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비 Young Author Series 2
크리스 클리브 지음, 오수원 옮김 / 에이지21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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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생이 계획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학창시절에는 친구들과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쌓고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고 내가 꿈꾸던 직장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하고 운명같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식탁을 차리는 현모양처가 되는 꿈이 모두 이루어 졌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까 궁금하다. 비록 하나에서 부터 열까지 원하는 대로만 살아지지는 않았지만, 상처도 있었고 좌절도 있었지만 '나는 나'로 살아간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개념을 넘어서서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바뀌어 버렸다'는 말 처럼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완전히 부정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이한 이들도 있다. 리틀 비에게 일어난 일도 그렇게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나이지리아에서 평범한 소녀로 살아가던 리틀 비는 자신이 살던 마을이 유전 지대라는 이유때문에, 가진자들의 이권을 위해 마을 주민들이 몰살되는 현장을 지켜봐야만 했다. 추격자들을 피해 달아난 리틀 비 자매는 관광지인 해변에서 새라와 앤드루 부부를 만나게 되고 도움을 요청한다.    

 

 한편 새라는 영국에서 잡지사 편집장이라는 직위를 가진 성공한 여성이었다. 칼럼리스트인 남편과 사랑하는 아들 찰리까지 그녀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것. 새라는 성공한 삶과 완벽해 보이는 가정에도 불구하고 내무부 직원인 로렌스와 불륜에 빠지고 만다. 최근에 남편이 그 사실을 알게되자 남편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나이지리아로 여행을 오게 된 것이다.   

 

 리틀 비 자매가 가족을 잃고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 일이나 새라가 리틀 비를 만나게 된 일 모두다 삶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이것은 단순히 원하던 대학에 떨어진 일이나 오랫동안 사귄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 받는 상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낯선 일이다. 리틀 비와 새라의 만남은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해야만 하는 생존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순간 새라의 용기있는 행동으로 위기를 넘기지만 그날의 충격은 모두에게 떠올리고 싶지않는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 후, 2년간의 시간이 흘러 리틀 비는 다시 새라 앞에 나타난다. 리틀 비는 언니마저 잃고 우여곡절 끝에 영국으로 건너와 이민자 수용소에서 나온 상황이었고, 새라는 자살한 앤드루의 장례식을 치르던 순간이었다. 이제 리틀 비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새라 밖에 없고 새라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리틀 비 뿐이다. 리틀 비는 그 날 해변에서 새라와 헤어진 후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이야기 해주고 새라는 리틀 비를 위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흉터가 아름다운 이유는 죽어가는 자에게는 생기지 않는 것이 흉터이기 때문이다. 흉터의 의미는 '생존'이다. (p.22)"

"인생이란 우리를 도망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법이다. (p.143)"

 

 우리는 이웃을 돌아보아야 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수도 없이 배우면서 자란다. 하지만 막상 특정한 상황이 닥치면 행동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새라의 남편인 앤드루의 경우도 리틀 비 자매를 만나기 직전까지 타인을 배려하고 실천하는 삶에 대한 칼럼을 썼을 만큼 의식이 있는 지식인이지만 막상 무장한 무리들이 리틀 비 자매들을 대신해서 희생할 것을 강요하자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것은 앤드루 뿐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안다는 것과 실천한다는 것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높은 벽이 존재한다.    

 

 또한 리틀 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난민 문제'는 정치적인 면과 경제적인 면에서 결코 쉽게 결정하고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못된다. 난민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일인 만큼 인류애적인 측면에서는 그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맞겠지만 세계적으로 난민 문제에 긍정적인 나라들은 드물다고 봐야 한다. 환경 다큐를 통해 남태평양의 투발루 섬은 해마다 섬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상황이지만 국제사회의 무관심 속에 섬주민들이 방치되어 있다고 들었다. 그 외에도 내전 지역을 탈출한 난민들을 비롯해서 '보트 피플'에 대한 냉대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사회의 경우도 최근 몇년간 탈북자들의 수가 엄청나게 늘었다고 들었다. 같은 민족이다 보니 그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 수가 많아지다 보니 정착 지원금 문제부터 돈과 직결되고, 학생들의 경우 학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든지 구직 등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가 심각하다. 목숨을 건 탈출로 새로운 삶을 보장받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 사회 활동을 전혀 하지 못하고 좁은 아파트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야만 하는 현실을 생각할 때, 장기적인 면에서 대안이 나와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을 덮은 후에도 마음이 참 무거웠다. 소설의 모티브가 2001년도에 난민 보호를 요청했다가 이민국으로 송환되자 자살을 했던 앙골라인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니, 공지영의 <도가니>를 읽었을 때에 버금갈 만큼 마음이 무겁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빈부의 격차가 너무나도 심하고 권력에 희생되는 힘 없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세계적으로도 빈곤과 전쟁으로 고통받고,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희생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로렌트의 말처럼 새라가 아무리 노력해도 리틀 비의 삶이 나아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교와 국가를 초월하여 구호활동을 펼치는 수많은 봉사자들을 떠올릴 때,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그들 나라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누군가의 생존을 지켜주기 위해 '행동하는 노력'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지를 깨닫게 한다.

 

"그래, 바로 이거야. 내 마음만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어. 더 이상 달아날 필요가 없는 마음. 세상 돈 전부를 합친 것보다 소중한 나의 마음. 그 마음의 진정한 고향은 바로 인간이야. 이런 나라, 저런 나라에 살고 있는 인간을 말하는 게 아니야. 내밀하고 저항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야말로 바로 내 마음의 고향이었던 거야. (p.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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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 브로드 1
팻 콘로이 지음, 안진환 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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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생이란 원하는대로만 살아지지 않는 것.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운이 좋았던 한 순간'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선택과 실수과 좌절을 겪은 결과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돌아보면 그 순간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수많은 질문을 하게 되지만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야 말로 개개인을 성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한 평생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살았던 촌부의 삶이나 대도시에서 성공하여 한 시대를 풍미한 삶을 살았다거나 하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누가 뭐라해도 인생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사우스 브로드> 이 책을 읽으면서도 글자 그대로 '인생은 아름답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책의 내용은 1960년대 미국 남부 찰스턴을 배경으로 열여덟 살인 주인공 레오폴드 블룸 킹을 중심으로 그의 가족과 친구들,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인공 레오는 신앙심 깊은 어머니와 인자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모든 면에서 형과 비교되는 못난 동생이었다. 어느날 형이 갑작스럽게 자살하고 그 현장을 목격한 레오는 충격으로 방황하게 된다. 부모님 조차도 스스로의 상처때문에 괴로워 하느라 레오를 보듬어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중대한 범죄에 휘말려 누명까지 쓰게 된다. 이어지는 재판과 사회봉사명령, 정신과 상담 등 평범해 보이는 소년에게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싶을 정도다.

 

 이쯤에서 도대체 어떤 점이 아름다운 인생이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상 여기까지는 지난 시간에 대한 설명이자 배경이나 다름없고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은 그가 의무적으로 행해야 했던 것들이 거의 마무리 되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지금까지는 친구도 없이 지내왔던 레오가 찰스턴의 명문가 자녀들을 비롯해서 고아 남매, 이웃의 쌍둥이 남매, 그리고 풋볼팀의 흑인 코치의 아들과 같이 다양한 계층의 친구들을 사귀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과 그 후의 삶까지 비추고 있다. 

 

 여기서 배경이 되는 시공간이 1960년대 후반 미국 남부 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리고 주인공의 친구들이 다양한 계층이라는 점은 그들 내부적으로도 많은 갈등의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가령 그가 속해있던 풋볼팀에 공립학교 최초로 흑인 코치가 오자 감독을 비롯해서 팀원들이 모두 팀을 떠나버리는 상황이라든지, 학교 내에서도 인종차별과 갈등이 심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겉으로는 명문가 임을 내세워 자기 보다 못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려 하거나 경멸하면서도 정작 그들의 삶 속에는 가식과 거짓, 비도덕적인 행동으로 얼룩진 것을 여과없이 들추기도 한다.

 

  이쯤에서 또 한번 물을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어디가 아름다운 인생이냐고 말이다. 주인공 레오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울고 웃고 고민하고 괴로워하지만 그 속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희생하는 모습 때문은 아닐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다. 물론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평생을 고통속에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묻어버리고 소중한 추억만 간직하게 되는 것 같다. 때문에 어느 시점에서건 인생을 뒤돌아 보면 '그래도' 좋았던 기억, '그럼에도' 행복했던 순간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비유할 때, 드라마틱하고 소설같고 영화 같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개인적으로 그 의견에 공감한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으니 인생에는 예고편이 없다는 사실이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성공을 즐길 줄 아는 것보다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리고 주인공이 마지막에 되내인 말처럼 우리 삶에는 일어나지 못할 일이 없다. 좋은 일이든 슬픈 일이든 그 모든것이 하나가 되어 인생인 만큼 다가올 미래를 숙연한 마음으로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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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운명을 바꾼 역사의 순간들-군사편>을 읽고 리뷰해주세요.
인류의 운명을 바꾼 역사의 순간들 : 군사편
탕민 엮음, 이화진 옮김 / 시그마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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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전쟁'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내심으로야 그 말에 반박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씁쓸할 뿐이다. 해묵은 영토분쟁, 이념의 갈등, 서로 다른 종교, 경제적 이해관계, 내분을 피하기위해 전쟁을 일으킨 경우 등 그 이유도 다양하다. 안타까운 것은 누구나 입을 모아 전쟁이 있어서는 안된다며 평화를 부르짖는 가운데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전쟁은 곧 파괴다. 건물이나 집 같은 눈에 보이는 것들 뿐만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과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힘을 모아 재건한다. 인류 역사는 그렇게 파괴되고 부서지고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 2차 세계 대전'과 같은 대규모 전쟁이나 아프리카 대륙의 이름 없는 나라에서 벌어지는 내전이나 비극적인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놓을 만큼 영향을 미친 전쟁이 있을 것이다. 

 

 <인류의 운명을 바꾼 역사의 순간들(군사편)> 이 책은 전쟁 이라는 주제를 통해 세계사를 조명하고 있는데 '군사편'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인물을 중심으로 한 서술로 흥미를 자극하고 있다. 내용면에서는 지금까지 정설로 알려져 왔던 '역사의 순간'에 대해 새로운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기존의 지식에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특히 관심을 끌었던 내용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이용했다는 내용이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교란작전으로 몽고메리 장군과 똑같이 생긴 인물을 몽고메리 장군인 것 처럼 꾸며 아프리카로 보냈다는 사실, 몽골의 기병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몽골마, 히틀러가 유태인을 그토록 미워했던 이유 그리고 이중 간첩으로 유명했던 마타 하리의 생애도 인상적이었다. 독서를 통해 지금까지 알지못했던 세계를 경험하고 새로운 지식을 쌓는다는 것은 언제나 흥분되는 일이다.

 

 한편으로는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기보다 풍문으로 떠돌던 소문들에 관한 내용을 나열한 경우도 많았는데 예를들어 히틀러는 자살하지 않았다 라는 주장이나 잔다르크는 화형된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생존했었다 라는 주장 등이 그렇다. 그리고 한신의 죽음은 억울한가, 쿠바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체 게바라가 왜 콩고에 갔을까 등에 대한 설명에서도 마찬가지로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시 못하고 의견만 분분해 산만한 느낌을 준다. 결국은 "이러이러한 소문(주장 혹은 설)도 있다." 라고 시작해서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로 끝을 맺는 식이어서 아쉽기도 했다. 

 

 역사란 일어난 사실이 전해는 것인데도 왜곡이나 오류가 많다. 생각해보면 우리 근대사에서 명성황후의 사진을 놓고도 말들이 많지 않은가. 일제의 역사 왜곡이 가장 큰 역할을 하긴 했지만 고대사도 아니고 근대사에서 국모의 모습이 불확실하다는 것은 기가찬 노릇이다. 그뿐 아니라 서로 이해관계가 얽히다 보면 같은 사건을 놓고도 다른 해석이 나오는 등 역사는 파헤칠수록 새롭기만 한 양파껍질 같은 것이다. 이번 독서를 통해서도 새로운 사실 알게됨과 동시에 새로운 의혹이 생긴만큼 앞으로 비슷한 주제에 관한 글을 보면 예사로이 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진실에 좀 더 가까와지는 오겠지, 라고 스스로를 다독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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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인디스토리 엮음 / 링거스그룹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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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살아가는데 불확실성이란 것이 존재하는 것 처럼 보편적인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때, 뒤늦게 원인과 결과를 규명하려는 노력들이, 그런 현상이 참으로 흥미롭다. 헐리웃의 영화들처럼 국내 영화 시장에서도 제작사와 감독, 배우라는 삼 박자가 어우러진 블록버스터급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한지 꽤 되었고 한국영화가 예매순위를 점령한 때에도 저예산 영화나 독립영화는 개봉관조차 잡지 못하는 현실을 겪곤 했다.

 

 영화 <워낭소리>의 경우도 제작 당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수많은 독립영화들 중 한 편에 불과했다. 심지어는 왠 생뚱맞은 소리냐고, 세상과 타협하려는 자세가 부족한 감독의 고집이 또 시작되었구나 하는 시선으로 비춰졌던 영화였다. 하지만 개봉 직후 부터 꾸준한 입소문으로 독립영화 기록이라는 5만 관객을 가뿐히 넘어 서서 마침내 300만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죽을 각오로 만들었다는 감독 자신조차도 그 정도일줄은 몰랐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결과였던 것이다.  

 

 내 아이의 경우는 소를 직접 보는 것만도 신기해 하는 세대이나 70대이신 아버지는 어린 시절 소꼴을 먹이며 하루를 보내신 기억을 가지고 있는 세대다. 농경 민족에게있어서 소는 재산 목록의 윗부분을 차지하는 가치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노동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다른 가축과도 구분되는 위치에 있었다. 예전에는 어린 송아지를 데려다가 늙을 때까지 함께 사는 경우가 흔했고 죽으면 고기를 팔지 않고 땅에 묻어주거나 동네 사람들에게 내어주곤 했다고 하는데, 궁핍했던 시절에도 소와 각별한 인연을 나누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책의 내용은 영화에 대한 메이킹 필름이자 비하인드 스토리인 만큼 영화의 감동을 뒤로하고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구상단계의 어려움, 제작비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 했던 일, 현실적으로 계속 상주할 수가 없다보니 젊은 소가 새끼를 낳는 장면이나 축사가 무너지는 장면 등 원하는 장면을 찍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도 공감이 갔다. 하지만 쇼킹한 발언도 있다. 처음에 촬영을 시작할 때만 해도 너무나 늙고 힘없는 소라서 과연 필름의 분량을 채울 수나 있을까 걱정했다가 생각보다 촬영기간이 길어지니 나중엔 왜 빨리 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니 너무한다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이별하는 모든 것들은 썩어서 다시 나무로 꽃으로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저물어갈 수밖에 없다는 게 자연의 일이라면 생이 다해도 관계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자연의 일일 것이다. (p.43)"

 

 연로하신 노부부와 평균 수명을 훌쩍 넘긴 늙은 소의 이야기~ 스토리가 정해진 것도 아니고 일상을 카메라에 담은 다큐멘터리 형식이어서 더욱 가슴에 와닿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인간과 짐승의 교감을 비롯해서 할아버지와 소, 할머니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의미, 존중과 배려 그리고 정, 무엇보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가끔씩 우리의 삶 자체가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상상을 많이 하는데 이 영화의 경우가 정말 그렇다. 비록 영화가 대박난 이후 잡음도 많았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생활도 전과 같지는 않겠지만 영화를 통해 느꼈던 감동 만큼은 그 모든 것과 비교될 수 없을 만큼 값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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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이 인간이 될 수 있을까>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로봇이 인간이 될 수 있을까? - 수수께끼와 역설의 유쾌한 철학퍼즐 사계절 1318 교양문고 14
피터 케이브 지음, 남경태 옮김 / 사계절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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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이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어린아이 스럽다고 해야할지 혹은 너무나 철학적인 질문이라고 해야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일단은 이 책이 철학에 관한 책인 만큼 철학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어야 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사람을 먹으면 왜 안 되는가?> 라는 책을 쓴 피터 케이브 라는 저자의 책이다. 결국 두 권의 책은 내용면에서 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우선 제목에서 연상되는 것은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했던 <바이센테니얼 맨> 이라는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미래 세계, 가사 도우미용 로봇으로 만들어진 앤드류 라는 로봇은 마틴 가족과 함께 살아가게 된다. 앤드류는 제조상의 사소한 실수로 인간과 같은 감성을 가지게 되면서 가족들과 긴밀한 유대감을 형성하게 되는데, 세월이 흘러 마틴가의 후손과 사랑에 빠지면서 인간이 되고자 갈망한다. 그는 위원회가 거부하는 조항들을 한 가지씩 수정해 가면서 인간으로 인정받기를 원하고 마침내 영원한 삶까지도 포기한다.

 

 요즘 울 아들이 푹 빠져있는 '디지몬' 이라는 만화를 보면 인간과 디지몬들이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주인공들의 활약이 주를 이룬다. 또한 '액스맨' 이라는 영화에서도 돌연변이들에게 인간과 똑같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고 그들만의 세계를 인정해 줄것을, 그들이 인간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러한 상황들을 철학적으로 해석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정말 로봇은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앞서 읽었던 <사람을 먹으면 왜...> 에서와 마찬가지도 이 책에서도 황당 질문과 궤변도 눈에 띈다. 말도 많고 주장도 다른 "어디부터 사람인가?" 하는 질문에서는 인간을 죽이는 행위가 잘못이라면 인간을 낳지 않는 것도 잘못이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슬람과 서양의 도덕관이 다른 것은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라는 내용과 도덕도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이라는 주장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사람은 왜 '허구'인 것을 알면서도 감정을 변화를 느끼는 것인지, 모작임이 밝혀지는 순간 왜 예술적 가치가 떨어지는가 하는 질문 등은 분명 반박할 내용이 있다고 생각되는데도 불구하고 순간 작가의 의도에 말려드는 느낌이 들어 약이 오르기도 했다. ^^;;   

   

 중요한 것은 인류의 역사를 뒤돌아 볼 때, 특정 현상이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리고 그 부분에 대한 이설이 없어지면 더이상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보라. 하늘의 별은 왜 반짝이며, 자신은 어디서 태어났으며, 비는 왜 내리는지, 계절은 왜 바뀌는지,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 의 할머니까지 올라가면 누가 있는지 등 어른들에겐 질문 거리가 되지 못하는 것들이 그들에겐 엄청난 사실이 될 수도 있다. 당연한 현상에 질문을 던지고, 기존의 명제를 뒤집는 새로운 가설을 세우고 도전하는 것이야 말로 사고의 폭을 넓히고 사상을 발전시킨 원동력이라고 믿는다.

 

 다시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 으로 돌아가 보자. 인간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다는 것과 '인간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포인트는 바로 그 점이 아닐까?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인간보다 더 따뜻한 앤드류의 마음과 지고지순한 사랑에 그가 인간으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면서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는 눈물을 떨구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과연 그는 로봇인가 아니면 인간인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진정 무엇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아, 철학은 정말 어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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