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카이퍼의 숨겨졌던 책! 이라고 하면 조금 과장된 홍보글 같겠지만, 역자의 해제에 따르면 실제로 이 글은 그동안 온라인상의 영역본을 제외하면 한 번도 번역된 적이 없다고 한다.
책 제목에 붙어 있는 “세 마리 여우”란 아가 2장 15절에 나오는, “포도원을 해치는 작은 여우들”에서 따온 것이다. 무슨 큰 소리를 내거나, 엄청난 충격을 주는 건 아니지만, 교회 안에 침투해서 슬그머니 담장을 무너뜨리고 그 힘을 흩어버리는 요소들을 “여우”에 비유했다. 이 글에서 꼽는 세 마리 여우는, 지성주의와 신비주의, 그리고 실천주의다.
지성주의와 신비주의는 상대적으로 그리 어렵지 않다. 지나치게 어려운 지적 문제를 다루는 데만 집중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카이퍼는 “회중은 강단 위의 공증인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실 관계를 정확하게 기술하는 것이 일인 공증인과 설교자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 신비주의는 그 대척점에 서 있는 태도다. 단순히 감상적인 것을 넘어, 교회(와 성경)를 건너뛰고 바로 성령과 직접 연결될 수 있다는 확신이다.
이 두 태도가 어떻게 교회에 해를 끼치는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자명하다. 전자는 교인들에게서 기운을 빼버리고, 후자는 교인들의 길을 잃게 만든다. 흥미로운 것은 세 번째 여우인 실천주의다. 카이퍼는 여기에 크게 세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고 있는데, 해외선교, 주일학교, 병자간호가 그것이다.
사실 이 세 가지 모두 교회에서 여전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고, 어느 것 하나 비판하기가 쉽지 않는 대상들이다. 카이퍼의 비판 지점은 비슷하다. 이 세 가지가 각각 어떤 좋은 열정에서 시작되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교회와 상관없는 기관과 일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여러 선교단체들은 어느 새 교회와 경쟁하는 기관이 되거나 돈과 명예가 얽히면서 내부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다툼의 소식이 적잖이 들려오기도 한다. 주일학교의 경우 신앙교육을 단지 ‘학교’에서 배우는 무엇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국민교육이라는 당대의 세속적인 목표에 부합하는, 세속 프로젝트화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병자 간호는 간호라는 일의 외주화를 초래하게 되어 간호와 죽음이라는 일이 믿음과 사랑이라는 본질적인 가치와 분리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개인적으로는 세 번째 지적인 실천주의, 그 중에서도 병자 간호와 관련된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다. 국민의 3/4이 병원에서 죽어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미국은 이 비율이 50%가 안 된다고 한다), 그런 죽음이 신자들에게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게 과연 옳을까. 사실 이런 죽음은 지극히 경제적이고 행정적인 논리를 추종하는 것인데, 더 나은 고민을 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이미 카이퍼의 시대로부터도 150년이나 지났는데 말이다.
결론부에서 카이퍼는 이 세 가지 지적이 그것들을 교회에서 없애자는 말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중요한 건 균형이라는 말이다. 지성도 필요하고, 신비도 필요하다. 실천 역시 결코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바른 신앙과 교리 위에서, 그러니까 검증된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확실히 카이퍼는 보수주의자였다.
사실 여기에서 지적한 것들은 아주 새로운 것도 아니고, 이미 과거 교회사에서 한 번 이상 등장했던 태도로, 그 결과는 이미 역사로 입증된 바 있다. 그 결과를 알고 있다면 다시 오류를 반복하면서 힘을 소진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물론 어지간히 역사를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인지라, 쉴 새 없이 어제의 실수를 다시 반복하고 있지만.(나 역시도...;)
100년도 훨씬 더 전에 나온 글이지만, 여전히 오늘날 교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찬찬히 읽으면서 함께 나눠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현대미술, 이름만 들어도 뭔가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느낌은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미술의 결과물(“작품”이라는 말을 모두에게 붙이고 싶지는 않다)을 보고 난해함을 느낀다고 한다. 이 책은 나처럼 미술에 별 조예가 없는 사람들에게 현대미술이 무엇인지 간략한 이해를 제공하고, 감상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안내서다.
먼저 현대미술이 과거의 미술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알 필요가 있다. 우선 현대미술은 다양한 미술적 실험들(인상주의, 입체주의, 야수주의 등등)의 결과물이다. 근대의 이런 미술적 실험은 중세미술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기도 했는데, 중세까지의 미술의 특징은 작품을 의뢰하거나 후원하는 이들을 만족시키는 데 집중했다.
앞서 언급한 다양한 실험들은 이런 구조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었고, 크고 위대한 것에서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주제가 변화하고(인상주의), 보이는 그대로의 구도마저 벗어나며(입체주의), 이전에 사용하지 않았던 강렬한 색체를 도입한다(야수주의). 아마도 그 최종 진화(?) 단계에는 아예 형태를 없애버린 추상미술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는 작가의 자기의식의 표현이 중심에 있다. 쉽게 말하면, 그냥 내가 이걸 이런 생각을 담아 만들었고 하고 내 놓으면 그게 곧 미술적 결과물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그 자체에서 뭔가 이해하기 보다는, 그것을 만든 작가의 머릿속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제 우리가 감상하는 건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생각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뒤샹이 내어 놓은 소변기다. 1917년 뉴욕의 한 상점에서 구입한 남성용 소변기에 “샘”이라는 이름을 붙여 출품한 것. 많은 사람들은 이를 앞서 언급한 미술 개념의 전환(미술가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에서 미술가의 머릿속을 관람해야 하는)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여긴다.
다만 여기에서 떠오르는 질문은, 애초에 이 책의 저자가 말한 것처럼 현대미술은 보는 사람이 “스스로 느끼고 즐기는 것”이고, “꼭 작가의 의도대로 읽을 필요가 없다”면, 우리가 굳이 소변기를 “작품”이라며 떠받들 필요도 없지 않냐는 것이다. 애초에 소수의 이너서클의 멤버들이 서로 대단하다고 추켜세우는 동안, 일반인들의 공감을 얻긴 했을까 싶다. 뭔가 있어 보인다는 느낌은, 다분히 그들이 만들어 낸 모습은 아닌지.
며칠 전 제주에 있는 한 미술관에 다녀왔다. 물방울을 트레이드마크로 하는 작가였는데, 신문지 위에 그린 리얼한 물방울이 흥미롭게 보이긴 했다. 다만 그 의미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고, 그림 옆에 쓰인 해설을 읽지 않으면 그냥 잘 그린 정물화 정도의 느낌이다. 그러면 우리가 보는 건 그림일까, 해설글일까.
작가야 뭐든 만들고 싶은 걸 만들 수 있다. 다만 그걸 보는 사람에게까지 뭔가를 느껴야 한다고 강요만 하지 않으면 된다. 애초에 형태마저 흩어진 결과물에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것을 보는 것 자체가 무리에 가깝지 않을까.
어떤 의미에서 현대미술은 글이 아닌 도구로 쓴 글처럼 느껴진다. 이전의 작가들이 자신의 기술과 생각을 보여주었다면, 현대미술 작가들은 자꾸 설명하고 (가끔은) 가르치려고 하는 느낌이다. 물론 그게 보는 사람의 코드와 맞으면 신이 나겠지만, 미술에 대한 정의부터, 그 가치와 영향력과, 내용까지 온통 자기들끼리만 추켜세운다는 느낌을 주면 점차 일반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지는 않을까.
아무튼 현대미술에 대한 두려움을 확실히 없애준 책. 간략한 설명이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잡기에도 좋다. 리뷰는 좀 까칠하게(?) 쓴 듯하지만, 나같은 문외한에게 딱 맞을 듯하다.
보수적이고 정통적인 유대교 신학자는 보수적 기독교 신학과도 꽤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사실 신학적 자유주의는 개신교회 안에만 있는 건 아니다. 유대교 가운데서도 자유주의적 입장에 속한 학자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그런 글들은 대개 지루하기 그지없다. 워낙 다양한 흐름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개신교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윤리를 강조하는데, 윤리적이고 도덕적 책임감을 갖고 살자는 데는 동의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데 왜 유대교가 나와야 하는지를 억지로 연결하는 느낌이랄까.(이건 기독교 자유주의도 마찬가지고)
사실 이 책의 저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에 대해서도 잘은 모른다. 하지만 이 두꺼운 책을 읽어가면서 왠지 그에게서 ‘우리’와 비슷한 향기가 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리처드 마우가 쓴 한 책의 제목과 같은 “톱밥향기”와 비슷한. 오늘날 기준으로는 조금 투박해 보이지만, 훨씬 더 오래된 정통과의 연결, 그리고 한 차원 높은 통찰. 한 가지 큰 차이점이 있다면, 책 어디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뿐.
1부에서는 간략하게 예언자가 누구인지를 설명하고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예레미야, 하박국 등으로 이어지는 주요 예언서들의 내용을 분석한다. 다만 주석책과 같은 느낌은 아니고, 그 역사적 정황과 그 안에서 경험했을 예언자들의 특별한 경험과 반응 등이 주가 된다. 말미에는 징벌과 정의라는 예언의 주된 주제를 간략히 고찰한다.
2부에서는 예언서를 좀 더 외곽에서 바라보면서 떠올릴 수 있는 몇 가지 주제들을 세밀하게 분석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고, 영감을 받고 예언을 하는 과정은 어떤 모습이었을지(황홀경, 무아지경과는 어떻게 다른지), 자주 등장하는 강한 분노와 징계의 정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등이 다양하게 설명되어 있다.
주제 하나하나가 흥미로울뿐더러,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과 관점도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예언자들에 대한 심리분석이나 정신분석 타령이나 하는 가볍디가벼운 현대주의자들의 글과는 차원이 다르다. 소위 비평적인 주석들에서는 묻거나 잘 다루지 않는 예언자들의 영감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 그리고 정경적 관점에서 보는 예언자의 사역 등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특별히 2부의 여러 내용들은 따로 영상으로 만들어 보고 싶을 정도.
앞서도 말했듯이, 보수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는 개신교인들에게도 구약의 예언서들을 읽어가는 데 좋은 참고서가 될 수 있을 듯하다. 부족한 부분(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적 기준 같은)은 또 다른 책으로 보충하면 될 일이고. 조금 두껍다는 것이 난점이긴 한데, 이런 책은 한 권 끼고 조금씩 간식 허물어 먹듯이 곱씹어 가며 읽으면 좋지 않을까. 얼마나 많은 책을 읽느냐보다 중요한 건, 얼마나 좋은 책을 읽느냐이니까.
또 하나 기억하길 바라는 것은 이윤의 결과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들보다
조금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은 타락의 영향 아래 있고,
그 안에서 형성된 문명에서 경제 활동을 해야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타인을 보고 그 영향력까지 고려하는 사람은
오직 자기 이익만 보며 수익을 추구하는 사람을
결과에서 이기기 어렵습니다.
- 손성찬, 『돈』 중에서