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에는 신앙과 교회, 교육, 동양고전, 로마사, 국제정치와 성경의 역사까지 다양한 분야의 책 11권을 읽었습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교회가 붙들어야 할 진리, 전통교회가 바꾸어야 할 형식, 질문을 되찾아야 할 교육, 로마제국의 쇠퇴와 미중 경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함께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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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 에이미의 은혜 - 내 존재와 삶을 채우시는 하나님
박순용 지음 / 아가페출판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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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조금 생소할 수 있다. 특히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거나, 최소한 헬라어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다면 더욱 그럴 터. 책 제목에 쓸 정도면 이 책의 내용에서 “에고 에이미”라는 구문이 꽤 중요하게 다뤄질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란, 영어의 I am과 비슷한 용법이다. “에이미”는 영어 be동사와 유사한 에이미동사의 1인칭 단수형인데, 영어로도 어떤 문장에서 I am 이라고만 끝마치면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처럼, 헬라어에서도 마찬가지다.


저자는(그리고 여러 학자들은) 이런 조금은 어색한 구문에서 특별한 신학적 의미를 찾아낸다. 이 표현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계시하셨던 “여호와”(저자는 또 여기에서 히브리어 본래 발음에 더 가까운 건 ‘야웨’라고 쓰는데, 애초에 이 단어의 정확한 발음을 모른다는 상황에서 야웨가 더 가까운 발음이라는 것 또한 추측일 뿐이다.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기에 기억과 전승을 통해서 단어를 발음하는데, 일부에서는 ‘야웨’의 모음은 ‘그 이름’이라는 뜻의 “하 쉠”이라는 단어에서 모음을 가져다가 붙였을 뿐이라고 보기도 한다)라는 이름과 같은 의미라는 것. “여호와”라는 단어의 의미로 추정되는 것 중 하나가 “나는 나다”, 혹은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라는 데에서 의미적 유사성이 있다는 말.





그렇게 저자는 “에고 에이미”라는 구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한 신성 주장을 읽어낸다. 다만 이 주장에는 한 가지 반론도 존재하는데, 요한복음에서 “에고 에이미”라는 구문을 말한 예수님 이외의 인물이 존재한다는 점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이 사람이 정말 그 사람이 맞는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하자, 그가 나서서 말한다. “에고 에이미”. 번역하면 “나야(나 맞아)”다.(요 9:9) 그렇다면 이 표현이 예수님만 사용하신 독특한 표현이라는 주장이 조금 헐거워진다.


물론 그것(요 9:9)과는 상관없이 요한복음의 저자가 예수님의 신적 주장이라는 의미를 담아 이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고 보는 것도 크게 무리한 주장은 아니다. 어쨌든 요한복음에서는 이 구분이 반복되면서 예수님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다양한 모습으로 계시하셨으니까. 거기에 집중하면 된다.


다만 책에서 빠진 설명이 하나가 있는데, “에고 에이미”라는 구문이 갖는 또 한 가지의 독특한 점은 헬라어 동사에는 애초에 성과 수가 다 포함되어 있어서, 굳이 주어(이 경우에는 “에고”)를 붙이지 않아도 뜻이 통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에이미”라고만 써도 “나는 ~이다”라는 의미가 다 있다. 여기에 굳이 1인칭 주격 대명사인 “에고”를 붙이면 이중으로 “나”를 강조하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조금 의역하면 “그게 바로 나다” 정도일까.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는, 그렇게 시작한다.





책은 요한복음의 “나는 ~이다”라는 아홉 개의 본문과 저자가 생각하기에 중요하다고 여기는 또 한 가지 주제를 각 장에 펼쳐서 설명한다. 리뷰 초반에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에 트집 아닌 트집을 잡았지만, 책 내용 자체는 표준적이고 안정적인 해석과 적용이 담긴 설교문이라는 느낌이다.


사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는 ~이니”라는 연속되는 구절들은 내용도 아름답고, 깊은 교리적 진리를 담고 있어 사랑받는 본문들이다. 이런 긴 강화는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요한복음만의 독특한 특징적 본문이다. 책은 이 본문들을 너무 어렵지 않게 잘 설명한다. 누구에게 권해 줘도 나쁘지 않을 만한 책일 것 같다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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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은 과학에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 아니라

훨씬 더 적극적이며 우호적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창조 신앙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우리가 (모든 면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주신 지적, 이성적 능력으로

창조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과학을 포함한 모든 지적 노력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닮은 모습의 한 면을 드러내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이해해 가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 강영안, 우종학, 『대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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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낚는 어부의 기술 - 토머스 보스턴이 전하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영혼을 얻는 목회와 전도의 원리
토머스 보스턴 지음, 아가페 편집부 옮김, 이서용 감수 / 아가페출판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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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청교도의 향기가 짙게 묻어 있는 작은 책은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걸까. 문체부터 내용 전개 방식까지, 마치 오래된 오크통 속에서 숙성된 황금빛 액체처럼, 진한 맛이 배어 나온다.


저자가 이 책에서 살피는 성경구절은 딱 하나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에서 저자는 우리(특별히 목회자들이지만 그리스도인 전반을 배제하는 건 아니다)가 그분을 따라가는 것은 의무이며, 그럴 때 우리는 사람을 낚는 사명과 그 결실을 보게 될 것이며 이 모든 일은 그분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약속을 받는다고 말한다.


1부에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어떤 방식으로 그의 일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2부에서는 어떻게 이 일을 해 낼 수 있는지에 관해 길게 설명한다. 목회자의 부족함에도, 이 일을 해 낼 수 있는 것은 결국 성령의 도우심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확신 어린 결론이다.





청교도 특유의 담담함이랄까, 우직함이 느껴진다. 부족하면 어떤가, 능력이 없으면 어떤가, 이 일을 맡겨주신 분이 함께하신다면 우리는 해 낼 수 있다는 말이 현실을 모르는 사람의 글처럼 느껴질 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 시대를 살았던 청교도들은 온갖 박해와 차별과 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켜왔던 이들이다.


사역적인 면에서도 청교도들이 그 시대의 인플루언서는 분명 아니었다. 주류는 국교회였고, 사실 사람들의 신앙의 열의도 그리 높지 않았던 시대였다. 책 속에서 이를 반영하는 구절이 나온다. “목이 터지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간절히 설교한다 해도,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진심으로 회개하거나 영혼을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상황이 이토록 악화되기 전에 하나님이 생을 은혜롭게 마치게 하시고 그분의 품으로 데려가신 선배 사역자들은 얼마나 복된 자들인가!”


악전고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성령을 의지하면서, 자신의 소명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라는 권고는 저자 자신에게 하는 각오이기도 했던 것 같다. 소명이라는 말의 무게감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던 이들의 글은 언제나 울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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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 민심을 얻는 왕도정치의 고전 ㅣ 명역고전 시리즈
맹자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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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에는 동양 고전을 두 권 째 손에 든다. 월초에는 논어를, 월말에는 맹자를 읽게 된다. 공자와 맹자, 뭔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느낌을 준다. 주로 짧은 경구들 속 공자는 뭔가 심오하면서도 동네에서 만날 수 있는 아저씨 같은 면모도 가끔 보여주는 친근한 면이 있었다면, 맹자는 입만 열면 요순 시대를 말하면서도 종종 모순되는 행동(요순의, 또는 자기 자신의)을 변명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좀 보인다.


물론 책 전반에 걸쳐서 공자와 맹자가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있던 한계가 짙게 드리워있다는 느낌도 준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이상을 국정 운영에 반영해 보고자했던 정치이론가였지만, 그들이 말하는 인, 군자 같은 사상은 춘추시대가 저물어가고 전국시대가 시작되는 마당에 각국의 권력자들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말들이었다.


그런데 또 그렇다고 해서 맹자가 어디 산골에 틀어박혀 몇 안 되는 제자들하고만 지냈던 서생도 아니었으니, 난세일수록 인재는 더 필요한 법이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맹자같은 사람들 주변에는 또 인재들이 모이는 법이라 수백 명의 종자들을 거느리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며 유세를 했다고 하니, 오늘날로 치면 꽤 유명한 인플루언서였다.





군자와, 인에 대한 강조는 공자와 비슷하지만, 요순, 또 우탕과 문무 등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인물들에 대한 지나친 숭배랄까, 윤색이랄까 그런 것도 좀 보인다. 어떻게든 그들을 좋은 사람으로 덧칠하려는 시도. 이쯤 되면 거의 신앙인데, 문제는 누가 공자와 맹자에게 그런 것들을 가르쳐 주었는가가 의외로 불분명하다는 점. 일종의 유학의 신화가 아닌가 싶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역성혁명에 대한 옹호인데, 양혜왕 하편을 보면 은나라의 창업군주인 탕이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을 쫓아내고 왕이된 것을 가리켜,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을 받고는, 걸은 인과 의를 해치는 인물이니 군주가 아닌 ‘한 사내’일 뿐이라는 논리로 이를 옹호한다. 왕이 왕 같지 않으면 내쫓아도 상관없다는, 꽤나 충격적인 가르침이다. 유학은 결코 점잖은 체 하는 샌님들의 학문이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측은지심도 여기 맹자에 나온다. 맹자는 여기에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과 사양할 줄 아는 것,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것을 더해 사람의 사지처럼 반드시 가져야 하는 무엇이라고 본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자신의 그릇이 안 되는데도 사양할 줄을 알지 못하는지, 그저 자리만 준다고 하면 덥석 받아먹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예나 오늘이나 인재를 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맹자는 신하된 가장 중요한 도리는, 단지 군주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는 것이 아니라, 군주가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간하는 것, 그리고 도무지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물러서는 것이라고 보는 듯하다. 트럼프니, 윤석렬이니 하는 무능하고 악한 지도자들 옆에 붙어서, 그저 자신은 시키는 것을 했을 뿐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변명이나 일삼는 한심한 무리들은 맹자의 눈으로 보기에는 신하 실격이다.


이 외에도 군자는 동물이 죽어가는 소리를 듣고서 그 짐승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는 구절에서는 동물에 대한 측은지심도 엿보인다. 다만 채식주의를 하라는 말은 아니다. 고기는 공자님도 사랑했고, 맹자 역시 생선도 곰발바닥(!)도 좋아하는 요리 재료라고 말한다.





“맹자” 역시 다양한 번역과 버전으로 나와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경우 여러 중요한 주석가들의 의견을 반영해 현대어로 번역을 했지만, 워낙 오래 전 글이다 보니 어느 정도의 해석이 붙어 있었더라면 이해하는 데 좀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맹자의 시대에 자신의 뜻을 온전히 다 펼쳐본 인물이 누가 있을까 싶다. 시대적 한계와 상황의 제한 속에서 작은 뜻을 실현해 보기도 하고, 실패도 하고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터. 그래도 꽤 높은 관직도 경험해 보기도 하고, 개인적인 생명의 위협을 겪었던 공자와는 달리, 나름 큰 위기 없이 평생을 살면서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까지 남겼다면, 정치철학자로서의 삶은 꽤 괜찮았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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