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없이도 인간이 선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폴 챔벌레인 지음, 김희진 옮김 / 소망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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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정통 변증론을 읽어본다. 기독교인, 무신론자, 진화론자, 인본주의자, 상대주의자라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어느 날 기묘한 초청장을 받아 한 자리에 모인다.(이 콘셉트는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에서 본 듯하다) 그런데 하필 모인 사람들의 대화 주제가 도덕과 윤리(정확히는 객관적인 도덕적 기준이 존재할 수 있는가)다.


몇 주간에 걸친 정기적인 만남 과정에서, 차근차근 각자의 주장들이 논파된다.(대화는 기독교인이자 아마도 논리학이나 윤리학 교수로 보이는 ‘테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도덕이 주관적일 경우 생길 수 있는 문제가 지적되고, 그 도덕성은 단순한 합의나 사회적 계약, 또는 진화의 결과물로 세워질 수 없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마지막 만남에서 테드는 도덕의 기초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제시한다. 당연히 감정적으로 반발하는 사람들 투성이였지만, 테드는 단순히 신앙을 가지라는 게 아닌, 이제까지 해 왔던 것과 같은 학문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으로서 유신론을 고려해 보라고 설득을 시도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은 진지하게 그 가능성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사실 드라마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내용은 매우 건조(?)한 책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윤리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주제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 채워져 있으니까.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눈을 떼지 못하고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오히려 그런 ‘밀도’가 딱 내 취향에 맞았던 걸지도.


책을 읽는 내내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1부가 떠올랐다. 정확하게 동일한 작업을 70여 년 전 루이스는 전쟁(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영국에서 BBC 라디오 방송으로 시도했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을 보면, 이 논의가 할 일 없는 이들의 시간 때우기 토론 정도가 아니라는 것, 죽음의 위협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에도 집중하게 만드는, 어쩌면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에 실려 있는 논의는 여전히 유효하고, 유용하다. 물론 책 속에 묘사되는 방식의 대화가 실제 생활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사실 여기 등장하는 다양한 관점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대개는 자신의 전제를 인식하지 못한다). 문제는 책에서처럼 “끝까지” 생각을 밀어붙이지 못하니 자신이 가진 생각의 한계도 인식하지 못한 채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 변증의 효용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변증이라는 건 오히려 일상 가운데서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와 대화를 통해서 좀 더 설득력 있게 전달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적절한 때에 적절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알아둬야 한다는 건 두 말 할 필요가 없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살짝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함께 읽고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면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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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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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식히기 위해 늘 찾는 작가가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 주인공. 이번에도 동네 도서관에 가서 가볍게 그의 책을 빌려왔다(아니 빌려온 줄 알았다). 작가가 이번에도 꽤 흥미로운 주제를 물었구만 하는 생각으로 책을 덮고 나서 리뷰를 쓰려고 봤는데, 엇? 히가시노 게이고가 아닌데? 히라노 게이치로, 작가 이름이 다르다. 이렇게 ‘히’와 ‘게’로 나를 혼동시킨 건가 싶지만... 뭐 김성훈이라고 분명히 썼는데 내 이름으로 착각하는 건 전적으로 읽은 사람의 잘못이다.


작가의 이름이 히가시노 게이고든, 히라노 게이치로든 중요한 건 이야기가 재미있다는 점일 것이다. (작가 이름도 제대로 몰랐으니) 당연히 정보가 전혀 없이 펴든 소설은 매우 일상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병원에서 진료 순서를 기다리는 환자다. 그런데 의사와의 대화가 좀 이상하다. 그리고 작가는 단도직입적으로 첫 수를 찔러 들어온다. 주인공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다. 그것도 3년 만에.





자 이렇게 되면 소설의 장르가 또 궁금해진다. 이건 미스터리, 혹은 호러인가? 하지만 안심하자. 전혀 그런 분위기로는 흘러가지 않는다. 물론 죽을 당시의 기억이 없었던 주인공은, 자신이 자살한 것 같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극구 부정하면서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지를 나름 추적해 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소설의 좀 더 중요한 무대는 주인공 데쓰오의 집이다. 지난 3년 동안 홀로 아들을 키우며 살아온 아내 지카와의 관계.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대신해 주인공을 키워온 어머니, 그리고 지카와 그녀의 부모님(주인공의 장인 장모) 사이의 관계까지. 그러니까 작가는 죽음이라는 것이 그 당사자 주변의 여러 관계들에 큰 영향을 준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지카는 남편의 죽음(자살)이 자신 때문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을 마음속에 큰 돌처럼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일찍 남편을 잃은 데쓰오의 어머니는 또 다시 아들마저 잃고서 (티를 내지는 않지만) 큰 충격을 안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며느리인 지카와의 관계를 삐걱거리게 만들었고. 사람은 살아서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존재인 것 같다.


전국(아니 전 세계)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그들이 모여서 협력단체를 만들고, 당연히 그들을 의심스럽게 보고 나아가 혐오하는 이들까지 출현하면서 잠시 장르가 사회물로 가나 싶었지만, 작가는 다시 주인공의 심리에 집중한다. 적어도 외부적인 위협은 그리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자신의 죽음의 진실과, 그의 정신을 계속해서 헤집는 경비원 사에키(그의 말은 글로 읽는 데도 구역질이 날 정도다)와의 만남, 그리고 마지막에 갑자기 나타난 또 다른 반전.





결말부의 시간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흐르는 것 같다. 갑자기 살아난 사람들은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주인공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조금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죽음이라는 건 우리의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무엇인 것이다.


이제까지 자신의 죽음에 관해 누군가의 탓을 하려고(원인을 찾으려고) 애썼던 테츠오는 비로소 자신이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를 진심으로 후회한다. 다시 살아와 보니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더욱 실감했달까. 우리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뒤늦은 후회를 반복하는 것 같다.


기발한 소재를 재로 삼아 우리의 (평범해 보이는) 삶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괜찮은 작품을 써냈다. 이 작가도 기억해 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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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종교는 왜 이렇게 쉽게 위험한 관계가 될까요?


오스 기니스의 《정치와 종교, 그 위험한 관계에 대하여》 1장 “다양성을 포용하는 세계”는 이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저자는 단순히 “예의를 지키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서로의 가장 깊은 신념, 종교, 이념, 세계관이 다를 때 우리는 자유를 파괴하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번 영상에서는 1장의 핵심 내용 가운데 “미국인이 직면한 다섯 가지 도전”을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깊은 종교적·이념적 차이와 더불어 사는 문제, 세속화 이론의 한계, 글로벌 공적 광장의 등장, 문화전쟁으로 흔들리는 미국의 모델, 그리고 종교와 공공생활의 새로운 분수령을 차례로 해설합니다.


이 책은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쓰였지만, 그 문제의식은 오늘 대한민국 사회와 한국 교회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정치적 진영화, 세대 갈등, 젠더 갈등, 종교와 비종교의 긴장, 그리고 유튜브와 SNS에서 증폭되는 조롱과 혐오의 언어는 우리 사회의 공적 광장도 점점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공적 광장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신앙의 확신을 지키면서도 타인의 양심과 자유를 존중하는 길은 가능할까요? 이 영상은 그 질문을 함께 생각해 보기 위한 해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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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누스는 24살에 부제가 되어 갈리아 방어에서 성과를 거두었고, 이후 콘스탄티우스의 죽음으로 단독 황제가 됩니다. 그러나 그가 역사에서 가장 강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콘스탄티누스 이후 강화되던 기독교 우대 정책을 되돌리고, 로마의 전통 이교를 다시 부흥시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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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과연 정말 ‘배교자’였을까요? 아니면 처음부터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이교도 황제’였을까요? 또 그의 행정개혁과 종교개혁은 왜 현실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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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상에서는 율리아누스의 개혁, 이교 부흥책, 안티오키아에서의 충돌, 페르시아 원정과 죽음까지 살펴보며, 한 황제의 이상이 현실 정치와 종교 지형 앞에서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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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큰소리쳐 놓고는

내 마음대로 해석해 버리는 일이 다반사인 상황에서,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나의 정략적 사설을 늘어놓는 일이 다반사인 상황에서,

교회의 건강을 위해 중요한 것은

말씀의 권위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관한 싸움이 아니다.

그것은 권위 있는 말씀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어떤 목적으로 써먹고 있느냐를 검증하는 일이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믿음만큼이나 실제 해석의 과정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해석학적 우상숭배’를 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권연경,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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