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내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딱 좌파처럼 생겼다”면서 빈정대는 악플이 달린 적이 있다. 책소개를 하면서 윤석렬의 불법 계엄에 대한 지극히 일반적인 일반적인 비판을 넌시히 돌려 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거기에 긁혔나 보다. 안 그래도 무속정권 추종자들답게 관상으로 세상을 보느냐고 일침을 놓고 차단해 버렸다. 은근 이 정도의 수준인 사람들이 넘치는 곳이 온라인이라는 무대다.
그런데 사실 나는 보수적인 편에 가깝다. 작성된 지 2천 년이 훨씬 넘는 글에 인생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보수적인 게 아니라면 누가 보수적이란 말인가. 문제는 우리나라의 자칭 “보수 정치인”들이 내뱉는 언사가 전혀 보수적이지 못하다는 데 있는 것이고, 그러니 그런 종족에게 미약하나마 내 한 표를 절대로 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민주당 계열 정당에 소속된 사람들이 늘 옳은 말, 좋은 말만 한다고 보지도 않는다.)
보수라는 단어가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는 너무나 많이 오염되어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그게 우리만의 상황은 아닌가 보다. 저자는 전 세계적으로 이 보수주의라는 것이 그 정확한 함의를 잃고, 막연한 인상에 의존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 주된 원인은 이른바 진보주의에 있다.
애초에 보수주의는 자생적인 사상이 아니라 진보주의에 반대하는 맥락에서 튀어나온 (의존적) 사상이다. 그런데 최근 이 진보주의가 길을 잃고 태생적으로 추상적이고 모호한 이념 중심의 사상답게, 현실 세계에 긍정적인 변혁을 일으키는데 실패했다. 또한 그런 변화를 강력하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리게 된 것들(그 중에는 좋은 전통도 포함된다)도 많고. 그렇게 진보주의가 사상적으로 약화되자 보수주의 역시 함께 그 성격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사실 보수주의라고 해도 그 형태가 고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저자는 영국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에게서 시작된 “보수주의”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반혁명(프랑스혁명), 반사회주의, 반큰정부라는 형태로 그 내용이 끊임없이 변화해 왔음을 역사적 과정에 대한 추적을 통해 보여준다. 이 흐름 속에서 일관되게 남아있는 것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강조다. 그리고 이건 오늘날 미국의 새로운 보수주의 주류가 된 네오콘의 이념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런 분화와 분석은 역시나 앞에서 말한 진보주의의 몰락과 함께 점차 투명해지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보수나 진보,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따라가야 한다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상대적으로 가치의 중심점을 어느 쪽에 두는가의 차이만 있을 뿐, 양측 모두 결국 비슷한 것들을 주장하고 있으니까. 결론부에서 저자는, 이런 상황의 변화 속에서 보수주의가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방성과 유동성을 아울러 갖춰야 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런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의 소위 보수 정당, 혹은 보수 정치인들은 (그리고 자기들이 무슨 ‘보수의 자존심’이라는 망상에 빠져 있는 일부 지역의 유권자들은) 애초에 보수가 뭔지 1도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인습에 박혀서 온갖 부패하고 무능력한(최소 능력이 검증되지도 않은) 정치인들을 거수기처럼 뽑아 국회로 밀어 넣는 건 공동체에 대한 범죄에 가까워 보인다.
이건 이 책의 저자의 나라이기도 한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저자는 마루야마 마사오라는 학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보수주의 없는 강한 ‘보수’ 세력이라는 역설”이라는 표현을 가지고 온다. 이거야 말로 우리의 보수를 설명하는 촌철살인격 어구다. 보수주의 없는 강한 보수.
현실적으로 우리의 “보수”란, 정관계에 잡초처럼 퍼져서 온갖 부패와 협잡을 일삼으며 공동체의 양분을 뺏어먹다가, 마침내는 친위쿠데타까지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몰락 중인 부패공동체다. 애초에 보수란 무엇인가를 지킨다는 의미이지만, 그들이 말하는 보수에서 그 지킴의 대상은 자신들의(그리고 자신의 지지자들의) 이권일 뿐인 경우가 많다.
저자가 말하는 새로운 보수가 과연 우리나라에도 나올 수 있을까? 그리고 그때가 되면 나도 그쪽에 표를 주게 될까?
현대인은 정보와 소통에 도취되어 몽롱하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더 이상 소통의 주인이 아니다.
의식된 통제로부터 벗어난 정보의 교류에 몸을 내맡긴 상태다.
소통은 점점 더 외부에 의해 유도된다.
자기 자신은 알아채지 못한 채
알고리즘으로 조종되는 자동적이고 기계적인 프로세스에
예속된 것처럼 보인다.
- 한병철, 『서사의 위기』 중에서
기억하자.
성경에는 왕의 권위와 종교적 권위를
함께 보유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즉 자신이 대통령이자 제사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특별한 칭호가 있는데,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 톰 라이트, 마이클 F. 버드, 『예수와 권세』 중에서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후 어느 교회의 담임목사직을 두고 공개 방송 오디션이 펼쳐진다. 흥미로운 설정이다. 참가자들은 서바이벌 게임 형태의 미션들을 수행하면서 다음 단계로 진출하기 위한 일종의 대결을 펼치고, 그 과정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져서 송출된다. 우리 눈에 익숙한 형식의 전개가 조금은 흥미롭게 펼쳐지지만, 그 과정에서 결국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건, 교회란 무엇인지, 목사란 어떤 사람인지 하는 본질에 관한 질문이다.
부제로 붙어 있는 ‘The Pastor Game’이라는 명칭은 몇 년 전 전 세계를 들썩이게 했던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떠올리게 한다. 드라마 속에서 사람들은 말 그대로 탈락할 때마다 죽어나가면서 수 백 억의 상금을 위해 미션을 수행해 나간다. 목사가 되는 일이 어디 그와 비슷하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지간한 규모의 교회에서 담임목사에게 제공하는 다양한 특전(?)들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1회성 상금보다 더 나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불나방처럼 그런 보상에 뛰어드는 비정상적 목회자들도 수두룩한 게 사실이고.
다만 소설은 그런 문제를 직접 다루기보다는, 오디션에 참가한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미션에 대처해 가는 방식을 따라갈 뿐이다. 이 과정에서 특별히 억지스러운 빌런은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이 부분은 이 작품의 약점과도 관련이 되어 있는데, 전반적으로 주인공을 제외한 등장인물들에 관한 개인서사가 부족하고, 때문에 인물들이 좀 평면적으로 느껴진다. 물론 이건 다른 말로 하면, 주인공 이야기에 집중하는 구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책 곳곳에 오늘날 교회에 관한 작가의 인식이 묻어 나온다. 내부와 외부인들의 기대와 신뢰를 진작 잃고, 최대종교의 위치를 내어주고 곧 소수종교의 길을 가게 될 것 같은 상황, 말 그대로 최하 수준의 기대치를 찍는다.
그런데 어쩌면 바로 거기에서 다시 교회가 일어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기본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방법이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깨달았따면 (시작 지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오늘날 교회가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은 여기에 있는 지도 모르겠다.(물론 그게 단순히 2천 년 전 교회가 하던 일을 문자적으로 반복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책의 볼륨이 작은데다가 내용도 재미가 있어서 금세 다 읽어버리게 된다. 물론 이제 막 첫 책을 쓴 작가인지라, 설정상의 아쉬움이라든지 하는 부분들이 눈에 몇몇 보이긴 한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주제의식에,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손에 들어봐도 좋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기독교 안에서도 좋은 소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인데, 이런 책들도 괜찮은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