다는 걸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주인공 빌보와 골룸과의 만남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여기 깊은 땅 속 검은 물가에 작고 끈적거리는 동물, 늙은 골룸이 살고 있었다.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인지 아니면 무엇인지 나도 모른다. 마른 얼굴에 희미하게 빛나는 두 눈을 빼면 칠흑처럼 새까만 그가 바로 골룸이다. 그에게는 작은 보트가 있었는데 그 보트를 타고 아주 조용히 호수 위를 저어 다녔다. 호수는 더럽고 깊고 몸소리쳐지게 차가웠다. (......)그는 골룸이라고 말하면서 목구멍에서 끔찍한 꼴록거리는 소리를 냈다. 바로 그 소리 때문에 그는 골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비록 그 자신은 항상 자신을 '내 귀염둥이'라고 불렀지만...(...)

"저게 우리한테 하나 물어볼 거야, 내 귀염둥이야, 그래, 그래. 딱 한문제만 더 맞히자, 그래, 그래,"

골룸이 말했다.

하지만 빌보는 그 역겹고 축축하고 차가운 것이 옆에 앉아서 손발로 건드리고 찔러댔기 때문에 아무 문제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몸을 할퀴고, 꼬집기도 했지만 여전히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우리한테 물어봐! 우리한테 물어봐!"

골룸이 말했다.

(...)

멀지 않은 곳에 빌보가 모르는 골룸의 섬이 있었다. 골룸은 그 은신처에 몇몇 잡동사니들을 쌓아 두었는데 그 중 아주 아름다운 물건, 너무 아름답고 멋진 물건이 있었다.  그것은 반지, 그것도 아주 소중한 황금반지였다.

그는 끝없이 이어지는 어두운 나날에 가끔 그랬듯, 자신에게 속삭였다.

"내 생일 선물! 그게 우리가 지금 원하는 거야. 그래, 그게 필요해!"

반지를 원한 것은 그것이 마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 반지를 손가락에 끼면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밝은 햇빛이 비칠 때에만 보이는데 그것도 희미하게 흔들리는 그림자가 보일 뿐이었다.

"내 생일 선물! 그건 내 생일에 나한테 왔어, 귀염둥이야."

그는 항상 이렇게 자신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반지들이 아직 이 세상에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까마득한 시절에, 그런 선물이 어떻게 골룸의 손에 가게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아마 그 반지들을 지배한 군주조차 알 수 없으리라. 골룸은 처음에는 그것을 끼고 다녔지만 나중에는 너무 피로해져서 견딜 수 없었다. 그 다음에는 쌈지에 넣어서 달고 다녔지만 살에 스쳐서 피부가 벗겨졌다. 그래서 지금은 자기 바위굴에 감춰 두고 언제나 돌아가서 보곤했다.

(...)

그걸 잃어 버렸어. 귀염둥이야, 없어졌어. 잃어버렸다고! 빌어먹을! 제기랄! 내 소중한 걸 잃어버렸어!"

 

-J. R.R. 톨킨, <호빗> p87~100 중-

 

너무 오랫동안 홀로 지내왔던 골룸은 혼잣말을 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렸다.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하고 스스로 답한다.

외로움을 달래줄 유일한 건, 바로 반지였다.

끼면 모습이 보이지 않는 마법의 반지!

그런데 그 반지를 잃어버린 것이다.

 

골룸의 '공포와 상실의 날카로운 아픔'이 슬픈 메아리가 되어 빌보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독자인 나에게도 전해졌다. 왠지 모르게 골룸에게 연민이 느껴진다. 골룸의 슬픔과 외로움 그리고 상실감이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잘 표현되었기 때문일까...

골룸이란 존재는 인간의 물질에 대한 집착과 악마적인 모습의 발현이 어쩌면 외로움이라는 질병으로부터 생겨난 건 아닌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고블린 동굴에 빠져 헤매던 주인공 빌보는 우연히 땅에 떨어져 있던 반지를 주워 주머니에 넣게 되는데, 그 반지가 바로 호숫가 동굴 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골룸의 것이었다. 골룸과 맞닥뜨린 빌보는 수수께끼 내기에서 이김으로써(사실, 반칙이지만...) 끼면 투명인간이 되는 마법의 반지를 차지하게 된다.

 

영웅의 조건 중 한가지인 '지혜'를 테스트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평범하고 소심한 빌보가 절대절명 위기의 순간에 어떻게 이처럼 지혜를 발휘할 수 있었을까?

빌보는 평소 자연을 가까이 하면서 물질적 욕심없이 여유롭고 낙천적인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지혜를 습득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지혜로움이 빌보로 하여금 수수께끼 내기에서 골룸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는 당당함과 어두운 굴속에 혼자 떨어졌을 때 두려움 대신 차분한 용기를 갖게 만들었던 것이리라.

 

자라나는 어린이에게는 재미있으면서도 용기와 지혜를 깨닫게 해주며, 성인에게는 이젠 잃어버린 그러나 분명 갖고 있었던 '호연지기'를 다시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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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시작이다.

<호빗>을 성공적으로 읽었으니 <반지의 제왕>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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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 읽는 여인
브루노니아 배리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 아니 책읽기였다.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과 주제의식이 빛나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현재 환상과 현실 사이를 종횡무진하는 구성이 책읽기를 심각하게 방해했다.

이야기는 타우너 휘트니라는 본명을 갖고 있던 소피아라는 여자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녀는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과거의 일부 기억을 상실하는 증상을 앓고 있다. 이와 같은 그녀의 증상들은 사실 외상성증후군이라 할 수 있겠고 작품의 기본 줄거리가 바로 그녀에게 외상을 입힌 '과거'라 하겠다. 

 

그녀는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리고 부모 복이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빠가 되어서는 안되는, 한마디로 인간이 아닌 인간을 아빠로 두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현명한 할머니와 이모를 두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사실 작품의 줄거리와 주제는 퍽 일반적이고 단순하여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다. 즉,  어린 나이에 친족에게 성적 학대를 받은 여성이 성인이 되어서도 고통을 받다가 주변인들의 도움으로 자긍심을 되찾고 회복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영화 디렉터로 일한 바 있다는 작가는 작품속에서 영화처럼 영상적 효과를 도모하고 레이스라는 소품을 통해 신비로움과 상상력를 불어넣어 진부한 이야기를 멋스럽게 바뀌어 놓았다. 마치 흔해빠진 음식 재료를 이용하여 독특한 맛을 내는 새로운 요리로 탈바꿈 시키는 것처럼... 하지만 정체 불명의 '퓨전 요리'를 누구나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듯이 상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이야기 전개 방식은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고 심지어는 '기만'당했다는 느낌마저 갖게 만든다.

독자를 굳이 '혼란한 상태로 몰아넣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작가가 영화 속 장면이나 허리우드식 반전을 지나치게 의식한 게 아닌가 싶다. 영화라면 특수효과 등으로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장면을 훨씬 더 잘 표현할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첫단추가 잘못 채워진 듯 싶다.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애매모호하고 잘못 전달되다 보니 그렇지 않아도 구성 자체의 특징으로 혼란스러운 독자의 머리는 등장인물들의 관계도와 가계도를 그리는데 불필요한 에너지를 쏟아부어야만 한다.

 

나는 첫 도입부분에서 주인공 타우너 휘트니가 '휘트니 집안 여자들은 괴짜다.' 등의 내용을 설명하는 단락에서 당연히 부계(父系)쪽이라고 생각했더랬다. 미국 사회도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아버지 성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바 할머니를 타우너 휘트니가 자신의 고모할머니라고 했기 때문에 더더욱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더 책장을 넘기자, '에바는 내 할아버지 지지 휘트니의 두 번째 부인이다.' 라는 대목이 나오는가 싶더니, "우리 엄마 메이의 집과 이모 엠마 보인튼의 집 두 채 뿐이다. 엠마 이모는 에바 고모할머니의 딸이고, 우리 엄마 메이와는 이복자매이며, 내 쌍둥이 자매 린들리의 호적상의 어머니이다. (.....) 엠마가 '사고'를 당하기 전, 그러니까 이모와 이모부가 부부로 살았을 때, 엠마와 엠마의 수양딸 린들리는 휴가철에만 섬에서 살았다. 물론 이모부도 포함해서. 이모부인 캘빈 보인튼도 사람으로 친다면 그렇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사람으로 치지 않는다.(p61)" 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성이 같으므로 당연히 지지 휘트니를 친할아버지로 생각했지만 알고보니 외할아버지였다. 그리고 고모할머니라는 에바가 지지 휘트니의 두번째 부인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럼, 할아버지가 자신의 여동생과 재혼을 했단 말인가? 워낙 막되먹은 괴짜 집안이라고 소개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더랬다. 그래도 고모할머니라는 호칭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고모할머니란 아빠나 엄마의 고모로인 대고모를 고모할머니로 부르기 때문이다. 주인공 타우너 휘트니의 아빠는 등장(?)하지 않고 엄마 메이만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그녀는 부계(父系)가 아닌 모계(母系) 성을 따르고 있으며, 에바는 그녀의 고모할머니가 아니라 외할머니여야 맞다.  

 

참!

그리고 타우너 휘트니의 십대 시절 남자친구인 잭은 린들리의 자살 장면을 타우너와 함께 목격한 것인가 아닌가? 잭과 함께 목격했다고 타우너가 상상한 것이라면 린들리가 죽기 전의 잭의 여자친구는 린들리가 아니라 타우너란 말인가?

 

이 뿐만이 아니다.

친딸을 성적으로 학대한 인간 아닌 인간으로 나오는 캘빈 보인튼은 클럽의 요트 선수였는데 어떻게 캘빈교의 교주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와 안젤라는 어떻게 만났으며 사랑하는 사이가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도 세일럼이란 도시에선 마녀 사냥이 가능한 걸까?

 

이 밖에도 앤과 레퍼티의 등장과 역할은 무엇일까?

 

아, 정말 모르겠다.

상당히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몰입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었다. 

만약, 다시 읽는다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인건만은 확실해보이는데... 제대로 즐기고 느끼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환타지 소설은 내 취향이 아닌 것 같다. 이제부터 읽을 책이 환타지 소설의 선두주자라 할만한 톨킨의 <호빗>인데 벌써부터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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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헤르타 뮐러라는 작가 이름도, <숨그네>라는 작품명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출판사가 야심차게 출판한 세계문학전집목록에 올라있는 걸 확인하고는 <호텔 뒤락>과 함께 '선정'한 책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품이란 걸 알고는 처음부터 재미를 기대한 건 아니었으나 역시 진도가 쉽게 나가진 않았다. 처음 몇 페이지만 읽다가 2~3일 공백기(?)를 거친 후, 한나절만에 완독했다.  


일단 작가 소개부터 간단히 하면, 헤르타 뮐러는 루마니아에 거주하던 독일인 가정에서 태어나 공산독재 시절 엄청난 탄압을 받다가 80년대 독일로 망명했다. 그후, 그녀는 루마니아에서 공산독재정권에 '침묵'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의 삶을 주로 그렸다고 한다. 특히, <숨그네>는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패전후 소련의 수용소로 끌려가 5년동안 강제노동을 당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작가의 모친 역시 그녀를 출산하기 전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노역을 했다고 하니, 작가로서의 그녀의 성향은 어쩌면 이미 '결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1944년 2차 세계대전이 종착력 향해 숨가쁘게 달려가던 때였다.

그 당시 친독일 국가이던 루마니아가 소련의 침공을 받고 공산주의화되면서 소련으로부터 나치 독일에 의해 파괴된 소련 재건을 위해 루마니아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을 소련으로 보내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하여, 17세부터 45세까지 당시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은 가축을 실어 나르는 기차에 태워져 우크라이나에 있는 수용소로 끌려가 5년동안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나치 독일에 의한 '홀로코스트'의 역사가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해, 패전 후 평범한 독일인들 역시 승전국 소련에 의해 고통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나 역시 <책 읽어 주는 남자>라는 작품을 접하고 나서야 독일인의 입장으로 2차 세계대전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전쟁을 일으킨 행위를 옹호하려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 당시 전쟁과 전체주의가 휩쓸던 독일 사회에서 개인이 양심과 이성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으며 용기가 필요했는지... 전후, 패전국민으로서 감내해야했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무엇보다도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없었던 수치와 고난의 역사가 평범한 독일인들의 삶을 어떻게 갈갈이 찢어놓았는지... 한번쯤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뮐러의 작품 <숨그네>의 주인공 레오 역시 1944년 새벽 3시에 루마니아 경찰의 손에 이끌려 수용소행 기차에 오른다. '너는 반드시 돌아올 거야'라는 할머니의 '영혼없는 인삿말'을 가슴에 품고서 열일곱살 레오는 그렇게 가족과 '생이별'을 했다. 그렇지만 레오에게 가족과의 이별이 커다란 슬픔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그의 가족이 레오를 홀가분히 떠나보냈기 때문이고 레오 역시 가족으로부터의 '떠남'을 일종의 '탈출'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레오는 당시 루마니아 사회에서 범죄자 취급받던 동성애자였고, 그의 가족 역시 동성애자인 레오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불편해했다. 


수용소에서의 삶은 '배고픔' 그 자체였다. 

작가는 주인공 레오의 시선으로 수용소에서의 중노동과 일상화된 죽음 그리고 굶주림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1인칭 주인공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주인공 레오는 자신이 겪은 일들을 실감나게 들려주는 적극적인 이야기꾼이라기보다는 사실을 보고(報告)하는 마치 제3자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독자는 주인공과의 감정이입에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등장인물과의 동화 여부가 작품의 '흥행'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에 비춰볼 때, 이와 같은 글쓰기 전략은 작가에게 상당히 불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뮐러가 이와 같은 글쓰기 전략을 채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소위 '전범(戰犯)'의 후손으로서 행여 자신의 '폭로'가 또다른 손가락질이나 오해를  불러오지는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일까? 작품을 읽는 내내 풀리지 않던 의문은 '작가 후기'를 읽으면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어머니도 오년간 수용소 생활을 했다.

루마니아의 전체주의적인 과거를 회상시키는 강제추방이라는 주제는 입에 올려서는 안 될 금기였다. 가족끼리나 함께 추방되었던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만 수용소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마저도  늘 암시에 그쳤다. 이 비밀스러운 대화가 내 어린 시절을 함께 했다. 나는 대화의 내용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두려움은 감지할 수 있었다.

2001년, 나는 강제추방을 당했던 우리 마을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동료 오스카 파스티오르도 강제추방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는 그에 관한 글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나를 돕고자 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만났다. 그가 이야기하면 나는 받아 적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책을 쓰자는 바람이 우리 안에 싹텄다.

오스카 파스티오르가 2006년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초고 일부와 수기 메모로 채워진 공책 네 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죽음 이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메모에서 느껴지는 인간적인 친밀함 때문에 상실감은 더욱 커졌다.

그로부터 일 년 후에야 고심 끝에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와 이별하고 혼자 소설을 써야 한다고. 그러나 오스카 파스티오르가 없었다면 수용소 일상에 대한 세세한 묘사들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2009년 3월 헤르타 뮐러, <숨그네> 작가후기 中-


 

그러니까 그녀의 모친을 포함하여 강제추방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집단 침묵'이라는 암묵적인 방식으로 과거와 상처에 접근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침묵한다고 아물거나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되어 끊임없이 되새기고 회상함으로서 천천히 과거의 상처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진정으로 '화해'하지 않으면 절대로 치유될 수 없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마음의 상처는 가슴 깊이 흔적을 남겨 시시때때로 우리를 공격하는데, 이를 심리학적 용어로는 '트라우마'라고 한다. 이처럼 치유되지 않은 마음의 상처에 빠져 있는 사람들 곁에서 성장한 작가에게 트라우마의 잔영은 고스란히 전해져, 그녀 역시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거대한 침묵의 유리벽 안에 갇힌 삶을 '강요'받았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때, 그녀는 스스로를 갇두는 행위라는 것도 모른 채 자꾸만 유리벽 속으로 숨어들기만 하는 주변 사람들과는 달리 그 벽을 깨고 나온다. 그녀의 선택은 집단침묵 대신 폭로였다. 그러나 간접 체험자인 그녀는 직접 체험자이면서 독일로 망명한 글쓰기 동료이자 같은 고향출신인 오스카 파스티오르도의 고백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숨그네>가 1인칭 주인공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관찰자적 심지어 방관자적 시선처럼 느껴졌던 것은 이와 같은 작가의 '거리 두기'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공교롭게도 <숨그네>가 발표된 해인 2009년 가을 그녀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선정 이유로는 "응축된 시와 진솔한 산문으로 박탈당한 삶의 풍경을 그려냈다"라고 한다. 책 제목이기도 한 '숨그네'는 그녀 특유의 조어법에 의해 탄생한 단어로, 말 대신 침묵하면서 심호흡을 하는 것으로 대신했던 강제 수용소 체험자들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치 그네가 왔다 갔다 하듯 들숨과 날숨을 쉬면서(어찌됐던 살아야 함으로 숨은 쉬어야 하니...) 고통을 들이마시고 희망을 내품는 '실존'을 상징한다.   

 

역자의 소개에 따르면, 강제추방 당해 5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했던 파스티오르는 수용소의 상황을 '실존의 절대영도'라고 표현했단다. 한계 상황으로 인간을 몰아넣는, 그래서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수용소들이 여전히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퍽 유감스럽다. 특히 이런 곳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우리들은 호흡하는 매순간마다 희망 대신 고통을 들이마시며 생존과 투쟁을 벌이는 이들이 있다는 걸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끝으로, 뮐러의 <숨그네>는 나로 하여금 루마니아라는 나라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루마니아'하면 먼저 공포 환상 문학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드라큐라 백작과 전설의 체조선수인 코마네치 그리고 차우세스쿠라는 독재자가 떠오른다.

 

동유럽 어딘가에 있는, 사회주의 국가로 소련의 영향을 받았던 소위 '빨갱이 나라'...

미치광이 독재자를 20년 동안이나 숭배했던...

그래서 그가 처형된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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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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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중국 대륙에서는 마오쩌둥 탄생 120주년 기념 행사가 성대하게 치뤄졌다.

마오쩌둥은 운이 좋은 것 같다. 공산주의 혁명을 이끈 지도자들이 생전에 몰락했거나 아니면 사후에 재평가된 것에 반해,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적 오류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대륙에서 여전히 추앙받고 있으니 말이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는 문화대혁명 시기 호흡기 전문의와 기생충병 전문의를 부모로 두었다는 이유로 '하방(下放)'당했던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자전적 소설이다. 1954년 출생한 다이 시제이(戴思杰)는 열일곱살이던 1971년 '하늘긴꼬리닭' 계곡에 자리잡은 어느 농촌 마을로 하방되었다. 문화대혁명기는 현대판 '분서갱유'의 시대였다. 개인의 자유와 욕망을 노래하는 모든 문학작품들은 금서(禁書)가 되었다. 주인공 역시 똥지게를 짊어지고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위험한 탄광에서의 고된 노역보다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에 더 큰 고통을 느낀다.


중국의 현대사실주의 소설처럼 이 작품 역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들을 너무나도 해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특히, 일명 '안경잡이'가 몰래 갖고 있는 발자크의 소설들을 빌려보기 위해 주인공과 그의 단짝 뤄는 방앗간 노인을 구슬려 구전 민요를 부르게 하여 가사를 적어오는 장면이나 주인공이 바이올린으로 모짜르트 곡을 연주하고는 부르주아풍이라고 의심하는 마을 촌장에게 '모짜르트가 마오쩌둥을 생각한다'는 말도 안되는 핑계를 갖다붙여 위기를 모면하는 장면등은 '풍자'의 극치를 보여준다.


'꽌시(关系)'의 도움으로 하방을 끝내고 도시로 되돌아가는 안경잡이의 소설책 가방을 통째로 훔친 주인공과 뤄는 마침내 인간의 욕망을 가감없이 그려낸 발자크의 매력에 흠뻑 빠지고 만다. 특히, 주인공이 재봉사에게 뒤마의 '몽테크리스토프백작'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과 감정은 그 무엇으로도 없앨 수 없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뤄는 재봉사의 딸인 바느질하는 소녀와 가깝게 지내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뤄가 소녀의 관심과 사랑을 얻어내는 방식 역시 서양 소설을 읽어주고 읍내에서 상영한 영화의 줄거리를 이야기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뤄는 마을을 잠깐 떠나면서 친구인 주인공에게 자기 대신 여자친구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다.

친구 대신 친구의 여자친구를 찾아가 문학작품을 읽어주면서 주인공은 그녀에게 남다른 애정을 느낀다. 그리고 그 애정은 그로 하여금 놀라운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게끔 만들었으니 그건 다름 아닌 친구의 아이를 임신한 그녀를 위해 읍내 병원의사를 설득하여 낙태 수술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놀라운 건, 의사를 매수(?)한 수단이 돈도 아니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발자크의 소설책 한권이라는 점이다!


 

하긴, 발자크가 어디 의사만 매혹시켰던가?

주인공과 친구 뤄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 재봉사의 딸 역시 발자크에 깊이 빠져 있었다. 발자크의 손끝에서 그려지는 인간의 자유와 원초적인 욕망은 산골 소녀의 가슴에 아로새겨졌다. 어쩌면 그녀는 뤄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들려주는 발자크와 사랑에 빠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펜끝에서 그려지는 자유의 숨결은 마침내 산골 소녀의 욕망을 일깨운다. 유산계급인 지식청년을 무산계급으로 만드는 재교육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하방'이 역설적이게도 무산계급을 '재교육'시킨 것이다.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나서야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라는 제목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발자크의 작품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를 '하늘긴꼬리닭' 너머의 또 다른 세상을 비춰준 '창(窓)'이었다.


프랑스 국적인 다이시제이는 소설가일뿐만 아니라 영화 감독이기도 하다. 그가 연출한 <식물학자의 딸>이라는 작품도 동성애라는 모티브를 빌려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평가하고 탄압하는 중국공산주의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한 작품이란다.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빼어난 영상미와 작품성으로 극찬을 받은 이 작품은 중국 당국으로부터 촬영 허가를 얻지 못해 베트남 등지에서 찍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와 <식물학자의 딸> 은 소설과 영화라는 장르만 다를 뿐 일관된 주제, 즉 '모든 지적이고 예술적인 활동은 인간의 욕망과 욕구의 표현이며, 이를 부정하고 억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런 시도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잔인한 폭력'이라는 점을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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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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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작가인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을 제외하고는 스칸디나비아 3국 출신 작가의 작품은 이번이 두번째인 것 같다.

스웨덴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다. 

그러나 밀레니엄 시리즈의 스티그 라르손을 비롯해서 영화 <렛미인>의 원작가인 욘 아이비데 등등... 요즘 스칸디나비아 문학 열풍이 만만찮다. 그러고보면 북극과 가까운 이들 나라들은 옛부터 북극 신화의 발원지로 유명했다. 산타클로스 역시 이곳 출신이지 않은가. 이 지역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풍부한 상상력과 스토리텔링 능력을 갖고 태어나는 것 같다.

스웨덴 출신인 요나스 요나손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첫 작품부터 봇물 터지듯 이야기를 쏟아낸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말 그대로 100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양로원을 탈출한 알란 엠마누엘 칼손이라는 어느 영감님의 이야기다.

작품은 2005년 5월2일부터 한달 남짓한 기간 동안 알란 영감의 도피행각을 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알란 영감의 파란만장한 과거사가 펼쳐지는데, 한 사람의 과거사인지 20세기 인류역사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다.


1905년 5월2일 스웨덴 플렌시의 소읍 윅스훌트에서 태어난 알란은 10세에 폭약 회사에 취직해서 폭약 기술을 익히다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거세까지 당한다. 병원에서  풀려난 그는 스페인 사회주의자인 에스테반을 만나 스페인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스페인 내전(1936~1939년)을 겪으며 프랑코 장군을 만나고, 다시 미국으로 흘러들어가 핵폭탄 개발을 담당하던 앨러모스에서 커피 나르는 웨이터 일을 하다가 당시 미부통령 트루먼과 친구가 된다. 결국 그의 요청으로 알란은 쑹메이링 장제스 부인을 따라 중국 대륙으로 가게 되는데, 뜻밖에도 이빈 시에서 마오쩌둥의 세번째 부인인 장칭을 구해준다. 시베리아 산맥을 넘어 중국 대륙을 탈출한 알란은 이란의 테헤란에서 비밀경찰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가 1948년 무사히(?) 조국으로 돌아온다. 스웨덴 정부가 제공한 사례금으로 호텔에서 머물며 느듯한 한때를 보내던 알란은 우연히 만난 한 남자를 따라 가게 되는데 그 남자는 다름 아닌 러시아 핵무기 과학자인 포포프였다. 알란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나지만 반공산주의자로 몰려 블라디보스토크 수용소에 갇힌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블라디보스토크를 탈출한 알란은 소위 아인쉬타인의 숨겨진 동생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가 김일성과 김정일을 만나는가 하며, 때마침 북한을 방문한 마오쩌둥을 만나  그에게 장칭을 구해줬던 사례를 톡톡히 받는다. 그 사례는 다름 엄청난 '달러'였다. 이 돈은 미국이 장제스에게 제공했던 대외원조비로 장제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이 차지한 달러의 일부였다. 이 돈으로 알란과 아인쉬타인 동생은 함께 인도네시아 발리로 건너와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곳에서 아인슈타인은 아만다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만다는 정치인이 되었다가 수하르토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프랑스 인도네시아 대사로 임명된다. 이때 프랑스로 함께 오게 된 알란은 68프랑스 혁명이 한창인 가운데 영국의 수상 처칠과 미국의 존슨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인연으로 미국의 스파이로 암약(?)하게 되는데 임무는 다름 아닌 러시아의 핵물리학자인 포포프를 첩자로 포섭하는 일이었다. 80세를 코앞에 둔 알란은1982년 고향으로 돌아와 고양이 한마리와 함께 잘 살다가 고양이를 잡아 먹은 여우를 잡기 위해 폭약을 설치했다가 집을 통째로 날리면서 양로원으로 오게 된다. 그리고 양로원에서 100번째 생일을 맞이한 날 창문을 넘어 탈출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건 사고들...

결국, 갱단의 돈가방을 훔친 알란 노인은 악명 높은 도둑이었던 율리우스. 만년 학생 베니, 코끼리 소냐의 보호자인 <예쁜 언니> 구닐라, 베니의 형 보세, 前 갱단 두목인 예르딘 그리고 그들을 쫓던 수사관 아론손 등을 모두 친구로 만들어 발리로 건너가 행복한 여생을 보낸다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황당무계한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재밌다. 개인적으로 유일한 여성 등장인물이라고도 할만한 구닐라 비에르클룬드, 즉 4.5톤 코끼리 소냐를 키우는 <예쁜 언니>의  과거사가 빠져 있어 무척 아쉽긴 하지만 20세기 역사적 인물들과 주인공 알란 영감을 엮어내는 작가의 솜씨가 제법이다. 물론, 억지스러움도 없지 않으나 인생이 교과서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소설이 사실을 나열하는 것도 아닌지라 '이런 거짓말이 어딨어?'라는 독자의 볼 맨 소리에, 작가는 '여기 있지. 어딨긴 어딨어!'라는 시치미로 응수한다.


그나저나 북극의 사람들이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들의 성격이 주인공 알란 노인처럼 낙천적인가?

갑자기 궁금해진다. 

작가인 요나스 요나손은 1994년까지 기자로, 그 이후에는 성공한 사업가였다가 2005년 건강상의 이유로 은퇴한 후 스위스 티치노에 머물면서 2009년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출간했다고 하니, 요양차 심심풀이로 소설을 썼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아궁~ 부러워라)

사업가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번 만큼 (세금을) 내야 하는 그들 나라'의 제도적 특성상, 요나손의 경제력은 우리나라의 은퇴한 중산층 수준에서 그다지 높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만약 그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일찌감치 은퇴하여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마음껏 글로 엮어낼 수 있었을까? 도대체 한국에서 요양하기 위해 40대 중반에 은퇴하여 한적한 휴양지에서 4년 동안 푹 쉬면서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 걱정에 노심초사 은퇴는 커녕 아픈 몸을 일으켜 억지로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설령, 은퇴했더라도 노후를 생각하며 모아 놓은 돈을 쓰지도 못하고 쳐다만 보면서 하루하루를 한숨속에서 보내야 하지 않을까?


이 작품은 나에게 묘한 '시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부럽고 또 부러웠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책임지는 그 사회제도가 부럽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쓸데없는 기대나 걱정을 하지 않는 주인공의 유연함과 낙천성이 부러웠으며....

삼촌의 유산으로 30년 동안 대학에서 이것저것 공부만 한 베니라는 등장인물의 팔자도 부러웠고...

무엇보다도 작가인 요나스 요나손이 한없이 부러웠다.


우리나라가 그렇게 받고 싶어 목을 매는 노벨문학상을 주관하는 나라가 바로 스웨덴이다. 잘 알다시피, 노벨은 스웨덴 출신으로 다이나마이트를 개발하여 엄청난 돈을 번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작품 속 100세 노인 알란 칼손이 폭약 전문가로 나오는 것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 오히려 스웨덴 출신으로 70년대 활동한 그룹 아바(ABBA)가 언급되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다. 


이런 작품들을 읽으면 솔직히 나도 모르게 애국심이 옅어지곤 한다. 

아무튼, 여러모로 '문화강국은 행복하고 창의적인 국민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말을 재확인할 수 있었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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