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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죽인 여자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푸른숲 / 2023년 12월
평점 :
온몸이 토막 난 채 불에 탄 소녀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자극적인 이 한 문장의 글만으로도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은 이 책은 표지마저 강렬한 빨강을 채택해서 스릴러 독자들에게 엄청난 기대감을 품게 했다.
그래서 책 도입부에서부터 언제쯤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단서를 찾아서 다시 한번 사건 당시로 돌아가게 될지 기대하게 했고 얼마나 잔인한 살인마가 숨어있을지 궁금하게 했다.
그렇다면 이런 나의 기대를 충족할 만한 누군가가 있었거나 엄청난 반전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요다.
사실 이 책은 시작부터 내 예상과 달랐다.
스릴러 소설이라면 강렬한 도입부나 혹은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후부터 내내 긴장감이 넘쳐흐르고 과연 누가 이런 짓을 했을지 나오는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행동이나 말 한마디도 흘려듣지 않는다.
이런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소한 것에 중요한 단서가 숨겨져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사건보다 이 사건 이후 가족들에게 벌어진 일들에 대해 더 초점을 맞춘 걸로 부족해 사건에 대해선 그 이후 별다른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단지 이 사건으로 이후의 이야기를 각자 사건과 관련 있는 사람들의 시점에서 풀어놓았고 독자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사건의 진실을 찾을 수 있게 해놨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에는 종교에 관한 부분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잔인하게 살해당한 소녀 아나의 가족들은 부모 모두 독실한 신자이고 그중에서도 특히 엄마의 신앙심은 대단했다.
그런 가족의 분위기에서 무신론자인 둘째 리아라는 존재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지만 그런 가족의 갈등은 아나의 장례식 때 모두의 앞에서 신을 부정하는 리아로 인해 결국 깨지고 만다.
리아에게는 살인범을 잡기 위한 노력을 하기보다 신의 뜻으로 모든 걸 돌려 잊고자 하는 부모를 비롯한 친척과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을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리아의 행동은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 여기는 종교인으로서는 손가락질 받을 만한 행동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부분에서 벌써 이 가족이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될지 예상할 수 있었다.
아나 엄마의 맹목적인 신앙심을 그대로 이어받은듯한 첫째 딸 카르멘 역시 리아를 배신자로 여기고 절대로 용서하지도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랬던 카르멘이 먼 길을 돌아 리아를 찾아온다.
그러고는 아버지의 죽음을 스쳐가는 이야기처럼 던져놓는다.
이렇게 얼핏 봐서 화목해 보이던 가족은 리아의 죽음 이후로 뿔뿔이 흩어져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되지만 그런 가족을 다시 모은 것 역시 리아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각각의 시점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게 되지만 범인의 정체는 너무나 쉽게 드러난다.
이야기의 중심은 범인의 정체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뚜렷한 긴장감이나 아슬아슬한 긴박감이 없지만 읽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던 이 가족의 비극은 차라리 잔인한 살인마가 있었더라면 하는 마음까지 생기게 했다.
편향된 사고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이 만나면 얼마나 큰 대미지가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