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태양을 먹어치우는 아스트로파지라는 미생물로 인해 위기를 맞은 지구를 구하기 위해 12광년이나 떨어진 타우 세티로 보내진 주인공 그레이스. 깊은 잠에서 깨어난 그레이스는 홀로 이 미지의 연구를 수행해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로키라는(물론 이 이름은 나중에 붙여준 것) 외계인을 만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흥미진진해진다.


로키 역시 자신의 별에서 같은 문제를 풀기 위해 와 있었고, 두 과학자들은 협력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급조한 통역기로 서로의 말을 이해하게 되고, 특수한 재질로 된 장벽과 우주복으로 함께 다닐 수도 있게 된 그들. 마침내 문제 해결 방법을 찾았지만, 또 하나의 문제, 그레이스에게는 돌아갈 연료가 없었다. 이 임무는 처음부터 이른바 자살임무였던 것.





외계인과의 협력.


영화의 대부분은 그레이스와 로키의 합동 작전에 할애된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다른 존재와 힘을 합쳐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영화 속에서는 종(種, species)마저 다른 상황이었으니 어려움은 배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려운 일을 해 낸다. 대개 외계인 하면 지구를 침략하고, 싸우고 하는 이야기들이 주가 되는 영화계에서 꽤 신선한 전개다.


한편으로 외계인과도 가능한 협력이 정작 인간들 사이에서는 좀처럼 안 되는 것도 현실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툭하면 혐중을 일삼는 머저리들이 널렸고, 온갖 음모론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상대를 저주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심지어 공당의 대표라는 인간이 나와서 공개적으로 대통령을 향해 욕설에 가까운 언사를 내뱉을 정도니 말 다했다. 나라 밖 사정도 마찬가지고. 헐리우드에서 떠들어대는 것과 달리, 우리는 외계인이 아닌 지구인들끼리 싸우다 멸망할 확률이 훨씬 더 높아 보이는 게 사실이다.





자기희생.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후반부에 나온다. 마침내 아스트로파지의 해결책을 갖고 지구로 돌아가려던 그레이스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돌아갈 연료를 날려버리고 만다. 자신만 돌아가거나 아니면 해결책만을 담아 보내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영화의 결말부를 보면 그레이스는 남기로 했나 보다.


사실 그레이스는 이 임무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우주선을 발사하기에 적합한 시간이 곧 다가왔고, 그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었고(사실 우주인 훈련을 전혀 받지 않은 상황에서 과연 그게 최선이었는지는 미심쩍다), 결국 그를 강제로 잠을 재워 보냈던 것. 심지어 애초에 돌아올 수 없는 임무에 말이다. 영화 제목에 나오는 헤일메리란, 미식축구에서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을 때 상대편 진영을 향해 있는 힘껏 멀리 공을 던지는 작전을 말한다. 말 그대로 도 아니면 모라는 작전. 뒷일은 생각하지 않는 계획이다.


그렇게 지구로 돌아갈 연료 없이 보내진 그레이스. 어떻게 보면 지구는 그를 버렸고, 그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상황이다. 과연 그런 상황에서 지구를 위해 어렵게 얻은(로키가 자신의 연료를 주어서) 돌아갈 기회를 포기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 독서모임에서 이 주제를 놓고 자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어보았는데, 의외로 전쟁과 같은 극한적 상황이라면 자기희생을 충분히 할 수도 있다는 대답들이 많았다. 아직 세상은 살만 한 건가.





그가 돌아온 이유.


영화의 결말이 꽤 인상적이다. 결국 지구로 돌아가기를 포기한 그레이스는 로키에게로 돌아왔고, 그레이스에게 연료를 주어서 6년은 더 연료가 만들어질 때까지(아스트로파지가 분열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던 로키와 감격의 재회를 한다. 어쩌면 그는 지구에 있는 인간들보다 바위 덩어리처럼 생긴 로키에게서 좀 더 동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또 그게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 결국 지구인들이라는 건 가기 싫다는 사람에게 약까지 먹여 잠재워서 돌아올 수도 없는 임무에 보내버린 것들이니까. 그 뒤에 아무리 인류의 운명 같은 묵직한 무엇인가가 얹혀 있어도, 본인이 싫다는 데 억지로 강요하는 게 받아들이기 쉽지는 않을 터. 그에 비해 로키는 처음 만났음에도 (심지어 종도 다른데도) 그레이스를 위해 6년이라는 시간을 추가로 더 기다리기로 했으니까.


가끔 ‘동물은 배신하지 않으니까’ 하는 류의 말들을 한다.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경험이 어지간히 컸기 때문이겠지만, 그리고 실제로는 동물들 사이에서도 (사람 입장에서 보면) 배신이 자주 일어나긴 하지만, 그만큼 신뢰를 주고 또 받는 일을 우리가 갈구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아주 깜찍한 꼬마 외계인들이 잔뜩 등장해 시끌벅적한 학교 모습을 연출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덕분에 편안하게 나올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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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영상과 AI가 쏟아지는 시대 속에서, 묵묵히 '문서 사역'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
​
큰 돈은 못 벌어도 이 사역을 끝까지 버텨내야 한다고 말하는 '3세대 막내' 출판인의 고민부터, 단순히 종이책을 넘어 릴스, 쇼츠, 웹툰으로 확장되어야 할 기독교 콘텐츠의 미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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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를 푸는 식사에서 힘을 북돋는 식사로 바꾸기 위해서는

몸이 설탕 중독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필요한 것을 제공해야 한다.

갈망을 억제하는 미네랄,

지방 연소 모드로 전환해서 탄수화물 욕구를 줄이는 건강한 지방,

지속적인 에너지를 공급하는 적절한 단백질,

그리고 만족감, 보상, 편안함을 계속 느낄 수 있도록

대체 수단을 마련하는 생환 습관 개선 등이 필요하다.

이는 단순히 스위치를 끄고 켜는 식이 아니다.

좋은 음식을 더 많이 섭취하여

이제까지 먹었던 나쁜 음식을 자연스럽게 줄여 나가는

점진적 과정이다.


- 대릴 지오프리, 『설탕 중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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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챙김 - 내 안의 빛을 찾아가는 여정
채정호 지음 / 선율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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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40여 년 동안 정신과 의사로 살아온 저자는 환자들의 치료를 돕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찾아왔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영성챙김”이라는 방식을 발견했다. 이 용어가 좀 생소하다. 영어로는 Spiritfulness라고 표기하는데, 어떻게 봐도 신조어인데, 비슷한 느낌의 단어로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요새 여기저기서 들리긴 한다.


사실 이 두 개념은 거의 비슷한데 강조점이 약간 다르다. 사실 기존의 정신과 치료의 주된 방향성은 정신적 고통을 회피하거나 억제하는 데 있었다면, 마음챙김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삶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도록 돕는 방식이다. 주의, 알아차림, 수용이라는 단계는 현재의 문제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대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려는 다분히 종교적 태도에 가깝다. 실제로 이 마음챙김은 불교적 수련법의 하나로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 책에서 말하는 ‘영성챙김’도 사실 비슷한 방법론과 방향성을 갖고 있다. 때문에 마음챙김이 가져다주는 정신, 심리치료적 효과를 유사하기 기대할 수 있다. 다만 단순히 자신을 살피는 것에만 목적을 두지 않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복원하고, 영적인 회복을 꾀한다는 면에서 차별점이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책 전반에 걸쳐서 이런 차별점에 대한 강조가 자주 보인다. 다만 이건 “영성챙김”의 우월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방법론을 미심쩍게 바라보는 시선들에 대한 일종의 방어논리처럼 느껴진다. 기독교계 일각에서는 이런 시도를 이교와의 혼합주의라고 경계 내지는 비난하고 있기 때문.


그런데 사실 이런 접근은 애초에 자기모순적이다. 기독교가 처음으로 만든 것이 얼마나 될까? 인류 역사만 해도 문자 기록이 남지 않은 선사시대를 제외해도 5~6천 년은 된다. 기독교가 출현하기 이전의 수천 년의 역사와 문화 가운데 영향을 받지 않은 게 몇 개나 있을까. 실제로 기독교 예배 가운데도 이미 근원을 따져보면 상당히 멀리서 온 요소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명백히 이교적 영향이 남아있는 것들이라면, 효과가 좋으니 무조건 받아들이자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책에서 반복해 입증하려고 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는 시간은 기독교 역사 가운데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신앙의 방식 중 하나다. 이른바 “영성챙김”이란 누구나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이 방식을, 몇 가지 도구를 통해서 도와주려는 방식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관건은 ‘익숙지 않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서유럽의 가톨릭 신앙의 결을 이어받은 주류 개신교 신학은 처음부터 조금은 이지적인 측면에 기운 상황이다. 나도 여기에 익숙해 있기에, 책 후반부에 실려 있는 열세 가지의 영성챙김(기독교적 명상?)의 실제 예를 보면서 어색함을 느꼈다. 그런데 현대에도 (우리가 잘 모르는) 정교회에서는 이와 비슷한 방식의 영적 수련이 널리 퍼져 있기도 하는 걸 보면, 함부로 폄훼하는 것도 “기독교적 태도”는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성경을 익히고 공부하는 이유는 결국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바울의 권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데에는 이 책에서 제안되고 있는 방법론이 나름 효과를 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신비주의자의 항해가 언제나 바른 목적지에 도착할 수는 없다는 C. S. 루이스의 경고도 항상 귀담아 들어야 한다. 적절한 지도(신학)는 필수적인 요소이고, 이 부분에서는 이른바 영성챙김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영적 우월함 같은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이 책의 저자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실제로 목회적 상담을 하다보면, 단순히 이론적인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이론에 충실하면서도, 개인의 삶에 하나님을 짙게 경험할 수 있는 훈련법들이 아울러 제시된다면 분명 기독교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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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 연대기
라시드 앗 딘 지음, 김호동 옮김 / 사계절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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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이란과 이라크에 해당하는 서남아시아는 과거 몽골제국의 영역이기도 했다. 칭기즈칸의 손자였던 훌라구가 군대를 몰고 이슬람 왕조인 아바스 왕국을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가 일 칸국이다(훌라구 울루스라고도 불린다). 몽골 제국 시기 워낙에 넓은 땅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당시의 교통과 통신 수단으로는 직할이 불가능했다. 때문에 각 지역을 ‘울루스’라는 이름으로 칭기즈칸의 일족들이 나누어서 지배하게 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각 울루스들의 독자성이 강화된다.


그 중 하나인 훌라구 울루스도 마찬가지였는데, 소수의 정복왕조 세력이 다수의 현지인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일종의 문화적 공작이 필요하다. 자신의 왕조에 정통성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 그리고 이 때 역사가 꽤 중요하게 사용된다. 라시드 앗 딘이 쓴 “집사”는 바로 그런 일환으로 쓰인 책이다. 훌라구 울루스의 일곱 번째 카안인 가잔 시대에 재상으로 활동했던 학자 라시드 앗 딘은 몽골제국의 역사를 모아 이 책을 썼다.(흥미롭게도 그가 유대인이라는 설도 있다. 물론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사실 이 책은 “집사”의 요약본이다. 원래의 “집사”도 같은 역자인 김호동 교수에 의해 다섯 권의 책으로 번역되어 나왔는데, 워낙에 방대한 책인지라 이렇게 보통 사람들을 위한 조금은 다이제스트한 느낌의 책을 따로 냈나 보다.


사실 나쁘지 않은 기획 의도였는데, 책을 읽으면서 든 느낌은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어떤 기대를 하며 손에 들었을까를 충분히 생각하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사실 우리가 “집사” 같은 책을 보려고 하는 건, 단순히 몽골제국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라기보다는(그건 요약적으로 잘 정리해 둔 인터넷 자료가 널려 있다) 그것을 다루는 12~13세기 저자의 독특한 관점을 읽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런데 이렇게 요약을 해 버리면, 그런 특징이 거의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오히려 서술에서 조금은 올드한 느낌까지지 들기도 하고. 역자인 김호동 교수의 내공을 알기에, 차라리 역자의 눈과 입을 통해서 몽골제국사를 정리했더라면 어땠을까, 그 쪽이 좀 더 흥미롭게 와 닿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예를 들어 원 저자가 알지 못했던, 혹은 알면서도 쓸 수 없었던 내용들을 현대의 학자들이 분석해 본 내용들을 더했더라면 좀 더 쉽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을 듯하다.





기획의 아쉬움과는 별개로 페르시아어 사본과 러시아어, 영어 번역본을 두루 참고해서 이런 책을 번역해 낸 역자의 능력에 경의를 표한다. 이런 책을 읽을 때면 언제나 다시 그 웅장한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다.


덧. 293쪽 본문 첫 번째 줄에 오타가 하나 보인다. “쿠빌라이”를 “쿠빌리아”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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